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 성녀 대 성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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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랑카벨 가문의 장녀, 아쥬흐 트랑카벨은 충실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바빴지만, 오늘은 다행스러운 일이 있었다. 2차 아넥시 공방전의 부상자들이 모두 안정기에 접어들었던 덕분이다. 처음 며칠 동안에는 매일 위독한 사람이 나왔지만, 다들 잘 이겨냈다.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제는 더 이상 혹시라도 밤에 부상이 악화될까 고민하면서 번갈아가며 쪽잠을 잘 필요도 없어졌다.
그녀 자신도 그렇지만, 의무대의 젊은 의사들과 간호사들도 총상 및 베인 상처 치료에 능숙해졌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사실 의무대 말고도, 트랑카벨 가문의 재무 담당자로서 할 일은 무궁무진하다. 가급적이면 조직을 잘 짜서 유능한 부하들에게 맡겨 두었지만, 그래도 직접 결정해야 하는 일은 있었다.
자신이 밖에 나와있어, 수시로 결재를 기다려야 하는 서기관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는 카르카냑의 집무실보다 의무대 막사를 지키는 쪽이 중요하다고 생각되었다.
잠을 줄여가며 해야 하는 고된 일이지만 이제는 슬슬 익숙해졌고 보람도 있었다.
다만 한가지 아쉬운 일은 있었다. 절대로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일이기에 마음 속에만 꼭꼭 숨겨두고 있는 일이지만 말이다.
바로 모처럼 물리적 거리가 멀지 않은데, 콘도티에레 에트와 함께하는 시간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함께 시간이 나면 느긋하게 차라도 마시면 좋을 텐데. 자신도 바쁘지만 콘도티에레 에트는 더 바빴다.
오랫동안 함께 지내본 바로는, 의외로 느긋한 성격이고 실수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유독 전투 준비만은 집착적으로 완벽을 추구한다.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말하자면 트랑카벨 가문의 ‘자산’이다. 한치의 불필요한 ‘손실’도 없이 칼 같이 운영해주는 것은 무척 고마운 일이다.
병사들은 단순 자산일 뿐 아니라, 트랑카벨 가문의 가신이며 백성들이기도 하니까. 이를 아끼고 완벽하게 이끌어 준다는 것이 반갑지 않을 리 없다.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일이다.
문득 계약서에 ‘매일 일정 시간은 아쥬흐와 함께 보낸다’라는 조항을 넣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부끄러워져서, 곧바로 머리속에서 지운다.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리. 게다가 만약 그랬다면, 콘도티에레 에트는 진지하게 시간을 지켜가며 업무를 수행했겠지. 그로 인해서 자신이 과로할 지경이더라도 참으면서 말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그러니, 지금도 힘내 일하는 사람에게 하기에는 너무도 부끄러운 생각이었다.
다만 전쟁이 끝나면 다시 한 번 생각을 해 볼 수 있지 않나··· 하는 미련이 남았고, 아쥬흐의 얼굴은 다시 한번 빨갛게 변했다.
갑자기 주변이 시끄러워진다. 진영 외곽의 물자 집적소에서 새로 전방으로 공급 된 물자의 목록을 보고 받던 차였다.
“아, 아쥬흐 대장님···.”
최근, 비번일 때는 반쯤 보좌관처럼 된 리타 드 리스바쥬가 불안한 얼굴로 막사로 들어온다.
“밖에··· 이상한 사람이 찾아 왔어요···. 블랑독의 성녀를 찾는다는 여자인데···. 성전군이 파견한 사절인가 봐요.”
“나는 성녀가 아닌데.”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아마도 자신을 찾아온 것 같다는 생각에 말을 잇는다.
“지금 콘도티에레 에트는 자리를 비우셨는데··· 본진 막사로 모셔줄래요?”
“그게··· 들어올 생각은 않고 문 밖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며 블랑독의 성녀를 찾고 있어요.”
“흐음?”
그래서 밖이 이렇게 시끄러웠나 보다.
“...쫓아낼까요?”
“아니에요. 제가 가보는 게 좋겠네요.”
마침 먼 장소도 아니었다. 그래서 별다른 의심 없이 나가자, 병사들이 경비를 서고 있는 문 밖에는 특이한 차림의 적 사절 일행이 모여있었다.
“당신이 트랑카벨의 딸인가요?”
어이가 없을 정도로 무례한 말이었다. 아쥬흐는 어색한 실소를 흘리며 상대를 살핀다.
이번 방문자는 10명 정도의 말을 탄 자들이었다. 모두가 범상치 않아 보이는 외형이다.
뒤에 늘어선 자들은 가죽과 금속으로 된 기괴한 가면을 쓰고 있다. 문득 보안과 비밀엄수를 상징한다는 철면은행의 가면이 생각났다.
하지만 이건 다르다. 일부러 보는 상대를 압도하고 겁박하기위한 의도가 뻔히 보이는 무시무시한 디자인. 밤에 갑자기 보면 비명이라도 지를 외형이다.
그에 비해서 복장은 얌전하다. 모두가 통일된 검은 색 수도복. 그 위에 철제 갑옷을 갖춰입고 있다. 그들이 탄 말역시 크고 혈통이 좋아 보이는 말들이다.
맨 앞에 선 것은 방금 그녀에게 무례한 질문을 했던 자이다. 일행 중 유일한 여자이기도 하다.
처음 봤을 때,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아무런 치장도 하지 않았으나, 세상에 이렇게 예쁜 사람이 있나 싶을 정도의 미녀였다.
매끄러운 검은 머리카락에 설화석고로 빚은 듯한 작고 하얀 얼굴. 그러나 그 얼굴에는 칼날과도 같은 냉엄함이 서려있다.
마찬가지로 별다른 장식이 없는 검은 수녀복을 입고, 철제 흉갑을 입었다.
수하들과 달리 얼굴을 가리지는 않았다. 다만 수녀용 베일 위로 철 조각을 이어 붙인 형태의 띠를 두르고 있어 투구 역할을 하는 모양이다.
대체 누구일까. 아쥬흐는 의문이 갔다. 자신은 이런 사람을 알지도 못했고 상대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쨌거나, 대답을 안 할 수는 없었다.
“저는 트랑카벨 자작가의 장녀, 아쥬흐 트랑카벨입니다. 성함을 여쭈어도 될까요?”
“저는 랑시아 아스트로메다. 모스탈 수도회에 신세를 지고 있는 보잘것 없는 구도자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법황 성하와 추기경단의 추인을 받은 ‘진짜 성녀’ 입니다.”
“아, 네.”
골치 아픈 대화가 되겠다. 부른다고 나오지 말 걸. 다년간의 경험으로, 아쥬흐는 곧바로 깨달았다.
“참칭성녀 아쥬흐,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차, 참칭성녀···.”
참칭이라니, 자신은 단 한번도 성녀를 자칭해본 적이 없는데.
“저는 어쩌면, 당신도 가엾은 희생자일지도 모른다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가끔 천벌을 받아 마땅한 이단자들이 그런 우상을 억지로 세우고는 하니까요.”
“....”
“만만하고 어리석은 시골 처녀를 꾀어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는 거죠. 하지만 그 실체는 무도한 이단자들의 노리개일 뿐이었으니!”
“...제, 제가 어리석을지는 몰라도···.”
“허나! 지금까지 조사해온 바, 당신은 이용당하는 쪽이 아니라, 오히려 이단들을 이용하고 있는 우두머리로 보이는 군요!”
아쥬흐가 뭐라 반박할 틈도 없었다.
“트랑카벨의 탕녀!”
“무, 뭐요?”
“미색으로 이단자들을 홀려 악마의 대열에 들게 했으며, 악마를 소환하여 반인반수의 존재에게 처녀를 바친 여자라는 소문이 있다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겠지요?”
“처, 처음 듣는···.”
“물론 과장된 바가 있겠으나, 아니 뗀 굴뚝에 연기가 나지는 않는다 했지요. 자신의 평소 행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진짜 성녀’의 말이 모두 완전한 거짓은 아니다. 그녀는 전쟁을 주도하는 트랑카벨 가문의 일원, 그 책임은 매일 아프게 통감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외에는···. 아쥬흐는 이빨을 깨물었다.
“회개하세요, 참칭성녀여. 이단자들에게 스스로의 정체를 밝히고, 그들의 집으로 돌아가게 하세요. 그것만이, 당신과 그 추종자들에게 화형대를 피하게 할 유일한 방법입니다!”
진짜 성녀 랑시아 아스트로메다가 선언하듯 말한다. 최소 천 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 대화를 듣고 있지만, 사방은 쥐죽은 듯 조용하다.
한동안 랑시아도, 아쥬흐도 더 이상 말하거나 대답하지 않는다.
“즉시 무리를 해산하세요! 그리고 주신의 이름 앞에 회개하여···..”
“랑시아 ‘진짜 성녀’님.”
“...?”
한참동안 가만히 있던 아쥬흐가 천천히 입을 연다. 언듯 보면 평소와 같은 목소리에 말투이다. 하지만 평소 그녀를 알던 사람이라면, 어딘가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도 알 수 있으리라.
“저는 성녀라 자칭한 적이 없습니다. 그게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오오, 그렇다면 즉시 회개를···.”
“하지만!”
반색하는 진짜 성녀의 말을 거칠게 자른다.
“제가 보호해야 할 백성들, 나의 병사들이 저를 어떻게 대하는지는 그들의 자유입니다. 만약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화형에 이르는 죄라면 저는 기꺼이, 화형대에 오르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말을 끊는다. 다음 순간, 그녀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주먹을 불끈 쥔다.
“원하신다면 언제든 와서, 저를 태워 보시죠! 내 병사들을 이길 수 있다면요!”
환호.
폭발과도 같은 환호.
분명 아넥시의 성벽을 절반이나 때려 부수었던 성전군의 포성보다도 거대할 환호.
시종일관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던 성녀 랑시아가 움찔할 정도의 엄청난 환호소리가 진영 안에서 터져 나온다.
랑시아가 찌푸린 얼굴로 마지막으로 뭔가 말하는 것 같으나 들리지 않는다. 환호 소리가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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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 몽세나 정찰 연대장, 로베르 드 나뵈프는 자신이 이렇게나 격정적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분노로 인해 머리에 피가 올랐다. 눈 앞이 붉어지고 귀에 이명이 들린다. 주먹은 너무 세게 쥐어서 감각이 없어진 지 오래였다.
자신이 원하는 말을 하기 위해서 몇 번이나 숨을 골라야 했다. 비로소 입을 열 수 있었다.
"아쥬흐 의무대장님. 만약에 명령을 내리신다면 곧바로 추격대를 편성해서...."
“아니요, 괜찮아요.”
그가 마음속으로 섬기는 성녀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서둘러 대답한다.
“그냥 전쟁 전의 흔한 야유인데요."
"하, 하지만!"
"정말 괜찮아요...."
하지만 보고 말았다.
평소에는 감히 마주 쳐다보지도 못할, 아쥬흐의 단아한 눈가에 붉은 기운이 도는 것을. 그리고 억지로 웃는 눈가에 눈물 방울이 맺힌 것을 말이다.
전부 자신의 탓이었다. 그의 주군은, 그의 자비로우신 성녀는 이런 모욕을 받아서는 안 되었다.
자신에게는 기회가 있었다. 뤼나메르 교차로에서. 몇 번이나 출전했던 북방 교란전에서. 바로 며칠 전의 아넥시 외곽에서의 전투에서.
적을 한 놈도 살려두지 않았다면, 감히 남쪽 방향을 통해 눈도 뜨지 못하게 철저한 공포를 가르쳐 주었었다면.
오늘 잘난 듯이 찾아와서 떠들지 못했을 텐데.
모두 그러지 못했던 자신의 탓이다.
지금이라도, 중대를 이끌고 쫓아가서 호위병들은 몽땅 찢어버릴까? 그 뱀의 혀를 가진 여자를 끌어다 블랑독의 성녀 앞에 무릎을 꿇릴까?
무단 행동으로 처벌을 받아도 좋았다. 작위와 명예를 잃고 군에서 쫓겨나든, 토굴에 갇히든 상관 없었다. 진심으로 그렇게 하고 싶었다.
"후후, 그리고 제 명령을 들으시면 안 되죠. 저는 그냥 의무대장인데요.”
"...맞습니다."
"저는 잠시 제 막사로 돌아갈게요. 별 일도 아닌데, 모두 해산해서 자기 업무로 돌아가게 해 주세요."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참은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자신같은 감정에 휘둘리는 어리석은 존재가 아니니까.
참자.
참자 참자 참자.
참으려 할 수록 울컥 올라오는 화를 간신히 가라앉힌다. 자신은 성녀의 검으로 살기로 혼자 맹세하지 않았던가. 자신이 분노할 때는 그녀가 분노할 때이다.
반드시 기회가 오리라. 그때는 자신의 목이 조각나는 한이 있어도 그녀의 명령을 수행하면 된다. 그래, 그럴 뿐이다.
조용히 맹세한다. 그가 섬기는 성녀의 적은 감히 블랑독의 땅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다음 전투에서, 반드시 전부 죽일 것이다.
"이런 시발! 뭐 저딴 년이 다 있어!"
"소금이 절여 죽일 년!"
"이 새끼들 진작에 조각내서 죽였어야 했는데!"
"다음 전투에서 두고 보자!"
자신과 비슷한 맹세를, 조금 더 시끄럽게 하는 병사들이 보인다. 분해서 가슴을 치고, 눈물까지 흘리는 병사들도 보인다.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도 그러니까. 빌어먹을... 간신히 억눌렀던 화가 다시 뚜껑을 열고 뛰쳐나오는 것 같았다.
"모두 자기 위치로 돌아가자. 성녀께서 그렇게 명하셨다."
"...예, 연대장."
모두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지을 망정, 명령을 어기는 자들은 없다. 자신들은 멋대로 행동하는 폭도가 아니다.
이 분노를 해방하는 것은 오로지 허락된 장소에서만이다.
그 와중에, 로베르는 자신이 처음으로 입으로 소리내어 '성녀'라 표현한 것을 깨닫지 못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