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292화 (292/556)

35-15. 생뢰르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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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실패했다.

크루사다 틴토 데 타라트라바 공작은 속이 쓰렸다.

첫 공세에 실패한 이후, 부상병들이 실려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상처부위를 움켜쥐고 울부짖는 모습이 안타깝다.

자신이 적의 진가를 파악하지 못했다, 까놓고 말해서 상대를 얕보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첫 교전이 시작된 직후에 이미 어느정도 깨닫기는 했다.

적은 생각보다 강하다. 규모에 비해 많은 총기를 보유해 화력이 강했고, 재장전과 조준도 익숙해 화망은 위협적이었다.

폭이 얕은 선형 대형이면서도 완강하게 저항했고, 더 숫자가 많은 타라트라바의 창병대의 공격에 완강하게 맞서왔다.

하지만 자신감과 선입견이 눈을 가렸다.

눈 앞에 배치된 보잘것 없는 외형의 보병 부대. 엘랑키아의 용병대가 타라트라바의 숙련병들과 동등하거나, 혹은 더 강할 것이라 인정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적의 화망이 강력하긴 하지만 이는 창병의 숫자를 줄이고 총병의 숫자를 늘린 고육지책 덕분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당장은 잘 버티고 있더라도 곧 밑천이 드러날 것이며, 종심이 깊은 타라트라바의 공세에 결국에는 흔들릴 것이라 믿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현실은 최초 방어선에서 적을 1미터 조차 밀어내지 못했다.

병력 우세를 이용한 정면 힘싸움도, 모서리와 측면을 노리는 베테랑 보병들의 우회 공격도 차단당했다.

보통 밀집 대형 싸움에 익숙한 보병일지라도, 소수의 백병전 전문 요원들을 투입한 우회 공격에는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좁은 장소에서의 소수 전투에 익숙한 라솔과 타라트라바 출신 보병들은 그런 싸움에 매우 능숙하고.

이는 군사 귀족인 엘랑키아의 기사 가문 출신들이 대부분 보병이 아니라 기병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었다. 당연히 엘랑키아 입장에서는 기병의 보충을 우선시하게 마련이고.

허나 어쩐 일인지, 정면의 적은 그런 약점도 없었다. 오히려 익숙하다는 듯 기습해온 타라트라바의 베테랑들을 역으로 격퇴해 버렸다.

"이런 화력 집중은 소르난 전쟁 시절에도 경험해본 적이 없습니다."

방금 최전방에서 연대를 이끌다가 크루사다 공작의 퇴각 명령에 돌아온 지휘관들은 지친 표정으로 보고를 이어나갔다.

마치 그리다 만 모자이크 그림처럼 피가 점점이 튀어 있는 흉갑이나, 눈 아래쪽이 찢어져 군의관이 꿰맨 자국을 보면 얼마나 전투가 치열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다음 공세는 이쪽도 포병의 협력을 받아 만전의 준비를 기하겠습니다."

"그러도록 하게. 부하들의 상태는 괜찮은가?"

"뜻밖의 저항에 당황한 것은 분명하지만 여전히 사기는 왕성합니다. 엘랑키아 놈들에게 한 대 맞고 끝나지는 않을 생각들입니다."

"다행이군. 알겠네, 필요한게 있으면 언제라도 말하고 다음 공격을 준비하게."

"옛, 공작전하!"

미처 생각하지 못한 변수는 또 하나 있었다. 적이 최전방에 만들어 둔 포대였다.

생각하지 않은 변수가 아니라... 그렇게까지 문제가 될 것으로 생각하지 못한 변수에 가깝겠다.

지근거리에서 보병으로 늘어선 횡대를 거의 쓸어버릴 기세로 떨어지는 측면 사격은 선두 부대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으니까.

우선 병력을 퇴각시킨 가장 큰 이유는 포대와 가까운 쪽 부대들이 워낙에 큰 피해를 입어서 부대를 교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두 개의 적 포대 중 좌측, 중앙에 가까운 포대 근처에서 적을 공격하던 부대는 사상자가 절반 가까이 나와서 도저히 전투를 지속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충분히 견딜 수 있다 생각했던 포격이, 거리가 가깝고 입사각이 좁아지면서 도무지 견딜 수 없는 수준의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에 비하면 오히려 측면을 위협하는 모습으로 접근했던 적 기병은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엘랑키아 기병이 무섭다고는 하지만, 이는 귀족 출신의 중장기병들이 무서운 것이지 말만 탔다고 전부 공포의 대상은 아니다.

접근하면서는 보유한 다수의 권총을 이용해 중거리 화력을 뿜어내고, 백병전에서는 창벽까지도 뚫어내며 공포를 모르는 듯 저력을 발휘하는 기사들이 두려운 것이다.

창병과 총병이 협력하며 충분히 숙련된 사각 대형은 기본적으로 기병 공격에 대해서 면역이나 다름 없다. 엘랑키아 기사들은 그 기준에서 벗어날 정도로 강한 모습을 보여주니 두려운 것이고.

절반을 좌측의 퀸토 변경백에게 빌려줬다고는 해도 아직 1천기에 이르는 기병대가 있다. 타라트라바 귀족들의 지지 증거나 다름 없는 소중한 전력이다.

다소 수가 많을지 몰라도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인 용병 기마대 따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테니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타라트라바 군을 격퇴시켰다고 의기양양하게 기뻐하고 있을 엘랑키아 군을 생각하니 속이 뒤틀린다.

하지만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이다. 조만간, 공작의 부하들이 적들을 저 자리에서 끌어 내려 줄 것이다.

"알시라스의 왕자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드디어 오셨군. 이리로 모셔오게."

"옛, 알겠습니다."

좀 늦기는 했지만 이웃 나라 알시라스 왕국의 지원군도 도착했다.

시간이 조금 걸릴 뿐, 결과가 바뀌는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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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이동 준비? 지금 말씀이십니까?"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 소속의 총병 소대장 얀 고티에는 중대장이 전한 뜻 밖의 명령에 당황했다.

방금 치열한 교전 끝에 적을 격퇴했다. 눈치를 보며 주춤 주춤 물러서던 적을 보며 승리의 함성을 지른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완전한 승리는 절대 아니다. 적은 몇 백 미터 정도 물러선 것에 불과하며, 언제든 새로 공격해올 기세였으니까.

"방금 그렇게 지시가 내려왔네. 혹시 아직 후송 못한 부상자들이 있나?"

"아, 아닙니다 중대장님. 그런데... 저희는 어디로 이동하는 것입니까?"

벌써 굵직한 전투에 참여한 경험만 해도 수 차례에 이르는 베테랑 소대장이 된 얀이다. 하지만 격렬한 전투 중에 위치를 이동하다니,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지금까지의 실전들은 대부분 한 번 배치되면 자기 역할을 하고 그 지역을 끝까지 사수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니까.

샹다메리 전투에서는 중화승총 소대들은 따로 파견나가 아군 기병대를 지원했었지만 그래도 넓은 의미로는 수비전이었으니까.

그런데 트랑카벨 파견군과 드 레뮤즈 보병대 사이의 중요한 지점을 지키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동 명령이 내려지다니.

그것도 적이 언제 다시 공격해올지 모르는 시점에서 말이다.

"우측 방향으로 이동하란 명령이다. 북방의 높으신 분들 군대가 애를 먹고 있어 우리 도움이 필요한 모양이지. 나도 자세한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그, 그렇군요. 곧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게. 우리야 시킨 대로 할 뿐이지. 콘도티에레께서 직접 내린 명령 아니겠나?"

"생각해보니 저 따위가 이유를 알 필요는 없었겠네요."

"하하, 그건 나도 마찬가지겠지. 어서 준비하세나."

언제는 뭐 이유를 따져가면서 명령을 수행했던가. 총병 중대장과 소대장 사이에 오고 간 웃음은 그런 의미였다.

어련히 목적하신 바가 있으니 시키는 것이겠지. 그리고 필경 그것은 승리로 가는 과정일 테고.

특히나 신생 트랑카벨 영지군의 최선임 연대라는 자부심을 공유하는 제10 카르카냑 연대이다.

콘도티에레의 명령이다. 이 이상의 암묵적 동의를 받기 위한 완벽한 조건은 없었다.

"들었지? 빨리 준비하자. 우리가 싸울 장소는 여기가 아닌 모양이다."

"알겠습니다, 대장님."

부하들도 중대장과의 대화를 들었는지 군소리 없이 준비를 시작한다.

사실 보병의 이동 준비라고 해 봐야 별다른 것은 없다. 어차피 손에 들린 무기와, 몸 여기저기 붙어있는 군장을 제외하면 특별히 챙길 것도 없다.

다만 첫 전투가 격렬했기에 화약 소모가 상당히 컸다. 이동하기 전에 보급을 받을 시간이 있으면 좋을 텐데.

걱정하며 부하들을 인솔해 행군대형을 갖추던 얀은 바닥에 누워있는 두 명의 시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가 지휘하는 소대는 두 명이 사망하고, 한 명이 부상해 후송되었다.

상대적으로 주변 소대에 비해서는 운이 좋았지만, 그래도 마음이 무거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도 희생자가 더 나올 테고, 자기 자신도 바닥에 누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곁을 떠나갔던 많은 동료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적이 내 시체를 타넘고 지나가는 일은 없기를 기도한다.

“어어, 여기가 우리 자리구만. 우리는 15연대에서 왔소이다. 소대장 아베로 모켕탕이오.”

“얀 고티에입니다. 지금 막 떠나려던 참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여기는 맡기고 잘 다녀오시구려. 무사히 돌아오실 때까지 우리가 맡아 놓고 있을테니.”

트랑카벨 정규 보병의 장구를 갖춘 소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제15 델레망드 보병 연대에서 온 소대장은 얀보다 나이가 열 살은 많이 보인다.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껄껄 웃는 15연대의 소대장이다.

“분명, 어려운 전장이 있으니 콘도티에레께서 가라 하시는 게 아니겠소. 힘든 싸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무사하길 빌겠소.”

“15연대에도 무운을 빕니다. 다녀오겠습니다.”

“고맙소이다! 전투가 끝나고 무사히 만나길 빌겠소!”

목숨을 내걸고 있는 같은 입장이라서 그런지, 낯선 이들이지만 유난히 친근하게 느껴진다. 얀과 아베로는 굳은 악수를 남기고 헤어진다.

“오, 얀 소대장 왔군.”

“늦었습니다, 중대장님.”

“아닐세, 여기서 잠시 대기하고 있으니. 우리는 우익 쪽, 몽파르지에 공작님인가 하는 양반을 도우러 가기로 됐네.”

“북부 귀족님들 말입니까?”

“그렇지 뭐. 그래도 우리 편이지 않은가. 지금 라솔 놈들에게 밀려서 상황이 어려운 모양이야. 우리가 본때를 보여줘야지.”

“알겠습니다.”

콘도티에레께서 시키는데 무슨 의문이 있으랴. 그저 명령하는데로 가서 명령하는 상대와 싸울 뿐이다.

이번 북부 귀족들은 기병에만 신경을 써서 보병이 약하다는 소문은 트랑카벨 영지군 사이에서도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샹다메리에서는 그렇지 않았는데··· 라고 생각하는 병사들도 있었다.

어차피 엘랑키아 전체의 남동쪽 끝자락인 블랑독 출신 병사들의 지리 감각으로는 수도 베르마유를 포함한 중북부와 드 몽파르지에 공작가가 수장으로 있는 서부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또 이번에는 예비대의 지빌링엔 연대와 함께 가기로 했다는군.”

“그 멀리서 온 용병들 말입니까?”

“그래, 샹다메리에서도 전공을 세운 우락부락한 친구들 말이지. 이번에는 우리가 방패이고, 그 친구들이 창이야.”

“우리 10연대 포함해서 2개 연대가 이동하는 겁니까?”

“그렇다는군.”

트랑카벨 병사들에게 선망의 대상인 슈토르히 만큼은 아니지만, 지빌링엔 용병들에 대한 평가는 나쁘지 않았다.

단순히 돈만 밝히는 용병들이 아니라, 트랑카벨 가문에 충성을 바친 고용 관계라는 것이 알려졌기 때문인지, 동지의식이 싹텄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빌링엔에 대해서는 잘은 모르지만, 함께 이동한다니 든든했다.

“오, 화약 보급이 시작됐군. 자네 소대도 얼른 받도록 하게!”

“옛, 중대장님!”

새로운 전장이 어디인지는 몰라도, 트랑카벨의 최선임 연대로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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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랑키아의 겁쟁이 새끼들! 또 도망치느냐!”

“자신 있으면 이리 와! 돼지처럼 울부짖으며 죽게 해주마!”

지저분한 욕설 소리가 들려온다.

“자식들, 아예 덤비든가 애매한 거리에서 짜증나게···.”

드 레뮤즈 가문의 기병대장, 소베트르 드 랑두제 전남작은 휘하 기사 중 한 명이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위기에 처했던 서부군의 기병대를 사지에서 무사히 끌어내 아군 후방으로 보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병력의 약 절반이 소베트르의 지휘아래 천천히 적을 견제하며 그 뒤를 지키며 후퇴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얌전히 보내줄 것처럼 보이던 적은, 거리가 어느정도 멀어지자 경기병을 보내 애매한 거리에서 도발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제대로 전투가 벌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무기 사거리 밖에서 욕설을 할 뿐이다.

발끈한 드 레뮤즈 기병들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기강을 잘 지키면서 명령대로 후퇴하고 있었다.

“라솔 기병들이 저러는 것은 노리는 게 있기 때문이겠지.”

소베트르는 상황을 그렇게 일축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그의 부대는 잘 통제되고 있었다.

만약 욕설에 대응해 뛰쳐나갔다면 난장판이 벌어졌겠지. 하지만 서부군 기병을 무사히 구한 다음 본진으로 복귀하는 것까지가 임무이다.

이 뒤늦게 정신차린 노장의 머리속에는 오로지 그것만이 가득했다.

그런 그에게, 부대의 한쪽 끝에서부터 전령이 달려온다.

“소, 소베트르 경!”

“무슨 일인가?”

“보병이, 서부군 보병이 뚫렸습니다!”

“뭐, 뭐라고?”

창백한 얼굴의 전령이 외쳤다.

“서부군 중대 몇 개가 무너져 도망치고 있습니다! 라솔 놈들이 빈 틈을 파고들고 있습니다!”

이건 계획에 없었는데.

서부군 기병을 구해 원래 위치로 데려다 놓고, 자신은 다시 보병 대열의 후방을 통해 본진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 ‘후방’이 없어질 지경이다.

주어진 임무의 완벽한 수행만 생각하고 있던 소베트르의 눈 앞이 캄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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