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250화 (250/556)

30-6. 회합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은 기습적으로 ‘나의 군대를 훈련하라’는 제안을 해왔다.

나는 상대의 진의를 알아채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비틀린 미소에서 벌레 씹는 표정으로 돌아온 라몽에게서는 아무것도 알아보기 힘들었다.

국가든 가문이든, 서로 긴밀하게 결속된다면 상호간 군사 교류는 당연하다.

블랑독 연맹이 처음 결성될 때도 그랬지.

블랑독의 군소 귀족령에서 제공한 군대는 트랑카벨 영지군에 소속되어 현재도 함께하고 있고, 드 누아 가문의 군대도 트랑카벨의 장교들이 훈련시켰으니까.

원래 우리 제10 카르카냑 연대의 중대장이었던 기즈 드 콜롬브는 그게 인연이 되어, 드 누아 가문에 의해 위촉되어 남부 연대를 지휘하고 있을 정도고.

하지만 드 레뮤즈와 트랑카벨이 그렇게 긴밀한 관계라고 할 수 있을까.

솔직히 아직은 애매하다 생각한다.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훈련을 맡긴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상당한 신뢰가 없으면 힘들기 때문이다.

똑바로 훈련시키지 않고 아무것도 못할 쭉정이 군대로 만들 수도 있고.

전투력이나 구성 등 모든 정보가 적나라하게 노출 되는 것 아닌가. 핵심부에 남의 가문 사람을 꽂아놓게 되는 것이니.

반대로 내 쪽에서도, 병력 육성과 편성에 대한 노하우를 전하게 되는데··· 사람에 따라서는 이걸 꺼릴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나야 별 생각 없지만.

라몽 백작은 이런 점들을 모두 고려해서 말하는 것일까.

나는 지금까지 동맹과 고용주로 꽤 많은 귀족들을 만나봤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기 군대를 남에게 맡기고자 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그러니··· 라몽의 진의가 의심되는 것이다.

“아인멜츠 경의 말에 의하면, 그대는 상당한 기량의 지휘관인 것 같군. 그 뿐 아니라 트랑카벨의 군대를 단기간에 일신한 것 역시 그대의 역할이었나?”

“그건 그렇습니다만··· 약 1년여의 준비가 있었기에···.”

“그럼 드 레뮤즈의 군 역시 그렇게 만들 수 있겠군.”

“아니 그게 시간이 좀 있어야···.”

“비용이나 권한이 필요하다면 맡기지.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야겠고.”

“하··· 그건 맞는 말씀이긴 하지만···.”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생각해보면 훨씬 까다로운 요구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다.

이번에 트랑카벨의 입장은 ‘조건 제시해보고 조건 안 맞으면 손 떼자’는 절대로 아니니까.

갑의 입장 같지만 갑의 입장이 아니다. 역으로 상대측, 라몽 백작이 ‘싫은데? 꼴박 할건데?’ 해버리면 이쪽도 좋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여러모로 아쥬흐, 아실과 함께 고민을 해봤다.

하지만 현재 엘랑키아 남부를 둘러싼 현 상황을 타파하려면 드 레뮤즈와의 동맹은 필수 불가결이라는 결론이 났다.

작위나 영향력 같은 정치적 이유 뿐 아니라, 군사력이나 경제력도 말이다.

“저도 부탁드립니다, 에트 경.”

한참 듣고만 있던 라몽 백작의 군사고문, 아인멜츠 피노르 폰 자이트리츠가 말한다.

“드 레뮤즈 가문의 가신과 기사들은 훌륭하신 분들입니다. 갑작스러운 개전에 놀라면서도 백작 각하의 소집에 응해 달려오셨지요.”

봉건제도에서 군주에 대한 당연한 의무··· 라고 하기에는 이게 잘 안 지켜지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자면 주군이 신통찮다거나, 도저히 이길 각이 안 보인다거나.

물론 대놓고 거부하면 반역이고 자신도 모든 권위를 잃겠지만, 그 흔히들 있지 않은가. 몸이 아프다거나 하는 핑계 대면서 계속 늦추는 그런 거.

하지만 드 레뮤즈 가문의 소집령은 매우 잘 이행되고 있다고 나도 알고 있다. 덕분에 전쟁준비는 무사히 잘 되고 있다 한다.

이는 라몽 백작이 평소에 가신들에게 어떻게 대우받는지 알 수 있는 증거기도 하고.

“하지만 엘랑키아 남부는 꽤 오랫동안 평화로웠기에 준비가 잘 되어있지 않습니다. 의지는 있지만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에 가깝습니다.”

“라솔과의 전쟁도 한 세대 이전의 일이니···.”

“저도 어떻게든 준비를 돕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각자 출신과 지역이 다른 영지군들을 하나의 강군으로 연성하는 것은 역부족입니다.”

“음···.”

처음 트랑카벨 영지군을 재편성할 때가 생각난다.

병사들은 전쟁을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농부 출신이 대부분.

기사들의 인식은 몇 세대 이전의 전쟁 지식에 멈춰있었다. 마상에서 창을 버리고 총을 들어야 한다고 말하자 폭동이 일어났었지··· 하아.

그때는 가신단의 큰 어른, 톨마르 마슈레 영감님이 직접 능숙하게 총을 다루는 모습을 보여주었었다. 반은 달래고 반은 윽박지르며 말을 듣게 했던가.

그 결과로, 지금은 대륙 어디에 내놓아도 부족하지 않은 훌륭한 군대가 되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내가 확신을 가지고 진행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바로 지도자들이 개혁에 강한 의지를 가지고, 솔선수범할 준비가 되어있었다는 것.

그리고 위에서 아래까지 모두가 고향과 가족, 주군과 신앙을 지키겠다는 결심은 확고했다는 점이다.

나는 그 열정과 힘의 방향을 잘 맞춰준 것이지, 절대로 바닥부터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어느 누구도 그건 불가능하다. 흠, 신이라면 가능할지도.

그 성공 공식을 드 레뮤즈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솔직히 모르지. 알 리가 없잖아. 일단 라몽 백작, 이 인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다고.

원래 한 명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독재 시스템의 장점은 윗대가리가 똑똑하면 전체가 잘 돌아가지만, 반대인 경우가 훨씬 많다는 거니까.

특히 개혁을 다른 사람에게 맡길 때, 뭐는 진행하고 뭐는 진행하지 않는 가치판단에서 문제가 많이 생긴다.

극도의 비효율 끝에 하나마나한 애매한 결과물이 나오는 경우도 흔하고.

많은 비용과 시간이 투입되었음에도, 똑바로 역할하지 못하는 절름발이 군대를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후우··· 계속 한숨이 나올 것 같지만.

하지 않는다고 대답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다. 적어도 군사고문으로 그 ‘자이트리츠’ 출신의 아인멜츠를 앉혀 놓았다는 건 고무적인 일이고.

자이트리츠는 그룬발트 황제 외의 주군을 섬기지 않으며, 대신 가문의 구성원들을 훌륭한 군인으로 배출하는 데 온 힘을 쏟는 것으로 유명한 집안이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하니 여러 개의 단기 계획을 세워 급한 순서로 하나씩 이행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방식에 대해서는 그대들에게 맡기지.”

라몽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공수표에 얼마나 속았던가. 하지만 지금은 믿는 수밖에.

나는 가스텔 드 누아 백작에게도 말한다.

“드 누아 가문에도 교관 파견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오오, 우리가 도움이 될 게 있는가?”

“네. 현재 드 누아 보병대에 파견된 기즈 드 콜롬브 경은 아주 훌륭한 훈육 장교니까요.”

“아아, 기즈 경 말인가! 가능하면 영지라도 줘서 우리 가신으로 삼고 싶은 남자지. 아쉽지만, 트랑카벨의 신하니 돌려드려야겠군. 더 필요한 게 있으면 말만 하시게.”

이 초로의 백작 역시 아쉬움을 토로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무척 기분이 좋아보인다.

하긴, 블랑독 연맹이 처음 생길 때도 라몽 백작이 함께하면 좋겠다 말하기는 했었지.

“아인멜츠 경, 전령들이 필요합니다. 카르카냑에 손이 빈 교관들이 있을테니 바로 불러와야 하거든요.”

“넵! 뭐든 말씀해주세요.”

이 젊은 용병 장교 역시 무척 기뻐보인다.

우리 슈토르히의 선임 중대장, 루트비히도 까다로운 녀석이지만 손발이 잘 맞았었지. 그 사촌은 어떨지 모르겠다.

어차피 하기로 한 동맹, 더 말도 안되고 어거지인 요구가 나올 수도 있었는데 이 정도면 다행이지.

동맹군이 강해지는 건 우리에게도 이득이니까.

한동안 또 바빠지겠네. 트랑카벨에서도 할 일이 남아있으니 오래 머물 수는 없으니 전부 사람을 뽑고 서면으로 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 분기탱천한 라솔 군이 국경을 넘을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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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솔 왕국, 중북부의 도시 마르제로는 좌우에 두 개의 강을 끼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이다.

육로와 두 개의 강을 통한 수운 모두 이용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도시를 둘러싼 성벽 외에도 모두 일곱개의 거대한 수문이 도시를 지키고 있기에, ‘수문의 도시’ 라는 별명도 있었다.

그리고 도시 한가운데의 거대한 ‘마르제로 대성전’은 대륙에서 손꼽히는 거대한 성전이다.

모두 아홉 명의 라솔 군주들이 심혈을 기울여 국고와 사재를 털어 증축, 개축을 거듭해왔다. 덕분에 마르제로는 물론, 라솔을 대표하는 대성전으로 알려졌다.

이 대성전의 뒤편에 딸려있는 수도원의 조용한 안뜰에 면한 작은 기도소에서는, 라솔 최강의 권력자 두 사람이 만나고 있었다.

바로 라솔 국왕 리오고.

그리고 타라트라바 공작 크루사다 틴토 데 타라트라바.

두 사람은 현재 공식적으로는 각자의 궁정에 머물고 있었다.

“그럼, 리오고 폐하께서는 저희 타라트라바에게 총알받이를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곱슬거리는 검은 머리를 가진 젊은 크루사다 공작의 말투에서는 분노와 경멸이 느껴졌다.

“그건 아니오. 라솔 왕국이 나서려면 다소 시간이 필요하며, 타라트라바도 보조를 맞춰 주었으면 한다는 것이지. 허나, 귀국이 원한다면 먼저 움직이면 지원하겠다는 것이오.”

자신의 나이 절반도 되지 않는 젊은 공작의, 사자의 포효와도 같은 분노 섞인 말을 리오고 국왕은 자연스럽게 받아넘겼다.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번에 엘랑키아에서 비겁하게 참살당하신 에드메르 각하는 제 장인이시기에 앞서 폐하의 친동생이 아니십니까?”

“그렇소. 내 입장에서도 왕실 일원의 죽음이오. 그러니 더더욱 경거망동 할 수는 없소.”

“하지만···!”

크루사다 공작은 목구멍까지 나온 말을 다시 집어 넣었다. 리오고 국왕은 감정 없는 눈으로,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본다.

원래 라솔과 타라트라바는 사이가 좋지 않다.

오죽하면 라솔 인이 타라트라바 인에게 수염 모양을 칭찬하자, 그 타라트라바 인은 수염을 깎아버렸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을 정도니까.

그만큼 사소한 것 조차 딴지를 걸지 않고는 못 버티는 감정의 골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현 국왕 리오고는 인정머리가 없는 인간으로 유명했다. 오죽하면 라솔 왕가를 이어주는 것은 가족 사이의 정이 아니라 공포라고 할 정도.

그래서 친동생의 죽음에도 즉각 복수에 나서지 않는 것에도 불만이 많았다.

다만, 직접 만나 대화를 해보니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인간, 뱀과도 같이 냉혹한 리오고는 동생의 죽음을 ‘기회’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오늘 공식적으로는 만나지 않은 것 아닙니까. 폐하께서 속내를 말씀해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속내라니··· 무엇을 말씀하시는 거요.”

크루사다는 아직 가슴속에 남아있던 분노를 꾹꾹 눌러 진정시킨다. 뱀을 상대하는데 화를 내서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제 아내가 슬퍼하고 있습니다. 아버님이 엘랑키아의 음모에 빠져 돌아가셨으니까요. 그 복수를 위해 군을 동원하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바라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따로 원하는 것?”

“이스키비르 유역의 비옥한 농토입니다. 지금 엘랑키아의 차지인 그 곳이지요.”

“호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던 노회한 국왕, 리오고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아마도 상대가 이렇게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폐하께서 직접 나서시지는 않고, 저를 앞세우고 싶어하신다 느꼈습니다. 다른 분도 아니고 리오고 폐하시라면, 달리 생각하시는 게 있어서 그렇겠지요?”

“흠···.”

“그냥 말씀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원하는 방향은 같지만, 바라는 보상이 다르다면 타라트라바도 협력하겠습니다.”

젊은 공작의 말에, 늙은 국왕은 생각하는 듯 눈을 감는다.

라솔 왕국과 타라트라바 공국.

두 나라는 군신관계이다.

그러나, 협력할 때보다 경쟁할 때가 더 많다. 오죽하면, 양국의 통치자는 서로의 혈연을 섞지 않으려고까지 할 정도니까.

한 명의 군주에게 통치받는 것을 신하들과 백성들이 못 견뎌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비공식 회담 역시 주군과 신하의 모습은 전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앙숙지간일지라도 조건에 따라 협력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라솔 왕국으로서는 전쟁이 아직 이르다 판단하고 있소.”

“어째서입니까?”

“지금 전쟁을 해도 본질적으로 이단 토벌 성전의 연장이오. 엘랑키아 남부의 일부 지역을 영역에 둔 분쟁일 뿐이지.”

“그 정도만 합병해도 큰 성과가 아닙니까?”

“물론 그렇소. 허나···.”

순간 크루사다는 목 뒤의 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방금 마주 앉은 리오고에게 느낀 것은 도저히 인간의 기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국왕의 친동생의 죽음’이라는 명목은 단 한번만 쓸 수 있으니까 말이오.”

동생의 죽음조차 ‘유용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은 실로 ‘마성’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마 크루사다 자신은 죽었다 깨도 세상을 그런 식으로 보지는 못하겠지.

“직접 나서기에는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 라고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그건 관점에 따라 다를 것 같소.”

소름이 느껴지고, 턱 아래에 식은 땀이 흐른다. 그의 주군은 실로 괴물이었다.

소년의 나이에 후견인도 없이 왕실에 던져져 권력을 잡으려면 이런 인간이어야 하는가.

상대에게 느껴지는 인간적인 혐오감.

그리고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절대적 포식자에 대한 공포와도 비슷한 감정 때문에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진정시킨다.

자신은 공국의 통치자이다. 상대가 아무리 마왕이라 한들, 나라를 지키고 권익을 수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좋습니다. 그럼 타라트라바가 앞장서겠습니다. 상대가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이니, 격도 맞겠습니다.”

“그렇게 결정하셨소이까.”

“폐하께서는 어떻게 도와주시겠습니까?”

“음··· 하류 주둔군을 빌려드리겠소.”

“허허···.”

크루사다는 자기도 모르게 바보처럼 웃었다. 놀랐고, 기뻤기 때문이다.

그렇게 곧바로 나올 정도로 사전에 계획을 다 세워놓은 국왕에게 놀랐고.

이스키비르 하류 방위를 책임진 정예군을 선뜻 빌려준다는 것에 기뻤다.

‘빌어먹을···.’

좋든 싫든, 자신은 이 뱀 같은 국왕이 미리 깔아놓은 계획대로 움직였고, 앞으로도 움직일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조만간, 공식적인 자리에서 뵙겠습니다.”

보여줄 것을 보여주고, 받을 것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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