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7. 생뢰르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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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라.
생각해야 한다. 생각해야만 한다.
나는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돌리기 위해 애를 썼다. 오늘 하루종일 머리속에 뿌옇게 안개가 낀 것 같았다.
마치 오늘 나에게 주어진 사고력을 이미 아침나절에 다 써버렸다는 말도 안되는 생각이 들 정도. 뇌가 파업한다는 것이 이런 느낌인가.
이번 전투는 계속 어딘가에서 일이 터지고 가기 간발의 차이로 늦기 전에 대응하는 식으로 흘러가고 있다.
다행히 결정적으로 대응도 못할 정도의 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 전투가 시작되고 주도권을 좀처럼 가져오지 못하고 있었다.
주도권을 가지고 오려면 적을 당황하게 해야 한다.
갑자기 예상 이상으로 큰 피해를 입게 할 수도 있겠고, 상대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병력을 파견할 수도 있다.
어쨌든간에 전략전술의 기본은 상대가 싫어하는 행동을 저지르는 것이니까.
이런 데 시달리기 시작하면 아무리 의지가 단단하고 확신이 있는 지휘관이라 해도, 부담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이번 전투는 그게 부족했다. 이미 벌어진 일을 뒤늦게 수습하는 식으로는 주도권을 그냥 가져올 수 없다.
상대가 예측하지 못한 부분을 찾아서 상대가 기대하지 않은 사건을 일으킨다.
다행히도 실마리가 될 법한 부분이 몇 군데 있기는 하다.
“첼레스티나, 우익 쪽에서는 아직 소식이 없지?”
“네에, 콘도티에레! 연대 하나는 완전히 무너졌지만 나머지 두 개 연대는 어떻게든 뭉쳐서 버티려고 하는 것 같아요오···.”
첼레스티나의 표정이 좋지 않다. 적군에 의해 아군 중앙과 우측이 분단되었으니, 비상사태임은 분명하다.
다만 전방위에 대한 방호가 가능한 사각 대형을 빠르게 갖추기만 했다면, 갑자기 적과 접하는 전장이 늘어났더라도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
다행히 아직 서부군의 보병은 전멸하지 않았다.
천만 다행으로, 서부군도 드 레뮤즈 군도 측면의 아군이 무너지는 가운데에서도 연쇄적인 패닉을 일으키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보병 중심인 적도 몰이 사냥이라도 하듯, 전과를 죽죽 이어나갈 수는 없다.
산개 대형으로 이리저리 공격해 봐야 이미 측면, 혹은 후면에서의 공세를 대비한 거대한 보병의 사각 대형을 뚫을 수는 없다.
수천이나 되는 창병과 총병이 똘똘 뭉쳐서는 우스꽝스러운 밀집 대형을 취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전장에서 실질적으로 가장 강력한 전술이기 때문이지.
그래서 적군도 새로이 공격을 위해, 돌파구를 힘으로 찢어 넓히기 위해 새로운 대열을 갖추는 중이었다.
이 길어야 십여 분의 시간이 우리에게는 황금과 같은 시간이다.
바람처럼 전장 끝에서 끝으로 달려간 지빌링엔 연대가 드 레뮤즈 군의 측후면을 지키기 위해 대열을 전개하고 있었고, 제10 연대가 그 뒤를 따르고 있다.
하지만 저들은 급한 불을 끄기 위한 소방수일 뿐, 불리한 전황을 뒤집거나 적에게 의외의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다만, 우익에는 아직 남아있는 계산하기 어려운 요소가 있다.
이걸 의외라 해야 할지··· 대놓고 보이는 요소이긴 한데.
“아인멜츠 경, 드 레뮤즈 기병대, 소베트르 경이 지휘하는 병력이 정확히 얼마입니까?”
“소베트르 경이 이끌고 가신 병력은 중기병 약 2천입니다.”
“그렇다면··· 서부군 기병대가 큰 타격을 입고 반토막이 났다고 해도 거의 4천에서 5천에 가까운 병력이겠군요.”
“예, 말씀하신대로입니다. 다만 보병 대열이 무너지고, 직전에 큰 패배까지 당한 상황에서 기병도 얼마나 전선으로 복귀할지 불안하긴 합니다만···.”
서부군 기병은 벌써 두 번이나 큰 타격을 입었다. 한 번은 방금 전이고, 나머지 한 번은 이번 전투가 시작하기 전에 말이다.
그런데도 남은 병력이 드 레뮤즈 기병대를 합치면 4천에서 5천으로 추산된다니, 역시 기병 강국 엘랑키아이다.
전혀 계획한 바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이 마지막까지 전투를 포기하지 않아 준다면 적에게는 큰 부담이 될 것이다.
적은 기세 좋게 아군 대열을 돌파했다.
하지만 전과의 확산, 즉 측면 대열이 연이어 붕괴하는 결정적인 우세에는 이르지 못했다.
원래 돌파 시도하다가 어정쩡하게 멈추면 오히려 반포위 상태가 된다. 세 방에서 얻어 맞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적은 그런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돌파구를 확장하려 할 테고, 우리는 이를 죽어라 막아야 한다.
그러니··· 서부군이 생각보다 너무 빨리 무너지면 안되는데···.
“콘도티에레! 적 우측 병력, 타라트라바 군이 다시 공격해오고 있어요, 병력이 보강되어 숫자가 많네요!”
“우리 병사들이 버틸 수 있을까?”
“네에, 당연하지요, 콘도티에레! 콘도티에레가 필요하시다고 말씀하시는 만큼, 우리 병사들은 버텨 낼 거예요.”
첼레스티나가 유난히 힘을 실어 말하자, 나는 눈물이 찔끔 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좌측에 남아있는 병사들도, 무너지기 시작한 우측을 보완하기 위해 급히 달려간 병사들도 힘든 싸움이 될 것을 알고 있겠지.
그들이 물러서지 않고 죽음과 공포에 맞서 의연할 수 있는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 하지만 그 일부는 분명 내 지휘에 대한 신뢰이리라.
나는 그 신뢰에 보답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우리가 맞을 차례야. 적의 다음 공세를 버텨 내는 거야.”
“네에, 콘도티에레! 포병도 준비되었어요.”
야전에서 적이 가장 약해지는 시점은 ‘공격이 실패한 직후’이다.
당연히 숫적으로 불리한 우리를 찍어 누르려고 하겠고 다소 무리를 해서 공격을 투사해 오겠지.
그걸 버티면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약해지는 시간이 올 것이다.
그럼 그때까지 모루의 역할을 하던 좌익의 병사들은 망치로 돌변할 것이다.
그때까지 내가 할 일은 적을 모루에 꽁꽁 묶어놓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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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그리 나쁜가 볼누 경.”
“...보병의 절반이 무너졌습니다. 드 레뮤즈의 본진과 단절되었으며··· 기병의 노브리크 드 다부아 자작은 실종, 나머지 병력도 혼비백산하여 의지를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드 레뮤즈에서 보내준 기병대가 아직 함께 있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본진으로 귀환하는 순간, 저희 우익군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흐음···.”
앙비토 드 몽파르지에 공작은 평소보다 좀 더 창백해진 얼굴이었으나, 말투는 평소와 같다.
그 앞에서는 선대 드 몽파르지에 공작을 섬겼던 노련한 지휘관 볼누 드 아르가스 남작이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휘하의 보병 연대 3개 중, 하나는 완전히 무너졌고, 나머지 하나는 여기저기 균열이 난 상태로 간신히 적의 공세에 버티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루젱 드 모르텍스 백작의 연대는 여전히 굳건했으나, 가장 중요한 한쪽 끝을 지키는 축이다.
쉽사리 병력을 빼서 주변을 지원하기가 쉽지 않았다.
전술적으로 냉정하게 말해서, 그냥 다른 연대들이 무너지게 방치하고 지금 자리만 굳건히 지키기만 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나더러 도망치라 하는 것이오, 볼누 경은?”
“...외람되오나 공작 전하, 언제 적이 여기까지 휩쓸고 들어올지 모릅니다. 적이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못하는 이유는 반대편에 드 레뮤즈 군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흐음···.”
“부디 몽파르지에 본성으로 퇴각하시어 혹시라도 모를 위험을 피하시고, 만약의 경우 권토중래의 기회를 얻으시도록....”
무문의 명가 드 몽파르지에를 평생 섬겨온 볼누 남작은 말의 끝을 흐렸다.
‘아무래도 전투에서 질 것 같으니 주군은 안전한 후방으로 도망치라’
아무리 유명무실한 꿔다 놓은 보릿자루와 같은 사령관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청하는 것은 군인으로서 즐거운 일은 아니었으리라.
“내가 도망치더라도 귀경들은 남아서 계속 싸울 생각이 아니오?”
“왕가의 명을 받들어 엘랑키아의 서부를 지켜온 드 몽파르지에의 가신들이 마지막까지 싸워 무도한 라솔 놈들의 발을 묶겠습니다.”
지금까지 참담하기만 하던 볼누 남작의 눈에 날카로운 빛이 한 줄기 어린다. 앙비토 공작은 전장에서 처음 보는 가신의 의외의 모습에 깜짝 놀랄 정도였다.
“드 레뮤즈 백작가의 주인에게도, 더 동쪽 변경에서 왔다는 트랑카벨의 군세에게도 부끄러운 모습은 보이지 않겠습니다.”
설령 전장에 남아 목숨을 잃더라도 주군의 부끄러움을 대신 감당하겠다는 말.
전후관계가 다소 차이는 있지만, 그러게 한다면 드 몽파르지에의 서부군은 한계까지 싸워 힘이 부족해 패배한 것이 된다.
앙비토 공작은 잠시 고민하다가 주변을 둘러본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다. 급박한 상황이니까.
대열을 버리고 북쪽 어딘가를 향해 흩어져 도망치는 패잔병들을 1초.
거기 생긴 빈 공간을 비집고 나오는 적의 대열과,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측면에서 몰아 붙이며 아우성치는 아군 보병들을 1초.
그리고 저 멀리까지 드넓게 펼쳐진 엘랑키아 남서부의 초원 지대를 3초 정도.
저 초원 너머 어딘가에는 드 몽파르지에 가문의 영지가 있다.
안전한 난공불락의 요새가 몇 개나 있고, 천 명 이상의 기사와 만 명 단위의 자유민 보병을 소집할 수 있는 풍요로운 영지이다.
여기서 도망친다면, 반드시 다음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자신과 주변의 우호적인 귀족 영지에서 다시 대군을 규합할 수 있고, 왕실에도 지원을 요청할 수 있겠지.
라솔의 침공과 점령은 분명 일시적일 것이다. 오래지 않아 적을 몰아내고 엘랑키아는 결국은 승리할 것이다.
설령 앙비토 드 몽파르지에 자신이 지금처럼 쓸모없는 인간으로 멋대로 살고 있더라도, 엘랑키아의 누군가, 누군가들이 전쟁에서 이겨 낼 것이다.
자신이 애초에 전장에 나온 것이 잘못한 것이 아닐까.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하게, 괜히 전장에서 싸우고 있어야 할 가신들의 마음이나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가 아닐까.
“허수아비는 새라도 쫓지···.”
“예? 듣지 못했습니다, 전하.”
“아니오, 그냥 혼잣말이오.”
앙비토는 고개를 젓는다. 자신에게 충언해온 볼누 남작에 대한 부정이기도 하고, 자기 자신의 생각에 대한 부정이기도 했다.
“볼누 경, 이 몸은 못난 인간이지만 내 가신들에게, 병사들에게 신뢰를 받고 싶다는 욕심은 있소.”
“...공작 전하?”
평소 좀처럼 자기 생각을 말 하지 않는, 무슨 소리를 해도 ‘경의 뜻대로 하시오’ 정도로 넘어가 버리던 젊은 신임 공작의 말에 볼누는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나는 못난 인간이라 뭘 해야 신뢰를 받을 수 있을지 전혀 모르겠소. 누굴 신뢰를 해 본 적도 없어서 말이지.”
“저희 가신단은 모두 앙비토 공작 전하를 신뢰하고 있습니다.”
“아아, 경들의 충성심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오. 그냥 내가 말하는 것은···.”
순간 앙비토 공작의 머리속을 스치고 지나간 것은 낯선 병영에 멋대로 찾아갔을 때 보았던 광경이었다.
생소한 인간들, 특별히 귀한 몸인 척을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평소라면 말 한 마디 섞을 이유가 없었을 ‘천한’ 자들.
몇 푼 안되는 금화에 팔려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벼운 용병들..
그러나 그 천한 병사들은 껍데기뿐인 귀한 몸들 보다, 훨씬 무언가로 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자신감, 믿음, 용기 등등.
무엇 하나 자신이 가져본 적 없는 것들로.
가지고 싶었다.
부친이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도 신뢰 받지 못했던 텅 빈 인간인 자신일지라도.
“...설명을 하려니 어렵군. 그냥 여기서 전장을 떠날 수는 없다는 말이오.”
“하지만 이곳은 위험해서···.”
“허허, 그렇군. 그래도 죽는다면 귀경들과 함께요.”
“전하···.”
볼누 남작은 말을 잃었다. 평생 인형과도 같은 얼굴이었던 젊은 주군의 얼굴에는 뭔가 깃들었다 느꼈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앞으로도 계속 보고 싶다 느껴지는 무언가가.
“병사들에게 돌아가시오, 볼누 경. 나야 후방에서 어떻게든 요령껏 살아 보면 되지만, 귀경은 병력을 지휘해야 하는 중요한 입장이 아니오?”
“...명령 받들겠습니다.”
“그러시오. 그리고 이겨서 몽파르지에에는 함께 돌아갑시다. 개선 장군으로 말이오.”
“알겠습니다, 공작 전하.”
그때, 어디선가 전령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볼누 경! 볼누 참모장님! 전··· 엇, 고, 공작님! 제가 무례를···.”
“아닐세. 급한 보고 같으니 즉시 보고하게나.”
“예, 옙! 드 레뮤즈의 기병대장께서 전언을 보내셨습니다!”
“무슨 내용인가?”
“전령! 드 레뮤즈의 기병은 이대로 서부군을 엄호하겠다. 귀군의 용전분투를 기대한다. 이상입니다!”
“오오···.”
앙비토 드 몽파르지에 공작은 활짝 웃었다.
평생 이렇게 웃어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의 조금의 계산도, 망설임도 없는 웃음.
“하늘이 우리를 돕고, 드 레뮤즈의 기병대가 우리를 돕고 있으니 싸우지 않을 수가 없구려.”
“그렇습니다, 공작 전하. 드 레뮤즈 백작의 호의에 보답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부디 귀하신 몸 보존하십시오!”
“나는 그럴 테니, 병사들에게 전투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리시오!”
“예, 전하!”
우익의 상황은 여전히 절망적이고, 라솔과 엘랑키아 보병의 기량 차이는 현격하다.
하지만 그것이 싸움을 포기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