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4. 제2차 아넥시 방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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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레망드 삼각주에서의 전투는 우리, 블랑독 연맹군의 승리로 끝났다. 내용상으로 분명한 승리였지만··· 어딘가 애매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콘도티에레, 적은 완벽하게 격퇴하셨잖아요? 뭐가 애매하시다는 거예요?”
“으음 이 전투로 우리가 얻은 게 뭘까··· 그게 조금 애매하네.”
“네에··· 그래도 아군이 잃은 것은 딱히 없잖아요?”
“그렇게 생각해도 되겠지?”
첼레스티나의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니 굳이 고민을 과하게 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다.
함부로 강을 건너온 적에게 아군의 방비태세를 보여줬고, 따끔한 맛도 보여줬다.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제19 델레망드 연대가 다소 피해를 당하기는 했지만 애초에 교전 규모가 크지는 않았기 때문에 사상자가 어마어마하게 많지는 않았고.
어쨌든 수적으로 우세한 적을, 지형과 미리 준비한 전술로 격퇴한 것은 사실이지.
음, 그렇다면 아군이 잃은 것은 무엇일까.
당연하지만, 전사한 장병들에게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겠다. 아무리 압도적인 승리라도 용감한 사상자가 발생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는 없다.
그들의 꽃 피지 못할 인생은 나 같은 지휘관이나, 트랑카벨 가문과 같은 통수권자가 평생 지고 가야 할 책임인 이유이다. 하다못해 그들의 명예가 지켜지고, 그 희생이 헛된 일이 되지는 않도록 말이다.
그 점을 제외하자면··· 치명적인 손해는 보이지 않는다. 지원을 위해 급파된 제51 포르망제 의용보병 연대와 지빌링엔 연대가 주 전선에서 빠진 것이 문제려나?
그렇지 주 전선!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방어전이 한창인 아넥시 쪽이다.
냉정하게 아넥시를 그냥 방어 거점 중 하나라고 치더라도, 이어서 밀고 들어올 적군을 더 남쪽으로 오지 못하도록 막아내는 게 중요하다.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아넥시 쪽 주 방어선에 신경을 쓰지 못하도록 신경을 돌린 것은 아닐까?
“앗! 혹시···.”
“콘도티에레?”
“혹시 적은 우리가 여기 병력을 파견한 사이 뭔가를 저지르려는 것은 아닐까?”
“네에? 동쪽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을 친다! 인가요오···.”
“설마 주 전선 쪽에 무슨 일이?”
“네에··· 아니요! 아직 보고된 바는 없네요.”
내가 본대로부터 받는 전황 정보는 약간의 시간차가 날 수 밖에 없다. 아넥시에 큰 이변이 있으면 본대를 통하지 말고 즉각 보고하라고 명령하긴 했지만 내가 이리 멀리 나와 있으니···.
갑자기 두려워진다. 이번에 상대한 적은 분명 보통이 아니다. 그렇다면··· 먼저 쳐들어온 주제에 적극적인 결전을 피한 방어적 병력 운용은 이를 고려한 것일지도···.
“에엣, 적이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벌인 작전은 아닐 거로 생각해요, 콘도티에레.”
“왜 그렇게 생각해?”
“네에, 만약에 그랬다면 이렇게, 싸우다 말고 홀라당 병력을 빼서 도망치지는 않았을 것 같거든요.”
그런가··· 내가 너무 깊게 생각해서 스스로 함정에 빠진 걸지도. 그녀의 설명이 계속된다.
“그렇잖아요? 만약 우리 신경을 여기에 묶어두고 있었다면, 서로 얻을 것 하나 없는 일진일퇴의 소모전을 계속하지 않았겠어요?”
“그것도 그렇네···.”
역시 첼레스티나는 명석하고 명쾌하다. 내 말을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니라, 조금 다른 방향에서 사건과 사물을 본다. 그리고 기탄없이 자기 생각을 말해주는 것이 고맙다.
확실히, 우리 신경을 끄는 게 목적이라면 계속해서 싸웠겠지. 지원군으로 기병대까지 불러 수적 우세까지 달성했으니 싸우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기든 지든 여기서 엉망진창으로 소모전을 벌인다면···.
성전군은 지키는 입장인 우리에 비해 수적으로 압도적이다. 그동안 기병대로 외곽을 돌면서 깎아낸다고 깎아냈지만, 여전히 거대한 대군이다.
그래서 가장 피하고자 했던 것이 생각없는 소모전이다. 거기 맞춰주다 보면 이미 한계까지 병력을 동원한 우리 블랑독 연맹군은 견딜 재간이 없으니까.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최소한 그런 목적으로 온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겠지.
“그리고오··· 콘도티에레, 하나 더 느낀 게 있어요.”
“뭔데, 첼레스티나?”
“적장이 누군지는 모르겠는데요··· 휘하 병력을 아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뭐? 그래? 아니 지휘관이라면 자기 병력을 당연히 아껴야지!”
왠지 이게 주제는 아닌 것 같지만, 꼰대같은 소리가 반사적으로 나왔다. 역시 하나 마나 한 소리는 하면 안 된다니까.
“네에, 그거야 그렇지만요. 하지만 뭐랄까, 우리가 처음 삼각주에 도착했을 때 버림 말로 던져준 떨거지... 순례자 보병들과 비교해서 분명히 아끼는 병력이 있다 느꼈어요.”
“흐음··· 그런 것 같기는 해.”
분명 그렇다. 적은 유난히 위험을 피하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병력을 맞부딪히다 보면, 적장의 생각이 가끔 느껴질 때가 있다. 진작에 병력을 뺀 것도 그렇고, 명백하게 느껴진 일관됨이다.
“그러니, 여기 투입됐던 병력은 적장에게도 나름 소중한 핵심 전력이 아니었을까요?”
“그렇지··· 용병은 전략적으로 승리하더라도 휘하 병력 손해가 너무 크면 용병일 계속 못하니까···.”
용병이란게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나쁜 이미지처럼 돈 많이 주는 쪽을 택하고 배신을 밥 먹듯 하는 존재는 아니다. 오히려 돈과 목숨이 엮였기 때문에 신뢰 관계는 깔끔하게 하고 간다 해야 하나.
군주에게 있어 봉신 관계로 맺어진 가신이 정규직이고, 용병은 잠깐 쓰다 버리는 비정규직이라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반대이다.
의무조항으로는 파트타임 솔저에 불과하고, 전쟁터에 묶어두려면 온갖 특혜를 줘야 하는 가신들만 데리고 전쟁을 할 수가 없으니 돈만 주면 원하는 만큼 데려다 쓸 수 있는 용병이 흥하는 것이다.
게다가 주종관계로 맺어진 의무로 전장에 나온 평범한 기사보다 배신하거나 도망쳤을 때 잃을 게 훨씬 많다고 할 수 있고.
가뜩이나 돈에 팔리는 도급업자인데, 신뢰마저 없으면 누가 고용해주겠나. 결국, 지금까지 쌓아온 커리어를 박살내는 짓이다. 이게 상당히 중요하다.
역으로 전쟁에서 졌다고 그걸 죄다 용병 책임으로 돌리는 경우는 잘 없다. 설령 졌다고 해도 충분히 잘 싸웠다면 그 점을 평가해서 오히려 주가가 오르기도 하니까.
···슈토르히 연대의 성공적인 커리어 시작도 탈탈 털린 전투에서 도망치면서 생긴 이상한 명성 때문이니까.
다만 아무리 신뢰할 수 있는 존재이더라도 결국 용병이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바로 휘하 병력을 희생시켜 전략적 승리를 추구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용병에게는 고용주와도 계약관계로 묶이지만, 부하들과도 계약관계로 묶이니까 말이다. 그러니 막대한 희생을 전제한 전술은 일종의 계약 불이행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부하들의 신뢰를 잃어버린 용병대장이 어떻게 되는지는··· 네그라타의 원주인이었던 알코자르 남작의 비참한 최후를 보면 알 수 있고.
“그래서, 더 괴롭히지 못하고 놔준 게 아쉽다는 거예요!”
“아, 그렇네! 더 후드려 패서 장사 밑천 털어냈어야 하는데!”
“맞아요오! 상대가 아끼는 병력이라면 더 못 참아요! 마침 강가이니 시체가 뜨지도 가라앉지도 못하게 북 로데브 강을 가득 채우고! 그럼 강물이 시뻘겋게 물들겠죠? 그걸 보고 간신히 살아 돌아간 패잔병들도 살아도 산 게 아니게 크나큰 정신적 충격을 안겨 줬어야 하는 건데요!”
“어··· 아니 그··· 첼레스티나.”
“그랬으면 다음 전투에 단체로 종군 거부하고 탈영병이 속출했겠죠? 그거 간신히 달래서 절반으로 줄어든 병력으로 전장에 나서야 할 테고요. 간신히 도살장 끌려가는 새끼 돼지 같은 표정으로 전장에 나와서는, 적을 보기만 하면 생각나겠죠? 동료들의 시체로 가득했던 북 로데브 강이요. 그럼 평소 실력의 절반도 안 나올 거예요!”
“...아니 그렇게까지는 좀···.”
“네에, 헤헤, 농담이에요, 콘도티에레.”
역시 첼레스티나의 농담은 묘하게 현실적이고 좀 무섭다니까. 목소리가 예쁘고 여상스러워서 더 무섭다. 그 막··· 살인마가 잡아놓은 희생자 귓가에 속삭이는 뭐 그런 거 있잖아.
그래도 첼레스티나의 말이 맞다. 한 번 싸워서 힘의 차이를 보여주면, 같은 용병단을 만났을 때 확실하게 우위에 설 수 있으니까.
오히려 불타는 복수심으로 칼을 갈고 왔을 수야 있겠지. 하지만 한번 맞은 상대와 눈 마주치기 힘들듯, 세상은 그런 식으로는 잘 돌아가지 않는다.
약간 찜찜함은 있지만, 일단 델레망드 삼각주의 방어전은 끝났다고 봐도 되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피해 복구도 겸해서 데리고 온 두 연대는 여기 방어 배치를 하도록 하자.
“그럼 제51 연대랑 지빌링엔 병사들이 아쉬워하겠네요···.”
“그게 아니야. 다음 전장은 더 북쪽으로 옮겨질 테니까.”
“네에··· 그런가요?”
“그렇다니까. 결국, 여기 배치한 수비 병력과도 다시 집결하게 될 거야. 우선은 사령부로 돌아가자.”
“네에! 콘도티에레!”
아쥬흐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은 미안하다. 하지만 아쥬흐는 부상병들을 돌볼 겸, 트랑카벨 영지 동쪽의 가신들을 만나고 갈 예정이라고 했다.
정말 전투 준비나, 전후 처리나 아쥬흐의 손이 안 닿는 곳이 없다. 최소한, 전투 도중이라도 신경을 쓰지 않도록 해 줘야지.
다시, 원래 전장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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꽈광!
“크윽!”
“괜찮아? 다친 사람 있나?”
“하 짜식들 매콤하네.”
흙먼지가 아넥시의 성벽 위로 내려앉았다. 몇몇 수비군이 일부러 여유를 가장하지만, 모두의 표정은 긴장이 역력하다.
“시팔! 저 대포 좀 어떻게···.”
“평생 쏴보라 해! 화약 낭비야 화약 낭비!”
콰쾅!
도발을 듣기라도 한 듯, 다음 포탄이 날아와 성벽을 때린다. 강렬한 울림이 웅크리고 있는 병사들의 어깨를 움찔거리게 한다.
“이거 큰일 났네···.”
방어 교회 사제, 요한 린데만 폰 아인푸르트가 성벽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포탄에 맞은 성벽을 살펴보더니 탄식을 내뱉는다.
“아이고오, 사제님! 위험합니다! 위험해요!”
“얼른 이쪽으로 오세요!”
대담한 모습에 놀란 민병들이 허겁지겁 요한 사제를 만류하지만, 겁이란 게 없는 사람처럼, 요한의 호언장담은 멈추지 않는다.
“하하핫! 제 머리통은 주신께서 허락하시기 전 까지는 부서지지 않습니다!”
“아이고, 사제님, 자꾸 그러시다가 주신님도 이놈 보라 하실지도 모른다고요?”
“그럼 그때가 제 머리통이 온전한 마지막 날인 겁니다!”
요한의 쩌렁쩌렁한 헛소리가 성벽 위에 울리자,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들린다.
긴장된 분위기가 조금이나마 풀린 것이긴 하나, 포탄이 끊임없이 성벽에 와서 부딪치고 있는 현실은 헛소리처럼 웃어넘길 수 없다.
“성벽은 좀 어떻소?”
“...아직은 괜찮지만, 솔직히 위험합니다.”
“허어! 얼마나 버틸 것 같고?”
“흐음··· 그걸 잘 모르겠다는 것이 가장 문제입니다. 이거 걱정되네요.”
그동안 아넥시가 잘 버텼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다. 좁고 방어하기 좋은 정면, 의외로 충실한 방어 준비,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은 사기, 자신들의 신앙을 핍박하는 성전군에 대한 강한 증오심까지.
하지만 요한 사제는 언제부턴가 파악하고 있었다. 적군이 공성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넥시 요새를 포위한 적의 숫자는 1만을 훌쩍 넘어간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공성전에 도움되는 병력은 많지 않았다.
결국 별로 넓지도 않은 성벽 전면에 육탄 공격을 하느라 희생만 누적시키고 있었다. 가끔 사다리도 놓기 힘든 측면 바위 언덕으로 접근하는 때도 있었으나, 소수의 경비 병력만으로 격퇴될 정도로 큰 의미가 없었다.
이건 아마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성전군이 우연히 공성전에 대한 지식도 없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남하하는 것은 아닐 것이란 말이다.
세상의 대부분의 ‘우연’은 알고 보면 누군가의 인위가 작용한 ‘필연’인 경우가 많았다.
수비군의 일원으로서, 요한은 확신했다. 분명 성 밖의 다른 아군이 이 공성전을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마도 트랑카벨 가문의 총사령관이라는 콘도티에레겠지. 요한은 그에 대해서 사실 아무것도 모른다. 마을 주민들도 몰랐기 때문에 이름조차 몰랐다.
그저 아는 건, 그가 ‘아넥시의 성녀’를 섬기는 신실한 사도라는 것과 수성전에 매우 유능한 미녀 부관을 데리고 다닌다는 정도일까.
하지만 그가 남긴 방어 계획서를 살피면서, 오늘까지 이어진 전장 환경을 보면서 그가 누군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는 전장을 넓게 보는 전략가가 분명하다. 게다가 공성전에도 매우 박식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렇게 철저하게 적군을 방해하듯 공성 부대만 쏙쏙 잘라먹지는 못했을 테니까.
그래서 확신했다. 아넥시 수비군은 외롭지 않았다. 당장 구하러 오지는 못해도 성 밖의 아군이 아넥시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포병대가 나타났다.
본래는 공성전에 쓸만하지는 않은, 야전에서 인마살상용으로 쓰는 게 적합한 소구경 야포들이다.
하지만 꽤 많은 숫자가 꾸준히, 성벽의 한 장소만을 때리고 있었다. 아마도 성 주변을 포위한 야전군들이 가지고 있던 야포들을 집결시킨게 아닌가 했다.
거기에 아넥시의 성벽이 언제 지어졌는지도 모를 고대 아란 제국 시절의 건축물이라는 것이 문제다.
물론 아란 제국의 건축물은 지금도 그 위용을 뽐내는 경우가 많지만, 당시에 이처럼 화약의 힘으로 발사된 쇳덩이가 연달아 때려대는 상황을 상정하고 만들지는 않았을 테니.
성벽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아마 성벽이 무너진 다음을 벌써 준비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요한 사제는 고민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