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8. 생뢰르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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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방, 북서쪽에 엘랑키아 기병! 최소 1천 기 이상으로 보입니다!”
“뭐라고··· 갑자기?”
“깃발의 형태로 보아 적 우익 기병을 구원했던 병력이라 생각된다 합니다! 그렇다면 병력은 최대 2천 기가 넘을 수도 있습니다!”
“거기는 분명··· 우노스 연대의 잔존 병력이···.”
마티오 가엘 데 프라가도, 현재 라솔 군 최후의 공세를 이끌고 있는 검천사의 막내 연대장은 눈 앞이 캄캄해졌다.
그는 전력을 다해 정면의 완강하게 저항하는 적을 뚫어내려 하고 있다.
적은 겉보기에는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인다.
대열도 무너지고 병력의 숫자도 많이 줄어 대열에 구멍이 뻥뻥 뚫려있다. 장비나 복장도 통일되지 못해 별 볼일 없어 보이는, 궤멸 직전의 패잔병으로 보이기도 한다.
허나 그렇게 밖에서 보기에는 너덜너덜하고 붕괴 위기에 처한 것으로 보여도, 이들은 라솔 최고의 정예군의 공격을 최소한 여섯 번 막아냈다.
마티오는 연대장이 된 이후, 아니 그 전에 퀸토 변경백 휘하에서 중견 장교로 복무하던 시절에도 우노스 연대가 그렇게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을 처음 보았다.
중상과 경상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멀쩡한 병사가 한 명도 안 보일 정도로 심각한 병동이 된 연대 지휘소.
수 많은 전투에서 전공을 세우고 훈장을 받은 백전연마의 베테랑들이 탈진하여 몸도 가누지 못하는 모습, 입가에 흐른 침도 닦아내지 못하는 모습을 말이다.
저 너덜너덜한 적군의 대열이 그렇게 만들었다. 라솔 최강의 전투 부대를 반신불수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빌어먹을···.”
마티오는 망설였다.
지금 그에게 남은 카드는 딱 두 장 있었다. 결사대의 제3열과, 마지막 제4열이 그것이다.
이들은 우노스와 코루냐 연대에서 쓸만한 전력을 탈탈 털어서 편성해낸 말 그대로 최후의 돌격대이다. 눈 앞의 저 저주스러운 엘랑키아 보병대를 돌파할 마지막 일격이다.
허나 후방을 들이친 적 기병을 이대로 방치해도 괜찮은가.
아군 대열을 유지한 이후에야, 적진 돌파가 의미가 있는 게 아닌가?
현재 결사대 제1열과 제2열의 공격은 성공적으로 적진 깊이 박힌 상태이다.
그들의 목적은 한계까지 짜내 싸우고 있는 적군을, 다시 한 번 한계까지 몰아내는 것이다.
그 목적은 성공하고 있었다. 마티오가 파악하기로, 이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았을 얇디 얇은 적 방어선은 예비대를 모조리 소모했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지원군은 심지어 말에서 내린 하마 기사대라고 한다.
분명 후방에 대기하고 있던 마지막 예비 기병대거나, 혹은 사령부의 호위대겠지.
그만큼 급박한 것이다.
그렇겠지, 당연히 그래야지.
이스키비르 하류 주둔군의 검천사들이 이만한 희생을 지불한 전선이다. 그걸 정면으로 받아낸 적 역시 멀쩡할리는 없다.
허나 남은 제3, 4열을 이대로 투입해도 되는가?
아무리 공격 일변도의 상태라지만 공세의 축이 되는 본진을 내어 주어서야 결사대의 돌격이 성립되지 않는다.
“연대장님, 명령을 내리시겠습니까?”
“음··· 제3열에게 명령 전달을···.”
“옛, 어떤 명령이십니까?”
지금은 제3열을··· 후방 지원용으로 쓸 수밖에 없나···.
현재 엘랑키아 기병에게 습격당한 ‘후방’에는 우노스 연대가 있다. 평소라면, 검천사의 맏형 연대이자, 라솔의 최정예라는 자부심에 걸맞게 자력으로 격퇴했겠다.
허나 지금의 우노스는 거듭되는 정면 공세에 소모당할 대로 당한 이후, 그나마 남은 핵심 전력을 마티오의 최후의 돌격대에 넘겨준 잔존 병력이다.
거의 절반은 부상병이고, 상당수가 탈진했을 것이다. 썩어도 준치라고 어느 정도는 버티겠지만 자력으로 적 기병의 공격을 견디지는 못하리라.
하물며, 무턱대고 돌진해온 엘랑키아의 기사들을 공들여 준비한 함정에 빠뜨려 섬멸시키기 직전에, 그들을 구해간 기병대라지 않는가.
복장이나 무기가, 통상적인 엘랑키아 기사들처럼 화려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신분이 낮은 향사나 종사 중심의 기병대일수도 있고, 용병일지도 모르지. 허나 전장에서 그 따위 구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기병은 최소한의 갑주만 갖추고, 일정 속도 이상의 기동성을 갖추었으면 됐지. 그 다음은 똑똑한 지휘관 머리에 맡기면 된다’
퀸토 로르카 데 페니베라다 변경백이 자신의 스승에게 들은 말이라고 한다.
허나 안타깝게도 하류 주둔군은 그만한 기병대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 그만한 비용이 있다면 보병 연대를 하나 더 창설하겠다··· 가 사령관인 퀸토 변경백의 의지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적 기병을 보병으로 막아야 한다.
특히, 결사대 제3열은 상당수가 라솔 군 복무경험이 긴 베테랑 장교와 부사관들로 이루어져있다.
개개인이 강력한 전투원이기도 하지만 소부대를 편성해 지휘하거나, 이미 대열이 무너져버린 병력을 재건해 새롭게 방어선을 만들어내는 것에도 전문인 자들이다.
이번에도 우노스 연대에 지원을 보낸다면 확실히 자신들의 숫자 이상의 역할을 해낼 것이다.
···그만큼 현재 마티오의 임무인 적진 정면 돌파는 힘들어지겠지만.
그래도 제1, 2열이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었고, 가장 강력한 제4열이 남아있다. 전선의 안정성을 생각한다면 그 수가 나았다.
안정성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돌파 작전에 문제가 생긴다면 어쩔 것인가.
그렇다면 라솔 군 전체가 위기를 감수하고, 시도하는 이 최후의 돌파 작전이 의미가 없어진다.
이미 타라트라바 군은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여기서 라솔까지 전술적 목표를 이루지 못한다?
아군의 완전 패배.
마티오 연대장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마른 침을 삼킨다.
돕는다면 간신히 쪼개가며 마련한 전력이 손실되어 돌파 성공 가능성이 더욱 떨어진다.
돕지 않는다면 우노스 연대가 복구 불가능한 피해를 입을지도 모르고, 본진이 침범당하면 돌파 작전 자체가 의미 없어질지도 모른다.
“제3열은 공격에서 빠져 우노스 연대를 지원한다.”
“그,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즉시 전달을···.”
명령을 내리는 마티오 연대장이나, 명령을 전달하는 연대 작전 참모나 아쉬운 표정이다.
양쪽 모두 알고 있다. 어느 쪽을 정답이라고 할 수 없으며, 나머지 하나도 오답은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지금은 선택해야만 했다. 정답은 아니더라도, 오답에 가깝지는 않은 것을.
“전령! 전령! 참모장 아드리아니 경이 보낸 전령입니다!”
“참모장이?”
이상한 일이었다. 통상 이스키비르 하류 주둔군의 참모장은 퀸토 사령관을 보좌한다.
때문에 대부분의 명령은 사령부에서 발령한 것으로 나온다. 허나 참모장이 따로 명령을 내렸다면, 현재 사령관과 참모장은 서로 다른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인가.
“아드리아니 참모장께서 마티오 연대장께 전령을 보내셨습니다!”
“내용은?”
“전령! 코루냐 연대는 사령관께 받은 공세 작전에 주력할 것! 아군 지원을 위해 병력을 나누는 것을 금함! 아군 지원은 하류 주둔군 사령부가 하겠다! 이상!”
“...뭐라고?”
내용 자체는 반가운 말이다.
뒤를 봐 줄테니, 너는 정면의 적만 보아라.
야전 지휘관에게 이보다 더 기쁜 명령은 없다.
허나 가능한 일인가? 마티오의 코루냐 연대부터가 후방을 지키다 전방의 병력 부족으로 인해 불려온 입장이다.
다른 예비대라고 해도 뾰족한 수가 없으리라 생각되는데, 참모장은 어디서 병력을 만들어낸 것일까.
“다른 예비대가 있었나? 참모장은 어디서 병력을 찾아온 것이지?”
“옛, 할콘 남작의 기마 용병대가 전선에 복귀했습니다!”
“그 인간이 다시 돌아왔다고?”
사령부 전령 앞에서 ‘그 인간’이란 표현을 쓴 것이 잠시 후회되었지만, 너무 놀라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할콘 남작의 기병대는 초반에 엘랑키아 기병대를 유인해서 함정이 빠뜨리는 데 활약을 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기병대는 전장을 빠져나갔으며, 적의 우익을 궤멸시키는데도 실패했다.
그 이후 할콘 남작은 병력을 이끌고 언덕 너머로 퇴각해 전장을 관망만 할 뿐, 마치 자기 역할은 끝났다는 식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다시 전장으로 되돌리는데 성공했다니··· 아무나 참모장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새삼 든다.
본래 연대장들은 ‘새로운 일을 저지르자’고 건의하는 편이고, 참모장은 이를 막는 역할이다. 때문에 서로 적대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썩 편안한 관계가 아닌 것은 사실이다.
개인적인 불화가 있을지라도 참모장의 전문성에는 일말의 의심도 한 적이 없다. 지금도 이만한 역할을 보여주고 있으니까.
“좋다! 참모장께 전해라!”
“옛!”
“전령! 사령부의 지원에 감사한다, 코루냐 연대는 이대로 공격에 전념하겠다,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벌써 최소 2분은 지체되었다. 이렇게 된 이상, 카드를 숨길 필요도 없겠지.
“제3열을 투입하고, 바로 이어서 제4열을 투입한다!”
“옛, 어디로 보냅니까?”
“제3열은 제1열이 공격한 지점의 바로 오른편, 그리고 제3열은 다시 명령하겠다.”
“준비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멈추었나 싶었던 전장의 시계가 다시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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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타타탕! 타타탕!
“으으윽!”
“멈추지 마! 적이 대열을 갖추면 더 위험하다!”
타탕! 타다다당! 타타탕!
“화력은 우리가 위다! 이대로 밀어붙여!”
“이야아아아아!”
“제10 카르카냑! 물러서지 마라!”
전장에 깔린 들풀이 피에 젖어 미끌거릴 정도로 참혹한 전장에서, 양군은 마지막 안감힘을 짜내 싸움을 거듭하고 있다.
워낙 서로 죽거나 다친 병사가 많이 나와, 전선의 밀도가 옅어진 듯 했으나, 새로운 병력이 추가되면서 다시 전투는 격렬해졌다.
새로 투입된 병력은, 방어측에는 제31 정찰 연대의 총기병들이 말에서 내려 달려왔다.
역으로 공격측은 결사대 제3열이 투입되었다. 근접 무기와 사격 무기 모두에 익숙한 베테랑 전사 250명이 투입되자 전선이 삽시간이 밀리기 시작한다.
“지원은 소대 단위로!”
“알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소대장 판단에 따라 그대로 남아서 아군을 지원하라! 본진은 어떻게든 하겠다.”
“옛, 연대장님!”
이제는 소대원이 한 명도 없는 총병 소대장 얀 고티에는 오늘 벌써 몇 번째 바뀐 무기인지도 모르는 화승총을 장전하며 숨가쁘게 오가는 명령을 듣고 있었다.
그의 등 뒤에는 원래 전사한 거의 동료, 드레소 비타가 사용하던 중화승총이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아군을 지원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은 전장에서 노획한 여분의 화승총이다.
결국 적의 저격수를 찾아내는 데엔 실패했다. 적의 관측수로 보이는 자를 조준하고 쏘기는 했으나 명중 여부는 알 수 없었다.
허나 그 이후로 그 특유의 ‘빠칵’ 하는 탁한 총소리는 들리지 않고 있다. 최소한 이 주변에서는 말이다.
어쩌면 자신이 맞춘 게 관측수가 아니라 무기를 내려놓고 표적을 살피던 저격수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이 싹트고 있었다.
하지만 모르는 일이다. 적은 단순히 사격을 멈춘 것일수도 있고, 잠시 자신의 모습을 숨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예전에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의 연대장 대리를 맡기도 했던 모리츠의 교육을 좀 더 진지하게 들을걸 그랬다.
어차피 자신이 저격까지 하게 될 일은 없다 생각하며 적당히 흘려 들었던 과거의 자신이 때려주고 싶을 만큼 저주스러웠다.
분명 저격의 조짐을 파악하고, 적이 있을 법한 장소를 훑어보는 요령도 있었는데 말이다.
결국 지금은 평범한 한 명의 화승총 사수로서, 그나마 시야가 좋은 장소이며, 중요한 표적인 로베르 연대장 부근에서 행동하고 있다.
오늘 너무 많이 썼기 때문인지, 검지와 엄지 사이의 얇은 피부가 찢어질 듯 아파왔다. 꾹 참고 격철을 당겨 장전을 마무리한다.
타앙!
또다시 적진으로 총알 한 발이 빨려 들어갔다. 이번에도 명중 확인을 하지 않는다. 곧바로 뜨거운 총구에 꽂을대를 쑤셔 넣을 뿐.
“새 공격이군··· 드로브테 경의 남은 중대를 전부 보낸다.”
“옛, 연대장님!”
이제는 사실상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 방어선의 지휘를 하고 있는 제31 정찰 연대장 로베르 드 나뵈프.
그리고 그 옆에서 코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장중한 자세로 연대기를 붙잡고 있는 이는 지빌링엔 연대의 이름 모를 빈더갈렌 출신 병사이다.
참고로 코피가 난 이유는, 바로 근처까지 접근해온 라솔 군 보병의 콧잔등을 박치기로 멋지게 깨 버렸기 때문이다.
기묘하게도, 연대장도, 연대 기수도 제10 카르카냑 출신이 아니다.
아마 병사들도 지금은 거의 절반 가까이는 외부에서 온 지원군일 것이다.
그만큼 오랫동안, 치열한 전투에서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는 거듭해서 싸워오고 있었으니까. 얀은 혼란 통에 떨어져 버린 자신의 부하 소대원들이 제발 무사하기를 빌었다.
“어어어? 뭐지?”
“새로운 적입니다! 설마 적 본대가···.”
이 지경이 되어서도 빠릿빠릿한 새 병력이 있는 것인가.
얀은 지금까지 최소 여섯 차례는 적의 공격을 격퇴했다. 그런데도 끝없이 몰려오다니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조차 든다.
“예비대는 얼마나 남았지?”
“이제 2개 소대 뿐입니다, 연대장님!”
“흠··· 이제 지휘부도 지휘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상황이군.”
“...참모와 호위병들에게 전투 준비를 시키겠습니다.”
“그래주게. 그리고 아까 찾아왔던, 얀 이라는 이름의 실력 좋은 총병 소대장을 불러주게.”
얀은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명령을 내리던, 따를 수 밖에 없다.
무표정한 로베르 연대장과, 다소 일그러진 얀 소대장의 얼굴이 마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