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92화 (92/556)

17-12. 뤼나메르 교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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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의 제31 몽세나 정찰 연대가 적 후방을 강타한 이후, 연쇄적인 대혼란의 파도가 적을 덮쳤다. 겉으로 보기에 종교적인 열정으로 가득해 보였던 적들은 생각보다 한계까지 몰려 있었던 모양이다. 기병이 돌입하자마자 사방팔방으로 도망치는 꼴을 보니··· 아마 여력이 남아있는 상태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겠지.

다행히 아군 보병들은 여력이 남았다!

“첼레스티나, 지빌링엔 연대는 준비됐어?”

“네에, 적 기병들이 퇴각하자마자 전투 대형 변경했어요!”

“무장 광부대는?”

“네에, 마찬가지! 준비됐다고 확인했어요!”

“좋아, 전진 명령을 전달해. 굳이 적을 포위하려고 할 필요 없어. 양 측면이 우선 전진하고, 이후 중앙이 압박하면 자연스럽게 무너질 거야.”

“네에, 알겠습니다 콘도티에레!”

안정된 전선, 흔들리는 적, 한계까지 몰리지는 않도록 잘 관리된 전선. 덕분에 힘든 싸움을 계속해온 우리 병사들은 힘이 넘친다!

전방에서 싸우는 병사 하나하나가 전장 전체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누구나 전장이 흘러가는 분위기는 느낄 수는 있다. 그 때문에 병사들이 안정감을 느낄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드는 것 또한 사령관으로서 아주 중요한 일이다. 이런 전장의 안정감이란, 마치 무거운 짐을 들기 전에 지반이 단단한가를 확인하는 것과 같다. 무거운 짐을 들 능력도 있고 의지도 있는 병사들이 짐을 들지 못하고 있다면 그건 100퍼센트 사령관의 잘못이다.

“피 흘리는 흑곰이 적을 찢어버릴 시간이다!”

“지빌링엔, 앞으로!”

명령이 전달되었는지 좌측의 지빌링엔 연대가 함성을 지르며 전진하기 시작한다. 가지런히 대열을 갖춘 장창병들이 발을 맞추어 한 걸음씩 나아가자, 간신히 버티고 있던 적 보병 대열이 우르르 무너진다. 지금까지 가장 위험한 좌측면을 맞아 정면의 보병을 상대하는 한편, 기병으로부터 측면을 보호하느라 붙잡혀 있었지만, 내가 보기에 이들에게 어울리는 임무는 적진 돌파이다. 흑곰에 비견되는 인간 도살자들에게는 당연히 수비보다 공격이지.

“몽땅 찍어버려라!”

“또라이들 머릿속에는 은이 한 덩이씩 들어있다고!”

“이게 에크테인 산맥의 맛이다!”

한 타이밍 늦게, 우측의 무장 광부들 역시 전진을 시작한다. 그동안의 활약으로, 이들이 중무장, 경무장, 혹은 보병과 기병을 막론하고 아무튼 멈춰있는 적들을 잘 뭉개버린다는 사실은 확인했다. 전형적인 돌격형 충격 보병들이다.

지빌링엔과 무장 광부, 양 측면 병력이 전진하자 이미 후방에 기병 돌격을 맞고 후방이 무너지던 부대가 서서히 쪼개지기 시작한다. 그나마 질서가 유지되던 전방의 병사들 역시 슬슬 현실이 보이겠지. 훈련으로 확립된 기강이 아니라 정신론이나 열정 따위에 기대었던 부대일수록 무너질 때는 걷잡을 수 없다.

“드 포르망제 가문의 중장병들에게도 전진 명령을 전해줘, 첼레스티나.”

“네에, 콘도티에레!”

지금까지 굳건하게 전면을 지키고 있던 드 포르망제 가문의 기간 병력이 전선을 밀어 올리기 시작하자 완전한 쐐기가 박혔다. 원래 후퇴는 공격보다 어렵다. 집착에 가깝게 병력 간의 간격을 유지하려는 이유도 이것이다. 지리멸렬한 상황에서는 단 한 걸음의 후퇴가 부대 전체의 붕괴와도 연결된다.

마치 지금처럼.

“밀지 마! 밀지 마!”

“으아아! 여기도 자리 없다고!”

“커헉, 창병! 창병이 필요해!”

후방에서 기병이 덮친다. 양 측면의 충격 보병이 행동 영역을 좁힌다. 정면의 중장병이 전체적으로 압박하며 전진한다. 위협에서 본능적으로 도망치고자 했던 적병들은 한가운데로 모이게 되었을 터, 창을 나란히 하고 전진하는 아군의 앞에서 전열부터 모조리 죽어 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나마 공간에 여유가 있는 측후방에서 활로를 찾은 적들이 거미 새끼들처럼 흩어져서 도망치지만··· 그들을 후방에서 잔뜩 벼르고 있던 추격기병들이 덮친다. 몽세나 산악지대에서 자란 다리가 짧고 체력이 좋은 산악마를 탄 이들이 가장 잘하는 임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철저하게 부순다. 평범한 전쟁, 상식적인 전투라면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는다. 적당히 압박을 늦추고 포로를 잡거나 그럴 생각이 없다면 퇴로를 내준다. 가끔은 적을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나은 경우도 있고. 하지만 이번에는 이쪽에 그럴 여유도, 이유도 없다. 이 종교에 미쳐서 전쟁하러, 아니, 사람 죽이러 온 미친놈들은 살려 보내면 분명 다시 찾아올 것이다. 게다가 주변으로 흩어져서 도망친다면 마을을 약탈하고 무고한 주민들을 괴롭히면서 두고두고 민폐가 될지도 모른다.

포위망은 완성됐으니 일선 지휘관들에게 맡겨두자. 나는 언덕의 왼쪽, 지빌링엔 보병들이 지키던 위치로 이동했다. 과연 전장의 나머지 부분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까.

마브리엘 마슈레의 제8 기병 연대와 대치하고 있던 적 보병, 그리고 언덕의 측면을 공격하며 지빌링엔 부대와 싸웠던 적 기병은 패배의 기색이 느껴지자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들은 확실히 경험이 많아 보인다. 종교적 열정 나부랭이가 아니라 당장 눈앞의 황금을 보고 온, 성전군에 고용된 용병이라 그렇겠지.

멀찍이서 진형을 좌우로 벌여 ‘올 테면 와 봐라.’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제8 기병 연대의 정면에는 이제 적이 없다. 그들을 추적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던 적 보병 연대는 서쪽으로 물러나고 있다. 무질서한 후퇴는 물론 아니다. 혹시라도 후방을 노린다면, 언덕 위의 아군 보병들이 지원하지 못하는 위치에서 일전을 받아주겠다는 도발적인 태도. 아주 좋은 움직임이다.

한편 언덕 공격을 포기하고 물러난 적 기병 연대는 조심스럽긴 하지만 다소의 희생은 무릅쓰겠다는 태도로 퇴각하는 보병들을 엄호하고 있다. 분명 전투 초반에 언덕의 제8 기병 연대를 공격했다가 기습 산탄 사격에 상당한 병력을 잃은 충격이 대단히 클 텐데, 저런 태도를 보이는 것을 보면 확실히 잘 훈련받은 부대이다. 어쩌면 특별한 목적 없이, 어정쩡하게 규모만 커진 이번 전투에서 가장 큰 성과는 저 기병대의 핵심 전력을 깎아놓았다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이래서는 더 이상 큰 피해를 주는 것은 무리겠지. 전투의 마무리는 언덕 전방의 광신도 보병들을 섬멸하는 것으로 해야겠다.

“콘도티에레, 콘도티에레!”

“응? 첼레스티나?”

“멀리 접근하는 적이 보여서,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아요!”

“또 지원인가!”

거의 다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겁이 덜컥 난다. 서둘러 언덕 북쪽, 서서히 적을 붕괴시키고 있는 아군 보병의 후방으로 이동한 나는 망원경을 꺼내 멀리서 일어나는 모래 먼지 쪽을 바라본다.

“병력이··· 상당하네···.”

“네에··· 그렇네요. 보병과 기병이 섞여 있어요···.”

“못해도··· 보병은 2천이 넘어 보이고, 기병 숫자도 상당해 보여. 이대로 전장에 도착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네에··· 으음··· 빠르면 1시간 30분으로 추산해요!”

“하아, 다 이겼는데···.”

아쉽다. 너무 아쉬워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머릿속으로 남은 병력을 계산해본다. 언덕 위의 아군 보병, 드 포르망제 가문 병력과 지빌링엔 용병, 그리고 보조 전력인 민병들을 포함해도 병력은 1천 남짓. 세 차례나 거듭된 전투를 거치며 지쳐있었다. 지금은 이기면서 기세를 타고 있지만··· 새로운 적과 싸워야 한다고 하면 피로감이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발목을 붙잡으리라.

“첼레스티나, 각 부대에 전령을 보내 줘.”

“네에! 콘도티에레.”

“보병에게 전령! 더 이상의 추격을 멈추고 언덕으로 귀환해 대열을 정돈할 것!”

“네에, 보병에게, 추격을 멈추고 언덕으로 돌아와 대열 정돈!”

“제31 연대에 전령! 현재 교전 중인 적 보병의 중앙을 돌파할 것, 그 이후 역시 언덕으로 올라와 다음 명령을 기다릴 것!”

“네에, 제31 연대에, 교전 중인 적 중앙돌파, 이후 언덕 위에서 명령 대기!”

“좋아, 그렇게 보내줘. 휴우, 조금만 더 고생하자 첼레스티나.”

“네에, 헤헤, 저는 콘도티에레와 함께 있으면 아무것도 힘들지 않아요. 그럼 다녀올게요오!”

아쉽지만 신나는 섬멸전은 여기까지다. 병력을 원위치시키고 언덕 지켜내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자. 화약이 괜찮을까··· 제8 기병 연대가 화약을 넉넉하게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나눠 받은 화약은 슬슬 바닥을 드러낼 것이다. 종일 쏴댄 제8 연대 포병대의 화약도 걱정이다. 아무리 작은 포라지만 화승총과는 화약 소모량이 차원이 다르니까.

이러면 제8 기병 연대도 걱정이다. 적 기병이든 보병이든, 비슷한 병력의 단일 병력 상대로는 필승이라고 자부하지만 두 부대가 협력한다면 제8 연대가 할 수 있는 일은 극도로 줄어든다. 그저 정면으로 싸운다면 이기기도 힘들뿐더러, 이긴다고 해도 전력이 급감하는 무의미한 승리가 되겠지···.

적은 착실하게 서쪽, 아군에게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움직이고는 있지만 새로운 지원군이 도착했다면 태도를 어떻게 바꿀지 모른다.

“콘도티에레, 남쪽을 봐주시겠습니까?”

“음?”

호위병 중 하나가 말한다. 카르카냑부터 따라온 호위병들도 참 전령이다 호위다 고생을 많이 하고 있다. 지금은 언덕 구석구석에서 관측병 역할까지 하고 있으니. 그의 말대로 남쪽 머리를 살펴보니, 확실히 다수의 보병이 이동하는 것이 분명한 낮게 깔리는 모래 먼지가 보인다.

“저건··· 설마··· 아군이겠지?”

“방향으로 봐서는 그렇습니다!”

“아니··· 아직 오려면 이른 시간인데···.”

설마 자는 시간을 줄여가면서 강행군을 한 것인가··· 당연히 내일에야 올 줄 알았는데. 나는 서둘러 망원경을 꺼냈다.

“아하··· 저 실루엣은···.”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저들은 트랑카벨 영지군은 아니다. 동맹 가문, 드 누아의 부대이다. 아마도 내일쯤 도착할 예정이던 북부 연대겠지.

“드 누아 군이 힘을 내줬구나···. 휴우···.”

정말 한숨 돌렸다. 적의 지원군에 비하면 작은 규모이지만, 기세를 생각하면 다시 전력은 호각 이상으로 돌아온다! 특히, 이미 후퇴를 진행 중인 적들은 다시 싸울 엄두를 내기 힘들 것이다.

퍼펑!

적의 불안함에 쐐기라도 박겠다는 듯, 제8 연대 소속의 야포들이 불을 뿜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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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조금 늦은 건가?”

법황이 임명한 성전군 사령관, 라모리 스텐던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아니 정확히는 벌어졌던 언덕 위를 올려다본다. 멀리서 봐도 확연하게 알 수 있을 정도로 완만한 비탈에는 시체가 널려있다.

그 밑으로는 엉망진창으로 박살이 나서 사방으로 도망치는 성전군 병사들. 그가 네부카디라는 이름의 모스탈 수도원장에게 내주었던 ‘선발대’의 뜨내기들이다. 그 형편없는 몰골만 보아도 얼마 전까지 어떤 전투 양상이 벌어졌었는지는 추측할 수 있다.

다행히도 복장으로 봐서 그의 직속 부대는 포함되지 않은 것 같다.

“아니, 적절한 시간에 도착한 것 같군.”

마침 그가 파견한 기병 지휘관, 울터 콜린스가 보낸 전령이 도착했다. 세심하게 줄로 묶인, 돌돌 말린 쪽지 전령은 딱히 문장이나 봉인 등의 표시가 없더라도 누가 보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울터는 다소 소심하지만, 아니 소심하기에 좋은 지휘관이다.

- 적 보병은 블랑독 북부의 귀족군과 농민병을 중심으로, 에크테인 산맥의 광부 및 지빌링엔 용병으로 이루어짐

- 적 기병은 트랑카벨 가문의 기병으로, 약 1천 명 규모로 다수의 화기로 무장했음에 유의, 특히 8문의 대포를 보유

- 추가로 좀 더 작은 규모의 적 기병이 우회한 것으로 보임, 네부카디 수도원장의 병력과 교전

- 현재 아군, 본인의 기병과 자프론의 보병은 서쪽으로 퇴각 중, 병력 손해는 약 2할

쪽지를 보던 라모리는 혀를 찼다. 참 애매한 순간에 도착해버렸다. 한 시간만 일찍 도착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직 네부카디의 병력이 버티고 있을 때 도착했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그가 이끌고 온 병력은 보병이 약 2500, 기병이 800명에 이르는 나름 상당한 병력이다. 이대로 싸운다면 최소 호각으로 싸울 수 있는 병력이다.

어떤 판단을 해야 할까··· 전술이나 전략적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저 언덕 위의 적과 싸워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무기를 부딪쳐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는 욕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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