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4. 생뢰르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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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군의 기병대가 퇴각해오면서, 우측 방향에서의 격렬했던 전투는 일단락이 났다. 양군이 서로 제법 아픈 공격을 한 번씩 주고 받았다.
아군의 우익, 서부군의 기병대는 기세 좋게 돌격하기는 했으나 결정적인 전과를 거두는 데는 실패했다.
돌격의 기세를 잃어버린 직후, 마치 계획된 것처럼 치명적인 포위망에 걸려든 꼴이 될 뻔도 했다. 그래도 때마침 도착한 드 레뮤즈 기병대가 생존자들을 구해서 돌아올 수 있었다.
사상자가 결코 적지 않고, 전투력도 삼 분의 이 미만으로 떨어졌다고 봐야겠지. 게다가 황급히 병력을 빼내는 과정에서 엉망진창으로 뒤섞여서 재편성에도 시간이 걸리겠고.
그래도 부대가 와해될 정도는 아니니까, 후방에서 재편성을 거치면 어떻게든 전투에서 기동 전력으로 써먹을 수 있을 만큼은 복구시킬 수 있으리라.
만약 구원이 늦었거나, 소베트르 경의 기동이 실패해서 우익 기병대의 타격이 심대했다면 전투의 흐름이 순식간에 적에게 흘러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 전투에서 우리 군이 가진 절대적 우위는 바로 기병의 숫자이다.
특히 서부군과 드 레뮤즈 군을 합치면 5천 기에 이르는 엘랑키아 기사는 그 존재만으로도 라솔 군에게는 압박의 대상일 것이었다.
만약 우익 기병대가 전멸하거나 와해되어 전술적 가치를 잃었을 경우, 이 기병의 우위라는 강점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게 된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동안 준비했던 계획을 완전히 새로 검토해야 하는 일이 생긴다.
세상 모든 조직의 운영이 그렇겠지만, 특히 군대는 자신의 강점을 극대화하고, 약점을 줄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전투에 나서서는 나의 강점으로 적의 약점을 노리는 것이 기본이며, 반대로 적의 강점이 우리 약점을 노리지는 못하게 해야한다.
음, 아닌 경우도 있기야 하겠다. 약점이 노려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면, 최소한 적에게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로 바꿔 말할 수 있겠다.
문득 스승님이 예를 들어주셨던 명쾌한 전술 지휘의 가정이 생각난다.
'아군과 적군이 모두 동등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가정하지요. 전력은 모두 세 개의 부대로 나뉩니다. 각 부대는 강, 중 약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양측의 역량이 완전히 동등하다면 반드시 이기는 경우의 수는 어떤 게 있을까요?'
지금 생각하면 바로 답을 알 수 있지만, 당시의 나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답은 아군의 강으로 적의 중을 치며, 아군의 중으로 적의 약을 칩니다. 마지막으로 적의 강에게는 아군의 약을 보냅니다. 그러면 세 개의 국면 중 두 개에서 승리하면서, 종합적으로 아군이 승리하게 되겠지요?'
당시의 나에게는 충격적인 대답이었다. 탁상 위의 말판 게임이라면 필승의 수일 테고, 그 이상의 해법은 없겠지.
하지만 나로서는 인정하기 싫은 답이었다. 특히 버림말로 '약'의 부대를 가장 강한 적에게 희생물로 내놓는다는 것이.
지휘관으로서는, 작전 지도 상에서는 합리적일지라도,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칼처럼 정리되기는 쉽지 않으니까. 특히 자기 자신이나, 친한 혈육이 희생자 목록에 오른다면 말이다.
'호오, 에트의 지적은 조금 의외네요. 보통은 그런 형태의 승리는 기사답지 않다거나, 명예롭지 않다는 지적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스승님은 내 답변에 미소를 지으며 부연 설명을 해 주셨었다. 스승님은 언제나 직접적인 평가를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 대답이 몇 점이나 되는 대답이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실제로 세상이 합리성만 가지고 흘러가지는 않습니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라, 말은 쉽지만 자신이 소가 되었을 때 기꺼이 그럴 수 있는 인간은 많지 않으니까요. 그럼 준비할 시간이 충분히 있다는 단서를 하나 더 붙인다면, 에트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한참동안의 고민 후에 내놓은 내 대답에, 스승님은 왠지 무척 즐거워 하셨다.
'강을 최강으로 만드는 것은 어려울 것 같으니, 약을 중까지는 올려서 승리하겠다구요? 아하하하, 에트 다운 대답입니다.'
스승님이 말 그대로 박장대소를 하는 모습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으니까. 나로서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웃음을 터뜨리셨던 스승님은 한참후에야 눈가를 닦으며 진정하셨었다.
'그룬발트에는 자이트리츠라는, 전쟁을 연구하는 오래된 가문이 있습니다. 위대한 전술가 한 명은 10개 연대의 정예군보다 강하다고 주장하면서, 전술 전략을 철저하게 감정을 배제한 이론이자 학문으로 접근하는 전쟁학자들이죠.'
그러고보니 자이트리츠 가문에 대해서는 그 때 처음 들었었구나. 전쟁관이라는 연구 시설이자 양성 시설이 있었는지는 몰랐지만.
'의도는 정 반대인데, 어쩐지 에트와 그들의 이론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기도 하네요. 흐음, 이를 수렴이라고 봐야 할까요, 발산이라고 봐야 할까요.'
어느 쪽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스승님은 판단하지 않았다. 그게 스승님의 방침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아직은 잘 모르겠다.
'오로지 강 대 강만을 생각하는 많은 기사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이긴 합니다.'
다만 그 이후로도 내 전술론과 전략론은 당시 말했던 개념에서 크게 바뀌지 않았다.
전략과 전술이 따로 떨어질 수는 없다.
전략을 도외시한 채, 한없이 좁은 국면이라 할 수 있는 전장 내부에서의 국지적인 승리만으로 전쟁의 승패를 판가름할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전투에 임하기 전에 이미 승패는 절반 이상은 정해진다는 것이다.
내가 이번 전투에 혼란을 겪고 있는 이유는 이 기본적인 원칙을 지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아예 권한이 없어서, 철저하게 내가 담당한 부대, 담당한 전선만을 책임지는 것도 아니다.
또는 전권을 가지고 완전히 아군을 파악했으며, 또 장악하고 최대한의 효율을 내는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상태에서 전투를 시작하게 되었으니... 아직 혼란스러운 상황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또 한 명의 믿을만한 지휘관을 확인했다는 것은 아주 기쁜 일이다.
소베트르 드 랑두제 경이라는 라몽 드 레뮤즈 백작 휘하의 기병대장의 병력 운용은 우직하니 믿음이 가는 방식이다. 앞으로도 자신의 역할을 잘 해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어쩐지 오랫동안 같이 합을 맞춰온 아인멜츠 경이 여러모로 칭찬을 하더라 싶었다. 사실 라몽 백작은 제법 사람을 보는 눈이 있는 건 아닐가.
그러고보니 라몽 백작은 아직 전장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것일까.
미리 이럴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역시 주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다소 불안한 점은 있다.
급한 불은 껐으니 다시 전장의 균형을 맞춰야겠다.
"콘도티에레! 좌측면 방향 적이 물러나기 시작했어요오!"
두 군데를 포대를 돌며 배치를 마치고 어느새 돌아온 첼레스티나가 반갑다면 반가운 소식을 전한다.
적이 물러난 것의 절반 정도는 첼레스티나의 발빠른 포병 지휘 덕분이다.
포대에서 위험한 각도로 떨어지는 포탄이 포대 근처로 접근한 적에게 막대한 손해를 입혔기 때문이다.
나머지 절반은, 적의 측면을 위협하는 각도로 기동한 프리스마라 연대 덕분이다.
프리스마라 기마 용병대를 이끄는 단장 코바르 리메니에디는 본인 말대로, 걸음마 할 때부터 말 위에서 먹고 자고 했던 사람답게 날카로운 기동으로 적의 측면을 위협했다.
물론 실제로 전면적인 공격을 가한 것은 아니다. 그저 본대에서 낙오된 소규모 부대 몇 개를 공격해 섬멸하고, 아슬아슬한 거리와 각도에서 적을 휘협했을 뿐이니까.
하지만 전방의 적 보병, 즉 트랑카벨 파견군의 보병대가 생각보다 강적임을 깨달아 전투가 길어질 게 뻔한 상태에서 측면에 다수의 기병이 나타나자 움직임이 소극적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전면적인 퇴각은 아니고 병력을 추스르고 재차 공격을 가하기 위한, 흔히 말하는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에 가깝겠지만.
그래도 일단은 우리가 1점 땄다고 봐도 되겠지. 조금은 기뻐해도 되겠다.
"그리고 적 후방에 새로운 병력이 나타났어요! 지원 병력이 아닐까 싶어요, 콘도티에레!"
"뭐? 정말이야?"
"네에! 저 쪽, 보병 중심이고 5천 명은 넘어 보여요오...."
이건 또 예상하지 못한 요소인데. 나는 서둘러 첼레스티나가 넘겨준 망원경을 눈으로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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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이면 이런 때 병력을 물리다니, 크루사다 공작도 눈치가 없는 사람이군."
라솔 군의 좌측을 지휘하는 하류 주둔군 사령관 퀸토 로르카 데 페니베라다 변경백은 아쉬운 듯한 미소를 지었다.
방금 막 적 기병이 함정을 빠져 나갔다. 결정적인 실패라고 할 수는 없지만, 라솔 군이나 지휘하는 퀸토의 사령부로서는 힘이 빠질 수 있을법한 일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때 타라트라바 보병대가 물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전투에서 기세라는 점이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쉬운 일이다.
우측의 타라트라바 진영이나, 좌측의 라솔 진영 모두가 일보 후퇴를 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적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전력을 재조정하려는 모양입니다. 때마침 알시라스의 지원군도 도착했으니 곧 재공격에 나서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그냥 기세가 조금 아쉽다는 말일네."
참모장 아드리아니의 합리적인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공세를 한동안은 유지해 주었으면 했다. 마침 라솔 군 역시 새로운 형태의 공격을 준비하던 참이었고.
"그럼 아군도 전방 연대에 명령을 잠시 늦추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알시라스 군이 합류를 하든 안하든, 타라트라바 군이 재공격을 시작할 때 같이 하는 게 좋겠지. 코루냐 연대 역시 후위 부대에 포함되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변경백."
"그나저나 알시라스는 잘도 저만한 병력을 모았구만. 보냈다던 병력의 두 배가 넘지 않는가?"
"중부 지역에서 사이가 좋은 가문들에 요청해서 병력을 모았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원래 왕성 사교계에서 이름이 높던 남자를 사령관으로 보냈다던가요."
"허... 전장에서도 그만큼 이름이 높았다면 좋겠구먼."
알시라스의 지원군은 사실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퀸토 변경백 휘하의 라솔 군이 거침없이 공격을 펼치고 있는 엘랑키아 군의 우익은 누가 봐도 불리한 상황이었다.
초반 격돌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완전히 무너져 흔적도 남지 않은 중대도 몇 개 있었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꾸역꾸역 버티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것도 나름 유서깊은 대국인 엘랑키아의 저력이라고 해야 할지, 명백하게 기량 차이가 완연했지만 쉽게 무너지지만은 않겠다는 의지가 분명히 느껴진다.
그렇다고 절대적인 전력의 유불리가 뒤집힐 정도는 아니다. 퀸토 변경백은 이걸로 불리해질 일은 없다며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기로 했다.
오히려 방금 전, 엘랑키아 기병과의 교전으로 한가지 사실은 확인했다.
엘랑키아의 기사들은 확실히 막강하고, 버거운 적이기는 하다.
하지만 준비된 하류 주둔군의 네 검천사 연대로 맞상대가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방금 전의 공세는 측면에서 기습적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거기에 검천사 중 막내인 코루냐 연대는 조금의 물러섬도 없이 막아냈다.
심지어 수적으로는 엘랑키아 기사들이 훨씬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준비를 했고 나름의 자신감과 계산도 있었으나, 막연한 불안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엘랑키아의 기사들이 상상 이상으로 강력하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제대로 엘랑키아의 대군과 맞상대해본 것은 한 세대 전의 일이다. 그래서 엘랑키아 기사의 강함은 전해지는 이야기를 통해서만 실감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얼마전 저 북방 전쟁, 나우데사 연방과의 전쟁에서도 철저하게 요새에 의존해 항거하던 나우데사 군을, 엘랑키아 군은 야전에서 모조리 쳐부수며 결국에는 승리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하류 주둔군의 검천사들 조차도 상대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없지 않았는데.
다행히도 이는 기우였다.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쉬운 상대라고까지 하지는 않겠지만.
이것만은 장담할 수 있었다. 오늘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이름 높은 엘랑키아의 기사들 대부분은 생뢰르반 마을 주변의 초원에 피투성이 몸을 누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