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347화 (347/556)

36-16. 승리자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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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어렸을 때의 꿈을 꾸었다.

신기하게도, 꿈 속이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자신의 기억을 반추하여 눈 앞에서 보여주는 듯한 기묘한 경험.

그리운 얼굴을 보았다.

아버지와는 같은 집에 살았지만, 얼굴을 보는 시간이 그다지 길지는 않았다. 심지어 식사시간에도 말이다.

당시에 아버지는, 가족을 이끄는 가장의 역할 보다는 영지를 이끄는 영주로서의 역할을 우선시했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이는 모범적이고 본받아야 할 행동이다. 오히려 아버지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실망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렇게나 노력해도 생각대로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 그만큼 가문이 처했던 일들은 심각했다.

군사적 문제, 재정적 문제, 관리적 문제.

지금 생각해보면, 결국 모든 것은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일어났다.

군사적 패배는 영주로서의 권위를 실추시켰고, 영토의 일부를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소중한 가장을, 후계자들을 패배하는 전장으로 끌고가 희생시켰다 생각하는 가신 가문들의 충성심이 전 같지 않았다.

또한 가문의 금고를 바닥냈다. 어디에 쓰나 싶을 정도의 엄청난 전쟁 비용.

심지어 영내를 통과하는 아군 지원부대가 늘어날수록 그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

전장에서 죽어간 가문의 청년들은, 각자 중요한 역할을 맡았거나 맡을 인재들이었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누구 하나 의미없는 인간은 없었다.

그들을 잃은 영지는 이전처럼 돌아가지 않았다.

사방에 비정상, 비효율이 가득했다. 이제는 오히려 과거의 안정되고 풍요로웠던 시기가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평생을 가문과 영지를 재건하기 위해 일해온 아버지였다. 명백하게도, 그는 자신의 생명을 태우며 일하고 있었다.

과로로 첫 번째 쓰러졌을 때, 아버지는 예전과 같은 생명력을 더 이상 보이지 못했다.

마치··· 한 번 지옥에 갔다가 돌아온 사람 같았다. 행동이나, 표정이나.

그러면서도 영지의 업무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결국, 아버지의 시계가 완전히 멈추는 데는 4년이라는 시간이 더 걸렸다.

당시 고용인들은, 후계자의 성인식은 마치고 가시고 싶으셨을 텐데, 직전에 돌아가셨다며 항상 바쁘지만 관대했던 주인을 애도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저 자식의 성인식만을 기다렸던 것은 아니다.

후계자가 물려받을 영지를 적어도 전쟁 전의 상황으로는 돌려 놓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엉망진창이 되었던 영지는 조금, 아니 상당히 회복되어 있었다.

여전히 빚은 많았지만 뼈를 깎는 노력 끝에 가문의 재정은 흑자를 보이고 있었으며, 영주와 가신, 가신과 가신 사이에는 신뢰가 회복되었으니까.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나이에 가문을 물려받은 후계자는, 진심으로 아버지를 존경하던 가신들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적응할 수 있었다.

그리고 10년도 지나지 않아서···.

가문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혼란이 싫고, 가난이 싫고, 얕보이는게 싫었다.

가신들이, 영민들이 불안정하고 궁핍한 상황에 괴로워하면서도 자신들의 영주를 동정어린 시선으로 보는 것이 죽도록 싫었다.

대단한 권력을 가지고 군림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었다.

그저, 이전처럼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게 너무도 두려웠기에, 집착에 가깝게 앞으로는 그런 일을 겪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행동했다.

평생을 영지를 위해 살았던 아버지의 이름에 맹세코,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단 한 가지, 전쟁에서 이기는 법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을까?

어떤 책을 보아도 대략적인 개념은 알 수 있으나, 확실한 행동원리나 원칙에 대해서 속 시원하게 알기 힘들었다.

결국 자신이 선택한 것은 원칙적인 행동이었다.

영지의 재정을 건전하게 유지하고, 군사 귀족 출신인 가신들이 무예를 훈련하고 병력을 육성하는 것을 장려했다.

다만 일말의 불안감은 있었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지 못한 것은 아쉬웠다. 결국 자신의 전략과 전술에 대한 이해 부족이 가장 큰 문제였지.

그래서 나름 믿을만하다 생각한 자들에게 일을 맡기기는 했지만··· 조금 부족했다.

마지막 한 조각이 부족했다.

“헉, 흐으읍!”

과거의 자신을 구경하는 듯한 꿈으로 시작해, 마치 한 줄기 빛도 없는 컴컴한 방 안에서 고뇌하는 꿈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현실로 돌아왔다.

눈을 떠도 눈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손바닥을 들어 눈 앞에서 움직이자, 흐릿하게 윤곽이 보여 다행히 완전히 눈이 먼 것은 아님을 안심하게 된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목을 움켜쥐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으며, 숨을 최대한 천천히 몰아쉬고자 노력한다.

당황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자주 겪어본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냥 평소대로의 각성. 조금만 참고 조금만 노력하면 된다.

조금씩 시야가 돌아오고, 호흡이 안정되어간다. 깊게 들이쉬고, 길게 내쉰다.

거무스름한 실루엣만 간신히 구분가던 눈에 빛과 색이 들어온다.

걱정으로 인해 창백해진 하인들의 얼굴이 보인다. 그 와중에도 집사장 드레피니의 주름진 얼굴이 보인다.

대체 저 노인은 잠은 언제 자는 것일까. 언제나 깨어나 보면 곁에 있는데 말이다.

“...지금 몇 시지?”

“열 시가 조금 지났습니다, 백작님.”

“늦잠이군.”

“그래도 어제보다는 일찍 일어나셨으니 다행입니다. 지금 일어나시겠습니까?”

“으음··· 도와주게.”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은 건장한 하인들의 조심스러운 도움을 받아 일어난다. 간밤에 흘린 땀으로 범벅이 된 땀을 닦아낸다.

옷을 갈아입으며 라몽 백작은 허여멀건 자신의 팔뚝을 무심히 내려다 본다.

딱히 주름은 없지만 윤기도 탄력도 없는 피부는 자신이 보기에도 기괴해 보인다. 마치 인간의 살갗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정신을 놓고 있던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예, 백작님께서 ‘주무시고 계신 동안’, 참모장인 트랑카벨의 에트 경이 라솔 군 상대로 결정적으로 승리하고 귀환했습니다.”

“호오, 이스키비르 강변에서 이겼다더니 정말인가 보군.”

“예, 맞습니다. 미처 강을 건너 도망가지 못한 포로들의 숫자가 상당해 보였습니다.”

“다행이군.”

라몽 백작은 입가를 기묘하게 비틀며 웃는다.

“아군의 피해는 많지 않은가?”

“다행히도, 그런 편입니다. 제가 듣기로는 전투 시간이 그다지 길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백작님.”

“그럼 어떻게 이겼다는 말인가? 생뢰르반에서는 하루 종일 싸우지 않았던가.”

“이미 약화된 적의 약점을 공격해 적진을 반토막내고, 절반은 도망가도록 놔둔 후 추격, 나머지 절반을 포로로 잡았다고 합니다.”

“그런가··· 으음. 그렇게 된 것인가.”

주군이 일어나면 언제나 전황에 대해 가장 먼저 궁금해하는 것을 알기에, 늙은 집사 드레피니는 주로 아인멜츠 경을 통해 미리 전황에 대해 알아두는 것이다.

주군이 언제 깨어나더라도, 현 상황을 막힘 없이 보고할 수 있도록 말이다.

다행히도 최근에는 계속 좋은 보고만 이어졌다. 오늘은 심지어 결정적인 승전에 대한 확정 보고니 말이다.

승전 보고 자체는 전투 직후에 급히 달려온 전령을 통해서 들었겠지만, 자세한 상황에 대해서는 처음 들으시는 것이리라.

게다가 출전했던 병력이 무사히 돌아오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이다.

하물며 다수의 적 포로와 함께라니··· 편찮으신 주군에게 승리 보고를 올릴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는 드레피니이다.

“다른 특이사항은?”

“왕실에서 사람을 보내온 모양입니다. 어전회의의 결정사항이라 하는데, 반드시 백작님께 직접 전달해야 한다고 해서 아직 내용을 듣지는 못했습니다.”

“왕실이라니···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가만히 놔 두기나 하면 좋겠는데.”

라몽 백작의 표정이 또 험악하게 일그러지자, 드레피니는 황급히 말을 잇는다.

“다만 이번에는 사자 혼자 온 것은 아닙니다. 3천 기의 기병과 함께 왔다고 합니다. 근위기병대의 핵심 전력이라 하니, 급하게 편성해서 보낸 것으로 생각됩니다.”

“허어, 자기들도 전선 사정이 급한 건 알았다는 건가. 허나 이미 전투는 끝나지 않았던가.”

“전쟁이 길어질 것을 고려하여 추가 병력도 계속 보낼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백작님의 군대가 너무 일찍 이겨서 왕실에서도 놀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내 군대라니··· 드 레뮤즈의 지분은 절반도 되지 않는다만.”

“설령 그렇다 해도, 누가 뭐래도 생뢰르반 전투의 사령관은 라몽 백작님이었습니다.”

“흥, 그걸 대체 누가 인정할지.”

드레피니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도무지 밖으로 티는 내지 않지만, 그의 주군이 은근히 기뻐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인멜츠 경이 지난 전투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백작님께서 바라실 때 말씀해주십시오.”

“음, 곧 나가도록 하겠다.”

라몽 백작은 왕실이 싫었다.

괜히 다른 나라에 전쟁을 걸었다가 패배하고, 그 책임을 자신의 가문에 뒤집어 씌웠던 왕실이.

그로 인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백작가를 조금도 돌보지 않았던 왕실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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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요, 콘도티에레께서는 방금 잠자리에 드셨다고요오···.”

막 잠이 들려고 하는데, 밖에서 첼레스티나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앗··· 그래도··· 그래도··· 우우, 알겠어요. 제가 모시고 갈게요.”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듯, 뭔가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첼레스티나의 풀 죽은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깨달았다. 아, 오랜만에 낮잠좀 자려고 했더니 물 건너갔구나.

다들 고생하는 와중에 높은 사람이라고 유세부리기는 싫지만, 요 며칠은 정말 바쁘고 힘들었다고···.

생뢰르반 전투에서부터, 이스키비르 강변을 따라 상류로 이동하는 적을 추격하고, 전투를 벌여 승리했으니 끝··· 일 리가 없잖은가.

현실은 포인트가 되는 주요 전투에서 승리하면 전역도 승리처리가 되는 게임이 아니다.

잔당의 잔당이 얼마나 빠져나가 엘랑키아 영토에 남았는지도 파악해야 하고.

일부 병력을 남겨서 정찰 및 연락망도 만들어야 하고.

대량으로 잡힌 포로도 관리 및 신문해야 하고 말이야.

그걸 엄밀히 내가 전부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남들에게 맡기고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참모부에는 안 바쁜 사람이 없었거든.

결국··· 자잘한 보고와 업무 때문에 벌써 며칠째 잠을 쪼 개서 잤는지 모르겠다. 포상이고 뭐고, 성과를 그럭저럭 이루었으니 그냥 잠이나 자게 놔 두었으면.

하··· 집에 가고 싶다.

라고 생각한 순간, 나는 살짝 소름이 돋았다.

내가 집에 가고 싶다 생각하며 떠올린 ‘집’은, 바로 블랑독 카르카냑 영주관에 있는 살풍경한 ‘내 방’이었기 때문이다.

거참··· 엘랑키아에 이렇게나 오래 머물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저어, 콘도티에레? 죄송하지만 일어나셔야 할 것 같은데요···.”

“괜찮아, 첼레스티나. 나 안 자고 있었어.”

“네에··· 괜찮으신가요? 라몽 백작님의 사령부에서 전령이 와서요.”

첼레스티나의 미안해서 죽을 것 같다는 듯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어두컴컴한 막사 안에서 일어나 앉아 억지로 기지개를 폈다.

머리속에 누가 손을 넣어 휘젓기라도 한 것 처럼, 엉망진창 곤죽이 된 느낌이다. 비몽사몽간에 헛생각을 좀 했나보다.

“휴우, 그래도 조금 누워 있었더니 기분이 좀 나아졌네.”

거짓말이지만.

“그런데 무슨 일이래? 라몽 백작님은 괜찮으신가?”

내가 출발하기 전에는 거의 혼수상태로 하루 종일 보내셨다는 것 같은데 말이지.

“네에, 백작님께서 직접 호출하셨어요, 콘도티에레. 듣기로는 왕실에서··· 엘랑키아의 국왕님이 직접 임명장을 보내셨다고 해요!”

“...뭐? 임명장?”

갑자기 불안함이 스쳐지나간다. 설마 ‘나’에 대한 임명장은 아니겠지?

“...일단은 가 보자고.”

나는 옷을 갈아입는 동작을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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