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8. 마르사코르 언덕
이런 아군과 적군, 기병과 보병이 마구 뒤섞인 혼전에서는 계급 고하는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통일된 지휘를 위해서는 빨리 적을 제압하고 혼전 상황을 벗어나야 했다.
중대장 콜테 다비에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로 옆을 파고 들어온 적 기병에게 달려들었다.
“허어억!”
적이 반대편을 보고 무기를 휘두르는 틈을 타서, 콜테는 단검으로 갑옷에 보호되지 않는 허벅지 뒤편을 마구 찔렀다. 걸쭉한 피가 터져나온다.
“이단자 놈이!”
“엿이나 쳐먹어 가면쟁이새끼야!”
기마 수도사가 뭐라 외치며 철퇴로 자신을 때리려고 했으나, 아예 바짝 달라붙은 자신을 공격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어차피 서로 대충 갑옷은 챙겨 입었다. 큰 동작 없이 치명상을 입히는 건 어려운 일이다. 휘둘러도 각이 나오질 않는 것이다.
퍼억!
“그으윽!”
애매하게 휘둘러진 철퇴가 정면만큼 두껍지는 않아도 철갑으로 보호 받는 등짝을 때렸다. 아팠다. 하지만 아까 총에 맞은 얼굴 만큼은 아니었다.
그러면서 무작정 단검으로 허벅지를 찌르고 또 찔렀다. 벌써 무뎌진 단검을 꽂은 상태에서, 허벅지를 잡고 훽 당긴다.
“으어억!”
“카악!”
땅에 떨어진 적과 함께 나뒹군다. 그러면서도 부둥켜 안은 적에게 찌르기를 멈추지 않는다. 몇 초 후, 적은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콜테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가면을 쓴 수도사는 움직이지 않는다. 난전 중에 가면이 반쯤 벗겨져 턱이 드러나있다.
죽은 게 맞는지 확인을 위해 억지로 가면을 벗기자, 옅은 갈색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 얼굴이 드러난다.
악마 같은 놈이었지만, 가면을 벗은 모습을 보니 악마는 아니었다. 오히려 번듯하게 잘생긴 청년의 모습이다.
그때, 중대 장교 한명이 그를 부른다. 긴 창이 방해가 되어 밀집 대형 안에서는 앞뒤로는 몰라도 좌우로는 사람이 오가기 힘들다. 때문에 장교는 몇 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중대장님 측면이 돌파당했습니다!”
“뭐라고?”
“우리 중대를 놔두고, 그 너머로 이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각 대형으로! 막지 못했다면 방해라도 한다.”
“옛, 중대장님, 이미 하고 있습니다!”
“잘했다! 우리 방어선 안쪽으로 넘어온 놈들은 살려두지 마!”
정면에서의 압박이 줄어든 이유가 이것이었다. 적은 어떻게든 대열을 뚫고 후방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었다.
잠깐 당황했으나, 그것까지 보병 중대장인 콜테가 막을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단단한 트랑카벨 군의 방어 대형은 한 겹이 아니다. 자신은 그 마개를 최대한 틀어막으며 뚫고 나가는 적을 최대한 방해하는 것이 임무였다.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른 아군이, 콘도티에레가 적을 격멸 시키고 다음 수를 둘 것임을.
아직 적은 남아있었다. 이대로 자신들이 무너진다면, 적은 돌파한 것이 되겠지.
하지만 끝까지 자신들이 버틴다면, 적은 돌파한 게 아니라 물린 것이 된다.
끝까지 물고 늘어져주마, 주변의 중대원들을 모아 사각 대형을 형성하면서 생각했다.
###
성전군 사령관 라모리 스텐던은 눈을 부릅뜨고 전장을 살핀다. 그의 부하들이 해내고 있었다.
두 군데 돌파구가 열리고 있었다. 단단하게만 보였던 적진에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우측은 신뢰하는 휘하의 보병 지휘관 자프론 푸코데무스가 지휘하는 보병의 공세로.
좌측은 성녀 랑시아가 이끄는 성전군 전체 기병대를 끌어 모은 혼성 기병의 공세로.
둘의 방식은 완전히 달랐지만 각자의 방식대로 적진을 밀어내고 있었다. 역시, 정직하게 연대 단위로 배치된 적군의 경계선을 밀어내는 것이 답이었다.
단단하게 고정된 판자를 통으로 부수는 것은 어렵지만, 연결부위를 비틀어 밀어내는 것은 비교적 수월하니까.
“라모리 경! 저희 부대도 공세에 참여해도 되겠습니까? 돌격대를 편성하여 마지막으로 전열을 붕괴시키도록 하겠습니다.”
“흐음···.”
옆에서 함께 전황을 지켜보던 기직스 마슈람 알메르타트가 간절한 표정으로 말한다.
돌격대란 주 전열을 편성하는 전력, 즉 창병을 제외한 나머지 병과에서 근접 부대를 편성하여 적의 약점을 타격하는 것을 말한다.
주로 총병과 당장 활약의 여지가 없는 기병 등을 모아 편성하게 된다.
적에게 접근하여 가지고 있는 화기를 총동원해 사용하며 돌격한다. 따라서 일시적으로 돌파구를 만들고 확대하기에 좋은 편성이다.
하지만 라모리가 망설이는 이유는 기직스가 최후의 예비대였기 때문이다. 물론 라모리 자신의 직속 병력이 얼마간 남아있기는 하지만 이는 1천 명도 되지 않는다.
예비대를 모두 소진해버린 지휘관은 전장의 방관자가 되어버린다.
유리할 때 추가 투입하여 전과를 확대하고, 불리할 때 추가 투입하여 전면적인 붕괴를 막아야 할 병력이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금 전력을 다 하지 않았을 때 미래는 있나? 라는 생각 또한 든다.
여기에 생각이 이르니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다.
블랑독을 다 뒤덮을 기세로 몰려든 성전군 수만 대군이 패배를 거듭하고 거듭하며 결국 이런 꼴이 되었다니.
자신이 너무 늦게 개입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이길 줄 알았고, 그 과정에서 허들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기회가 올 것으로 생각했으나···.
놀랍게도 성전군은 첫 허들에서 주력군을 통째로 날려먹으며, 라모리에게 온 기회는 반쪽짜리에 불과했다.
확실하게 이길 수 없다면, 법황에게 신뢰받은 용병으로서 의무는 다 해야겠지.
적군과 피투성이가 되어 부둥켜 안고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는 정도는 할 수 있으리라.
“좋다, 기직스 경. 총병의 절반과 창병의 사 분의 일을 돌격대로 편성해 자프론 연대를 지원하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즉시 준비하여 출발하겠습니다.”
이번에는 눈을 성녀 랑시아가 이끄는 기병대 쪽으로 돌린다. 역시 기병의 충격력이 가해졌기 때문인지, 더욱 전황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기병의 돌입을 뒤집어 쓴 보병들은 마치 기병의 바다에 떠 있는 섬처럼 몇 개의 사각 대형을 만들어 버티고 있었고, 일부 기병이 이미 적진 후방으로 돌입해 나가고 있었으니까.
상황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
적의 대열을 토막토막내고 지휘력을 상실시키면, 그 다음은 원하는 대로 되겠지.
###
“지원에 감사드린다 전해라.”
“옛, 자프론 경.”
전방에서 적진 돌파를 지휘하고 있던 자프론 푸코데모스는 전령을 돌려보냈다.
전방 지휘관은 그의 입장에서는 다소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자프론 연대는 느리지만 꾸준히 진격하며 돌파구를 열고 있었다. 여기 추가적으로 돌격대가 포함된다면··· 그 시간을 빨리 열 수도 있겠지만.
그건 적이 대책없이 후위에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을 경우에나 해당되는 일이다.
분명 적의 2선 예비대와 한차례 더 싸움이 벌어질 텐데, 기직스의 예비대는 그때 투입하는 것이 맞지 않나 라는것이 자프론의 판단이었다.
뭐, 그건 개인적인 생각일 뿐, 라모리 총대장이 그렇게 판단했다면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차피 평생 라모리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결심한 이상, 주어진 것 이상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전력이 늘어났다면 싫을 이유는 없다.
잘 써먹으면 될 뿐이니까.
“자프론 경, 지원 왔습니다!”
“잘 왔소, 기직스 경.”
얼마 지나지 않아 자프론은 동료 연대장인 기직스와 마주한다. 10살 이상 어린 청년이면서 자신과 동격이란 점에 조금의 거부감도 없었다.
어차피 용병이란 그렇다. 윗사람과 주변 모두에게 인정받으면 진급한다.
윗사람에게만 인정 받은 낙하산은 얼마 안가 밑천이 드러나 미움을 받게 될 것이다. 거기서 더 버티면 정말 뒤에서 찔려 죽을 수도 있고.
반대로 주변에서만 인정 받고 윗사람과 관계가 좋지 않다면 용병단을 떠나 독립할 수밖에 없다. 어찌됐든 월급 주는 사람을 거스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기직스는 그렇게 진급해왔고, 젊은 시절의 자프론도 그렇게 진급했다. 자신은 영 윗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해서 라모리를 만나기 전까지 고생을 하긴 했지만.
피차 그런 관계인지라 질투하고 견제하고 할 일은 없었다. 게다가 이 젊은 후배는 자신을 비롯한 동료들에게 무척 싹싹하게 잘 대했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전장으로 향하도록 하지. 귀관의 병력은 준비를 마쳤소이까?”
“지금이라도 투입 가능합니다.”
“그럼 공격중인 우리 중대의 중앙부에 공간을 낼 테니, 여기를 통해서 돌격하시오. 폭은 약 20미터에서 30미터가 될 테고, 적의 후방을 위협하기에 충분할 것이오.”
“알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자프론 경!”
작전 수립은 신속했고 이의는 없었다. 각자 자신의 역할을 할 뿐.
몇 번 전령이 오가고, 전방에서 싸우던 부대가 공간을 낸다. 당연하지만 적과 접해 백병전을 하는 상황에서 병력을 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자프론의 베테랑 용병들은 이를 쉽사리 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프론이 기직스에게 약속했던 돌파구가 생겨난다.
좁고 긴 회랑 형태의 공간.
거기에 자리 바꿈하듯 기직스의 기운 넘치는 병력이 들어간다. 창병들은 창을 버리고 근접 백병전을 위한 무기로 바꿔 들었고, 총병이 중심인 돌격대 병력이다.
타타타탕!
타탕! 타다당!
돌파구를 열기 위한 사격이 이어진다. 하얀 연기 속 총탄이 오가고, 이는 적군도 마찬가지다.
본래라면 선두 대열을 교대하면서 사격을 지속하겠으나 ‘돌격대’의 사격은 짧고 밀도 있게 끝난다. 목적이 달랐으니까.
“돌격 앞으로!”
“가자! 돌겨억!”
“우와아아아아아!”
돌격대가 쏟아져나간다. 적 측에서 총격이 이어져 몇 명인가 도중에 쓰러지지만, 상관하지 않고 후열이 끝없이 밀려든다.
횡대끼리 모인 힘싸움에서 이런 폭이 좁고 깊은 종심의 돌격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때가 있다. 특히 그것도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이었다면 말이다.
자프론은 적의 선두 창병 밀집 대형들이 이미 퇴각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기직스의 돌격대가 적의 후퇴를 유발했는지, 아니면 운 좋게 후퇴를 시작한 적을 추격하는 꼴이 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전공 다툼 따위는 애초에 할 생각이 없었다. 적 전열이 분명히 동요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기직스에게만 맡겨둘 수 없는 일이다.
“전령! 모든 중대에 적의 후퇴에 맞춰서 전진하도록 명령해라!”
“옛, 대장님!”
단순히 대열을 뚫고 일부 병력이 적 후방으로 빠져 나가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분명 적도 예비대가 있다. 그러니 큰 쐐기를 박아 다시는 닫히지 않도록 유지해야 한다.
전투 중에 전열이 토막난다는 것은, 실질적인 손실 이외에도 적군의 상황 파악과 명령 전달을 막는 추가적인 효과가 있었다.
병력 숫자나 화력이 부족한 아군 입장에서 피아가 마구 뒤섞인 혼전 상황을 만든 것 부터가 이득이다. 역시, 라모리 총대장의 지휘가 옳았다!
“라모리 대장, 적이 후퇴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착실하게 밀어 붙여라.”
“옛!”
적은 완전히 무질서한 것은 아니나, 일부 부대가 밀집 대형을 풀고 어지러이 도망치고 있었다.
명령에 의한 퇴각이라 할지라도, 적장이 전열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 판단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억지로 맞서서 버티다 전열이 붕괴되느니, 시간과 공간을 주고 병력을 온존하는 것이다.
“흠!”
자프론의 입가에 처음으로 비틀린 웃음이 걸린다.
이는 나쁜 판단은 아니다. 그러나 하필이면 자프론의 연대에 기직스의 돌격대가 합쳐진, 힘이 잔뜩 실린 상태였다.
적장 입장에서는 운이 없었지, 평소였다면 상식적인 안전한 선택이었을 판단이 최악의 선택이 되었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전진! 전진!”
“대열을 정돈해! 아직 전투 안 끝났다!”
밀집한 창병 끼리의 힘싸움에서 적을 밀어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기량면에서 적군을 완전히 압도했다는 것이며, 용병끼리 평생 자랑으로 삼아도 될 일이다.
덕분에 자프론의 휘하 병력 역시 기세가 크게 올랐다.
마치 개선식에서 행진하듯, 칼같이 밀집 대형을 갖춰 적이 밀려난 공간을 차근차근 점유해 나아간다.
“기직스 경에게 전령을 보내 돌격을 멈추고 보조를 맞추도록 전해라. 적 예비대가 눈 앞에 보인다.”
“알겠습니다!”
전령 또한 신이 나서 달려간다.
30미터 정도를 상정했던 돌파구는 이제 거의 그 두 배 정도의 너비가 되었다.
자프론이 보낸 창병들이 그 공간을 잡아 늘리고 있었고, 적군은 뚫리지 않기 위해 측방에 제2 전선을 만들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그 정도 너비라면, 아직 힘이 넘치는 후속 병력들이 뚫고 지나가 적의 배후에 전개하기에 충분한 공간이다.
그 앞에 적의 새로운 예비대가 황급히 대열을 갖추고 있었다. 병력은 1천 명 쯤 될까, 최소한 ‘이 국면’에서 만큼은 자프론의 연대가 유리하다.
새삼 라모리의 지휘가 대단하다고 느끼게 된다.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면서 적을 약화시킨 드라멜른 기사단의 보병들에게도 고마움이 느껴졌다.
이제는 자프론 자신과 기직스의 돌격대의 차례다. 이 예비대만 무너뜨린다면 적의 후방은 무인지경이 된다.
“적군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곧 교전이 시작될 것 같습니다.”
“으음! 화약은 충분한가?”
“옛, 아직 전투 한 번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괴롭겠지만, 병사들을 믿어본다. 적군이 다가오며 깃발이 눈에 들어온다.
“저건 무슨 깃발이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커다란 새를 그린 것 같습니다. 하얀 새 입니다!”
지금까지 싸웠던 적들이 내건 깃발과 다르게 초라하고 밋밋해 보인다.
아마도 정규군이 아닌 2선 부대라서 그렇겠지만, 그렇다 해도 만만하게 볼 수는 없다.
같은 순간, 최전방에서는 자프론의 선두 3개 중대가 힘차게 공세의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