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 가장 신성한 전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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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든 작든 부하들을 맡은 총지휘관은 항상 바쁘다. 전투 전에도 할 일이 많고, 전투 중에야 당연히 할 일이 많다.
그런데 전투 후야말로 진정한 업무의 시작이 되는 경우가 많다.
군인에게 최대의 목표는 바로 ‘승리’이다. 그 때문에 그 승리를 쟁취했으니 일도 끝났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전투가 끝난 뒤가 더 중요할지도 모르고.
아마도 소설이나 연극 등에서도 거의 묘사되지 않는 이유는, 이렇게 재미도 없고 정신도 없고 화려하지도 않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전투 후에 자칫 잘못 판단하면 전투의 성과가 완전히 사라질 정도로 치명적인 결과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만큼 전투 전이나, 도중처럼 후에도 지휘관의 판단은 중요하다는 말이다.
뭐 차라리 패했다면··· 병력의 온존이라는 절대적인 우선순위 업무가 생기기에 오히려 마음은 편할지도 모른다. 퇴각전 자체가 매우 괴로운 일이기는 하지만 할 일이 딱 정해져 있으니까.
하지만 이겼다면 더더욱 생각할 게 많아진다.
우선 병력의 온존. 승리를 했어도 아군 역시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그렇다면 병력을 수습해서 재편성하고 부상자들을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투를 막 끝낸 병사들의 멘탈 관리는 상당히 중요하다. 아군의 경우 결속력이 상당히 강해서 그런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전투 이후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한 병사들이 들고일어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힘들게 고생하고 죽을 위기를 넘었는데도 더 이상 보상을 받기가 힘들다고 생각한 병사들이 떠나버린 경우도 있다. 약탈을 위해 적지로 가거나, 고향으로 가기 위해 떠나버린 것이다. 지휘관들이 승리의 미주에 취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에 병력의 절반이 녹아 사라진 것이다.
부상병 관리 역시 병사들의 사기에 큰 영향을 미친다. 우리야 뭐, 아쥬흐가 직접 이끄는 막강한 의무대가 의료 지원을 책임지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다음으로 이후의 전략 방향이다. 이 역시 잘못 챙기면 야전군이 통째로 날아가 버리는 경우가 종종 일어난다.
승리에 도취하여 보급받기 어려운 적지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거나. 약탈에 집중해 병력을 분산시켰다가 후속하는 적군에 대응하지 못하고 패배했다거나.
뭐 이런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더라도, 얼마나 많은 사령관이 전투에서 이기고도 전쟁을 말아먹었나 생각하면 뭐 답은 나오지.
내 경우, 병사들의 케어는 믿을만한 중견 지휘관들이나 트랑카벨 영지군의 시스템을 믿고 있다. 특히 트랑카벨 정규 연대 소속의 병사들 중에는 이번 전투가 첫 전투인 경우도 있으니까.
병사들 입장에서도 전장 정리라는 매우 큰 일을 겪은 직후였다. 전투에서 승리하고 잠깐 쉰 이후에는 시체들을 아군과 적군으로 분리하고, 버려진 무기들을 회수하고 시체로부터 장비들을 벗겨낸다. 아군이라면 신원을 기록하고 유품을 회수한다.
그러는 사이, 다른 병사들은 열심히 무덤을 판다. 그렇게 정해진 자리로 시체들을 옮겨서 나란히 묻는다. 날이 더운 초여름이다 보니 하루만 방치해도 시체는 썩기 시작하니까, 조금이라도 빨리하는 편이 좋다.
대량의 시체를 처리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화약의 시대라는 특성상··· 전장이 엄청나게 넓은 데다가 심하게 훼손된 시체들이 많아서 정신력을 깎아 먹게 된다.
말 그대로 신체 일부를 삭제해버리는 수준인 포탄은 말할 것도 없고. 통상적인 소총탄만 해도, 변형이 심하게 되어 신체를 난도질하는 경우가 많다. 시체를 옮기려고 들어 올렸는데 내용물이 쓰러지거나, 최악의 경우 뚝 부러져 버리는 경우도 있다.
···여러모로 시체가 썩기 전에 전장 정리를 마쳐야 하는 이유가 있다. 지척에서 시체 썩는 냄새 맡으면서 쉴 수도 없는 일이고 말이다.
또한 한편에서는 회수된 무기와 갑주들을 정리하고 세척한다. 간단한 수리는 직접 하기도 하고 파손이 크면 폐기하기도 한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재생할 수 있는 무기는 재생해서 쓰는 것이 우리 트랑카벨 영지군의 원칙이다.
앞으로 얼마만큼 신병을 증원할지도 알 수 없는 일이고 말이다.
그렇게 정신없는 이틀을 보내고 나니···.
다른 일들은 대충 끝났다. 패주한 적군은 엉뚱한 데 들르거나, 복수전을 계획하는 대신 거점인 브와이유로 퇴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빠른 시일 내로 전투가 재개될 가능성도 거의 없다.
이제 내가 정할 것은, 승리한 우리 군을 어떻게 움직이느냐 하는 것이겠다.
“첼레스티나, 아직 아넥시가 공격당하고 있다는 보고는 없지?”
“네에, 벨모제에서 온 정기 보고가 어제 도착했는데 아넥시에 대한 내용은 없었어요, 콘도티에레.”
“흐음, 그럼 최소 최근 며칠 동안은 아넥시에 적이 도달하지는 않았다는 것이겠네.”
“네에, 맞아요 콘도티에레. 하지만 블랑독 북부에 적이 들어왔다는 말은 아주 많아요오···.”
"그래 나도 읽어봤는데, 정말 구석구석 훑어가면서 내려오는 모양이네."
샹다메리 전투 내내 포술장으로 역할을 다 해준 첼레스티나는, 전투가 끝나자 고맙게도 평소대로의 유능한 부관으로 돌아왔다. 부관으로 수고해준 아실은 다시 열심히 트랑카벨의 계승자 역할을 해주고 있고.
그나저나 법황의 성전군은 엄청난 전쟁 비용을 주민들을 수탈해서 조달할 생각인가. 애초에 속전속결은 할 생각도 없는 모양이지.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네에... 앗! 아쥬흐 양 오셨어요! 여기 차 드세요."
"항상 고마워요 첼레스티나.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는데."
"에헤헤, 마침 차를 끓여두었으니 한 잔 드세요."
"그럼 고맙게 마실게요."
아쥬흐와 첼레스티나, 두 사람이 함께하는 지휘부라니. 어쩐지 고향에 돌아온 것 같다. 그나저나 첼레스티나는 귀중한 기프트를 차 데우는 데에만 쓰고 있네. 최근에 쓸 기회를 만들어주지 못해서 그렇겠지만....
"바쁘신 것 아는데,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요, 콘도티에레 에트."
"아닙니다 아쥬흐 의무대장님."
"...그냥 평소처럼 불러주세요. 전투 중이 아니라면요."
"어... 그래도 그럴 수는...."
"부탁이에요."
"...알겠습니다, 아쥬흐 양."
나는 선선히 그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최근 야전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며 잠도 쪼개서 잔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확실히 피곤해 보였다.
"다행히 중상자들은 모두 고비는 넘겼어요. 그래서 잠깐 짬이 났네요."
"그거 정말 다행이네요...."
"다 콘도티에레 에트 덕분이에요."
"어... 저는 한 일이...."
"솔직히, 중상자가 서너 배는 더 나올 것으로 예상했었거든요. 이만한 규모의 전투에서 사상자가 이 정도로 그친 것은, 콘도티에레 에트가 조절한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니 의도가 있기야 했지만 내가 무슨 신도 아니고... 너무 과대평가인데.
"그래서 트랑카벨 가문의 일원이면서, 의무대의 책임자로서 콘도티에레 에트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어요."
"제 생각 말씀이십니까?"
"물론 저는 콘도티에레 에트의 전략에 아무 이의가 없어요. 다만, 미리 준비하고 싶어서요."
생각해보니 그녀의 말이 맞다. 트랑카벨 영지군, 아니 블랑독 연맹군 전체에서 그녀의 영향력은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
전선에서는 의무대를 운영. 없던 의무대가 생긴 것은 온전히 그녀의 노력과 인맥 덕분이다.
군수 보급을 전담하고 있다. 농담이 아니라 그녀의 뒷받침이 없다면 우리 대군은 꼼짝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인력 조달 역시 그녀의 외교력과 인기에 기대고 있는 면이 많다.
당연히 아쥬흐에게 자세하게 보고하고, 매번 결제를 받아도 모자랄 판이기는 하다. 다만 서로 바쁘고 신뢰... 등등의 이유로 내 마음대로 했던 점이 없지 않았지. 그걸 항상 지지해주었으니 고마운 일이지만.
"법황군과의 전투에서는... 사상자가 더 많이 나올 가능성이 큽니다."
"국왕군과 목표가 차이나기 때문인가요?"
"맞습니다."
역시 그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전부 알고 있다. 우리가 국왕군과 싸우는 것은 국왕의 군대를 전멸시키고 엘랑키아를 전복시키기 위함이 물론 아니다. 가능하지도 않고 말이다. 최선의 결과는 무력으로는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음을 알려주고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상호 간의 희생을 최대한 억제한 채 전술적으로 우위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전쟁과 전투는 기본적으로 사람이 죽는 불길한 일이다. 그러므로 사상자를 최소화하고 빨리 끝내는 것이 원칙적으로는 맞다. 하지만 `목적`이 있게 마련이다. 결국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기에, 근본적인 목적을 잃고 어설픈 인도주의자가 되면 안 된다.
물론 불필요한 유혈을 조장하거나, 끝낼 수 있는 전쟁을 질질 끌어도 안되겠지만 말이다.
정치적으로 국왕군은 외교의 대상이다. 그렇기에 힘을 보여주고 돌려보냈다. 오히려 너무 많이 죽인다면, 분노와 증오가 타산을 넘어서는 일이 생긴다. 그 선을 넘었다면 서로 끝을 봐야 하는, 참혹한 전쟁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법황군과는... 끝을 봐야 할까요?"
"엘랑키아 정부와는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것이지만... 법황청과는 세상을 보는 방식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네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 된 아쥬흐는 차를 한 모금 들이키더니 음미하는 듯, 눈을 감는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무언가 다짐한 눈빛이었다.
"그래야 한다면, 철저하게 때려 부숴서 다시는 블랑독에 얼씬도 못 하게 해주세요."
"어... 물론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라도 말씀해주시고요."
"지금도 필요한 것은 확실하게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주 보고 잠시 웃었다. 생각해보면 참 기묘한 관계이다. 고용주의 재무 담당자와 용병대장은 원수가 되기 쉬운 관계니까.
인원이 맞네 안 맞네, 총이 대구경이네 아니네, 작전 중 소요 비용이네 아니네.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려고 하고,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하고. 멱살만 안 잡아도 성인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흔한 일이다.
"법황군은 블랑독에 있어서 일종의 재해라고 봐야 할까요?"
"비유가 좋네요. 그렇게 볼 수 있겠습니다."
말이 통하는 협상의 대상인 엘랑키아 국왕의 군대는 적당한 피해를 주고 전술적 우위를 보여주면 물러난다. 하지만 법황군은 어정쩡한 피해를 줘서는 끈질기게 블랑독 영역 내에 머무는 암덩이가 될 것이다.
게다가 엘랑키아 국왕 입장에서는, 장차 자기 영토가 되어야 할 블랑독이 초토화되는 것이 좋을 리가 없다. 하지만 법황청으로서는 어차피 자기네 목적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지, 블랑독의 초토화는 부차적인 문제겠지.
같은 전쟁, 한 편이지만 입장이 이렇게나 다르다.
이 차이를 분명히 이해하지 않으면 이 전쟁을 계속해 나가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콘도티에레 에트... 표정이 좋지 않네요. 고민되시는 게 있으신가요?"
"아, 아닙니다. 제가 원래 걱정이 좀 많아서...."
"혹시 제가 해결할 수 있는 걱정인가요?"
"아뇨, 아뇨. 전쟁이 길어지면... 서로 원한이 쌓이다 본래 목적은 잃어버리는 경우를 많이 봐서, 그렇게 되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아...."
아쥬흐도 한숨을 쉰다. 우리가 발을 들여다 놓은 늪의 깊이가 얼마인지 모르겠다 느껴서 그런지.
"그래도 콘도티에레 에트와 함께라면 뭐든 극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으음... 그게 좀...."
"그렇죠, 첼레스티나?"
"네에, 네에! 그럼요! 두 분이 함께라면 못 할 일이 없을 거예요! 이번에도 질 것이라는 생각이 전혀 안 드는데요 뭐."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콘도티에레 에트."
"네에, 대륙 최강의 남자인걸요?"
"하아... 그렇습니까."
나는 필사적으로 대륙 최강 남자의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고, 이번에도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