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 신에게 바치는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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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집결한 아군은 힘차게,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 북쪽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목표는 엘랑키아 동부의 도시, 타비뇽이다.
블랑독으로 침공해오기 전, 아르누아 루케 추기경이 본진을 두었던 장소이며, 성전군이 집결했던 장소이다.
현재도 성전군의 후방 보급기지 역할을 하고 있었고. 아마도 후속하는 성전군의 부대가 있다면 여기서 우선 집결하지 않을까?
여러모로 우리 블랑독 연맹군에게는 눈엣가시같은 존재이다. 말하자면, 조금만 더 패면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적군에게 계속 숨을 불어넣는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또 타비뇽을 공격할 수는 없었다. 지금도 대륙 최강의 권력자들 중 둘이라고 할 수 있는 법황과 엘랑키아 국왕을 적대하고 있다.
그런데 상황을 관망하고 있는 엘랑키아 동부의 영주들과 척을 질 수는 없으니 말이다.
사실 이들 입장에서는 전통적으로 이웃 지방이자, 더 남쪽의 변경인 블랑독에 크게 이권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전이 끝나면 다시 평소대로의 데면데면한 상황으로 돌아가겠지.
그러니 블랑독 연맹군의 활동은 블랑독의 영역을 벗어나면 안 된다. 이건 중요한 대전제이다.
적을 늘리지 말자는 것.
그건 그렇고 반성하자면, 2차 아넥시 방어전과, 이어진 대규모 회전의 대승리로 다소 미래를 낙관적으로 봤었다.
적군은 대병력을 상실했고, 함께 주도권도 상실했다. 아마도 어중이 떠중이 다 모인 성전군 자체에 대한 통제력도 상실했을 것으로 생각했다.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게 맞을 수밖에 없으니까.
전 병력의 절반이 순식간에 눈 녹듯이 사라졌고.
그 과정에서 얻은 아무런 군사적 성취도 없었고.
지금까지의 적이 계속해서 취해온 공세는 수세로 바뀌게 되었다.
이 공세에서 수세로 바뀌었다는 점이 상당히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여기에는 실질적인 점과 심리적인 점이 있는데···.
전쟁이란 단순히 강자들이 모여 대치하고, 승부를 벌이는 것이 아니다. 전투 자체가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는 있지만, 승패의 반 정도는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갈려 버린다.
그만큼 전쟁은 거대하고도 정교한 톱니바퀴들이 얽힌 장치를 돌리는 것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수 많은 톱니바퀴의 용도를 이해해야 한다. 닳거나 망가지면 다른 부위에 악영향을 미치기 전에 제거하고 수리해야 하며, 새로운 장치를 부가적으로 설치하기도 한다.
그런데 공세를 수세로 바꾼다는 것은, 이 극도로 복잡하고도 거대한 장치를 갑자기 반대 방향으로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언듯 생각하면, 어차피 맞아 돌아가던 톱니바퀴이니 반대로 돌려도 상관없지 않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니 뭐 실제로 그런 경우도 있긴 하고.
하지만 실제로 거꾸로 돌려보면 여기저기서 탈이 난다. 이미 한계까지 헐거워져 있었으나 티는 나지 않던 연결고리가 갑자기 풀린다거나 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전쟁에 참여중인 수 많은 조직에 반대되는 명령이 내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만 해도 가뜩이나 바쁠 사령부의 부하는 더욱 커진다.
그 와중에 정보 전달이 늦어, 공격이 취소된 집결지에 이르러 의미 없이 자살이나 다름없는 공격을 하게 된다거나. 받을 아군이 사라진 보급품을 기를 쓰며 적진 한 가운데로 옮기게 된다거나.
그 와중에서 알게 모르게 망실되는 톱니바퀴 조각들이 꽤 많을 수밖에 없다. 최악의 경우, 지금까지는 잘 돌아가던 장치가 갑자기 망가지기도 할 정도로 말이다.
다음으로 심리적인 부분은 좀 더 명확하다.
운동이나 작업이나, 열중한 상태에서 큰 부담없이 진행하다가 어떤 이유로 갑자기 힘들어진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가령, 등산 중에 곧 정상인줄 알고 힘을 냈는데 알고보니 정상이 아니었다거나.
오래달리기를 하던 중, 마지막 굽이인 줄 알고 신이 났는데 알고 보니 골인 지점은 더 가야 있었다거나.
이미 야근 중인데, 갑자기 추가적으로 일감이 들어와 퇴근시간이 많이 늦춰졌다거나···.
인간의 뇌는 참 별 것 아닌 이유로도 신체의 기능을 극도로 저하시키는 경우가 많다. 특히, 곧 보상을 받을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갑자기 몸에 몇 배의 부하가 걸리게 된다.
공세에서 수세로 전환하게 되는 것이 딱 이런 케이스이다.
전쟁은 기본적으로 괴롭고 고단한 것이다. 하지만 나름의 목표가 있고 희망이 있기에 버텨낼 수 있다. 그게 금전적 보상이건, 사회적 지위의 성취이건, 종교나 신념이건 말이다.
그런데 그 보상을 갑자기 없애버리는 일이니··· 정신적으로 큰 부담이 생기는 것은 당연했고.
무엇보다, ‘지금부터 우리 불리해졌다’ 라고 공식적으로 사령부에서 병사들에게 통보하는 것이나 다름 없으니 아주 큰일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기는 편에 서고 싶어하니까.
그러니, 슬슬 적의 전력이 바닥을 드러내고 사기도 고갈될 것이다, 라고 내가 예상한 것도 아주 근거가 없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구구절절 변명하는 것 같아서 속이 다 아프다마는.
문제는 랑시아라는 성녀의 등장이었다. 갑자기 우리 진영에 찾아와서는, 아무 죄도 없는 아쥬흐에게 떽떽거리다 돌아간 그 못된 여자 말이다!
여기 와서 저지른 공공연한 선전포고는 생각보다 반향이 컸다.
물론 아군도, 경애하는 트랑카벨의 장녀, 아쥬흐 트랑카벨이 봉변을 당한 것에 대해 분노했다.
하지만 적군은 그 수준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전까지 다소 느슨한 연합군에 가까웠던 놈들이, 훨씬 똘똘뭉쳤다는 것이 분명했다.
종교... 빌어먹을 종교.
제발 그냥 외롭고 힘들 때 슬그머니 힘이 되어 주는 정도로 존재하면 안되나?
대체 왜 으리으리한 대궐 같은 성전과 복잡한 교리, 그리고 순수성을 강조하는 폭력성이 필요한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새롭게 검은 성녀의 카리스마에 감화 된 성전군과의 싸움은 좀 다른 형태로 부담스러운 결과가 될 것 같아 걱정된다.
적이 알아서 퇴각하거나, 와해되어 스스로 무너질 것 같지는 않으니 결국은 싸워야 할 것 같다.
"콘도티에레! 아실 자작님의 별동대에서 전령이에요오!”
“어, 그래? 별동대에서?”
이제 든든한 지휘관이 된 아실은 이제는 손발이 잘 맞는 참모장이 된 모리츠와 함께 별동대를 이끌고 있었다.
휘하 병력은 보병 3개 연대에 기병 1개 연대. 결코 적지 않은 전력이다.
지금은 동부 해안 지대를 따라 올라가며 적의 잔당을 소탕하는 한편, 점령지를 해방시키고 있었다.
더불어 적 주력의 반응 또한 살필예정이다. 부족한 전력으로 갑자기 적 주력과 맞닥뜨리는 일은 없어야겠지만, 이를 위해 서로 부지런히 연락하며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다.
“네에··· 소수지만, 끈질기게 저항하는 적이 있다고 하네요! 피해는 크지 않지만, 죽음을 불사하는 광신도들이 늘었다고 해요···.”
“하아, 거 참 큰일이네.”
“네에, 그래서 조심하시라는 아실 자작님의 전언입니다!”
“그래, 조심해야겠다.”
예상대로였다. 아마도 아실의 별동대가 만난 적군은 조직적인 후위부대는 아닐 것이다. 제멋대로 진격했다가 퇴각 명령을 못 들었거나 그랬겠지.
아까 생각했던대로, 갑자기 톱니바퀴 장치를 거꾸로 돌릴 때 적응 못하고 장치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적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타비뇽을 향해 행군하기 시작한지 시간이 꽤 지났는데. 언제쯤 반응을 보여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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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방아쇠에서 손 떼! 기다린다!”
트랑카벨 영지군,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 소속 총병 소대장 얀 고티에는 부하들에게 외쳤다.
눈 앞에서는 적··· 으로 생각되는 무리가 달려들고 있었다. 누더기를 입고, 무기 쪼가리 같은 걸 가졌고, 산발한 꼴을 보면 거지 무리가 따로 없어 보이지만.
고함을 지르며 달려드는 적을 앞에 두고도, 얀과 제10 연대 소속 총병들은 의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조준!”
트랑카벨 영지군 총병 매뉴얼의 기본은 소대 단위 사격이다. 물론 필요에 따라서 연대 차원에서 사격 통제 명령이 내려올 때도있지만, 병사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보는 소대장에게 사격 권한을 준 것이다.
그만큼, 소대장인 얀의 책임이 무거웠다. 그가 잘 판단하지 않으면 귀중한 20발의 첫 일제사격이 그대로 허공으로 날아간다.
심지어 그의 소대는 사거리도 화력도 더 강한 중화승총 부대이다.
샹다메리 전투에서, 아군 기병 틈에 매복했다가 돌입해오는 적에게 기습적으로 일제사격을 날렸었다. 적의 기세를 꺾은 공로로 훈장도 받았다!
지금 얀의 옷깃에서 반짝이는 트랑카벨 은엽장이 그 결과물이다.
그때, 이 무겁고 사용하기 까다로운 완발식 방아쇠의 중화승총이 얼마나 강력한 무기인지 실감했다. 적군은 그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먼 거리에서, 더 크고 강한 위력의 탄환이 쏟아지자 당황했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강하고 정확히 날아가는 총이라고 해도, 총병들은 잊어서는 안되는 일이 있다.
가까이에서 쏘면 더 강하고 더 정확하다.
“조준!”
지금까지 하늘을 향하고 있던 총구가 일제히 달려오는 적을 향한다.
완발식 방아쇠에는 격철을 당기는 과정이 없다. 그 전에 일반적으로 사용했던 순발식과 다른 구조이기 때문이다.
순발식은 격철을 뒤로 당기고 고정했다가, 방아쇠를 당기면 격철이 떨어져 내리며 화문에 점화, 발사되는 구조이고.
완발식은 방아쇠를 당기면 그만큼 불 붙은 화승을 물고있는 격철이 움직이면서 화문에 가까워지는 방식이다.
나름의 장단점이 있었지만, 아주 약간의 힘으로 즉시 발사가 가능한 순발식에 비해서 사수의 실력이 좀 더 중요하다 느껴졌다.
“으아아아아! 이단자들을 죽여라!”
“주신의 군대를, 주신의 손으로!”
“와아아아악!”
적은 숫자가 얼마나 될까. 150? 200? 그다지 많지는 않아 보인다. 제대로 된 무장도 없이, 덮어놓고 달려오고 있었다. 내리막길이라 속도는빠르지만···.
적이 다가온다. 적정 사거리인 50미터는 이미 지났다.
하지만 조금 더 기다리기로 한다. 중화승총은 조준용 받침대가 있다. 좀 더 오래 기다릴 수 있다.
“우와아아아아!”
40미터. 조금만 더 끌어들이자.
타타탕! 탕탕! 이웃 소대들이 쏘는 총격음이 들린다. 부하들이 조바심을 내는 눈치가 느껴진다.
바보들, 원래 명품은 오래 기다려야 만들어지는 거야.
“발사!”
타타타타타탕!
좀 더 묵직한 발사음과 함께 눈 앞에 뿌연 화약 연기로 온통 가려진다.
Y자 형태의 받침대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한 무지막지한 반동이 어깨를 때린다. 밀착하고 있던 뺨도 따갑다.
“재장전! 혹시 적이 남았을지 모른다, 주의해!”
“예엡!”
얀도 베테랑이 되었듯, 그의 부하들도 모두 베테랑이 되었다. 여유있게 자욱한 연기 너머를 살피고 귀를 기울이며, 다음 탄약포를 찢는다.
설령 적이 접근할지라도 쉽게 대열을 내줄 기세는 아니다. 그러기 위해 흉갑도 입고, 투구도 쓰고 있다. 여차하면 백병전도 할 수 있으리라.
“으으으···.”
“크헉!”
잠시 후 바람에 총연이 날려 사라지자, 보이는 광경은 역시나 파멸적이었다.
총병대열의 앞은 100명이 넘는 적군의 시체가 빼곡하게 깔려있다.
중화승총으로 무장한 얀의 소대는 자신들의 전과를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남들보다 더 큰 총탄을 쏘는 그들의 사격은 상처도 훨씬 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어어어···.”
피가 울컥울컥 뿜어져 나오는 상처를 감싸쥔 적병의 팔이 이상한 각도로 꺾여있다. 총탄이 뼈의 절반과 주변의 근육을 동시에 날려버린 것 같았다.
그 외에도 말 그대로 머리가 터져서 내용물을 부채꼴로 흘려버린 적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봐도 두 명이 한 총탄에 뚫린 듯 나란히 누운 적도 보인다.
남들보다 강한 화력의 중화승총을 근거리에서 맞으면 이렇게 된다.
이게 그들이 가진 힘이었다.
멀쩡히 살아남은 적은 십여명이나 될까. 그들이 아직 덜 죽어서 비척대는 동료들의 모습을 보고 공포에 질려서는 오던 길을 되짚어 달려간다.
기세 좋게 달려오던 때는 내리막이었지만, 돌아가는 길은 오르막이다. 보잘것 없는 누더기만 걸친 도망자들의 등짝을, 총병들은 굳이 노리지는 않는다.
혹시라도 다른 적이 있다면, 저 따위 상대에게 총탄을 낭비할 수는 없다. 이번 경우에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케엑! 기병에게 붙잡혔네요!”
“머저리들이라니깐.”
도망치던 적을 측면에서 날카롭게 달려든 기병 중대가 덮어버렸다. 굳이 총까지 쓸 필요는 없다는 듯, 총기병들의 예리한 검이 번뜩였다.
창병들이 적의 돌격로를 제한하고, 총병이 일제사격으로 격퇴한다.
적이 전의를 잃고 대열이 무너지면 기병이 마지막으로 추격해 섬멸한다.
트랑카벨 군은 모범적인 잔당 토벌 전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콘도티에레 에트가 조합한 완벽한 병력에 완벽한 전술이다. 최소한 동급의 화력으로 부딪치지 않으면 흠집조차 나지 않는다.
“더 이상 접근하는 적은 없다! 전투 상황 종료! 모두 수고했다!”
중대장이 외치자, 아직은 긴장을 풀지 않고 있던 병사들이 함성을 지른다.
“이겼다! 이겼다!”
“트랑카벨! 트랑카벨!”
원래 보잘것 없는 상대이기는 하지만 압승이다. 기쁘지 않을리가 없었다. 오늘도 블랑독을 침공한 성전군의 일부를 또 신의 곁으로 돌려 보낼 수 있었다.
트랑카벨 영지군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는 신생 영지군 전체에서 최선임 부대이다. 그래서 공식적인 연대장이 아실 자작이고, 현재도 아실 자작과 모리츠 참모장의 직할 지휘를 받고 있었다.
그런 만큼, 주요 전투에서, 위험한 전투에서 적과 맞서 싸운 경험이 많았다.
이제 슬슬, 그들의 전투력은 ‘평범한 숙련병’에서 ‘정예병’의 카테고리로 넘어가고 있었지만, 그들 자신은 스스로의 성장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