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119화 (119/556)

20-17. 샹다메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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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랑키아 왕실군 라베르뉴 연대 소속의 중장병들이 조심스럽게 비탈을 오르고 있었다. 사람의 손으로 파내어 쌓인 지 두 시간도 되지 않은 흙벽은 제대로 다져지지 않았다. 그 때문에 한 시대 이전의 육중한 철제 갑주로 무장한 중장병들이 타고 오르자 우르르 무너져 내려 움직임을 방해했다. 정확히는 굳이 다지지 않은 것이다. 일부러 비탈에서 미끄러지도록.

엘랑키아 북부와 동부 지역 출신 중장병들은 대부분 하급 귀족 출신으로, 대부분 중보병에서 창병으로 전환 훈련받은 이들이다. 그 때문에 오랜만에 장창을 버리고 평소 익숙하던 무기를 쓴다는 말에 기뻐한 경우 많았다. 하지만 그들이 마주한 것은 갑주로 무장한 육중한 거구들이 격돌하는 전장이 아니다. 해자와 흙벽이 끝없이 늘어선 낯설고도 불쾌한 전장이었다.

탕! 타탕!

"끄으윽!"

총소리와 함께 강철 파편과 피가 튀었다. 운 없는 병사 하나가 어깨를 움켜쥐고 주저앉는다. 나머지 병사들이 이를 갈며 걸음을 서두른다. 물론 그 서두른 걸음은 후두두 미끄러져 내리는 흙벽에 부딪혀 무의미하게 사라질 뿐이었지만.

해자와 흙벽의 미로는 물론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몇몇 사격 포인트에서 끊임없이 고개를 내미는 적들이 사격을 가해오고 있었다. 말 그대로 끊임없이, 단조로운 총소리가 이어지고 그때마다 운 없는 누군가가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아군 총병들이 뭘 하냐고 투덜대는 소리도 들리지만, 그들은 우선 진입하는 중장병들에게 길을 내주느라 사격각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 빌어먹게도 더러운 흙벽들 때문이었다.

원래 빌어먹게도 더러우라고 파 놓은 흙벽이니까.

물론 이 방어 진지에 접근하면서도 꽤 큰 피해를 입었다. 그래도 흙벽에 바짝 붙으면 안전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문제는 적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 흙벽을 타넘고 있는 것이다. 이곳만 넘어가면 적이 있을 것이다. 멀리서 역겨운 화약 무기로 비겁하게 싸우는 총병 놈들을 쓸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오로지 그 생각만을 하면서 자꾸 무너져 내리는 비탈을 오르고 있었다.

탕! 탕!

타앙!

"허윽!"

"개새끼들아! 이리 내려와!"

끊임없이 날아오는 총탄에 누군가가 또 쓰러지고, 분노한 누군가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직 전투가 시작한 지는 5분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 시간은 된 것처럼 벌써부터 지쳐오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사격에 시달리면서 초원을 지내 방어 진지에 달라붙었는데, 그 후로 해자를 넘어, 가파른 흙벽 비탈을 오르고 있는 데다가 어디선가 계속 날아오는 총탄으로 스트레스까지 쌓이고 있었으니.

하지만 이제 다 왔다. 이 비탈만 넘으면 적이 있을 것이다. 중장병들은 이를 악물고 검과 도끼 등 무기를 지팡이처럼 쓰면서 비탈을 올랐다. 비록 신분이나 재산이 부족해 말을 타지는 못했지만, 엘랑키아 중장병들의 자부심은 상당하다. 북방 전쟁에서도 나우데사 민병대 나부랭이의 포화를 뚫고 성벽을 넘어 요새들을 함락한 주역이 그들이니까.

"으아아아!"

"다 죽여!"

그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한 명 한 명 띄엄띄엄 넘어간다면 분명 또 다른 저격의 희생자가 될 뿐이었다. 흙벽 꼭대기에 이르기 전, 쪼그리고 앉아 충분한 숫자가 모일 때까지 기다리던 병사들이 한꺼번에 언덕을 넘었다. 다소 희생자가 생기더라도, 나머지가 복수를 해주면 된다. 무기를 짧게 잡고 함성을 지르며 뛰쳐나온 그들을 기다린 것은 총탄이 아니었다.

"밀어!"

"하아압!"

빽빽한 창날의 벽이 막 흙벽을 넘어온 그들을 덮쳤다.

"우아악!"

"뭐야 이 자식들!"

"커헉!"

완벽한 기습을 위해서 일부러 고개조차 내밀지 않고 있다가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하지만 왠지 적은 알고 있었다. 4열로 이루어진 창병의 벽은 띄엄띄엄 언덕 위에 모습을 드러낸 중장병들이 뚫고 지나가기에는 너무 두껍고 단단했다.

맞부딪힌 상대들은 대부분 흙벽 너머로 밀려나거나, 억지로 뚫고 지나가려다 재수 없게 찔리거나, 최악은 앞으로 미끄러져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굴러떨어진 병사들이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창벽 아래 대기하던 막타 요원들의 무수한 단검의 세례가 투구와 갑옷 틈으로 찔러 들어오는 것은 당연했다. 후속 병사들이 달려들어도 빽빽한 창벽을 뚫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고 거기를 억지로 뚫어 보고자 우르르 몰려들자, 이제는 거기로 사격이 쏟아졌다. 무수한 창대에 꼼짝도 못하고 얽힌 상태에서 사격을 받아 무의미하게 희생자가 늘어간다.

공격에 나선 엘랑키아 보병대 전체가 이 꼴이었다. 일단 방어선에 접근하는 것 자체도 애매한 사각에서 쏟아지는 사격에, 가랑비가 옷 젖듯 사상자가 늘어난다. 그렇게 방어선에 접근해 나름의 방법으로 방어선을 공격해본다. 흙벽을 넘어보기도 하고, 안으로 이어지는 해자를 따라 굽이진 흙바닥을 따라가 보기도 한다. 그러면 거기에는 `뭔가`가 기다리고 있다. 그게 뭐였던 간에 귀찮고 불쾌하며 치명적인 꼴을 당한다. 간신히 적을 밀어냈다 싶으면 측면에서 또 다른 압박이 가해진다. 뭔가 방어선 자체가 엘랑키아 군의 공세를 흘려내고 힘을 낭비하게 하는 느낌이다.

이를 직접 경험하고 있는 엘랑키아 군 병사들과 전방 지휘관들은 기가 막혔다. 이건 그들이 아는 전쟁이 아니었다. 정말 치사하고 짜증이 나며 답답했던 나우데사의 지루한 공방전도 이렇지는 않았다. 나우데사는 좁아터진 국토 대부분이 요새가 차지하고 있었을 뿐이지, 참호선은 상당히 정직했다. 힘으로 밀어붙이면 얼마든지 뚫어낼 수 있었다. 이처럼 공격 자체가 농락당하는 듯한 악랄한 구조는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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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 콘도티에레? 여, 여기는 어떻게! 아, 안녕하십니까!"

네그라타 연대 소속의 장교 하나가 지휘소에서 나가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외치듯 말한다. 그럴 만하지, 한참 전투 중에 사령관이 갑자기 들이닥쳤으니... 나도 될 수 있는 대로 이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급박해서 어쩔 수 없었다. 미안해 모두.

미카도 바르두 샌잔디스, 기병과 보병을 합쳐 약 1900명의 네그라타 용병단을 지휘하는 연대장이자 알코자르의 남작. 한 때 이스키비르 강을 건너 드 누아 백작의 영토를 침공했던 인물이지만, 현재는 트랑카벨 가문과 용병 계약을 맺은 블랑독 연맹군의 일원이다. 그 역시 내 방문에 상당히 놀란 표정이다.

"갑자기 와서 미안합니다, 미카토 연대장."

"아닙니다, 콘도티에레!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상황을 보러 왔습니다. 현재 우익에 가장 많은 적이 몰려 있으니까요."

"옛, 콘도티에레! 병력 배치도를 보여드려도 되겠습니까?"

"좋습니다."

어설픈 천막에 간이 책상이 놓여 있을 뿐인 지휘소에는 잉크 자국투성이의 거친 종이가 한 장 놓여있다.

"지도가 엉망이라서... 죄송합니다, 콘도티에레."

"아닙니다. 이거 보기 좋고... 흥미롭네요."

축적을 고려하여 두꺼운 선과 얇은 선, 빗금이 어지럽게 그려진 지도는 분명 현재 네그라타 연대가 배치된 우익의 방어 진지를 표현하고 있었다. 왼쪽의 커다란 사각형은 반쯤 무너진 벨로통 농장이고, 오른쪽의 물방울 모양 도형은 우측 끝을 지키는 강화 진지겠지.

이걸 보니 우익의 어지러운 방어선이 되는대로 파헤치고 흙만 쌓아 놓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알겠다. 중간중간마다 작게 그려진 동그라미들은 배치된 각 중대의 핵심 방어 지점일 테고, 크게 그려진 동그라미는 각 중대의 담당 영역이겠지. 상당히 치밀하다. 분명 상당히 고심해서 준비했을 것 같다.

"준비를 굉장히 많이 하셨군요. 라솔에서의 경험 덕분인가요?"

"라솔 남부나 타라트라바 쪽에서는 능선을 낀 대치전이 많아, 진지 싸움이 자주 일어나는 편입니다, 콘도티에레."

"좋습니다. 이후 전투가 어떻게 전개될까요?"

"지금 적군은 익숙하지 못해 혼란해 하고 있지만... 곧 전면 공세를 취해 오리라 생각합니다."

공세 지점을 몇 군데로 제한하고 있는 방어 진지에 원하는 대로 공격해주는 것은 미련한 일이다. 그런데 현재 적군이 그렇게 하고 있고. 약점을 찾아내겠다느니, 방어선을 파훼해 주겠다느니 하는 의도겠지. 하지만 적도 곧 그게 잘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자신들이 가진 압도적인 전력을 인지하게 되면, 방어 진지 통째로 밀어버리겠다는 것에 생각이 이를 것이다. 우리가 대응해야 하는 것은 딱 그 부분이고.

"그러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죄송합니다... 잠시 생각해보겠습니다."

나는 미카토와 처음 대화를 나누었을 때, 브롱보카쥬 전투 당시를 떠올렸다. 과거에 적이었던 알코라즈 남작의 네그라타 용병단을 격파했던 전투. 마지막 순간, 본대를 무사히 후퇴시켰으며 자신은 후위대를 맡아 포위망에 남았을 때를 말이다.

위험한 후위를 맡은 것도 대단하지만, 내가 놀랐던 것은 미카토의 냉철한 계산이었다. 이대로 싸우면 얼마큼의 시간을 벌 수 있으니, 본대가 충분히 도망칠 수 있다던 계산. 그리고 내가 그만큼의 시간을 줄 테니 전투를 여기서 멈추자고 제의했을 때 받아들인 이성적인 모습까지 말이다.

용맹하게 싸우고 목숨을 바치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자신과 동료들이 목숨을 바친 대가로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계산하는 것은 더더욱 대단한 일이다. 자신과 부하들의 목숨을 저울에 올리면서도 머리가 냉철하게 돌아간다는 것. 다시 말해서 충분한 대가가 약속된다면 자기 목숨 조차 지불할 수 있는 과감한 판단, 미카토는 그게 가능한 지휘관이었다. 잠시 눈을 감은 미카토는 머리속으로 계산을 해 보는 것 같다. 5초가 지나기 전에, 그는 눈을 뜨고 입을 연다.

"적은 최소한 2시간은 방어선을 넘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무슨 의견이죠?"

그는 좀 망설이는 것 같았다. 무엇을 고민하는 것일까.

"다만, 1시간 30분이 초과하면 네그라타 연대는 기동력을 완벽히 상실하고 복구 불능의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콘도티에레."

"아...."

그런 생각이었구나. 자신의 처지 때문에 말하기를 꺼린 것일까. 애초에 3배에 가까운 적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평지에 건설한 방어 진지의 이점은 희석될 것이고. 최종적으로 전투는 산산이 조각난 네그라타 연대가 억지로 지나가려고 하는 적의 발목을 잡아채는 피로 물든 수렁이 되겠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면 좋겠군요."

"저희는 콘도티에레의 결정을 따를 뿐입니다! 방어선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처음 보고드렸던 결심은 변함없습니다."

“...어려운 역할을 맡기게 되었습니다.”

“어렵지만 명예로운 임무를 맡아 자랑스럽습니다.”

미카토가 씨익 웃었다. 나도 마주 웃었지만 조금 미안한 웃음이었다. 용병들이란 이런 존재들이지. 당연히 목숨이 아깝고, 계산에 까다롭다. 하지만 주판을 두들겨 리스크 대비 리턴이 확실하다면, 신념이나 명예 따위에 목숨을 거는 기사보다 완강해지는 것이다.

직접 눈으로 방어선을 담아두려고 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미카토 연대장은 내 생각보다 전장 구석구석에 대해서 잘 파악하고 있다. 또한 네그라타 연대를 구성하는 병사들도 이 특이한 전투 방식에 익숙해 보인다. 내가 굳이 참견하는 것은 서로에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확신이 든다. 훌륭한 부하들이다. 내 고민을 그만큼 줄여주었으니까.

지금은 믿고 맡기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나는 경례를 받고 네그라타 연대 지휘소를 나왔다. 별일 없다는 듯 우익 지휘소를 방문했지만, 지금은 전투가 한창이다. 좌익 쪽 대규모 기병전이 그나마 정리가 되었다지만 적의 위협은 여전하다. 중앙의 전투는 잘 버티고 있다고는 해도 언젠가 한계가 올 것이며, 이곳 우익의 전투는 이제 막 시작됐다. 공기 중은 치열한 총소리로 가득하며, 아우성치는 병사들의 함성이 전장을 뒤흔들고 있는 와중이다. 내가 고민하는 순간순간은 아군 병사 누군가가 필사적으로 싸워 만들어준 시간이다.

"중앙으로 돌아가자. 그사이 다른 전령은 없었나?"

"없습니다, 콘도티에레."

호위병들을 이끌고 원래 지휘소로 돌아가며 고민을 이어간다. 지금 상황이 불리한가? 라고 누가 묻는다면 반드시 불리한 것은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점점 나빠질 수 있다.

다만 유리한 점이 있다. 현재 전체 전력 대비, 전투에 투입된 전력 비율을 따져보면 적이 더 많다. 아직 예비로 둔 전력이 우리가 좀 더 많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뭔가 더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고. 예비대를 전부 써 버린 지휘관은 전투의 방관자가 된다지 않는가? 나는 최소한 방관자는 아니다.

"아실 부관!"

"옛, 콘도티에레!"

"드 누아 남부 연대, 슈토르히 연대 지휘관을 소집!"

"알겠습니다, 콘도티에레! 드 누아 남부 연대와 슈토르히 연대의 지휘관을 소집!"

"에밀리아는 포병대의 첼레스티나와 지빌링엔 반 연대의 지휘관을 소집해줘."

"넵, 콘도티에레! 첼레스티나와 지빌링엔 지휘관을 소집하겠습니다!"

반격의 핵심이 될 부대의 지휘관들을 소집한다. 우리 병사들이 맞고만 있는데, 놔둘 수는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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