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174화 (174/556)

24-16. 제2차 아넥시 방어전

“합!”

“끄어어···.”

제19 델레망드 보병 연대의 부연대장, 악셀 엑스코르쥬가 머리로 치켜들었던 양손검을 당기듯 휘둘렀다.

딱. 파각., 쩌억.

평범한 기사 검과 비교하면 20퍼센트 정도 길고, 폭도 조금 넓은 양손검이 적병이 비스듬히 내민 장검을 부수고, 투구를 쪼갠 다음, 이마부터 턱까지 붉은 선을 그었다.

“커헉!”

얼굴 전체로 피를 줄줄 흘려대던 적병이 그대로 절명하며 앞으로 떨어졌다. 시퍼렇게 빛나는 칼날에는 핏방울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거의 동시에, 악셀의 날카로운 눈이 주변을 살핀다. 쓰러진 적 바로 옆에 있던 상대가 고함을 지르며 달려든다.

“하압!”

악셀은 거의 상체를 움직이지도 않는다. 대신 남달리 긴 양손검의 칼끝만 움직여 견제한다. 카앙, 카앙! 하고 두 번 쇠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적이 움찔거리며 물러선다.

실력이나 무기 상성이나 안된다 생각했는지, 적은 몇 걸음 물러나 주변을 살핀다. 혼자 안 되면 두 명, 그것도 안 되면 세 명에서 함께 덤비면 된다.

이건 결투가 아니다. 군인으로서, 용병으로서 나름 지혜로운 판단이다.

하지만 그럴 틈은 없었다. 부연대장이 나서서 잠시 시간을 끄는 사이, 전세를 가다듬은 예비대가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부연대장님을 따라라!”

“우와아아아아!”

기세가 오른 제19 연대 소속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바리케이드를 넘어온 적군을 되밀어 낸다. 그렇게 한 차례의 전투가 또 일단락된다.

“후우우···.”

부연대장 악셀은 조용히 숨을 고르며 검을 든 손을 늘어뜨린다. 남달리 크고 무거운 그 검은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체력을 많이 소모할 테니 전투태세를 오래 유지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자네 검술은 정말 볼 때마다 대단하군!”

“과찬이십니다.”

“아니 정말이야! 그러니 트랑카벨의 이전 영주님들도 엑스코르쥬 가문을 신뢰하고 관리자를 맡긴 게 아니겠나.”

연대장 넬리프는 진심으로 감탄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악셀은 쑥스러운 모양이지만.

“화약의 시대에 검술이 힘을 쓸 수 있는 것은 소규모 전투뿐입니다. 기껏해야 중대 단위 정도일까요?”

“오오, 중대 단위라면 100명까지 커버가 가능하다는 말이군!”

“여, 연대장님, 그런 뜻으로 한 말은···.”

“하하하, 농담이네. 그래도 자네가 있어서 든든하군.”

넬리프는 ‘내가 혹시 쓰러지더라도, 언제라도 후임을 맡길 수 있겠다’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괜한 사족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말이 씨가 된다고, 전장에서 그런 말은 농담이라도 금물이다.

잠시 전장이 안정되었다고 한숨을 돌린 사이,

“3중대에서 전령입니다! 연대장님!”

“뭔가? 말하게.”

“2중대장께서 전사하셨습니다! 3중대에서 방어 대열을 이어받아 막고 있습니다!”

제2 중대는 가장 우측을 지키고 있던 병력이다. 중앙 광장에 배치된 방어선 너머, 좁은 밭둑길 진입로를 지키고 있었다는 말이다.

지형상 전투가 벌어질 수 있는 정면이 좁다. 그 때문에 비교적 안전한 장소라 생각하고 있던 곳이다. 예상을 벗어난 사태에 넬리프의 눈에서 불꽃이 튄다.

“뭐? 우측 방어선이 무너졌어?”

“아닙니다! 적은 농장 길을 통해 우측으로 우회해 왔습니다!”

“...결국 길을 뚫었구나. 끈질긴 자식들.”

“그런데 적 주력이 중기병입니다!”

“작정하고 왔군! 초반에 보이던 기병이 어디에 있나 했더니!”

“제가 가겠습니다, 연대장님.”

그 때, 부연대장 악셀이 나선다.

“괜찮겠나?”

“창병 예비 소대를 둘 데리고 가겠습니다. 진입로가 좁으니 다시 틀어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알겠네. 부탁하겠다!”

“맡겨주십시오!”

다행히 전장은 좁아 수적으로 월등한 적과 싸우고는 있다. 하지만 적은 전장에 들어오지도 못한 병력이 잔뜩 있고, 이쪽은 예비대를 소대 단위로 쪼개 쓰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측면이 뚫리면 파멸이다. 어떻게든 측면에 뚫린 구멍을 막아야 했다. 그것도 최소한의 노력으로.

“다녀오겠습니다!”

“여기는 맡겨두게! 정문은 내가 단단히 닫아걸고 있을 테니, 쪽문 단속을 부탁하지!”

“옙, 연대장님!”

무거운 양손검을 어깨에 기대듯이 올린 부연대장 악셀이 경례를 마친 후 이동하기 시작한다. 30명 남짓한 예비대가 그 뒤를 따른다.

“자 우리도 힘내보자! 여기 방어선 다시 밀어 올리고 적 창병 측면에 산탄을 쏜다!”

개자식들, 전부 죽었다! 측면을 신뢰하는 부연대장에게 맡겨놓은 넬리프는 다시 전투 지휘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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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뚫었다! 길이 뚫렸어!”

“그렇습니다, 대장님!”

라모리 스텐던 휘하의 기병대장인 울터 콜린스는 오랜만에 말 위가 아닌 장소에서 지휘하고 있었다. 세 개의 농장이 만나는 접점에 세워진 큼직한 바위의 꼭대기였다.

덩굴 식물과 이끼로 뒤덮여 미끄러워 보이는, 위태위태한 바위 꼭대기. 겨우 사람 서너 명이 서면 꽉 차는 공간에 울터와 참모 장교가 서 있다.

어지간한 돌은 다 파내 농장으로 만든 이 지역에서, 드물게 남아있는 거대한 통 바위이다. 아마 오래전, 농장을 만든 자들도 개간을 하다 하다 안 돼서 경계선으로 남겨두었겠지.

밭둑과 잡목림에 가려 워낙 시야가 좁은 상황이다. 그래서 말을 타고 뛰어다니는 지휘가 의미가 없었다.

오랫동안 기병으로 싸우며 산전수전 다 겪은 울터였다. 그 덕에 총대장인 라모리에게 인정받아 기병을 지휘한다. 항상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기병은 기병의 방식으로 이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자존심을 버렸다.

기병의 방식으로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긴다’가 더 중요하니까. 무엇보다도 기병이 쓸 수 있는 시간이란, 중앙의 아군 보병들이 목숨을 바쳐 벌어 준 황금 같은 것이다.

자존심 챙기는 것 따위는 사치였다. 밥값 못하는 기병 따위 어디에 쓰겠나. 그 생각으로 유연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자신이 가장 먼저 말에서 내려 지휘를 시작했듯, 기병의 일부에게도 하마 전투를 명령했다. 중기병들이 정면에서 적과 싸우며 시야를 돌리면, 경기병들이 말에서 내려 밭둑을 기어오른다.

결국 몇 개 인가의 농장을 이런 식으로 점령했다. 다행인 점은 적의 숫자가 많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반대로 아군은 기병의 기동성을 이용해 사방팔방으로 전장을 넓힐 주도권이 있다. 뒤늦게라도 이를 깨달은 울터는 자신의 강점을 최대한 사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건 천천히 먹히고 있었다. 마치 느리게 효과가 작용하는 독처럼, 천천히 적의 촘촘한 방어선에 울터의 기병대가 스며들고 있었다.

휘날리는 깃발도, 고색창연한 출전을 알리는 나팔 소리도 없다. 장대한 말과 인간, 강철의 대열도 없다.

대신 말에서 내려 밭둑을 기어오른다. 반질반질 윤을 낸 갑주가 거무튀튀한 진흙투성이가 되도록. 멋들어진 승마 바지에 풀 물이 들도록 말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영토를 지키고 있는 적의 뒤통수를 치려면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 했다.

그 결과로 아주 희미한, 승리로 향하는 실마리를 찾아낸 것 같다.

“중앙 개활지로 향하는 길이 개척되었으니 기병 본대를 돌입시킬까요?”

“아직이다! 더 안전한 길을 만들어야지. 지금 길 하나로는 중기병이 다니기는 너무 좁아!”

“알겠습니다, 대장님.”

울터는 참모와 의견을 나누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나마 주변에서 가장 높은 장소를 찾았다 생각했는데, 생각만큼 시야가 좋지는 않다. 그놈의 빌어먹을 밭둑 때문이다.

지금 뚫린 우회로는, 마치 실 하나로 다섯 개의 바늘 귀를 동시에 통과하는 것과 같았다.

당연히 전혀 안정적이지도 않다. 바늘 중 하나가 손톱만큼이라도 움직이면 바로 길이 끊긴다.

그래서 아직은 반절의 성공이다. 울터가 가진 강력한 기병 전력을 적의 측면과 후방에 몽땅 쏟아버릴 수 있는 우회로가 필요했다!

“전령! 전령! 울터 대장님, 좌측을 추가로 뚫었습니다!”

“뭐? 결국 해낸 건가?”

“네! 적 후방을 향한 길이 열린 것으로 보입니다! 저 소리 들리십니까?”

확실히, 전장에서 조금 떨어진 왼쪽에서 은은하게 외치는 함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이제 더는 기다릴 수 없네. 예비대를 투입··· 아니 내가 직접 가겠다!”

“대장님?”

“자네는 여기 지휘소에 머물며 전황을 살피게! 급한 일이 있으면 전령을 보내고.”

“아, 알겠습니다!”

전령을 보내면 저 좁아터진 혼란 통에 받을 수는 있을지 모르겠다만. 그래도 지금은 생각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올라서 있던 바윗덩이를 조심조심 내려간다. 디딜 곳을 찾느라 바위를 더듬다 보니 뭔가가 인위적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림인지 글자인지. 오래 전 이 땅을 지배했던 아란 제국의 유적인지도 모른다. 혼자 높이 솟아 있으니 표지판 역할을 했을지도 모르고.

부디 승리로 가는 표지판이면 좋겠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부하가 내민 말고삐를 받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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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 델레망드 연대의 부연대장, 악셀 엑스코르쥬는 우측에 도착해 가장 먼저 흔들리는 병사들을 정리했다.

방어선 우측에는 원래 예비대 소수가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은 중앙 광장의 주 방어선을 지킬 예비대였다. 따라서 우측, 동쪽에서 들어오는 우회 공격을 막아 낼 준비는 되어있지 않았다.

여기에 외곽 쪽 농장들을 아우르는 방어선에 배치되어 있던 제2 중대 병사들이 몰려왔다. 적의 공세에 밀려 후퇴해온 것이다.

거기에 지휘관인 중대장은 사망했으니, 방향과 목적을 잃은 병사들이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은 당연했다.

“자, 우리가 여기, 일자로 방어선을 긋는다! 우리가 기준이 된다! 당황한 동료를 수습해서, 여기서부터 버텨 적을 몰아내는 거다!”

“알겠습니다!”

악셀이 데려온 창병들을 가지고 즉석 방어선을 만들었다. 우왕좌왕하던 병사들을 불러 그 뒤에 붙여 세운다.

간부 교육에서 들었던 방어선 재건법이다. 아직 힘이 남고 싸울 의지가 있는 병사들도 기세에 밀려 혼란에 빠지기 쉽다.

그러기 전에 조금씩,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 있을 장소를 주어 대열에 합류시키는 것이다.

특히나 일정 수준 이상의 훈련을 받았고, 전장이 고향이라 애향심이 높은 제19 연대 병사들에게 효과적이었다.

차츰 혼란이 잦아들고, 악셀은 현 상황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기병이 무슨 수로 이렇게나 많이!”

좁은 공간에 적 기병이 수백은 되어 보인다. 밭둑을 기어올라 넘어온 적 보병도 상당히 많아 보였다.

다행히 아직 아군과 적군이 마구 섞여있다. 좁아터진 광장 한 귀퉁이에 뒤섞여 옴짝달싹 못한다. 아마 적 지휘관은 부하들에게 지시조차 내릴 수 없는 상대이리라.

그리고 이쪽에는 다행히 기병을 잘 잡는 창병들이 있다. 악셀은 곧바로 판단을 내렸다.

“자, 우리 차례다. 창병은 나를 따라 전진한다! 창이 없으면 창병의 측면을 지킨다!”

“옙!”

“총병은 장전을 마치고 따라온다! 너무 늦지 말고!”

“예엡!”

“전진, 앞으로!”

창병이 기간 병력이 되어 서두르지 않고 한 걸음씩 나아간다. 창이 부러졌거나 잃어버린 병사들이 짧은 무기를 들고 바짝 붙어 따른다.

앞서가는 창병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무기를 좌우로 겨누며 측면을 지키는 전형적인 대열이다. 그 뒤로 장전을 마친 총병들이 따라붙는다.

악셀은 가문의 자랑인 양손검을 겨누고 맨 앞줄에서 병력을 이끈다. 다소 부실하기는 하지만, 직사각형의 전투 대형을 새로 갖춘 트랑카벨 군이 순식간에 재건되었다.

혼란의 와중에, 새롭게 편성되어 접근하는 작지만 단단한 보병 대열은 큰 변화를 가져왔다.

전열이 붕괴한 트랑카벨 군은 새롭게 나타난 아군에 합류하였으며, 성전군은 무리해서 개별적으로 추격하는 대신 새 적에 대응하기 위해 대열을 정돈한다.

서로 시간은 부족하다. 어차피 싸울 예정인 양측의 거리가 빠르게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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