17-1. 뤼나메르 교차로
가티 드 리네콩테는 조마조마해 하며, 주군의 짐을 들고 빠른 걸음으로 주인의 곁을 따라갔다. 숨이 거칠어지도록 화가 난 그의 주군, 에티엘 드 크레이는 긴 다리를 뻗어 성전군의 야영지를 성큼성큼 가로지르고 있었다. 훨씬 키가 작은 소년인 가티로서는 에티엘의 속도를 따라잡기가 힘들어 반쯤 뛰다시피 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어린 종자를 배려하여 이처럼 빠른 속도로 성큼성큼 걷는 경우는 없다. 그만큼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오른 것이다.
“누구시오?”
어느 큰 막사 앞에 도착하자, 그다지 단정하지 못한, 용병으로 보이는 호위병들이 에티엘과 가티의 앞으로 창을 겨누며 가로막는다.
“이분은 크레이의 공작이시며, 엘랑키아 국왕 다고베르 2세 폐하께서 성전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하신 에티엘 드 크레이 공이시다!”
가티가 재빨리 선언하듯 외친다. 주군의 신분을 모르는 자들에게 최대한 신속하고 멋지게 신분을 밝히는 것은 종자의 중요한 임무이다.
“어··· 성전군 사령관이라고요?”
“그럼 우리 대장은 뭐지?”
용병들은 당황했다는 듯 자기들끼리 얼굴을 마주 본다. 딱히 이쪽을 놀린다거나 빈정대는 듯한 기색은 없다.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모양이다. 하지만 갈수록 주군의 기분이 나빠지고 있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진다. 가티가 참다못해 한마디 하려고 나서는 순간, 막사 안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힘이 느껴지는 은근한 중저음의 목소리.
“들어오시라 해라. ‘엘랑키아 왕실 쪽’의 사령관이시다.”
“예, 대장.”
입구를 지키던 용병들은 고분고분하게 자리를 비켜선다.
“들어가시지요.”
에티엘 드 크레이 공작과 그 종자, 가티 드 리네콩테는 용병들을 지나쳐 막사 안쪽으로 들어간다.
“어서 오십시오, 에티엘 공작 각하. 잠시 맨손 운동을 하고 있어서, 실례.”
막사의 한가운데에는 법황이 임명한 성정군 사령관, 라모리 스텐던이 벌거벗은 상체에 셔츠를 입고 있었다. 구릿빛 피부에 잘 발달한 상체 근육, 그리고 열 개도 넘어 보이는 크고 작은 흉터. 군사 훈련은 지겹도록 받았지만, 아직 실제로 전장에 나가본 경험은 없는 가티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저 흉터 하나하나에 얼마나 많은 역사와 고통에 자리하고 있을까.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라모리 스텐던 경.”
“우선 자리에 앉으시지요. 아직 소집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여기는 무슨 일로?”
“라모리 경, 귀하의 군이 최근에 한 행동에 대해서 질문드리고 싶어 왔습니다.”
“제··· 군이요?”
라모리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턱을 긁적인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라모리 경! 3월 하순까지를 소집 기간으로 하고, 이후의 군사 행동에 대해서는 상호 협의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분노를 참지 못한 에티엘이 왈칵 소리를 지른다.
“허어··· 저희는 공식적으로 아직 어떤 군사 행동도 한 바가 없는데요?”
“귀하의 군대가 블랑독 북부 지역을 무자비하게 약탈하고 파괴하고 있다는 소식이 레뮤즈에 머무는 저에게까지 닿았습니다.”
“정말입니다, 공작님. 저는 아직 어떤 작전 명령도 내린 적이 없습니다. 둘러보시면 아시겠지만, 병영도 텅텅 비어있지 않습니까? 저희 성전군의 주력 부대는 아직 대륙을 가로질러 오고 있습니다.”
“으으음···.”
뭐라 한마디 더 하고 싶었지만, 에티엘은 분노를 억지로 눌러 삼킨다. 아마 지금 라모리가 말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이 항상 정직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말입니다···.”
양손을 깍지 끼며 라모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다.
“만약 제가 정말로 ‘파괴’를 하고자 했다면··· 공작님에게까지 소식이 갈 일은 없었을 겁니다.”
주군의 옆에 배석하고 있던 종자 가티 드 리네콩테는 순간 섬뜩함을 느꼈다. 어깨까지 길게 기른 짙은 갈색 곱슬머리와 콧수염이 매력적인 라모리 스텐던은 분명 웃고 있었다. 그것도 위협적이거나 도전적인 웃음은 절대로 아니다. 그저 앞니가 살짝 드러나는 평범한 웃음.
그러나 가티는 그에게서 마치 송곳니를 드러낸 짐승과도 같은 기괴한 느낌을 받았다. 차마 설명하기도 어려울.
“...라모리 경, 블랑독 지방은 현재 다소 무질서함이 존재하긴 합니다만, 분명한 엘랑키아 왕국의 영토입니다. 우리 성전군의 목적은 적법한 질서를 바로잡자는 것이지, 파괴하자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요. 명심하겠습니다.”
상대가 워낙 시원스럽게 대답하는 바람에, 에티엘은 할 말이 없어져 버렸다. 하지만 블랑독 북부에서 파괴가 자행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진실이다.
“...생각해보니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군요.”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라모리가 말했다. 하지만 에티엘도 가티도, 분명히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리라 짐작했다.
“저는 법황 성하의 은혜를 받아 성하의 군대를 지휘하고는 있습니다만, 블랑독 전역에서 실질적인 통수권은 아르누아 루케 추기경께서 가지고 있습니다.”
에티엘은 아르누아 추기경의 둥글둥글한 얼굴이 떠올랐다. 아르누아나 라모리나, 아는 척 모르는 척 의뭉 떠는 모습은 굉장히 닮아 보인다.
“최근 블랑독에는 모스탈 요새수도원의 무장수도사들이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아직 성전군 소속이 아니라 추기경 직할의 ‘사제단’ 소속이므로 저에게는 지휘권이 없습니다.”
“모스탈이라고 하셨나요? 무라비아 지방의 모스탈 요새수도원 말씀이십니까?”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모스탈? 가티는 자신의 머릿속을 뒤져보지만, 딱히 기억에 있는 고유명사는 아니다. 어딘가에서 들어 본 것 같기도 하고···.
“세상에··· 지금 엘랑키아의 영토에 모스탈의 인간 백정들을 풀어놓은 것입니까? 무라비아의 학살자들을···.”
“허어··· 물론 제가 의도한 바는 아닙니다. 다만 최근에 그들이 타비뇽 부근에서 보이질 않으니 블랑독으로 향한 것은 아닌가 추측할 뿐입니다.”
“...아르누아 추기경께서 어떤 생각을 하시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군요.”
“하핫, 그 점은 저와 같네요.”
에티엘은 여전히 은근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라모리의 얼굴을 노려보다가, 이내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더는 대화를 해도 얻을 것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가자, 가티.”
“예, 에티엘 공작님!”
가티는 다시 주군의 바로 뒤에서 따라간다. 밖에서 경비를 서던 용병들이 구경거리라도 났다는 듯, 두 사람을 기분 나쁜 눈빛으로 쳐다본다. 주로 귀족 군대들만 접해본 가티에게 이런 무례한 이들이 사령관 막사 주변에 있다는 것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공작님, 한가지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무엇이냐.”
“모스탈이 무엇입니까?”
질문을 들은 에티엘의 몸이 잠시 멈칫한다.
“...법황청에서 동쪽 변방, 사교도들의 영토 접경지대에 세운 요새수도원이 있다.”
설명하기는 하지만, 마치 부정한 것을 말한다는 듯, 내키지는 않은 말투이다.
“실제로 요새이기도 하고 수도원이기도 하다. 거기 사는 자들도 전사이기도 하고 수도사이기도 하지.”
수도원이라··· 가티는 혹시 자신에게 강제되었을지도 모르는, 절대로 피하고 싶은 미래 중 하나인 강제 수도서원을 생각해본다. 가문에 고위 성직자가 한 명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엘랑드르의 대공의 생각 때문에, 자신은 자칫하면 수도원에 끌려갈 뻔했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수도사들은 아니다.”
소년 종자가 존경하는 공작의 말에는 깊은 경멸과 혐오가 묻어있다.
“사람을 제물로 바치고, 그 내장으로 제사를 바친다고 알려진 사교도들을 처리하기 위해서 조직된 자들이기 때문이다.”
“아···.”
가티는 무엇인가 물어보려고 하다가 참기로 했다. 주군의 표정이 너무나도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야만한 자들을 상대한다고, 비슷한 수준까지 내려가는 것은··· 문명인에게 어울리는 행동인지 모르겠구나.”
에티엘은 잠시 뜸을 들이며 말한다. 자신의 신념과 예절에 거침이 없도록, 신뢰하는 종자에게 전달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단어를 열심히 골랐다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그런 자들을··· 같은 주신교 신도라고 받아들이기가 힘들구나. 하물며 블랑독의 땅에 그런 자들을 풀어놓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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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사!”
로이작 드 포르망제가 검을 치켜들며 외쳤다.
타탕! 탕! 타탕!
총소리와 함께 성벽 위가 하얀 화약 연기로 뒤덮인다.
“으억!”
“끄아악!”
사다리를 타고 성벽에 달라붙으려던 적병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적이 반격하는지 총탄과 화살이 날아오지만, 성가퀴에 맞아 튕겨 나가거나 재빨리 머리를 숙인 수비병들의 머리 위로 지나갈 뿐이다.
“적이 물러갑니다!”
“이겼다!”
“만세!”
포르망제 성의 수비병들이 지르는 함성이 비참한 꼴로 성에서 멀어지는 적군을 배웅한다.
아직 약관의 나이, 포르망제 남작가의 젊은 주인 로이작은 주먹을 불끈 쥔 팔을 머리 위로 들어 보인다. 병사들의 함성이 한층 더 높아졌다.
로이작과 포르망제의 가신들은 조상들이 세운 이 멋진 요새 도시를 포기하고 남쪽으로 도망치는 것을 거부했다. 주변의 이웃 소영주들 역시 힘을 합쳤다. 그렇게 포르망제 성은 블랑독 북부에서 가장 단단한 요새가 되어 침략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웃 귀족들과 그 가신들이 모여 전투원은 충분했고, 트랑카벨 가문에 구매를 요청해 받은 화약 병기들은 제값을 하고 있었다. 한때 성 주변을 가득 채우나 싶었던 적들은 벌써 여러 차례나 격퇴되었다.
트랑카벨의 콘도티에레 말로는 적이 대포를 가지고 오면 조심하라고 했지만, 아직 총알보다 큰 탄환을 사용하는 무기는 보이지 않는다.
“남작님! 북문 쪽에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다!”
로이작은 즉시 성벽에서 내려와 북문 쪽으로 향한다. 근처에서 함께 싸우던 병사들도 서둘러 성벽을 내려간다. 그리고 성벽 아래에서 기다리던 보병들과 합류한다. 100명의 중보병, 30명의 기병, 70명의 총병. 모두 200명의 병사들은 포르망제 남작가의 가신 중에 가려서 뽑은 정예들이었으며, 방어의 핵심이었다. 평지성이라는 특징 상 전체 성벽의 길이가 상당히 긴 포르망제 성벽의 방비는 나머지 병력들과 주민들이 교대로 맡고, 성내에서 대기하던 로이작과 친위대는 그때그때 전투가 발생한 지역으로 이동해 적을 격퇴하는 전술이었다.
지금까지는 아주 잘 통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쫓기고 있습니다.”
성문으로 향하는 길 위에 덜컹거리면서 달리고 있는 마차 몇 대와 그 주변에서 바글거리는 사람들이 보이고, 멀리서 쫓아오는 거지꼴의 병사들이 보인다. 꼴을 봐서는 성전군의 약탈자들이 분명했다! 아직은 거리가 꽤 있기는 하지만, 곧 따라잡힐 것 같았다.
로이작의 눈에서 분노의 불꽃이 튄다.
“개자식들이 피난민들을 습격하고 있는 건가!”
“하지만 도울 방법이 없습니다, 남작님···.”
“크윽··· 거리가 어느 정도 되지?”
“대략 1킬로미터 정도입니다. 설마··· 남작님!”
“저들이 성을 지키기로 맹세한 우리 병사들의 가족일지도 모른다! 모른 척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선대 포르망제 남작 때부터 섬겼다던 경험 많은 부관은 슬픈 얼굴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하지만 주군의 의사에 불복하겠다는 의사를 비치지는 않았다. 20세의 정의감 넘치는 주군의 뜻을 꺾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그럼 혹시 주변에 적이 있을지도 모르니 제가 먼저 나가서 주변을 살피겠습니다. 제가 신호를 하면, 그 때 성문 바로 앞에 방어선을 펴고 피난민들을 받아들이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하겠소!”
부관은 10여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북문을 나섰다. 혹시라도 언덕 아래나 성벽의 사각 등에 적이 숨어있지는 않은지 꼼꼼하게 점검한다.
그 사이에도 피난민 무리는 점점 가까워져 오고 있었고, 추격 중인 약탈자들과 피난민 무리의 거리는 더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주변에 적은 없습니다, 남작님!”
주변을 살피던 부관의 외침에, 로이작 드 포르망제는 곧바로 성문을 열고 200명의 정예병들을 이끌고 나간다. 직접 기병의 선두에 선 남작이 다급하게 피난민들을 향해 달려 나간다. 거리는 불과 몇백 미터.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 코 앞이다.
“힘내라! 조금만 달리면 된다!”
힘껏 달려 나간 30기의 기병대가 피난민들과 지나친다. 대열 안에는 남자와 여자가 어지러이 뒤섞여 있었고 마차 안에는 아이들과 노인, 그리고 부상자들이 빼곡히 타 있었다.
“오오,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신을 부르짖는 사내를 보며 로이작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피투성이인 하얀 옷을 입은 남자는 얼굴의 절반에 큰 상처를 입은 듯 피부가 엉망으로 문드러져 있었다. 저렇게 되려면 대체 어떤 고통이 있었을까. 설마 저 개자식들의 방화에 휘말린 것인가. 아니라면 설마 고문을 당한 것인가! 성전군, 아니 약탈자와 학살자들을 향한 로이작의 분노가 타올랐다.
“전군! 피난민들을 보호하라!”
“옛!”
정예병들의 숙련도는 매우 높다. 그들의 지휘관이자 주군을 닮은 그들의 정의감에도 불이 붙었다. 그들은 길 주위에 빈틈없는 방어대형을 만들어 피난민들을 보호하고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한다.
하지만 약탈자들은 더는 다가오지 않는다. 30기의 중장기병들이 성에서 뛰쳐나오고, 그 뒤에서 수많은 화승총이 자신들을 겨누자 아쉬운 듯 멈추고 거리를 둔다. 분명 일방적으로 짓밟을 수 있는 약자가 아니면 싸울 용기조차 없는 겁쟁이들이겠지.
“남작님! 위험합니다, 물러나야 합니다.”
“전군 성으로 돌아간다!”
피난민들은 이미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포르망제 군 역시 전투 태세를 유지하며 서서히 물러난다. 적들은 계속 아쉬운지 아슬아슬하게 거리를 두고 슬금슬금 따라온다. 빌어먹을 자식들, 덤빈다면 상대해주겠지만, 거리가 애매하다.
“후퇴, 후퇴!”
성문 밖에 큰 직사각형 모양의 전투대형을 갖추고 있던 병사들이 천천히 성문 쪽으로 물러선다. 이제 소부대 별로 돌아가면 끝이다. 그리고 다음 적의 공격을 대비하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한 찰나···.
쾅!
갑자기 그들이 나왔던 문, 포르망제 성의 북문이 닫혔다. 아니, 정확히는 나무로 된 여닫이 대문은 열려있었으나, 그 안쪽의 철창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내렸다. 성문을 관리하는 도르래라도 고장이 난 것인지.
“무슨 일인가!”
“어서 성문을 열어라, 수비대! 수비대!”
부관이 성벽 쪽을 향해 외쳐 보았으나 어떤 대답도 없고, 내려진 철창 역시 미동도 없다. 순간, 부관은 목 뒤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오래전, 전장에 나섰을 때 느꼈던 불길한 소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