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2. 마르사코르 언덕
“주신의 사랑받는 아들들이여!”
사각형 대열을 갖추고 선 보병들도, 중간 중간 서있는 종군 수사들도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볼 뿐이다.
랑시아로서는 처음 겪는 일이다. 이렇듯 많은 무장한 남자들이 자신을 묵묵히 바라만 볼 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다.
그녀가 이들을 만나는 것이 처음은 아니다.
아넥시 패전 직후 분산되었던 병력들을 재소집하고 성전군의 전투부대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많은 드라멜른 보병들을 만났었다.
그들 역시, 평범하게 그녀에게 환호했고, 그녀와 함께 기도를 올렸었다. 그녀와 손이 닿으면 감격해하며 그 자리에서 하늘에 감사하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마치 고개만 돌아가는, 돌과 나무로 깎아 세운 병정들의 인형을 보는 것 같다.
사람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지는 모른다.
아마도 이 향기와 영향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신에 작용하는 특수한 성분은 아닌 것 같다. 일단 그녀가 특별한 영향을 받고 있지는 않았으니까.
“존경하는 드라멜른의 기사들이여!”
그렇더라도, 성녀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기프트 발동의 신호, 하얀 빛이 그녀의 어깨 위에서 발하기 시작한다.
모두가 감탄하고, 때로는 성스럽다고, 때로는 아름답다고 칭송 받던 그 빛이.
“그대들은 주의 뜻에 따라 살 지어다. 영의 수족이 되어 행할 지어다. 대리인이 걸었던 길을 따를 지어다!”
“우리는 주의 뜻에 따라 살 거외다. 영의 수족이 되어 행할 거외다. 대리인이 걸었던 길을 따를 거외다.”
목석처럼 반응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다만, 더 느리고, 우물거리듯 말했을 뿐.
“우리는 간악한 이단자들의 함정에 빠졌습니다! 주신을 위해서, 신도들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들의 신앙을 위해서 싸워 주세요!”
콰앙, 하고 병사들이 세운 창 끝과 바닥을 부딪친다. 수천 명이 일제히 그렇게 하자 주변이 부르르하고 울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입을 통해 나오는 환호는 없었다. 성녀는 위화감을 느꼈다.
환호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조금 전, 출전을 앞둔 기도문을 읊던 그들의 말에 전혀 높낮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이 아니라, 악기나 기계를 통해서 만들어 낸 소리처럼.
허나 이것은 드라멜른 기사단의 일, 아무리 성녀라 해도 그녀가 관여할 일은 아니었다.
성녀는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기사단의 지휘관, 발란트 경에게 고개를 끄덕여 신호를 보냈다.
지켜보고 있던 발란트가 칼을 뽑아 하늘을 향한다.
“드라멜른 기사단! 감히 주신께 대항하는 이단자들의 군대를 분쇄하라! 앞으로!”
“앞으로오!”
“전군 앞으로!”
처억, 처억. 마치 한 몸이 된 것처럼, 전열 중앙의 거대한 사각 대형들이 언덕 가장자리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언덕 아래, 이단자들의 군대를 무찌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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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시작하는 건가!”
“설마 여기서 언덕 위가 보이시는 겁니까, 대공 전하?”
“아니 이런 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지!”
아소모 델 안프로니오 대공은 언덕 위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기운의 이동에 목 뒤가 저릿저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딱히 대단한 능력도 아니다. 사람이 있는 방과 사람이 없는 방은 느낌이 완전히 다르지 않은가. 용병으로 전장에서 오래 살면서 좀 더 감각이 날카로워졌을 뿐.
수천 명이 내는 소음은 멀더라도 기척이 느껴지게 마련이고, 수천 명이 내뿜는 강렬한 의지 또한 말로 표현하기 힘든 ‘여섯 번째 감각’으로 전해지게 마련이다.
‘갑자기 산불이 발생하여 병력과 보급품에 피해가 다소 있었으나 치명적이지 않음. 본군은 전면 공세 예정. 측면을 부탁드린다.’
방금 놀라서 헐레벌떡 본진에 다녀온 전령이 전해준 명령이다.
“우리는 본군이 공격하는 동안 여기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는다.”
“물론입니다, 대공 전하!”
호기롭게 외치며 분위기를 다잡는다. 주변 참모들과 하급 지휘관들 역시 단호한 표정으로 결심을 새로 하는 모습이다.
손해 보는 역할이다.
적의 증원 병력은 속속 도착하고 있고, 아군 증원 병력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걱정한대로, 명령도 듣지 않고 무모한 돌격을 재차 시도했던 병력의 태반이 녹아 사라졌다.
전원이 사망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단자 군대의 단단한 방어선을 몇 번 두드리다 스스로 붕괴해 사방 팔방으로 도망쳐버렸다.
이제 규합이 불가능하니 머리속 가용 병력 리스트에서 지워버린다. 그나마 추가적인 혼란을 일으키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이제 본군이 공격을 진행하는 동안,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몰라도 이곳을 사수하는 임무가 정해졌으니 버텨야 한다.
아마도 이제 증원은 기대할 수 없겠지.
애초에 지키려다가, 어쩔 수 없는 산불 때문에 시작된 공격이다. 아군이 유리할 리 없는데 따로 빼 둘 병력은 없을 것이다.
억지로 시작한 공격이지만, 그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은 전술가로서 공감하고 있었다.
역시 손해 보는 역할이다.
후퇴를 거듭한 끝에 이제 공간은 내줄 대로 내줬다. 시간을 끌 수 있는 수단은 사라졌으며, 오히려 숫자가 더 많아진 적군이 속속 포위망을 좁혀 다가오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전 전선에 걸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덕에 더 이상 포격이 날아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더 이상 공간을 내주고 시간을 벌 수 없다.
이제부터는 1분 1초를 버틴다는 것은, 부하들의 핏값을 지불한다는 것과 동의어가 된다.
아마 승리한다고 해도 화려한 승리의 주인공은 드라멜른 기사단이나, 라모리 사령관 휘하의 병력이 되겠지.
패배한다면? 그렇다고 부담이 덜한 것도 아니고. 어차피 퇴로도 없고 말이다.
선택지가 없다. 그래서 머리를 비우고 전선을 지켜내는 것만 생각하기로 한다.
설령 자신이 죽더라도, 안프로니오 대공가와 안프로니오 용병 연대의 이름은 더럽혀지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명분이 중요한 가문간의 전쟁이다. 성전에 나서 가주가 전몰한 영지를 침탈하려는 정신나간 가문은 없을 테니, 그의 자손들은 한동안은 안심할 수 있으리라.
가장 필요할 때 달려와 위험한 전장에서 싸웠던 안프로니오 대공의 이름을, 법황과 교단이 잊지 않아주기를 바랄 수밖에.
“전방에서 새로운 적이 접근합니다!”
“적의 신규 연대인가?”
“그렇습니다! 깃발은··· 검은 곰! 검은 곰의 문장입니다!”
“검은 곰이라···.”
갑자기 머리속에 오래된 용병 민족이 생각났지만 바로 생각에서 지워버린다.
검은 곰이든 하얀 곰이든, 적을 골라서 싸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든 상관 없었다.
무기를 부딪쳐 보면 정체를 알게 되겠지.
라모리 사령관, 부탁한다. 아소모 대공은 이를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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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굳은 얼굴로 망원경을 접었다. 이제 더 이상 필요가 없었으니까.
검은 옷의 대군이 천천히 다가온다.
평범한 부대에서는 보기 힘든 절도있는 모습이었다.
슈토르히 연대의 깔끔한 기동을 보고 있으면 소름이 끼칠 정도이지만, 그건 철저하게 효율적이고 유려한 움직임 덕이지, 저렇게 기계적으로 칼같은 동작 때문은 아니다.
왜냐하면 너무 칼같은 완벽하게 맞춘 동작은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장은 완벽한 평지도 아닐 뿐더러, 모든 전면이 적과 동시에 교전을 시작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커다란 사각 대형을 취했더라도 적당히 유연하게 움직이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번 적의 경우는 너무나도 칼같이 움직여 위화감이 들 정도였다.
“드라멜른 기사단과의 전투가 처음은 아니야.”
“네에, 여울목의 전투에서 싸우셨다고 전투 기록은 봤어요.”
“그때는 이렇게 대군은 아니었는데.”
용병으로 살면서 전장에서 흔히 만나는 군대는 크게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봉건제 하에 소집된 영지군을 중심으로 한 정규 군대.
돈을 받고 싸워주는 용병 군대.
종교 기사단이나 무장 수도회를 중심으로 한 종교 군대.
세 종류의 군대를 상대하는 방식이 극단적으로 차이가 나느냐, 하면 그건 꼭 그렇지만은 않다.
막 카테고리를 나누고 분석해야 할 정도로 격차가 크지는 않다는 것이고.
오히려 지휘관 특성이나 병종 구성 따위가 더 큰 영향을 미치는 법이지. 어느 군대라도 더 겁쟁이고, 그렇지 않고는 없다는 것이다.
다만 드라멜른 기사단은 좀 다르다는 것을 체험했지.
“저 녀석들, 약쟁이야.”
“...네에? 약이요! 약?”
첼레스티나가 소스라치게 놀란다.
“...무슨 약을 먹냐요? 성직자들이 그래도 되나요!”
“무슨 약인지까지는 잘 모르지만. 아니면 집단 최면일 수도 있겠지?”
나도 마약, 즉 향정신성 약물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뭐 종류가 제법 많고, 의외로 효과 효능이 다양하다는 정도만 들어서 알고 있다.
물론 의료법 의학적 기준 따위는 없는 세상이다. 현대 사회라면 소지만으로도 처벌받을 성분의 약재들이 피로회복이니 각성 등의 명목으로 잔뜩 사용된다.
주디칼리의 대학에서 최첨단 의술을 배워온 아쥬흐에게 물어봤었다. 진통제로 사용하곤 한다는 모양으로, 중독성이 있다는 것을 인지는 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런 판이니 피로 회복이나 단순한 쾌락 용도로 여기저기서 쓰이고 있다. 뱃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델레망드 뒷골목에는 아편 거리도 있다고 하니.
그럼 주신을 섬기는 교단 쪽에서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면, 당연히 금지이다.
아무리 막장인 교단이라 해도 약쟁이를 성직자로 쓰지는 않는다는 것이지.
그런데 과거에는 놀랍게도 일부 성사에서 사용되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일반 신도들이 모이는 성사가 아니라 수도사나 성직자의 위계를 올리는 등 특수한 상황에서긴 하지만.
처음 마약을 접한 자들은 이로 말할 수 없는 포근함과 행복함, 신비로움을 느끼게 된다는데, 이를 신에 대한 경험으로 치환하려고 했던 것인지.
그런데 이런 향정신성 약물이 만들어내는 기이한 각성상태, 즉 트랜스 상태를 만들어내는 데는 몇가지 방법이 더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최면과 열성적이고도 절박한 ‘기도’이다.
아마 드라멜른 기사단은 그런 요소들을 적절히 배합해, 현재의 상태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어쩌면 당사자들에게는 약을 한다는 의식이 없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여울목의 전투에서 포로로 잡았던 적병들이 그랬었으니까. 전투가 끝나고 깊은 탈력감에 빠지기는 했으나 금단 증상을 보이는 자는 없었다.
오히려 전투가 끝난 이후, 상당히 온순한 편이었으며 포로 교환을 통해 돌아갈 때까지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하지만 애초에 포로가 적었다는 이면의 이야기가 있다.
그만큼, 본대에서 이탈해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쉽게 항복하지 않고 저항한 자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단순한 종교적 열정인지, 아니면···.
애초에 마약으로 만든 각성 상태는 전투는 물론 모든 집단 활동에 부적합하다. 과하게 적극적이거나, 과하게 소극적이 되니까.
완벽한 훈련과 병과 간의 협동이 필수인 밀집 대형 전투에 약쟁이가 끼어 있으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지.
그러니 단순한 약에 취한 군대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냥 약에 취한 얼간이들이었다면 신성 그룬발트 제국 북방을 지키는 명문 기사단으로 오랫동안 살아남지도 못했겠지.
아무튼 종교에 미쳐서 정신이 나간 녀석들에게는 참교육이, 치료가 필요하다.
다소 물리적인 치료가 말이다.
“첼레스티나, 적이 언덕을 내려오고 있다.”
“네에, 콘도티에레!”
“포병 준비는 끝났지?”
“네에, 물론이에요, 콘도티에레! 언덕을 측면에서 살펴보면 중간이 움푹 파인 상태니까, 포격 시작 시점은 이렇게···.”
“잠깐, 말 끊어서 미안해. 그래도 첼레스티나의 실력은 잘 아니까 포병 지휘는 맡겨도 될까?”
“제가요? 네에! 맡겨만 주세요, 콘도티에레!”
“전령도 신호기도 필요한 만큼 써도 돼.”
“네에!”
첼레스티나는 뭐가 그리 기쁜지, 전령들에게 뭔가를 설명해 각 포대로 보내고는 자신은 신호용 깃발을 집어든다.
효율을 극대화하고 적의 공격으로 부터 포병대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고는 하지만, 꽤 먼 거리를 두고 포대가 나뉘어져 있기에 한 명이 통제하기 힘들 수도 있겠다.
거대한 검은 옷의 대군은 이제 완전히 언덕 비탈에 접어들어 내려오고 있었다. 내리막길이라 힘들 텐데도, 완벽하게 대열을 맞추고 내려오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전방에 배치된 우리 보병들도 준비를 완벽하게 하고 있었다. 언덕을 오를 일이 없어져서 다행이다.
괜히 적에게 기세를 살려줄 필요 없이, 최대한 원거리 화력으로 힘을 빼 놓고 언덕 아래에서 싸워 퇴각도 못하게 만들어 주마!
“자아, 준비이!”
보급품 상자가 쌓인 마차 위에서 들리는 소리다. 첼레스티나가 어깨에 둘둘 말린 신호기를 걸치고 좌우를 살피고 있었다.
아마도 각 포대로 신호를 보내려는 것이겠지.
장대를 어깨에 척 걸치고 좌우를 살피는 모습이, 마치 타석에 나선 타자 같기도 하다.
팔다리가 길쭉길쭉 늘씬한 미녀가 깃발을 든 모습이 마치 축제의 응원단장처럼 보이기도 하고. 아무튼 전쟁터에서는 이채로운 모습이다.
내가 이런 실례되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첼레스티나는 결코 일을 대충 할 사람이 아니다. 지금 그녀는 40문에 달하는 막강한 화력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녀는 현재 이 전장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간일지도 모른다. 평소에는 해맑게 웃어주기만 하는 눈이 날카로운 빛을 발하며 차근차근 다가오는 적을 주시한다.
그리고 펄럭, 하고 둘둘 말렸던 깃발이 풀려나와 바람에 날린다. 양손으로 깃발을 어깨 위로 치켜든다.
“발사아아!”
멀리까지 들리는 청아하고도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깃발이 아래로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