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289화 (289/556)

35-12. 생뢰르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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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열을 정돈해!”

“흥분하지 마라 애송이들아!”

“훈련대로 하자고! 말 머리 나란히 하고 명령을 기다려라.”

장교들이 대열을 정돈하기 위해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세습 귀족 출신 기사가 아닌, 지주나 종사 계층 신병들이 적지 않게 섞여있는 특이한 구성의 부대였기 때문이다.

“정말이군··· 아군이 위기에 처해 있어···.”

소베트르 드 랑두제는 신음소리와 함께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는 현재 라몽 드 레뮤즈 백작 직속의 기병대장으로서 중기병이 2200기, 경기병이 900기라는 총 3천 기가 넘는 대규모 기병을 이끌고 있었다.

그리고 막 지금은 완전히 비어 버린, 서부군 대열의 오른쪽 끝에 도착한 참이다.

갑자기 사령부에서 최후방에 위치한 자신에게 전령을 보냈을 때는 상당히 놀랐다.

아직 그들이 ‘지원’할 예정이었던 드 레뮤즈 보병대가 위기에 처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차례가 벌써 올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전령이라는 사람이, 왠지 별볼일 없는 자신을 항상 깍듯하게 대해주는 라몽 백작의 신임받는 참모 아인멜츠 경이었다.

그는 다급하게 서부군이 위기에 처할지 모르니, 즉시 우측 끝으로 이동하라는 참모장의 명령을 전했다.

혹시 비어버려 걱정되는 후방은 트랑카벨의 기병대를 보내 반드시 책임지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 시점에서 서부군 방향에는 아직 큰 문제는 벌어지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우익에서 돌격해나간 서부군 기병대는 절대적으로 우세해 보이기까지 했으니까.

‘문제가 없다면 그건 그거대로 괜찮습니다. 참모장께서 책임을 지실 일입니다. 다만 지금은 최대한 빨리 우익으로 향해 주십시오’

아인멜츠 경이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더라도 명령을 따르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자신은 작위까지 자식에게 물려준 늙은 몸, 라몽 백작이 자신을 기병대장으로 임명했으니 죽기 전까지 헌신하겠다는 생각이었고.

그러니 라몽 백작이 만든 지휘체계를 따르지 않을 이유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명령을 내린 주체인 참모장··· 트랑카벨의 콘도티에레가 얼마나 무서운 인간인지에 대해서는 그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잠시 풀어져 있던 부하들을 닥달해 대열을 갖추고, 한달음에 달려온 게 지금 상황이다.

구석구석 지휘관의 명령과 의도를 전하고, 부대를 정돈해 그 짧은 거리를 주파하는 사이, 전장의 상황은 완전히 변해버렸다.

기세 좋게 돌진해 나아갔던 서부군의 기병대는 라솔 보병과 마구 뒤얽혀 난전을 벌이고 있었다.

말이 난전이지, 돌파를 목적으로 한 엘랑키아 군의 의도는 처음부터 완전히 실패한 것이다.

게다가 라솔 놈들은 함정을 판 것인지, 측방에서 천 명 이상의 기병대가 접근해 후방을 사격하고 있었다.

같은 기병대장으로서, 자신이 저 부대를 지휘하고 있다면 어떻게 했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저런 혼전 상황이라면 부대 통제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을 텐데.

거기에 기병의 후방 공격까지 받게 된다면 외부의 도움이 없다면 살아 나오기는 힘들지 않을까.

외부의 도움.

아, 외부의 도움이 있었다.

자신이 3천기가 넘는 기병대를 이끌고 온 이유가, 바로 그 ‘외부의 도움’이 되기 위해서이지 않은가.

“시간이 없으니, 병력 배치를 새로 할 수는 없소. 지금 행군해온 순서 그대로 전진하며 양 측면으로 전개하도록.”

“알겠습니다, 소베트르 경.”

“내가 선두에서 부대를 이끌 테니, 귀경은 후위에서 혹시 모를 상황에 대응하도록 하시오.”

“명령 받들겠습니다.”

“명심하시오, 우리는 적을 격멸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위기에 처한 아군을 구하러 왔소!”

“알겠습니다!”

휘하 기병장교들은 모두 소베트르 ‘전’ 남작을 깍듯하게 대한다.

가문의 격으로 따지면 블랑독 끝자락에 손바닥만한 남작령을 가진 드 랑두제 가문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명문가의 자제들이다.

아마 교육도 더 잘 받았고 재능도 뛰어날지도 모른다. 자신이 더 위인 것은 나이 뿐이라 생각하니 실소가 나올 정도였다.

그들이 소베트르를 모시고 따르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권위는 잠시 빌린 것이며, 원래는 라몽 백작의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아주 잠시 빌려 쓰고, 그것도 드 레뮤즈 가문을 섬기기 위해서만 사용하고 돌려 드려야 하는 권위라 생각하니 항상 조심하게 된다.

생각해보면 작년부터 평생토록 겪어보지 못한 일들만 발생했다.

무언지도 잘 모르는 이단의 무리가 갑자기 블랑독에서 창궐했다.

지금도 어리석지만, 실로 머저리였던 당시의 소베트르는 이들을 탄압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저질렀고, 이는 소요사태를 만들었다.

소요사태는 거대한 사건이 되었고, 마치 들불처럼 번져나가 영지 관리에 문제가 생길 정도였다.

이단자들이 탈출했나 싶더니, 어디서 기사도 연합이라는 자들이 나타나서 자신을 사령관으로 앉히고 군대를 일으켰다.

말이 사령관이지, 오만방자한 귀족 놈들이 자기네 마음대로 사고를 치고 싶었을 뿐이었다.

명분 뿐인 사령관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들은 통제를 떠났고 자기네 마음대로 행동했을 뿐, 아무 실권도 없었으니까.

처음으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본 주군,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이 자신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던 게 생각난다.

그야 한심하게 보였겠지···.

그렇게 등 떠밀려 나선 전장은 여울목의 전투였다.

블랑독 남부의 트랑카벨이라는 자작 가문이 감히 이단의 편을 들어 라몽 백작에 대항해 군대를 일으켰다던가.

기사도 연합의 군대에 무슨 그룬발트 출신의 기사단까지 합쳐 아군이 훨씬 우세했다.

아무리 오합지졸이라도 당연히 이길 줄 알았지.

하지만 일방적이고도 처참하게 패했다. 이론의 여지 따위는 전혀 없었다. 재빠르게 후퇴라도 하지 않았으면 전멸했을 것이다.

지휘권을 온전히 발휘 못했다··· 기사도 연합이 말을 듣지 못했다···.

전부 핑계일 뿐. 어차피 뭘 해도 안 됐을 것이다.

무엇을 예상하고 무엇을 행동해도, 상대가 머리 위에 있는 듯한 가슴이 철렁하던 기분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트랑카벨 군대를 이끄는 것은 콘도티에레라 불리는 인물이라고 했다. 실로 공포의 대상이었지.

···그래서인지 같이 라몽 백작을 섬기는 입장이 된 지금에 와서도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를 못하겠다.

물론 나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라몽 백작은 어쩐 일인지, 무기력함을 절감하고 작위까지 물려준 채 은둔하려던 자신을 불러 기병대장으로 앉혔다.

왜 자신을 발탁했냐 물었더니, 트랑카벨 가문에 깨져 본 인간이라도 앉히는 게 낫겠다 대답하더라.

그리고 왠지 항상 자신을 존중해주고, 과대평가해주는 고마운 젊은 친구인 아인멜츠 경 역시 동료로 만날 수 있었다.

게다가··· 공포의 대상이었던 트랑카벨의 콘도티에레는 지금 에트 참모장이 되어 자신을 지휘해주고 있었다.

아무리 해도 극복할 수 없었던 공포가, 이제는 자신을 보살펴주고 있다는 묘한 기쁨.

그래, 처음부터 자신이 뭔가 대단한 것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자신보다 뛰어난, 위대한 인물들의 명령을 똑바로 수행이나 하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게 쉰이 넘은 나이에 새롭게 깨달은 소베트르 전 남작의 마음가짐이었다.

잠시 한숨을 쉬고 주변을 둘러보자, 기병 장교들이 모여있었다. 준비를 모두 마치고, 명령만을 기다리는 굳은 표정.

검을 뽑아 하늘로 들어 올렸다가, 그대로 어깨 높이로 내리면서 명령을 외친다.

“전진!”

“전지인!”

“전진! 전진!”

돌격 신호와는 확연하게 다른 낮은 나팔소리가 부대 전체에 울리고 기병대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부대 전체와 오랜 시간 같이해온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마치 수족처럼 소베트르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

여울목에서의 오합지졸 기사도 연합과도 다르다.

이들은 자신의 목숨을 소베트르에게 맡기고 있다. 그러니, 소베트르 자신도 목숨을 충성스러운 부하들에게 맡기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굳이 적을 공격할 필요는 없습니다. 갑자기 기병 3천이 나타나면 적은 그 의도를 두려워하며 무언가 반응을 할 것입니다. 그 사이에 서부군 기병들을 구해서 돌아오시면 됩니다’

전령으로 온 아인멜츠 경이 전해주었던 트랑카벨의 콘도티에레가 했다는 가이드이다.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그 공포의 대상이었던 콘도티에레가 내린 명령이니까, 그대로 하면 되겠지.

착착착,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는 드 레뮤즈 기병대의 말발굽 소리가 듣기에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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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런··· 하아···.”

라솔 왕국군 이스키비르 하류 주둔군 사령관, 퀸토 로르카 데 페니베라다 변경백은 아쉬움의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다 잡았다 생각했는데··· 이걸 고기가 그물을 빠져 나가는 꼴을 볼 수 밖에 없겠군. 이런 걸 뭐라 하지?”

“죽 쒀서 개 줬다가 적당하겠습니다.”

“그래, 죽 쒀서 개 줬군. 하하하.”

참모장 아드리아니 루코 데 가르자의 신랄한 표현을 따라 말하면서, 퀸토 변경백은 마지막 미련 또한 한숨과 함께 내보냈다.

“추격은 금지한다. 아직 전투는 초반이고, 적 기병은 나중에라도 딸 기회가 있겠지.”

“예,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변경백 각하.”

“으음, 아쉽긴 아쉽구만.”

치밀한 함정을 팠다고 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무수히 세웠던 가상 플래느 중 하나가 계획대로 잘 돌아갔다.

전방에서 가열하게 적을 몰아붙여 기병부대로 하여금 ‘뭔가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안긴다.

그리고 약점을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보여준다.

패배한 척, 도망치는 척의 전문가인 할콘 남작의 기마 용병대를 좋은 조건으로 영입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뭐 그게 아니더라도 엘랑키아의 기사들은 예상대로 매우 강했다. 이걸 대응하기 위해 몇 년을 준비해 왔지만, 코루냐 연대도 자칫하면 위험했고.

이 많은 카드를 사용하면서 그만큼의 가치는 있었는가?

조금 전까지는 그랬다. 엘랑키아 기병의 대부분, 그것도 중장기병이 몰려있는 주력군을 아군 진영 측방으로 끌어내서 두들겨 팰 수 있었으니까.

10분··· 아니 5분만 더 있었어도 적 우익 기병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철저한 파괴를 안겨줄 수 있었다.

포병이 미리 좀 더 준비되었다면 어땠을까. 우회하기 위해 무방비하게 이동하는 적들에게 산탄 한 번 씩만 날렸어도···.

하지만 초반에 도발과 퍼포먼스성이 짙은 포격전을 하느라 포병의 준비가 미흡했다.

이대로 끝까지 적을 물고 놔주지 않는 방법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저 새로 나타난 엘랑키아 기병들이 달려 든다면, 혼전은 규모만 커진 채로 계속 될 것이며 코루냐 연대와 타라트라바에서 빌려 온 기병대 역시 복구 불가능한 피해를 입을지도 모른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미련없이 포기하게 되었다.

잠시 양자를 머리속의 천칭 위에 올려보았으나,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일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직 전투는 많이 남았다. 빨리 끝내고 싶어도 끝내지 못할 전투가.

그나저나 적 기병은 어떻게 기막힌 타이밍에 저기 나타나게 되었을까. 참모들의 보고에 의하면 최후방에 위치해 있다가 갑자기 이동해 간 것으로 보인다.

만약에 적이 이런 상황을 예상해서 미리 병력을 이동시켰다면?

설마··· 그렇지는 않겠지.

이동 명령이 내려지는 시점에 엘랑키아 기병들은 이기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보이도록 할콘 남작과 코루냐 연대의 마티오가 노력하고 있었다가 맞는 말이겠지만.

지금도 적지 않은 타격을 입힌 것은 사실이고 절반은 성공했다. 더 이상 아쉬워해도 소용이 없다.

마지막으로 전장에 서 있는 자가 라솔이 되면 된다. 이를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감수할 수 있다.

자신이 끔찍이 아끼는 네 검천사는 물론, 타라트라바 공국의 군대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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