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4. 샹다메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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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군, 각자의 역할을 다하라!”
현재 샹다메리 평원에서 단일 기병 부대로 성전군 최강의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부대는 단연 퐁투베 연대이다.
약 1500기의 기병 중, 2/3에 가까운 900기 이상이 권총 등 화기와 몸의 대부분을 덮는 큐레이스 갑주로 무장한 강력한 중장기병이다. 이들 중 일부는 기병창으로 무장한 경우도 있었다. 구시대의 유물이 아닌, 나름의 계획적인 편성에 따른 숙련 대기병 전력으로서의 기병창 무장이었다.
나머지 기병들 역시 상당수가 잘 무장된 경무장 보조 기병이다. 주력인 중장기병들을 지원하며 정찰과 추격은 물론, 제한된 돌격 임무까지 수행할 수 있는 다재다능한 기병대였다.
게다가 그 절반 이상은 베테랑이다. 북방 전쟁을 비롯하여, 최근 엘랑키아가 참여했던 전쟁을 경험한 고참병들이라는 말이다. 설령 신병들이라고 해도, 대부분이 명문 귀족 집안의 자제들이나 가신들이다. 어릴 때부터 교육을 잘 받았고 승마에도 익숙하다. 엘랑키아의 청년 귀족이란 준비된 기병 예비군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을 지휘하는 중견 장교들 역시 가려 뽑은 왕실군의 정예 출신이다. 수많은 전투, 위험한 작전에서 살아남은 그들의 존재 자체가 실력의 증명이나 다름없는 귀중한 인재들.
연대장인 베리브 드 퐁투베 자작은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하물며 상대는 거의 동수의 보병 연대 하나이다. 먼저 아퀴오슈 후위 연대를 격파한 솜씨를 보면 상당히 강한 부대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무너뜨린다면 성전군은 확고한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것이다.
“쏴라!”
타타타타탕!
슈토르히 총병 대열의 앞에 다시 한번 피할 수 없는 파멸이 내린다. 엄청난 밀도와 명중률의 일제사격에 접근하던 기병들이 무수히 낙마하여 나뒹군다.
“돌격!”
“이야아아아!”
“이단자들을 벌하라!”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전장은 갑작스러운 대피해에 패닉에 빠져 울부짖으며 도망치는 적병으로 가득하지 않다.
목숨을 걸고 총병들의 일제사격을 몸으로 받아 낸 기병들이 이탈하기 무섭게 온전한 다음 대열이 덮쳐온다. 물론 슈토르히 총병들이 다음 사격을 장전하거나 창병의 보호 아래 숨을 시간은 없었다. 미처 대응하지 못한 총병들이 적 기병의 돌격에 밀려나기 시작한다.
베리브 자작이 지시한 제파 전술이다. 철저한 훈련을 거친 기병대이기에 사용할 수 있는 전술이다. 좌우로 늘어선 얇은 카드 형태의 기병 대열은 화약 무기에 의존해 적절한 충격력을 보여준다. 후열이 없기에 지속력은 떨어지지만, 대신 비슷한 형태의 대열을 다수 준비하는 것으로 약점을 보완하는 것이다.
이는 깊은 종심을 가진 총기병 전열을 돌파하기 위한 기병 전술의 변형이다. 즉, 원래는 ‘기병이 기병을 상대하기 위한’ 전술이다.
대기하고 있는 강력한 화기로 무장한 적군의 사격을 ‘견딜 수 있는 정도의 피해’로 받아낸 후, 후속 부대가 빠르게 대열을 좁혀 육박전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이는 백병전에 들어가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기병의 질에 자신이 있기에 사용할 수 있는 전술이다.
이는 슈토르히 연대의 선형 방어 배치의 약점을 꿰뚫어 본 괜찮은 일격이었다.
“오오오! 돌입에 성공했습니다!”
“역시 고명하신 국왕 폐하의 근위대장!”
이를 지켜보고 있던 퐁투베 연대의 귀족 참모들이 이미 다 이겼다고 생각했는지 감탄사를 연발한다. 하지만 베리브 자작은 마음이 불편했다.
분명 돌격에 성공은 했다.
하지만 그건 겨우 전투의 첫 단계가 지났을 뿐이다. 예상은 했지만, 적 총병은 기병이 붙는다고 와르르 무너지는 약골이 아니었다. 기병의 공세에도 침착하게 대응하며, 안전한 위치로 이동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었다.
베리브는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찼다. 내심 적 총병이 무너져 내리면서, 창병 대열까지 엉망으로 만들어 주기를 바랐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모두 두 방향. 슈토르히 연대의 동쪽과 남쪽에서 동시에 공격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를 위해 베리브의 기병들이 지불한 희생도 막대하다.
총병의 일제사격을 유도하기 위해 선두로 내보낸 부대들은 복구 불능의 끔찍한 피해를 입었다. 적 총병의 사격이 생각보다 정확하고 무서웠다.
또한 주변의 창병들이 총병을 커버하지 못하게 하려고, 무리해서 공격하고 있는 견제 부대도 있었다. 물론 무모하게 창날의 숲 사이로 뛰어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기병으로 창병과 교전하는 이상 꾸준히 사상자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상당한 희생을 지불하는 것을 전제로 한 소모전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 어떤 성전군의 부대도 슈토르히 연대를 상대로 대등한 소모전조차 펼치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분명한 진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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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장을 상대해본 적 있는 것 같아.”
치열한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슈토르히 연대 지휘를 맡고 있던 루트비히가 말했다. 그의 눈은 빈틈없이 공격당하고 있는 대열을 살피고 있었으나, 말투는 침착했다. 마치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뭐? 어디서?”
크레시미르는 짐작이 가는 바가 없는 모양이다.
“북방 전쟁, 나우데사에서. 분명 싸운 적 있어.”
“어··· 어떻게? 멀어서 안 보이는데?”
“병력을 움직이는 방식이 말이야.”
“그, 그게 보이는 건가···.”
“콘도티에레께서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잖아? 병력을 지휘해서 싸우는 건 대화나 다름없다고.”
“...나한테는 완전히 다른 세상 이야기구만.”
크레시미르는 잠시 한숨을 쉬었다. 콘도티에레와 루트비히는 대화를 하다 보면 갑자기 다른 세상으로 가 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안타깝지만 크레시미르 자신이나, 첼리스티나, 심지어 모리츠조차도 따라가지 못하는 세상으로 말이다.
“그래서, 저 적장은 어떤데?”
“아주 강한 지휘관이야. 첼레스티나가 키운 총병대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다니.”
“그래서 좋은 방법은 있어?”
“콘도티에레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건 루트비히 네가 가장 잘 알겠지.”
“분명 능력 있고, 똑똑한 상대이니까 빠지는 함정이 있다고 말씀하셨겠지.”
크레시미르는 오랜 전우의, 용병이라기 보다는 젊은 학자나 관리처럼 보이는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런 미소를 지은 루트비히가 지는 모습은 상상이 안 간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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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자작님 이건 지원해야 하지 않습니까?”
“아군이 밀려나고 있습니다!”
베리브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도 알고 있다. 보고 있다. 시끄럽게 떠드는 귀족들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짜증스럽게 들린다.
전황이 갑자기 확 나빠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진전이 없었다. 어떻게든 원래 진형을 되찾으려 하는 적군 보병과, 어떻게든 이를 방해하며 비집고 들어가려는 아군 기병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좀처럼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적 대열의 동쪽 편을 공격하던 부대는 방어선을 복구한 적에게 튕겨져 나오기까지 했다.
미칠 지경이었다. 이 정도까지 했는데! 평범한 보병 부대는 이렇게 하면 완전히 무너진다. 무너지지 않더라도 복구가 어려운 타격을 입어 부대의 기능을 잃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적은 왜 이리 완강한 것인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작전은 계획대로 잘 실행되었다. 병사들은 잘 싸웠다. 장비도 화력도 밀리지 않았다.
하지만 저 빌어먹을 보병 연대의 방어선은 꼼짝도 하지를 않는 것이다.
“베리브 자작님, 이대로 가면···.”
“제발 그 입을 좀 다무시오!”
“으읏··· 죄송합니다···.”
홧김에 거칠게 말한 베리브는 바로 후회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여기서 짜증을 부려봐야 얻는 것은 없었다. 어쨌거나, 상대는 존중해야 하는 대귀족 출신 참모이다. 최소한 그를 존경한다며 일부러 찾아온 인물일 터인데.
순간, 그의 눈이 크게 떠진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무언가가 보였기 때문이다.
현재 적군은 대단히 혼란스럽다. 하지만 말장난 같지만, 이는 혼란에 빠졌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부대를 완벽히 통제하고 있기에 혼란스러운 것처럼 보인다. 약점이 보였다 싶으면 병력이 이동해 막힌다. 그렇게 바삐 돌아다니는 예비 병력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저것은···. 뭔가 달랐다.
“예비대에 출격 준비를 전달하게.”
“예? 설마, 자작님께서 직접 출전하시는 겁니까?”
“명령을 전달할 시간이 없다.”
“아, 알겠습니다. 자작님!”
그럼 그렇지. 적은 약해지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만큼의 엘랑키아 정예 기병들이 희생을 감수하며 육박하고 있다. 부담이 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지금까지는 적 지휘관의 기민한 수완으로 인해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게 한계에 도달하기 시작했다. 뚜렷하게 보인다. 반평생을 말 위에서 보내온 그의 눈에는 말이다.
“출격한다. 북쪽 대열을 공격한다!”
“북쪽을 말씀이십니까, 알겠습니다!”
“나를 따르라!”
“위험합니다 자작님! 저희가 선두에 서겠습니다!”
피가 끓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기병대를 직접 선두에서 이끄는 것이 얼마만인지.
퐁투베 연대의 기병들은 지속해서 적 사각 대형의 북동쪽 모서리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리고 방금 시작한 기습적인 공격은 동쪽과 남쪽이 목표였다. 총병이 많이 배치된 넓은 면이다.
엘랑키아의 기사들이 많은 희생을 감수하고 공격을 지속했으나 적은 무너지지 않았다. 아니 그런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적 보병 대열 역시 끊임없이 피해가 누적되고 있었으며, 그 병력 충원은 다른 대열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점거한 성전군 공성포가 있는 포대에 의존한 북서쪽 모서리와, 거듭 공격받아 강화된 북동쪽 모서리. 그사이에 짧은 대열은 병력을 차출당해 필연적으로 약화하고 있었다.
베리브가 발견한 것은 그 약화된 대열의 균열이다.
시간이 없었다. 적이 대응하기 전에 약점을 파고들어야 했다. 기병이 보병보다 빠르다지만, 적은 자기 진영 내부에서 이동하는 데다가 거리가 짧다.
격차를 낼 수 있는 것은, 기병들의 이상한 기동을 전방에서 발견하고 보고가 올라가기까지의 시간차. 이 시간을 벌기 위해서 베리브는 부대의 선두에 선다. 자신의 판단이 전령을 통하지 않고 즉각 부대에 전해지도록.
시간이 없다. 베리브는 이동하면서 지시를 내린다. 다행히도 그의 오래된 측근들은 단번에 그의 지시를 알아듣고 부대를 재편성한다. 시끄럽던 귀족 참모들도 이제는 조용하다. 오히려 무언가 `중요한 장면`의 일원이 되었다는 희열조차 느끼고 있었다.
"재장전 중인 예비대를 후속하도록 전달했습니다."
"수고했다."
200여 기로 시작했던 예비대는 보충 병력을 받아 어느새 400여 기로 늘어나 있었다. 적이 제발 알아차리지 못하기를 빌면서 기회를 노린다.
그리고 지금.
다시 균열이 열렸다. 그것도 확실하게.
"지금, 신호나팔을!"
"신호나팔이다!"
짧지만 날카로운, 독특한 신호나팔이 세 번 울었다. 무심한 듯, 다른 임무를 기다리는 듯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기병들이 한 장소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대장 베리브 드 퐁투베 자작은 이미 말을 달리고 있다. 미리 신호를 전달받았던 휘하 기병들이 속속 대열에 합류한다.
최단 거리는 아니다. 마치 적 보병 연대의 방어선과 평행하여 달리는 듯하다가, 갑자기 방향을 튼다. 뒤따르는 부하들이 잘 따라올 수 있을지 다소 걱정이지만, 숙련된 엘랑키아 기사들이라면 걱정 없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진다. 적병이 우왕좌왕한다. 총병들이 황급하게 비켜서고 뒤에 처져 있던 창병들이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 이동하지만 이미 시기를 놓쳤다.
장애물이 있으면 문을 닫을 수 없듯이, 적 보병 대열 한가운데 뚫린 구멍으로 퐁투베의 기병들이 쇄도해 나간다. 당황해서 새파랗게 질린 창병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탕! 탕! 타타탕!
탕탕! 탕!
뒤늦게 대열을 갖추지 못한 총병들이 산발적으로 사격하고, 엘랑키아 기병들도 권총으로 반격한다. 거리가 가까운데도 엉망인 조준 때문인지 명중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돌파했다. 돌파했다!
마치 닫히기 직전의 문을 비집고 들어가는 사람처럼, 퐁투베 연대의 선두가 슈토르히 연대의 틈을 뚫고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양측에서 총병들이 저격하고, 창병들이 문을 닫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이미 기병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통로는 막을 수 없다.
얼마만의 선두 돌격인지. 베리브는 오랜만에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사실 그는 항상 선두에서 싸워왔다. 그 용맹함과 과감성, 빠른 판단을 인정하였기에 빠르게 출세할 수 있었고, 국왕 폐하의 눈에도 들 수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계급이 오를 수록 관리해야 하는 부대의 숫자가 늘어났고 기마대의 선두에서 달릴 기회는 줄어들었다.
내가 길을 정한다는 기묘한 충만감.
수백의 부하들이 내 뒤를 따른다는 쾌감.
"으아아아아!"
베리브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오는 고함을 질렀다. 창병과 총병으로 이루어진 사각 대형은 기병에 강하지만, 대형 바깥의 적에게만 강할 뿐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안쪽에 있다.
이제 그의 앞에는 기병에게 공포의 대상인 밀집 창벽 따위는 없다. 혼란하고 공포에 질린 보병들이 있을 뿐이다. 공포에 질린 보병... 만이 있어야 했을 뿐인데....
자신의 눈을 의심한다. 돌격해온 기병대의 선두를 가로막은 것은 촘촘하게 이루어진 원형 방패의 벽이었다. 그것도 상체를 다 가릴 정도로 커다란, 표면이 철로 보강된 거대한 방패.
무슨 의도가 있는 거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기책 따위로 이미 거대한 흐름이 된 기병의 돌격을 막을 수는 없다.
"돌격! 짓밟아 버려라!"
"으아아아아!"
"엘랑키아를 위하여!"
얄따란 방패의 벽 따위 짓밟을 기세로 엘랑키아의 기사들이 속도를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