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248화 (248/556)

30-4. 회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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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블랑독을 서에서 동으로 가로질러, 드 레뮤즈 백작가의 영토에 도착했다.

이렇게나 서두른 이유는 당연히 중요한 임무를 받았기 때문이다. 블랑독 연맹군의 대리 사령관으로서, 군사 관련 협상 전권을 위임받았으니까.

다만 트랑카벨 가문의 대리인은 아니다. 그렇다고 뭔가 특수한 독자적 권위를 지닌 것도 아니다. 특정 정치 세력의 외교적인 권한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다만 현 블랑독 연맹군의 사령권을 위임 받은 입장이므로, ‘연맹군의 외부 파병’에 대한 실무 협상을 진행할 뿐이다.

대외적으로야 어떻든, 블랑독 연맹군···과 그 맹주인 트랑카벨 가문은 오로지 방위 목적으로만 군사력을 사용하고 있었으니까.

내 임무는 이런 입장과 목적, 그리고 역할을 명확히 하여 외부에 널리 알리는 것이기도 하다.

말이 길었지만, 사실은 내가 맡기에 적절한 것인지 확신이 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내가 이 임무를 맡게 된 것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외교 업무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은 역시 아쥬흐겠지. 많은 대외 경험이나 가문에서 맡고 있는 일로 보나 말이다.

하지만 아쥬흐는 의무대 일도 맡고 있기 때문에 정말 바빴다. 특히나 몇가지 신경을 쓰고 있는 일들도 있었기 때문에··· 지금 자리를 비우기 쉽지 않았다.

특히 포로로 잡혀 큰 부상을 입고 인사불성인 법황청의 성녀를 살려내기 위해 치료를 거듭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무장 수도사들을 이끌며 선두에서 총에 맞은 모양이던데.

솔직히 꼴 보기 싫은 여자이긴 하지만, 확실히 살려내서 이만큼 가치가 있을 포로도 많지 않겠지.

그리고 아실의 경우는··· 첫 대외 업무로 나서는 것도 훌륭한 경험이 될 것으로 생각은 든다.

하지만 라몽 드 레뮤즈라는 속이 시커먼 능구렁이 앞에 혼자 내놓는 것이 좀 걱정된다는 것이, 아쥬흐와 나의 공통된 판단이었다.

귀한 동생일수록 너무 싸고 돌아서는 안되겠지만, 그래도 첫 임무가 그래서는 좀···.

그리고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 트랑카벨 영지군을 지휘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것은 아실 뿐이다. 군의 중심이니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애초에 내 지휘권이란, 아실에게 위임 받은 것이니까.

결국 함께 이야기를 나눠 내린 결론은 내가 가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노린 바가 없지는 않았다. 바로 제한된 권한만을 가진 내가 가면서 협상을 ‘군사적 협력만을 논의하는 자리’로 한정하는 부분이다.

현대의 외교라면, 동급의 외교관을 파견하는 것으로 급을 맞추는 식으로 대응하겠지만 그런 종류의 교과서적인 대응은 이 세계에는 없는 모양이다. 아마도.

그래서 현재로서는 외교적 주체는 블랑독과 연관된 두 명의 백작, 라몽 드 레뮤즈와 가스텔 드 누아이고 나는 거기 군사적인 내용을 조언하는 다소 애매한 스탠스가 되었다.

애초에 협상의 주체로 마주 앉기에 드 레뮤즈 가문과 트랑카벨 가문의 관계는 솔직히 너무 애매하다.

모두가 알고 있듯, 이미 이론상으로야 두 가문은 주종관계이다.

그러나 또한 모두가 알고 있듯, 실질적으로 남남이다.

그렇다고 이 괴상한 관계가 굉장히 오래 된 일도 아니다. 바로 현 트랑카벨의 주인, 아롱드 영감님이 젊은 시절 정립한 관계가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는 말이다.

아주 오래전, 트랑카벨 가문의 시초는 드 레뮤즈 백작가의 지방 관리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 넓기만 하고 척박했던 블랑독에 드 레뮤즈는 큰 관심이 없었다.

주군에게 버림받은 땅에서 차근차근 세력을 키우며 척박했던 토지를 개간했다. 외부 침입자가 있으면 격퇴하기도 하면서 성을 쌓기 시작한 것이 벌써 400년 전.

이제는 풍요로운 땅이 된 블랑독을 실질적으로 합병하고자 하는 역대 드 레뮤즈 백작은 당연히 있었다.

이에 트랑카벨 가문이 불합리한 주종관계를 타파하고 조상 대대로 발전시켜온 영토를 지키고자 했던 것도 당연했다.

양측의 싸움은 꾸준히 이어졌고, 이를 끝낸 것이 젊은 시절의 아롱드 트랑카벨이었다.

드 레뮤즈는 블랑독에서 군림하지 않으며, 트랑카벨의 영지를 인정한다.

트랑카벨은 더 이상 세력을 확장하지 않으며, 드 레뮤즈의 블랑독 종주권을 인정하고 그 권익을 수호한다.

이론상 주종관계, 실질적 남남.

그렇다고 서로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도 아닌 관계.

이 기이한 균형이 벌써 5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양측이 모두 이 관계를 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두 가문의 사이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다.

드 레뮤즈는 블랑독에서 경제적 이득을 얻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권위를 세울 수 있다. 또한 타국이나 다른 대영주 가문에 넘어가는 일도 없다.

트랑카벨은 드 레뮤즈라는 상전이 있기에 오히려 자유로울 수 있었다. 분쟁에 휘말리지도 않고 영지를 발전시킬 수 있다.

그게 이 기묘한 공존 관계이다.

실제로 양측은 이를 위해 일정한 노력을 해왔다.

가령 트랑카벨 가문은 멋대로 행동하는 것 처럼 보여도, 드 레뮤즈의 종주권을 훼손할 만한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봉건제도상 다른 주군을 섬기는 배신행위를 하거나, 영지를 외국에 넘겨 정당성에 흠집 가는 행동을 하지도 않았다.

한편 드 레뮤즈는? 물론 블랑독이 성전군에게 침공당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이는 봉건제도의 종주권과 무관한, 별개의 권위인 종교에 얽힌 별개의 사건이었다.

그 와중에 교단과 왕실에게 욕을 먹어가면서도 아슬아슬하게 중립을 지킨다.

이걸 박쥐 짓이라 욕할 사람이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만 생각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 덕에 트랑카벨 가문과 블랑독 연맹은 정치적인 부담을 덜 수 있었기 때문이다.

뭐 아무튼 의도야 어떻든 결과적으로는 그렇다 이거지.

어찌됐건 두 가문 모두 현재의 구도를 무너뜨릴 필요성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상황이 다소 변하기는 했다.

트랑카벨 가문이 심각한 위기, 이단 토벌 성전을 극복했기 때문이다. 그게 이 특이한 가문의 존재를 모두가 다시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나 할까.

원래부터 트랑카벨 ‘자작가문’은 상궤에서 벗어나는 존재였다.

하나 하나가 백작령의 핵심 거점이라고 해도 좋을 자작령을 4개나 가지고 있었으며, 상업으로 이룬 부는 작은 나라 수준이었다. 농지 중심의 중소 귀족이 이룰 수 있는 부는 절대 아니었지.

그게 지금은 법황과 국왕을 격퇴했다는 권위에, 이를 뒷받침하는 군사력까지 가지게 되었다. 전처럼 돌아간다고 해도 맘대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실질적으로 백작 이상의 작위를 받아 대귀족의 반열에 이르고, 정식으로 블랑독의 통치자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마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또한, 그들은 트랑카벨 가문이 승작을 원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는 왕실에서 카렐 경을 보내서 우리를 떠 본 점만 봐도 명확하다.

‘트랑카벨 백작 가문. 블랑독의 백작, 카르카냑의 자작, 벨모제의 자작, 델레망드의 자작, 몽세나의 자작, 라니오타의 통치자, 아넥시의 보호자.’

크, 가문 이름에 타이틀 줄줄이 달리는 것 봐라.

이게 멋짐이 아니면 뭐가 멋짐이겠어. 내 안에서 말라 죽어가던 제국주의자의 피가 부활하더니 손바닥을 쫙 펴서 허공을 향하는 경례를 하려 하잖아.

하지만 판도 뽕에 취하기 전에 분명히 해야 할 점이 있다.

지금까지 트랑카벨이 이룬 모든 것, 각종 이권도 장점도 무엇 하나 작위나 타고난 권위에 기대서 생긴 것은 없다는 것이다.

애초에 아롱드 트랑카벨 영감님도 그렇게 판단했기에, 그 정도에 선을 그었던 것일 테고.

내가 착안한 부분은 이 부분이다.

모두가 우리에게 원한다 생각하는 부분.

그리고 우리가 실제로 원하는 부분.

이 두 지점 사이에 생기는 괴리를 이용하는 것이다.

전투에서 활용하는 허점을 일부러 보여주는 전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적이 우리 약점이라 생각한 부분이, 실제로는 약점이 아니었던 것이지.

적이 우리 약점을 A라고 착각하게 하고, 슬쩍 양보하는 척 하면서 B를 챙기도록 하자.

좋다. 이론상으로는 완벽하다.

나는 그렇게 완벽한 이론으로 무장하고 회담에 임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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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이든 공작이든 마음대로 하시오.”

···계획은 분명 완벽했던 것 같은데.

“뭐든 상관 없소. 있던 작위를 확장하든, 독자적인 작위를 만들든 그건 왕실과 알아서 할 일 아니오? 그 망할 놈의 땅에 독립국을 세워 왕국을 자칭하는 것도 좋겠지.”

뭔가 회담이 초반부터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왕실에서도 사람이 와서 물어보고, 주변 귀족들도 난리더군. 허나 드 레뮤즈가 그걸 왜 막으려 들 것으로 생각하는지 모르겠소이다. 어차피 작위와 그 위계에 대해서는 왕실이 알아서 정할 일이지.”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은, 향후 블랑독 지방의 여러 가문에 대한 처우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시원하게도 ‘질러’ 버렸다.

“드 레뮤즈로서는 블랑독은 오랫동안 골칫덩이였소. 통치하지도 못할 쭉정이 권역, 현실적으로 수복할 가능성도 없다면 포기하는 게 맞겠지.”

아니, 아니아니··· 아니 이게 무슨 말이지.

이게 봉건시대 귀족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금화 한 쪽 안 나오는 땅이더라도, 판도상 증명할 수 있는 통치 권역이며, 거기서 나오는 권위는 막대하다.

각 나라의 군주들이 통치하는 변경 영지들이 대부분 그러니까 말이다.

세입의 일부를 중앙이 거둬들인다고는 해도, 척박하고 유지하는 것만으로 벅찬 지역에서 수입이 얼마나 나오겠나.

오히려 상황에 따라서는 돈이 더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군사비든 개발비든 말이다.

그럼에도 조상 대대로 내려온 왕국의 영토를 포기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자체가 조상들의 업적이고 가문의 권리이니까.

그런데 라몽 드 레뮤즈, 이 골때리는 백작은 그걸 쿨하게 포기한다는 것이다.

정말 괴물과도 같은 합리성이 아닐 수 없었다.

혹시라도 놀리는 건가, 속이려는 건가 싶어 라몽 백작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이런 젠장, 한결같이 벌레 씹은 표정이라 눈치를 살필 수가 없었다.

“라몽 백작님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야··· 우리 드 누아 역시 이의는 없소.”

함께 자리한 가스텔 드 누아 백작도 당황한 모양이다.

이로서 트랑카벨 가문은 가문의 위계를 올리는 승작에 아무런 걸림돌이 없어졌다. 물론 최상위 군주인 엘랑키아 왕실에서 인정을 해 주어야만이지만···.

뭔가 이상하다. 우리 입장에서 나쁜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원했던 것이 아니다 보니 혼란이 온다.

본래 통치자에게 영토 확장에 대한 집착이란, 마음을 좀먹는 열병과도 같다.

제국주의 시대, 열강들은 앞을 다투어 식민지를 만들고 세계를 지배하는 판도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사실, 대부분의 식민지는 국가의 권위를 세우는 것 외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적자 투성이 골칫덩이였다고 한다.

과거 농업 중심에 약탈 경제가 굴러가던 시절이면 몰라도, 경제와 산업이 발전하면서 그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미개발 식민지에서 종주국이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해 봐야, 천연자원이나 농작물 등 1차 산업 결과물에 교육받지 못한 단순 노동력 뿐이다.

여기서 생기는 이득이 국외 영토 관리 비용을 따라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식민지를 발전시켜 본토에 준하는 상태를 만든다면 경제적 가치야 생기겠지.

하지만 힘이 생기고 지식도 생긴 식민지민은 필연적으로 독립하려 한다. 이를 관리하기 위한 비용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애초에 단순 노동력이든, 천연자원이든 억지로 식민통치를 통해 뜯어내기 보다는, 평범하게 비용을 지불하고 무역을 통해 구하는 게 더 싸게 먹힌다는 것은 조금만 계산해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영토 확장에 대한 비이성적인 욕구가 이런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 넓은 식민지란 국가 자체의 권위이자 트로피였으니까.

인간의 몸 속에 흐르는 피 속에는 '제국'에 대한 본능적인 열망이라도 존재하는 것일까.

철혈재상이라는 별명을 가진 명 재상이 식민지 없이, 기술과 외교만으로 강대국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으나 결국 군주는 영토 확장을 원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오히려 중앙 정부의 자금을 끝도 없이 빨아들이는 밑빠진 독 상태의 식민지는 제국의 국력, 더 나아가 수명까지 갉아먹었다.

그게 제국이라는 허상에 마음을 빼앗긴 위정자들의 최후였다.

···그런데 라몽 드 레뮤즈 이 인간은 그렇지 않다.

그는 블랑독을 지배할 경우 관리 비용··· 단순히 금전적인 의미만을 의미하진 않더라도,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어떤 노력을 해도 절대로 온전히 드 레뮤즈 영지의 일부가 되지는 않을 것이란 사실 또한 알았다.

···나는 라몽 백작에 대한 평가를 수 없이 수정해왔고, 추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처음으로 ‘무섭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판단은 평범한 사람이나,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게 트랑카벨 측의 요구 사항이요?”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라몽 백작이 물어왔다.

“그건 아닙니다. 저는 애초에 트랑카벨이 아니라 블랑독 연맹의 군사 작전에 대하여···.”

“그래, 그렇겠지. 그럼 ‘진짜’ 안건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시게.”

“알겠습니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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