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185화 (185/556)

24-27. 제2차 아넥시 방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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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룬발트 동부 지방 특유의 털이 많은 말발굽이 아넥시 주변의 황무지를 디뎠다. 성전군에서 전위로 보낸 경기병들이다.

“저기다! 저기라고!”

“쫓아라!”

아넥시에서 북동쪽으로 몇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장소에서 적 기병이 발견되었다. 성전군이 파견한 500기 정도의 경기병들은 이 지역을 확인하고 가능하면 추적해 격퇴하는 임무를 안고 있었다.

“도망간다!”

“하아! 추격해!”

하지만 두 무리의 기병대는 서로 거리를 두고 밀고 당기기만 할 뿐, 전투는 벌어지지 않는다. 외부에서 접근해온 기병대가 항상 거리를 두며 도망쳤기 때문이다.

추격자 측에서 몇 번 신경질적으로 총을 발사했지만 100미터도 넘는 거리, 그것도 흔들리는 말 위에서 쏜 총이 명중할 리가 없었다.

추격자는 약이 올랐다. 적이 전속력으로 달아나는 것도 아니고, 잡힐 듯 말듯 애매한 거리를 유지하며 달아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기세도 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병력도 2배 가까이 많고 적을 추적하는 입장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룬발트 동부의 척박한 지역 출신들로 이루어진 기병대라 부유한 엘랑키아 인들을 죽이고 약탈할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어하지 않았다.

때문에 추격대는 말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상대도 이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속도를 올리기 시작한다. 추격대는 그 뒤에 바짝 따라붙는다.

추격에는 자신이 있다. 그들이 탄 말은 그룬발트 동부의 드넓은 초원을 달리던 야생마의 후예로, 지구력에는 정평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속도를 올려 따라잡지는 못하더라도 적을 지치게 하여 언젠가 따라잡아 도륙할 수 있으리라. 그러면 적이 걸친 질 좋은 갑옷과 무기, 값비싼 화약을 얻을 수 있다. 어쩌면 더 크고 좋은 군마나 두둑한 지갑도.

용병으로 고용되어 엘랑키아에 들어온 이후, 한 번도 활약할 기회가 없었기에 더욱 힘내서 달린다.

여기서 공을 세우면 더 남쪽의 전역에서는 선봉에 설지도 모른다. 그러면 말로만 들어온 풍요로운 남부 지방을 약탈할 기회도 얻을 수 있겠지.

사실 이들이 2선급 역할만 해온 것은, 포르망제 남작령 점령 과정에서 전투나 정찰 업무는 뒷전으로 약탈만 해댔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지만. 어차피 그런 사실은 머리에 남아있지 않다.

멀리 출정한 이상, 그만큼의 본전은 뽑아가지 않으면 안 되니까. 그들의 욕망이 말의 속도를 올린다.

타탕! 탕!

타타타타탕!

“윽!”

“으아아악!”

“어디냐? 전원 멈춰!”

전리품과 약탈품에 대한 즐거운 상상은 갑작스럽게 쏟아져 나온 총성으로 끊겼다. 좌측 외곽을 달리던 십수 명에 총에 맞아 쓰러졌다.

상당수가 혼란에 빠졌다. 누군가는 멈추고 누군가는 계속 달렸기에 추격 진형이 엉망진창이 된다. 여기저기서 갈 길을 못 찾은 말들이 제자리를 빙글빙글 돈다. 기수가 말을 제어하려 해도 놀란 말은 멈추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도 베테랑들은 반응한다. 전장에서 뼈가 굵은 장교들은 문제의 원인을 빠르게 찾아낸다.

“저쪽! 언덕 위!”

“총병인데? 대장 어쩌지?”

“쏘기 전에 잡는다! 이랴아!”

“돌격!”

반응은 빨랐다. 좌측 절반 정도가 완만한 비탈을 달려 오르기 시작한다. 규율이 잘 잡힌 정규군과는 또 다른 형태의 효율성이다.

베테랑 용병들은 알고 있다. 어차피 이 거리에서 총병을 만나 선제사격을 당했다면 즉시 도망치거나 적을 향한 돌격밖에 없다. 그런데 적이 얼마 안 된다면, 그만큼의 병력을 나누어 습격한다.

게다가 총병이 가지고 있는 장비는 꽤 비싼 편이다. 물론 온몸을 값비싼 무기로 치장한 귀족 기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총도 화약도 나름 돈이 된다. 게다가 소모품이기에 돈으로 바꾸기도 쉽다.

이런 계산 또한 전술적 판단과 동시에 머릿속에서 돌아가고 있다.

“우와아아아아!”

“싹 쓸어버려!”

게다가 총병의 수는 제법 되지만 아까 쓰러진 아군 숫자를 보면 명중률은 그다지 높지 않다. 이건 충분히 쓸어버릴 수 있다!

“가자아!”

“화약 쟁이 놈들 싹 다 죽여라!”

“히야아아아아!”

기세도 좋게 언덕을 오른 선두 기병이 발견한 것은, 생각보다 좀 더 많은 총병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익숙하지 않은 복장의 ‘보병’ 대열도 보인다.

분명 무릎까지 온 몸을 철갑으로 덮은 건장한 체구의 남자는 기병의 복장이다. 그런데 왜 말에서 내려 총병들의 바로 뒤에 서 있는 거지?

안타깝게도 선두 기병은 그 답을 알 수 없었다.

“전열 발사!”

타타타타타탕!

약 30여 미터 거리에서 나란히 늘어선 화승총구가 불을 뿜는다.

선두는 말에서 내린 용기병들이다. 화염과 연기, 그리고 뜨겁게 달구어진 납탄이 허공을 가르고 접근하는 경기병들을 덮친다.

생각보다 밀도 있는 사격, 게다가 거리가 30여 미터라는 짧은 거리. 돌격하던 기병이 멈추거나 다른 판단을 할 수 있는 거리는 아니다.

그리고 사람의 생각이 빨라 봤자 총알보다 빠르지는 않았다.

연기속에서 무수히 많은 기병이 말에서 떨어진다. 말이 놀라 날뛰거나, 상처를 입고 절룩거리며 엉뚱한 방향으로 달린다.

하지만 거기서 끝난 것은 아니다. 사격을 마친 용기병들이 그 자리에 앉아 장전을 시작하고, 대신 상체를 내민 것은 다름 아닌 ‘말에서 내린’ 총기병들이다.

용기병들의 1차 사격에서 살아남은 후속 돌격자들을 노리는 것은 이들 총기병들의 권총이다. 비록 사거리는 짧지만, 이미 30미터 안쪽의 근거리이다. 권총으로 사격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후열 발사!”

방금 용기병의 사격으로 뿌옇게 낀 화약 연기가 미처 사라지기도 전에, 권총에서 뿜어져 나온 납탄이 다시 한번 허공을 가린다.

연기에 연기가 더해져 뻑뻑한 하얀 벽처럼 아군과 적군의 사이를 막는다. 하지만 이 벽은 서로를 막아주는 안전지대는 아니다. 오히려, 무수히 많은 죽음의 흔적이다.

“사격 중지! 사격 중지!”

“사격 중지해!”

“멈춰! 사격 중지!”

다급하게 사격 중지 명령이 전파된다. 두번째 권총을 막 꺼내들던 총기병들은 명령을 듣고 격철을 올려 사격 대기 상태로 돌린다.

한창 전투 중에 갑자기 사격 중지 명령이 내려진 이유는 뻔하다.

더 이상 쏠 표적이 없는 것이다.

완만한 비탈에는 못해도 100여 기의 기병을 이루었던, 기수와 말이 누워 있었다.

“으··· 으으으으···.”

“크흐윽! 헉!”

낙마한 기병의 신세는 비참하다. 낙마의 원인이 되었던 상처도 있겠지만, 빠르게 달리던 말에서 떨어지면 보통 신체의 어디가 부러질 정도로 큰 상처를 입는다.

총상이든 골절상이든, 전장에서 다시 활동하기는커녕 살아남기도 힘든 상처이다. 부상한 기병들이 신음을 흘리며 꿈틀거린다.

비참하기로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탄탄한 가슴 근육이 총알을 막아준 것이 오히려 단말마의 고통을 늘리는 꼴이 되었다.

총을 두 발이나 맞은 말이 꿈틀거리며 움직인다. 피를 흘리며 억지로 일어나려 하지만 바닥만 긁는 꼴이다. 동부 대초원 출신인 이 말은 다시는 대지를 달릴 수 없을 것이다.

선두의 동료들이 참혹한 꼴을 당한 것을 본 후속 기병들은 더 이상의 돌격을 포기하고 말을 돌린다.

설령 돌격을 계속 이어가고자 하는 의미가 있다 해도 앞서 간 운 없는 동료와 그들이 탔던 말의 시체가 걸림돌이 된다.

기병의 돌격이 보병의 돌격과 가장 다른 점이다. 대단히 짧은 시간 동안만 이루어지고, 성공과 실패가 극명하게 갈린다. 빠르면 30초도 안 되는 시간 만에 실패가 확정되기도 한다.

게다가 실패한 돌격이 적진의 앞에 쌓아 올린 군마들로 이루어진 시체의 산은 후속 돌격을 불가능하게 막아 버린다.

보병의 돌격처럼, 적의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병력을 끝도 없이 밀어 넣어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총기병 승마! 총기병 승마아! 서둘러라!”

“달려라!”

“용기병은 재장전을 서둘러!”

전투는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장전을 마친 용기병들은 마치 총병처럼, 대열을 갖추고 적의 시체로 덮인 비탈을 천천히 전진힌다.

총기병들은 저 뒤편에 모아 놓은 군마로 달려간다. 용기병에게 부족한 ‘화력 지원’을 마쳤으니 이제 다시 기병으로 활동할 때이다.

“모두 준비됐나? 적을 포위 섬멸한다!”

“옛!”

말에 오른 총기병들이 힘차게 대답한다. 단거리를 전력으로 달려와 다소 숨이 차 보이기는 하지만 모두가 힘이 넘친다.

“그럼 가자! 사격은 자유지만 돌격 속도를 줄이지 않는다!”

“알겠습니다!”

총기병의 선두에서 호령하는 것은, 제31 정찰 기병 연대장 로베르 드 나뵈프이다. 콘도티에레의 명령에 따라 블랑독 북쪽 끝까지 나아가 후방 교란 작전을 마치고 귀환한 참이었다.

“돌겨억!”

“돌격!”

천천히 보병 대열을 갖춰 전진하는 용기병들을 우회한 총기병들이 무기를 치켜들고 달리기 시작한다. 그 반대편에서는 그들보다 한발 앞서, 적을 유인한 추격기병들이 돌입해오고 있었다.

간발의 차이로 도망칠 기회를 놓친 성전군 경기병들이 절망의 고함을 지른다.

이번에는 오히려 베테랑 용병들이 절망한다. 그들은 이 절대적 열세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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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군은 전위로 파견했던 정찰대의 패잔병으로부터 보고를 받아 그나마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적은 최소 1천이 넘는 기병과 비슷한 수의 보병이다.

또한 각종 화기로 잘 무장되어 있다.

전투에 능숙하며 끝까지 추격해왔지만 간신히 따돌려 탈출할 수 있었다.

정찰을 나갔던 500여 기의 경기병대가 절반 이하가 되어 간신히 돌아왔다. 지휘관급도 상당수가 전사했는지, 반쯤 정신이 나간 숙련 용병의 보고로 알 수 있는 것들은 저 정도였다.

“보병이 포함되어 있다니 단순한 별동대는 아닐 가능성이 있습니다!”

“최소 하나의 독립된 야전군 규모라면··· 걱정하지 않을 수 없군요.”

“적의 습격을 막을 계획을 세워야겠습니다.

아넥시를 포위한 성전군 사령부는 오늘도 어수선하다.

상석에 앉아 굳은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는 총책임자이자 총지휘관인 아르누아 루케 추기경은 별다른 말은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군사적 움직임은 군대를 이끌고 온 군 지휘관들이 협의하에 처리하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각국의 이름 높은 귀족, 영주, 성직자들이지만 의외로 심각한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기조를 정하는 것은 아르누아 추기경이었기에 애매한 부분은 추기경에게 판단을 맡겼기 때문이다.

때문에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는, 방어 준비는 큰 문제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내용이 문제다.’

발란트 디아모프 폰 잘렌펠트, 드라멜른 기사단에서 보낸 6천여 명의 파견대를 지휘하는 ‘기사단 집행관’은 혼란 속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서로 협력하고 하나의 목적을 위해 나아가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게 주먹구구식이라는 것이 문제이다.

한 명의 강력한 지휘관이 필요하다. 현재 지휘권에 대한 권위는 전부 아르누아 추기경에게 몰려있다.

하지만 아르누아 추기경은 지휘하지 않는다.

이건 장점이자 단점이 된다. 법황의 대리인이자 신앙의 전문가인 추기경은 전쟁의 전문가는 아니다. 그러므로 실무자들에게 전쟁을 맡기는 것은 나쁜 선택은 아니다.

문제는 본인이 필요하다 생각하는 부분만 개입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권위를 행사할 대리인이 없다는 점이다.

전자로 인해서 수많은 전술적 쟁점이 발생한다.

후자로 인해서 그 전술적 쟁점들이 비효율적으로 실행된다.

갑자기 작년, 블랑독에 선발대와 함께 도착했던 시기의 경험이 생각난다. 로데브 강을 건너려고, 여울목을 지키던 트랑카벨 군과 싸웠다.

당시에도 병력은 우세였으나··· 가장 큰 패인은 지휘체계가 단일화 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적군이 어이가 없을 정도로 아군이 아쉬울 부분만 골라서 공격한 점이라고 해야 할지.

물론 지금 분위기는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 성전군은 거대하며, 지휘관들은 협력적이고, 아넥시의 성벽은 붕괴 직전이다.

쿵, 쿵. 지금도 성벽을 때리는 포성은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성전군이 상대하는 적이 비교도 안 되게 약소하기 때문이다. 아르누아의 강한 의향에 따라 공성전은 그대로 진행한다. 그리고 나머지 병력이 외부 적의 공격에 대응한다.

손발이 잘 맞아가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아무것도 구체적이 아니다.

외부로 정찰대가 나가고는 있지만 보고는 산발적이고, 이를 종합해 분석하는 담당자가 없다. 결국 지휘부에 도달하는 정보를 그때그때 판단할 뿐이다.

게다가 지휘관들이 각자 나서서 휘하 병력을 이끌고 공격이든 방어 준비든 하기 위해 나서면, 이를 기록하고 책임지는 조직도 없다.

아넥시 포위를 담당한 병력을 제하고도 1만이 훌쩍 넘는 대군이건만, 그 대군들이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걸 담당할, 법황이 일부러 임명한 용병대장이 있었는데··· 본인도 욕심이 없고 특별히 배경도 없다보니, 한직 중 한직으로 밀려나 있는 판이다.

다들 어디선가 부지런히 뭔가를 하고 있지만 서로 그걸 알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래서는 필요할 때 전령을 보내서 병력을 동원할 수 없다.

공격하는 동안, 이기는 동안은 상관 없지만 조금이라도 불리해지면 이건 큰 약점이 될 것이다.

지원군도 있고, 분명 도와줄 의향도 있는데 지원군을 찾으려면 전령이 사방을 돌아다니며 묻고 다녀야 할 판이다.

물론 한시가 바쁜 전장에서 불가능한 일이다.

“발란트 경! 드라멜른 기사단은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그의 고민을 동료의 질문이 자른다. 몇 명의 무장들, 나름의 능력 있고 신뢰할만한 성전군의 지휘관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본 기사단은 일부 별동대가 외부에 나가 있습니다.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본진 주변을 지키고자 합니다.”

“오! 그러시군요. 그럼 전방이 될 북동쪽은 저희가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동료 지휘관들은 기뻐 보인다.

병력도 상당히 많고 교단 인사들 사이에서 위계도 높은 편인 드라멜른 기사단은 성전군의 누구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런 강자가 전장에 나서지 않는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자신들이 공을 세울 기회이다. 그러니 기뻐할 수밖에.

부디, 그 즐거운 착각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며, 발란트는 지도로 눈을 옮긴다. 자신만이라도 현 상황을 파악해 놓아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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