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1. 승리자의 영광
지형에 대해 묻는 콘도티에레의 질문에, 라마엘은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생각이 나지 않았다거나, 일부러 극적 연출을 노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잊는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분명히 죽는 그 날까지, 어쩌면 무덤까지도 함께 가져갈 기억이다. 미리 지켜내지 못했다는 후회와 함께겠지만.
그저, 이 청년 기사의 가슴 속에서는 그 잊지 못할 마을의 이름을 다시 말하려고 하자 뜨거운 무엇인가가 뛰쳐나오려고 했기 때문이다.
‘...로그포르 마을 주변에 그런 지형이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여기에 이렇게···.’
콘도티에레는 바닥에 쓱쓱 그림을 그리며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시간은 겨우 3분 정도. 지시사항 자체도 간단하여 어린아이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드 레뮤즈 백작가의 주요 거점 성채들은 나름의 방어 준비를 이미 하고 있었다.
전쟁 준비를 위해 훈련이 한창인 동안 트랑카벨 출신의 참모들이 영토 전역을 돌아다니며 방어를 준비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해도 여전히 대군인 라솔의 잔존 병력을 요격할만한 야전군을 편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그런 시도를 하다가 있는 방어력마저 털어먹는 실패를 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라마엘이 맡은 임무는 심플했다.
- 적의 행군로를 예상하여 현지 영주들과 상담해 주민들을 대피시킬 것
- 인력이 허락하는 한, 목재를 조달해 바리케이드를 만들 것
- 바리케이드는 가능하면 여러개를 만들고 불을 질러 적의 행군을 방해할 것
- 절대 직접적으로 적과 전투하는 것은 피할 것, 특히 현지 주민들을 위험에 빠드리지 말 것
라마엘이 주요 거점에 전령들을 보낸 후,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시간이 빠듯했다.
이미 적이 이쪽을 향해 오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피난을 시작한 지방 영주들도 적지 않으니까.
다만 한가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있으니···.
강변 지역 주민들이 라솔 침략군에 대해 가진 공포심 만큼이나, 증오심과 복수심이 강했던 것이다.
누구보다도 먼저 로그포르 마을에 도착해 그 참상을 확인하고 라몽 드 레뮤즈 백작에게 알렸던 라마엘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불안함과 두려움, 분노와 복수심에 술렁거리던 주민들은, 멀리서 온 기사님이 ‘자신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기뻐했다.
그리고 그들이 의기투합하는 데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본래 콘도티에레와 라마엘이 의논하던 시기에는, 인력을 빌린다고 해도 주변 영주들의 가신들이나 경비대 중에서 일부를 소집하는 정도가 아닐까 추측했었다.
대략 수십 명을 모으면 적에게 방해가 될 수 있을 정도의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불을 지를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정 인력이 부족하면 가지고 있는 은화를 써서라도 피난민 중에 장정들을 고용하려고 했었을 정도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좋은 의미로 예상을 벗어났으니까.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해 800명을 넘는 인력이 자진해서 이틀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력으로 나무를 모으고 ‘장작더미’를 쌓아 올릴 줄은 몰랐다.
그 결과가, 지금 라마엘의 눈 앞에 펼쳐진 거대한 화염의 장벽이다. 라솔 군의 행군을 가로막고 있는.
“불, 불 꺼!”
“시팔 안 보이잖아! 너희는 괜찮냐!”
“무슨 짓을 한 거야?”
“반대편에 적이 있다, 조심해!”
멀리서 들리는 온갖 고함소리는 장작이 타오르는 타닥소리에 묻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라마엘은 마지막까지 꼼꼼하게 장벽에 불을 지르던 종자가 말에 오르고서야 나란히 출발했다. 그들은 강변을 따라 달리는 대신, 적의 시선을 피해 내륙쪽으로 달린다.
라마엘은 숲 속으로 사라지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말을 돌려 달려온 방향을 바라본다.
하늘로 치솟는 시커먼 불타는 연기 너머로, 끝도 없이 이어진 라솔 군의 행군 대열이 보인다. 최소한 몇시간 정도는 저기서 꼼짝 없이 발이 묶일 것이다.
물론 강 쪽으로 우회한다면 지나갈 수야 있겠지만 저만한 대군이 전부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라마엘 경, 안 가십니까?”
“으음, 간다. 곧 따라갈게.”
이 전쟁에서 자신의 역할이 여기서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묘하게 시원함과 섭섭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만약에라도 적이 불타는 바리케이드를 넘어 도망친다면, 그걸 추격하는 것은 그의 임무가 될 터였지만.
그건 적을 집요하게 추격하고 있는 주력군의 활약 여하에 달린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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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군 대열이 멈췄다고?”
“송구하오나··· 그렇습니다.”
이스키비르 강을 건넌 라솔과 타라트라바 전군의 총사령관, 크루사다 틴토 데 타라트라바 공작은 보고를 받고 얼어붙었다.
조금만 더 가면, 강을 건너 라솔 땅으로 돌아가기에 적절한 여울이 나올 터였다.
라솔 군 사령관 퀸토 로르카 데 페니베라다 변경백은 이대로 돌아가지 않고, 전쟁의 원인이 된 라몽 백작의 영토를 습격하고 싶은 마음이 내심 있는 모양이지만···.
크루사다 공작 자신은 그러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최대한 빨리 안전한 라솔 영토로 돌아가고 싶었다.
가신들과 병력의 손해가 너무도 컸고, 정신적으로도 심하게 지쳤다. 이 상태로 큰 성과도 없을 위험한 전투를 이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오로지 강을 건너, 한 명이라도 병력을 온존해 타라트라바로 돌아가는 것, 오로지 그것이 목표였다.
비록 배는 없지만, 좀 더 얕아지거나 좀 더 좁아진다면 보병도 자력으로 충분히 강을 건널 수 있다.
비가 오지 않은지 한참 됐을 뿐더러, 매일같이 뙤약볕이 내리쬔 덕분에 이스키비르 강물이 말라붙을 지경인 덕분이다.
이는 실로 하늘의, 주신의 도움이다.
주신께서는 아직 타라트라바를, 라솔을 버리지 않았다 생각하며 종군 사제와 함께 감사의 성사를 진행한 것이 바로 엊그제였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크루사다 공작은 서둘러 병력을 앞질러 행군 대열의 선두로 향했다.
확인하러 끝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멀리서도 활활 타오르는 불의 벽은 잘 보였기 때문이다.
병사들이 줄지어 서서 강물을 떠서 벽에 뿌리거나, 끝이 뾰족한 갈고리로 장작더미를 무너뜨리려 애처롭게 노력하고 있었으나 누가 봐도 큰 의미는 없어 보인다.
분명 저 불은 양껏 타서 자기가 알아서 꺼질 때 까지는 꺼지지 않으리라. 그 이상을 기대하긴 힘들었다.
“이건 대체··· 어느 틈에 이런 걸 만들었다는 말인가?”
“저, 저희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전하.”
“우회로는? 우회로는 없나?”
급한대로 병력이라도 계속 나아가야 했다. 다행히 이 직전 바리케이드는 그렇게 통과할 수 있었다. 설령 짐들을 버리더라도 나아가야만 했다.
“바위언덕 너머로는 숲과 늪지대가 이어져서 대군이 통과하기 어렵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남은 건 강물 쪽인데···.”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역시나 숨이 턱 막히는 정보였다.
강물 쪽으로, 가뭄에 바닥을 드러낸 비탈지고 울퉁불퉁한 사면과, 아직 물이 고여있는 강바닥을 통과하면 되긴 한다.
보병도 기병도 건널 수는 있겠다. 평지를 걷는 것에 비해 시간은 훨씬 많이 걸리고, 수레는 전부 버려야겠지만···.
하지만 그 다음에는?
보급품도 없이 거지꼴로 드 레뮤즈 백작령을 약탈하러 가야 하나?
차라리 무리해서라도 여기서 강을 건너는 시도를 하는 것이 좋을까?
불이 꺼지는 것을 기다려야 하나? 직전의 바리케이드조차 아직 불이 꺼지지 않았는데··· 이 정도 규모의 장작더미가 얼마나 갈지는 상상도 가지 않았다.
빌어먹을.
이대로 끝날리가 없다. 이 전쟁은 주신의 명령을 지상 대리하는 전쟁, 정의의 전쟁이다.
“하류주둔군의 퀸토 변경백에게 전령을 보내야겠네.”
“알겠습니다, 전하.”
“아니, 내가 직접 가겠다. 여기는 최대한 불을 끄기 위해 노력하고, 혹시 모르니 병력을 보내 바리케이드 반대 편을 확보해 두도록 하게.”
“옛, 이미 1개 중대가 반대편을 점거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알겠다.”
혼란스럽고 불안한 마음으로, 크루사다 공작은 대열 후미로 말을 달린다.
크루사다 공작과 퀸토 변경백, 두 사람은 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꽤 오랫동안 회담을 했다.
무리를 해서라도 오늘 당장 강을 건너 병력이라도 살려야 한다는 크루사다 공작의 의견과, 최소한의 방어력은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퀸토 변경백의 의견이 갈렸기 때문이다.
결국 결론은 ‘적의 첫 공세를 막아내고, 불타는 바리케이드가 식기를 기다려 좀 더 상류로 이동한 후 강을 건너다’는 애매한 것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첫 공세는 충분히 버텨볼 만 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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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서둘러, 복수전이다!”
“대열 정돈하고, 문제 생기면 즉시 보고해!”
라솔 군 패주 대열의 후미에 바짝 달라붙은 드 레뮤즈 보병대가 바쁘게 공격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세로로 긴 행군 대열을 공격용 밀집 대형으로 바꾸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미리 지시는 내려 놓았기 때문에, 바쁘게 오가는 작전 참모들에게 일임해도 문제는 없었다.
대신 나는 전장의 이곳 저곳을 살핀다. 이미 몇 번 지나쳤던 곳, 대략적으로는 기억속에 있는 지역이다. 적 또한 이상한 징후는 아직 없다.
요 며칠 동안의 강행군으로 지친 드 레뮤즈 보병대가 걱정되었지만, 다행히 사기는 왕성하다.
하긴 적이 그들의 고향에 진흙투성이 발을 하나 들여 놓은 상태, 열 받지 않는다면 남자가 아니겠지.
“콘도티에레, 포병 준비 됐어요!”
“수고했어, 첼레스티나.”
“...결국 일부 밖에 데리고 오지 못했지만요오···.”
첼레스티나가 아쉬운 듯, 한탄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야심차게 공들여 합동 포병대를 꾸렸는데, 좁은 행군로로 급하게 전개하다보니 대부분을 후방에 놓고 오는 수 밖에 없었다.
“원하는 타이밍에 포격 개시 해 줘. 드 레뮤즈 연대들이 공격을 시도하기 전에 적을 최대한 약화시키고 싶으니까.”
“네에, 콘도티에레!”
명령을 받은 첼레스티나가 가벼운 걸음으로 말에 오르더니 포병 방향으로 달려간다. 조만간 빈틈없는, 적에게는 껄끄러운 포격이 시작되겠지.
추격에 몰린 적은 행군을 멈추고, 대신 대열을 좁지만 두터운 방어진으로 개편했다.
정찰병의 보고에 의하면, 적 대열의 선두를 ‘화염의 산’이 막고 있다고 한다.
화염의 산이라니··· 대체 뭐지? 한 번 보고싶은데···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참기로 했다.
아마도 드 레뮤즈 영지를 지키기 위해 선행한 라마엘 드 레도쿠르가 뭔가 좋은 의미로 사고를 친 모양이다. 대체 어느 규모의 장작더미를 모았길래.
몇 시간 정도 적을 방해해 주면 좋겠다 생각했었는데, 적이 통과를 포기하고 또 한 번 전투를 준비할 정도라니.
어쩌면 라마엘 경의 수완은 상상 이상으로 대단할지도 모르겠다. 혹은 고향 부근에서 싸울때 무지막지하게 실력에 보정을 받아 발휘하는 타입이라거나.
“참모장 공! 5분 후, 아군의 공격 준비가 완료되오이다!”
마침 그 라마엘 경의 아버지인 세샤르 드 레도쿠르 자작이 보고하러 찾아왔다. 드 레뮤즈 가문의 보병대장인 그는 당연히 이번 보병 공격을 책임지고 있다.
“맡기겠습니다, 라마엘 경. 저는 기병대에 가 보겠습니다.”
“물론! 목숨을 바쳐서 공격을 성공시키겠소! 맡겨만 주시오!”
호쾌한 인물인 세샤르 자작은 자신의 흉갑을 탕탕 내리치며 자신감을 보인다.
이 사람이나, 기병대장 소베트르 경이나,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은 잘도 책임감 있는 수하들을 잘 골라서 요직에 앉혔다는 생각이 든다.
퍼엉! 뻐벙! 뻥!
포성이 들리기 시작한다. 첼레스티나의 포병대가 포격을 시작한 것이다.
탄착을 관측하기 위해 한 발씩 일정 간격으로 쏘고 있다. 초탄인데도 상당수가 적진 부근에 정확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진짜는 곧 이어질 일제 포격이다.
황금의 감각을 가진 첼레스티나가 세심하게 관측 결과에 따라 보정한 포병대는, 분명 1.5문 이상의 역할을 해주리라.
그렇게 포병은 첼레스티나에게, 보병은 세샤르 자작에게 맡기고 기병대로 이동한다.
제장들과의 논의 끝에, 역시 이번 공격의 키는 기병임을 확인했다.
소베트르 드 랑두제 경이 이끄는 드 레뮤즈 기병대.
앙비토 드 몽파르지에 공작이 직접 이끄는 서부군 기병대.
코바르 리메니에디 단장이 이끄는 프리스마라 기병대.
세 기병대가 집결하고 나니 그 숫자는 거의 4천 기가 조금 안되는 엄청난 숫자가 되었다.
게다가 이번은 도망치는 적을 쫓는 추격전, 기병의 기동성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콘도티에레! 콘도티에레께서 오셨다!”
“콘도티에레!”
숲길을 한동안 달리자, 프리스마라 소속 기병들이 나를 맞이해준다.
언덕과 숲 등, 교묘하게 지형지물을 이용해 적이 규모 추측을 하기 힘들게 병력을 멋지게 배치해두고 있었다. 역시 기병전의 베테랑이 분명하다.
“각 기병대장들을 소집해주게.”
“알겠습니다!”
다행히도, 마침 적의 약점이 보인 참이다. 우연과, 아군의 노력이 겹친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