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4. 생뢰르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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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에서는 온갖 일이 계속해서 벌어진다.
아니 정말로, 평소에는 상상도 못하던 일들도 벌어진다니까.
그 대부분은 ‘사람’에 대한 일이다.
지휘관은 전술전략에 해박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만큼이나 자기 병사들과 적의 병사들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전쟁을 하는 ‘사람’은 그들이니까.
휘하 병력에 무관심한 지휘관이 전투에서는 강할 수 있을까? 나는 불가능하다 생각한다.
물론 병사들이 처한 상황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에게 잘 해주며,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형태로 관리하는 지휘관도 있으며.
혹은 정 반대로 잘 알고 있기에 전혀 신뢰하지 않으며, 심지어 경멸까지 하며 전쟁의 도구로만 다루는 지휘관도 있기는 하다.
이렇게 지휘관의 성향에 따라서 철저하게 갈리기는 한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관심을 두고 잘 알고는 있어야 성과가 나온다는 것은 명확한 이야기다.
흔히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고들 표현하는 경우가 많지만··· 나는 전쟁영웅의 씨도 따로 없다고 생각한다.
전쟁영웅이란 무엇인가.
혼자 전세를 뒤집어 놓고, 적을 전멸시키고, 역사를 새로 쓰는 신화와 전설 속의 영웅과도 같은 존재를 우선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애초에 한 전장에 나서는 전사의 수가 천 명을 넘는 시점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이 된다 생각한다.
오늘날 통상적인 의미에서 영웅이란 결국 전장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는 사람, 그 이상으로 해내 승리에 공헌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참전하는 인력이 양쪽을 합쳐 만 명을 넘는 이런 전장에서, 개인의 무력이 승패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칠 정도로 발휘될 기회를 찾는 것은 어렵다.
때문에 많은 영웅적인 행동들은 ‘부대 단위’로 발생한다 생각해야 한다.
실제로 전투 후 논공행상을 할 때에도, 전공의 평가와 포상을 부대 단위로 할 때가 많고 말이다.
특정 영주의 부대라면, 그 영주의 작위를 올려주고 영지를 추가로 챙겨줄 수도 있고.
특정 지역 출신의 부대라면 해당 지역에 세금을 면제해주는 등의 추가적인 포상이 있을 수도 있다.
이런 정도로 영웅의 의미를 좁혀놓고 생각하면, 전장에서 발생하는 여러 사건들 중 ‘영웅의 각성’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
굳이 게임으로 치자면, 캐릭터의 등급이 오른다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려나.
이미 충분히 육성 된 캐릭터는, 경험과 강화가 충분히 된 캐릭터는 더 강해지는 데 제약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신병이라면 그 이상의 성취를 보여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같은 경험치라고 해도 훈련으로 얻는 것과, 전장에서 사선을 넘어가며 얻는 경험치는 질적으로 하늘과 땅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물론 대체로 신병들, 그리고 신병들로 구성된 부대는 ‘기대에도 못 미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기는 하다.
그야 당연한 것이지··· 처음부터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이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니 아무리 중요한 대의를 들이댄다손 쳐도 너무한 요구가 아닌가.
그만큼 병사들, 그리고 부대의 수준과 상태를 신경써야 한다는 것이다··· 라고 하고 싶지만.
가끔은 촉이 올 때가 있다.
쟤들은 이번 전투를 경험하면서 나아가겠구나, 이전에 못 하던 것을 할 수 있게 되겠구나 하는 촉이 말이다.
무슨 초능력이 생겨서 미래가 보인다, 상태창이 보여서 가득 찬 경험치가 보인다, 이 따위 말이 아니다.
오랫동안 사람과 집단을 겪어오고, 비슷한 환경에 처했던 다른 케이스를 보아온 경험에서 오는 추측에 가깝겠다.
그리고 원래 부하들을 다루는 지휘관이란, 어느 정도는 미신에 가까운 자신만의 평가 기준이 있기도 하고. 굳이 관상이라 하기는 좀 그렇지만···.
지금 이 생뢰르반의 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저 장면도 비슷한 케이스라 할 수 있다.
100퍼센트, 절대적으로 예상했느냐! 라고 하면 그렇다 대답하기는 어렵다.
허나 절반 정도는 결정적인 순간에 해 주지 않을까? 라는 은근한 기대에 가까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적의 중앙이 밀려나요 콘도티에레!”
첼레스티나의 외침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전장의 중앙, 드 레뮤즈의 4개 보병 연대가 지키고 있었던 전장이다.
물론 그들이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은 절대로, 절대로 아니다.
그들 역시 견실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며 싸우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이 4개 연대가 지키고 있는 구간 만큼은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엄청난 공방이 벌어지고 전진과 후퇴가 반복되고 있는 트랑카벨 파견군이 배치된 좌측면이나, 초반의 돌파를 막지 못해 붕괴해버린 서부군의 우측면을 생각하면 상대적으로 조용한 전장임은 분명하다.
적군 역시 상대적으로 신경을 덜 쓰고 있었고··· 아마도 ‘덜 중요한 전장’이라 생각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 적의 착각을 기분 좋게 뒤통수 쳐 주는 것이지.
“아! 순차적으로 측면의 다른 연대도 전진을 시작했어요! 멋져요, 마치 드 레뮤즈의 저력이다! 라고 외치는 것 같네요오?”
“훌륭한 사선진이네. 첼레스티나, 슈토르히를 제외한 주 전선에 전령!”
“네에, 콘도티에레! 주 전선에 전령!”
“드 레뮤즈 보병대의 이동에 맞춰 전진할 것, 절대 무리하지 말라고도 전해 줘.”
“네에! 드 레뮤즈 보병대의 이동에 맞춰 전진할 것! 절대 무리하지 말 것!”
“좋아, 그렇게 해 줘.”
첼레스티나는 평소처럼 전령에게 전하러 가기에 앞서, 잠시 내 눈치를 본다.
“콘도티에레, 혹시 슈토르히에게 전할 명령도 있으신가요?”
“으으음··· 좋아. 같이 전달하기로 할까.”
“네에! 말씀해주세요.”
“루트비히에게, 적의 측위를 몰아낸 후, 마음대로 할 것!”
“와아! 루트비히에게 전달, 적의 측위를 몰아내고 마음대로 할 것! 슈토르히 연대에게 선물을 주시는 군요!”
“하하··· 많이 참았을 테니까.”
첼레스티나가 활짝 웃으며 달려간다. 내가 슈토르히에도 명령을 내리고 싶어한다는 것을 눈치로 알았던 것일까.
결국 슈토르히에게도 내려졌던 정지 명령은 10분도 가지 않고 번복되게 되었구나.
다만 그 10분은 무의미한 시간은 아니었다. 다소 무질서하게 진격하느라 어수선했던 아군의 대열은 회복되었으며, 약간이라도 휴식을 취할 수 있었으리라.
···물론 그만큼 적도 숨을 돌릴 수 있었겠지만.
그건 이, 막 자신의 힘을 인지하고 깨어난 ‘어린 거인’인 드 레뮤즈의 보병 연대들이 다시 원점, 혹은 그 이전으로 되돌려 버렸으니까.
우리 트랑카벨 파견군이 밀어붙인 적이 궁지에 빠져 선택한 일은 뻔하다.
‘덜 급해 보이는 전선’에서 병력을 빼서 급한 지역을 틀어 막은 것이다.
드 레뮤즈 군은 숫자는 어느정도 갖춰져 있었지만, 철저하게 방어적으로 나오고 있었고 타라트라바 군이 먼저 공격하지 않는 한은 대응도 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상대적으로 그 쪽에 병력의 밀도를 낮춰도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 나라도 그렇게 생각했고.
그런데 그게 그렇게 만만한 부대는 아니었다는 말이지.
저 종잡을 수 없는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의 영지에서 불러 모은 병력이지 않은가. 훈련을 다른 사람이 했다고 해도, 사람의 기질이란 공유되기 마련이니까.
말하자면, 지금까지는 타라트라바 군을 두 방향에서만 공격하고 있었다.
정면에서 3개 연대의 보병이, 측면에서 슈토르히와 프리스마라 기병대가.
그 상태로도 적을 상당히 몰아붙여 적지 않은 수의 적 연대를 격퇴할 수 있었고, 그 반수는 사실상 와해되어 전선에서 탈락했다.
그럼에도 결정타를 입히지 못한 이유는 ‘든든한 모루 없이 망치만 두드리는 상황’ 이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지금껏 방어전만 벌이던 드 레뮤즈의 보병대가 진출을 시작했다.
두 방향의 공격이 삽시간에 세 방향의 공격이 되었다.
지금까지 타라트라바 보병대는 필요하면 공간을 내주고 피해를 줄이는 기동이 가능했다.
하지만 세 방향에서 압박이 시작된 이상 그럴 수 없어졌다. 여기서 물러선다? 곧바로 반포위로 몰리는 끔찍한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드디어 어린 거인이 잠에서 깨어났다. 그들은 확실하게 방심하고 있던 타라트라바의 2선급 부대들을 밀어내며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으니까.
어린 거인의 아가리는 첫 희생물의 머리를 부숴뜨리기 위해 착착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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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다. 반 걸음씩도 괜찮아. 적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적이 버리고 간 공간에 우리 영역을 착실히 넓혀간다고 생각한다.”
“알겠습니다, 아인멜츠 경.”
드 레뮤즈 영지군 최초로 공세 작전을 지휘하며, 아인멜츠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희열을 느꼈다.
전략전술을 체계적으로 가르쳐 유능한 군인들을 양성해내기로 유명한 자이트리츠 가문의 방계로 태어난 아인멜츠다.
원래대로라면 자이트리츠라는 이름조차 자칭할 수 없는 애매한 위치였다.
운과 노력, 그리고 어쩌면 재능까지 겹친 덕인지 선택된 자들만 입학할 수 있는 교육시설 ‘자이트리츠 전쟁관’에 합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 이후의 커리어는 썩 좋지 않았다. 유독 불리한 싸움에 많이 기용되었고, 전적은 승리보다는 패배가 더 많았다.
지형이든 병력이든 다소 불리한 것은 상관 없었다. 문제는 고용주의 이해할 수 없는 지시라는 악조건에 한쪽 팔이 묶인 상태로 싸우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렇듯 온전하게 대군을 운용하는 기회는 사실상 처음이 아닐까.
그것도 자신이 드 레뮤즈 가문에 고용되어 바닥부터 양성해낸 병력을.
자신의 고용주이자 주군인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이나, 사실상 대리 사령관인 트랑카벨의 에트 참모장이나 자신의 전문성을 신뢰하고 병력을 맡겨주었다.
고개를 돌려 말에 올라 전장을 지켜보고 있는 ‘총사령관’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의 옆얼굴을 바라본다.
땀을 뻘뻘 흘리고, 때로는 경련하면서도 말에서 내리기를 거부한 그의 병약한 주군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가문의 병사들을 바라본다.
지금까지 지키기만 하다가, 비로소 공격을 시작한 레뮤즈의 보병들.
겉 보기에는 대단해 보였으나, 공격을 당하자마자 바로 무너지기 시작한 타라트라바의 얕은 전열.
양군이 주고 받는 엄청난 포화와, 그 안에서 명멸해가는 젊은 목숨을 반드시 눈에 담아 두어야겠다는 듯.
자신을 ‘허수아비 보다도 쓸모 없다’라고 자조한 라몽 백작이지만, 그가 사령부에 도착한 이후, 눈에 띄게 드 레뮤즈 군의 사기가 올랐다.
전선으로 나서기는 커녕, 병사들을 격려하는 연설 한마디 없었다. 그저 성치 않은 몸으로 말에 올라 뒤에 서있을 뿐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드 레뮤즈의 장병들은 자신들의 주군이 사령부에 서자,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더 강해졌다.
콰쾅! 퍼엉!
“끄아아악!”
“빈 자리를 채워라! 멈춰서는 안 돼!”
“드 레뮤즈! 으아아아아!”
“전진! 전진!”
적 포탄이 아군 보병 대열을 쓸고 지나가며 대여섯명이나 되는 보병의 몸이 피를 뿌리며 튕겨나가자, 라몽 백작의 입가가 일그러진다.
그러나 끝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기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무슨 생각을 했건, 절대로 실망시킬 수는 없다. 라몽 백작도, 에트 참모장도 말이다.
“아인멜츠 경, 우측 연대는 전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 무리하지 말고 멈춘다! 적은 라솔과 타라트라바, 둘로 나뉘어 있고 라솔은 아직 기세가 강하니까.”
“옛,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이제 힘이 다 빠져 대열조차 유지하지 못하는 타라트라바와 달리, 라솔은 아직 강하다. 우측 끝을 지키고 있는 트랑카벨의 2개 연대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예비대를 파견한다고 파견했지만 도움이 얼마나 됐는지는 알 수 없다.
“기병대의 소베트르 경은 아직 소식이 없나?”
“아직입니다. 전령을 보내볼까요?”
“그럴 필요는 없다.”
“옛!”
소베트르 경이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분명, 서부군이 아직 전멸하지 않았으며 저 연기 너머에서 전투를 포기하지 않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베트르 경의 기병대가 맡은 임무는 서부군의 엄호 또한 있었으니까.
서부군이 아직 살아있다면 여전히 상당한 숫자의 라솔 군을 묶어두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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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솔 왕국군 소속, 이스키비르 하류 주둔군의 참모장 아드리아니 루코 데 가르자는 무거운 얼굴로 보고를 마쳤다.
타라트라바 군의 전선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내용이었다.
“...크루사다 공작 본인이 보낸 전령인가?”
보고를 들은 그의 사령관, 퀸토 로르카 데 페니베라다 변경백은 경악한 표정으로 반문한다.
“유감스럽게도 그렇습니다. 아군 진영에서··· 관측한 내용도 같습니다. 현재 타라트라바 전군은 예비대를 모조리 상실한 상태입니다.”
아드리아니의 말은 더 최악의 상황을 최대한 완곡하게 전달하는 것에 불과했다.
예비대를 모두 상실했다.
이제 적이 뭘 하든,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상황이 더욱 진전되어 이미 ‘당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 머저리는 버티는 것 조차 못한다는 말인가.”
그 머저리가 누구인지는 뻔했지만, 아드리아니는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 의미가 없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타라트라바에 지원군을 보낼까요? 변경백 각하?”
“지원군? 그런 병력이 지금 어디 있다는 말인가.”
그나마 지금 상황에서 다행인 점은 변경백이 여전히 침착한 모습을 보여주고는 있다는 점이다.
“타라트라바의 머저리들이 완전히 꽁무니를 빼기 전에, 적의 절반을 뭉개 놓아 전투를 원점으로 되돌린다. 그리고 남은 적과 싸운다.”
···생각보다 침착함을 잃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