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9. 승리자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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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웅! 파가각!
콰자자작!
“어이쿠!”
“조심해! 총 떨어뜨리지 마라!”
작은 배가 심하게 흔들릴 때마다 병사들의 몸도 널뛰기한다. 노잡이들이 허우적거리며 한 번 손에서 떠났던 노를 잡아 배를 진정시킨다.
총병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좁아터진 배 위에 서거나 쪼그리고 앉아 균형을 잡으려 노력한다. 이렇게 밀집도가 높은 상황에서 화약이 폭발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이러다 배가 망가지는 거 아닙니까?”
총병 소대장 멜디크가 긴장한 표정으로 묻는다.
“허허허, 아마 계속 이러면 조만간 못 쓰게 되겠지요?”
“아니,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그래도 그때까지는 떠 있을 겁니다! 그리고 배 바닥이 강 바닥에 닿는다는 건 빠져 죽을 깊이는 아니니까 안심하세요.”
“허어···.”
배의 고참 노잡이이자 물길 안내인인 알레지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답하자, 소대장 멜디크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드 레뮤즈 하상함대 3번함은 지금 이스키비르 강의 상류 방향으로 계속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계속 배와 강바닥이 부딪치는 것이다. 보통은 그냥 긁히는 소리만 나지만, 아주 가끔은 배가 쪼개지는 것은 아닐까 요란한 소리와 함께 요동친다.
그러거나 말거나, 배는 멈추지 않는다. 애초에 그럴 각오로 자원한 상류행이다.
“평소였다면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느라 죽을 고생을 했을 텐데, 물의 양이 적어서 배가 잘도 나아가고 있습니다, 도련님.”
알레지의 말에 함장인 세트리 파레도는 표정이 좋지 않다.
“...평생을 물가에서 살았는데 물이 빠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멍청했군.”
“하이고, 도련님. 우리가 평생 물가에서 살았어도 하류는 별세계 아닌가요. 알아보지 못한 것도 당연한데요!”
“그래도 뱃놈들이 알아보지 않으면 누가 알아보겠나. 그리고 함장이라고 부르게!”
“예에, 예에.”
가문의 늙은 고용인이자 무장병인 알레지는 어린 주인의 면박에도 싱글벙글 웃는다.
“음, 이쯤이면 시간이 됐군. 연기를 피우도록 하지.”
“옛, 시작하겠습니다.”
얇은 철판으로 만든 작은 연통 안에 노끈으로 단단히 감긴 작은 주머니를 넣고 불을 옮겨 붙이자, 새까만 연기가 피어 오르기 시작한다.
강 위에 떠 있는 하상 함대로서는 육상의 아군에게 연락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이쪽 강변은 행군하는 적이 바글바글하며, 반대쪽 강변은 말 그대로 적의 영토니까.
저번처럼 정말 필요한 연락이 있다면, 밤에 몰래 목숨을 걸고 강변에 상륙해 몰래 적진을 지나는 방법이 있을 뿐이다.
매일 같은 시간에 피워 올리는 이 검은 연기는, 현재 적과 나란히 항해하고 있는 하상 전투함의 위치가 어디있는지 아군에게 알리는 신호이다. 당연히 사전에 약속된 행동이다.
세트리는 적의 보급부대 하나를 잡아, 나란히 항해하도록 주의했다. 이는 적의 행군 속도를 알리는 신호 또한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상류로 갈수록 행군 속도를 따라 잡는게 어려워졌다. 기껏해야 보병이 걷는 속도인데 말이다.
그나마 물이 깊은 곳을 찾아 이리저리 이동하고, 그래도 상류라고 유속이 점점 빨라졌기 때문이리라.
타앙! 탕!
“사격? 숙여!”
“엎드려!”
타타탕! 타타타탕!
시끄러운 총소리가 연달아 울린다. 놀란 탑승원들이 모두 상체를 숙이거나 쪼그려 앉는다.
···하지만 총탄에 날아오는 일은 없었다.
총격의 표적은 그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파파팍! 파팍!
따다다닥! 타탕!
표적은 그들 뒤에서 따라오는 하상함대 1번함이었다.
3번함과 함께 상류로 향하는 2척의 배 중 하나였는데, 세트리와 알레지가 이 주변 수로에 대해 잘 안다는 이유로 선두에 선 것이다.
주의깊게 3번함의 뒤를 따라오기로 되어 있었지만, 뭔가 실수를 했는지 너무 강변에 가까이 다가갔다가 적에게 총알 세례를 받은 모양이다.
다행히도 배의 측면에는 이 정도 거리에서는 충분히 방탄 성능을 기대할 수 있는 판자가 붙어 있었기에 크게 위협은 되지 않았다.
그래도 계속 타격을 받다보면 언젠가는 판자도 부서질지 모른다. 무엇보다 강 폭이 점점 좁아지고 있다.
“조심하되, 속도는 유지한다.”
“예.”
함장 세트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 전부터 강 건너편에서 이쪽을 살피고 가는 자들이 늘고 있었다.
평범하게 강변에 사는 주민들이 호기심에 나와 보는 것일수도 있지만, 이렇게 요란하게 교전까지 벌어지는 이상 라솔의 정찰병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했다.
자신들도 밤에 몰래 사령부로 전령을 보냈었다. 적도 전령 몇 명 쯤은 얼마든지 강을 건널 수 있었으리라.
생각보다 위험한 임무가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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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타타탕! 타탕!
“사격? 전투가 벌어졌나?”
“강에 떠 있는 적의 배를 아군이 공격한 모양입니다.”
“흐음··· 날파리 같은 녀석들, 아직 따라오고 있었군.”
퀸토 로르카 데 페니베라다 변경백은 부하의 보고에 눈살을 찌푸렸다.
저 날파리, 무장한 나룻배들은 계속 신경에 거슬린다. 주기적으로 연기를 피우는 것을 보면 뭔가 본군에 신호를 보내는 모양이다.
어차피 서로 위치를 아는 상황에서 큰 의미가 있나 싶기는 하지만, 자꾸 예민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라솔 왕국군의 이스키비르 하류주둔군 사령관이자, 이번 침공군 전체의 부장이라고 할 수 있는 그는 책임을 지고 전군의 후위를 담당하고 있었다.
공격할때 전군의 선봉은 위험하지만 화려하고 주목받는 자리이기라도 하지, 퇴각할때 전군의 후위는 고통스럽지만 인정받기도 쉽지 않은 자리이다.
모두가 피곤한 와중에도 수고스럽게 정찰병을 사방으로 보내 적을 탐색한다.
적 주력이 대략 하루 반 정도 거리 너머에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금도 안심할 수는 없었다.
혹시 후방의 적이 간밤에 잠을 자지 않고 거리를 좁히지는 않았나?
우회 부대를 보내지는 않았나?
측면에 매복한 새로운 적은 없나?
온갖 의심에 어느 방향을 보고 있어도 뒤통수가 땡긴다. 마치 그 방향에서 누가 노려보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판이니, 밤에도 충분히 자지 못하고 악몽에 시달렸다. 어제 밤에 꾼 꿈은, 새벽 일찍 안개 속을 걷다보니 방향을 잘못 잡아서 어느덧 적진 한복판에서 소스라치게 놀라는 내용이었다.
타라트라바의 공작과 협의하여, 상류행을 정했을 때 내심 적이 원하는대로 움직여주기를 바랐었다.
만약 적장이 주의깊지 못한 인물, 혹은 전공을 서두르거나 상관들에게 압박받는 인물이라면 이기고 있다는 생각에 실수를 저지르리라 생각했다.
아마도 적장은 라솔 군이 병력이 대부분 출격해 무주공산이 된 드 레뮤즈 백작령을 공격한다 판단할지도 모른다.
100퍼센트는 아니지만, 지금도 퀸토 변경백의 머리속에 그 생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한 번 패했다고는 하나, 퀸토 변경백 휘하의 라솔 군과 타라트라바 군을 합치면 1만 가까이 되는 기병과 보병이다.
대부분 전투에서 망실하기는 했지만 소수이나마 포병도 보유하고 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작은 요새나 지방도시 정도면 반나절이면 충분히 함락할 수 있다.
아마도 엘랑키아 남부 전체에서, 그들의 꽁무니를 쫓아오는 적을 제외한다면 이 병력을 막을 수 있는 야전군은 없겠지.
어지간한 도시라고 해도 자력으로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병력을 분산해서, 동시다발적으로 적의 거점들을 공격, 약탈하고 불태우며 적의 신경을 분산시키는 전략도 생각할 만 했다.
일이 잘 풀린다면 당황한 적에 대해 부분적으로나마 전술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을런지도 몰랐다.
다만 그러려면 적이 최소한 두가지 실수 중, 하나 정도는 저질러주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첫번째, 드 레뮤즈의 백작에게 압박당한 적장은 추격 대신 영토 방위를 위해 병력의 전부, 혹은 일부를 보내는 것이다.
그럼 당연히 퀸토 변경백 휘하의 원정군이 받는 압박은 크게 줄어들 것이 분명하고, 그냥 강 건너 퇴각하면 그만이다.
두번째는, 마찬가지로 라솔 군의 행동에 불안함이나 압박감을 느낀 끝에, 무리해서 추격해오는 것이다.
후위 부대를 계속해서 공격해오고, 우회 공격을 통해 퇴각 대열의 허리를 자르려고 하는 등의 행동 말이다.
하지만 이런 형태의 추격은 패전 직후 혼란스러운 상황이면 몰라도, 한번 전열을 가다듬은 라솔의 베테랑들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특히 기동성 때문에 기병이 동원 될 가능성이 높은데, 아무리 퇴각중인 적이라 해도 준비된 보병에 대한 기병 공격은 큰 위험을 수반한다.
퀸토 변경백이 후위에 라솔 군을 배치한 것은 그런 습격을 대비한 것이기도 하다.
퇴각하면서 후방을 지키는 것은 힘든 싸움이겠지만, 자신 있다. 퀸토 변경백 자신도, 그를 따르는 고참 장교들과 병사들도 말이다.
그 뿐 아니라, 갈수기로 폭이 좁아진 강을 기습적으로 건너는 것이나, 적지에 스며들듯 흩어져서 사방을 파괴하고 불태우는 초토화 전술도 자신있었다.
어느 쪽이든 적이 약간만 실수를 해주면 곧바로 실행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빌어먹게도 적은 둘 중 어떤 잘못된 선택도 하지 않았다.
후위를 지키며 낙오병들을 수습해 합류한 코루냐 연대의 보고에 의하면, 일부 충동적으로 뛰쳐나온 적이 없지는 않았으나 적은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
게다가 상류 방향으로 행군로를 정한 이후에도 전혀 동요하는 모습이 없었다.
게다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적의 전투선이라니! 미리 퇴로를 차단할 때를 노리고 준비한 것인지.
겨우 십수명 정도 타는 손바닥만한 배가 무장을 해봤자 결정적인 위협은 아니다.
하지만 평소에 능숙하게 하던 일도, 방해가 생긴다면 어그러지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는 적을 후방에 둔 도강작전이 그렇겠지. 더 이상 병력을 잃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그렇고 계속 위화감이 든다.
설마 적은 빌어먹을 영주들의 연합군이 아닌 것인가!
확인된 것만 해도 드 몽파르지에의 공작, 레뮤즈의 백작, 대귀족이 둘이나 있지 않은가. 그 중 하나의 영토를 공격당한다는 데 어떻게 반응이 전혀 없을 수가 있지?
엘랑키아의 대귀족은 라솔의 대귀족들에 비해 영토나 권력이 비교도 못할 정도로 강하다고 하지 않던가.
설마 드 몽파르지에의 공작이 백작급은 휘어 잡을 정도로 대단한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이었던가?
하지만 얼마 전 패전에서, 어이가 없는 졸전을 벌이며 순식간에 밀려났던 것은 드 몽파르지에 공작 휘하의 병력이었다.
설마··· 그 조차도 함정이었다는 말인가! 상대를 방심하게 만들기 위한?
약병에게 자신의 문장기를 맡겨 마치 주력인 양 위장하고, 자신은 비밀리에 강병을 이끌고 함정에 빠진 적을 타격한다?
드물지만, 전례가 없었던 일은 아니다.
허나 대귀족에게 자신의 가문 깃발을 내리거나, 남에게 빌려준다는 것은 실로 수치스러운 일이다.
하물며 엘랑키아 전체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의 대귀족이라면 더욱 그렇겠지.
전투 초반에 사로잡은 포로가 몇 있어 신문했으나 직위가 낮아서 그런지 지휘체계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누군가는 드 레뮤즈 백작이 총사령관이라 했고, 누군가는 드 몽파르지에 공작이 총사령관이라 했다.
그렇다. 퀸토가 아는 엘랑키아의 군대란 늘 그런 지휘권 다툼이 있어왔다.
국왕이 직접 지휘하지 않는 한 말이다. 아니, 가끔은 국왕의 친정군 조차도 지휘 난맥에 시달리곤 했었지.
그런 상황에서··· 그런 기만적인 지휘가 가능하다는 말인가?
아니··· 어쩌면 그 정도로 철저하게 승리만을 추구하는 냉철한 인간일지도 모른다. 가문의 명예에 다소 흠이 가더라도 조금이라도 유리하다면 실행해 버리는.
문득 라솔의 디오고 국왕 폐하가 생각난다. 폐하께서는 이웃나라나 봉신국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그런 기만책을 여러차례 쓰셨다.
그 결과로 한줌 비난하는 자들이 없지는 않았으나, 결국 승리자는 디오고 폐하였고 영광스러운 라솔은 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지 말아야겠다.
퀸토 변경백이 드 몽파르지에의 이름을 잊지 않기로 되새기는 와중, 참모의 외침이 그를 부른다.
“사령관 각하! 선두의 크루사다 공작 전하께서 전령을 보내셨습니다.”
“내용은?”
“전령! 전방에 적이 설치한 것으로 통나무 장애물이 보임. 치우고 전진 중! 조잡한 형태로 보아 중앙군이 설치한 것이 아닌, 지역 주민들의 방해공작으로 보임! 이상입니다.”
“장애물 바리케이드라도 있는건가?”
“아닙니다, 도끼로 베어 쓰러진 나무들을 길에 올려 둔 모양입니다.”
“흠···.”
단순히 통나무를 여럿 늘어 놓았을 뿐이더라도, 이걸 치우려면 시간과 인력이 든다.
치우지 않고 건너가는 경우, 보병은 몰라도 기병은 좀 불편하고, 수레는 전혀 지나갈 수 없다.
확실히 그 정도라면 적이 조직적으로 한 방해는 아닐 가능성이 있었다. 주민들 입장에서는 적국의 대군이 자기네 지역으로 들어오니 불안하기도 했겠지.
“알겠다. 크루사다 공작께 지역 민간인들은 가급적 건드리지 말라 한 것을 다시 상기시켜 드리는 전령을 보내도록.”
“알겠습니다!”
주민들 입장에서야, 섬기는 주군이 다를지라도 결국엔 타 지역 군대가 와서 타 지역 군대와 싸우는 꼴이다.
그러니 반감을 가지지 않도록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다. 반감을 가진 주민들의 방해 공작이란 가끔 기상천외하게 통과하는 군대를 괴롭히는 법이니까.
이 정도라면 아직은··· 괜찮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