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350화 (350/556)

36-19. 승리자의 영광

디타레 드 카울 경이 조심스럽게 또 하나의 어전회의 결정 사항을 전달하자, 또 회의장 분위기가 안좋아진다.

···주로 분위기가 안 좋아지는 것은 이 자리의 호스트인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이 열을 받았다는 것이지.

그런데 이번에는 나도 그렇다.

“내 영지군을 라솔과의 국경지대에 붙박아두려는 생각인가, 어전회의에서는?”

라몽 백작이 전매특허인 못마땅한 표정으로 쏘아붙이듯 말하자, 지금껏 침착함을 유지하며, 나름 어전회의의 사절 역할을 잘 하던 디타레 경 역시 당황한 듯 하다.

“아 아닙니다. 오히려 왕실의 명을 받아 군 사령부를 설치하게 되면, 참여 가문은 전비부담을 덜게 되고, 직책자들 역시 급료와 영지를 받을 수 있어서···.”

디타레 경의 말은 이런 것이겠지. 어차피 라솔과의 전쟁 상황이 되면, 특히 접경지역인 드 레뮤즈 백작가는 병력 동원을 할 수밖에 없다.

군 사령부 핵심 요원과 일부 병력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전쟁이 나면 그때서야 편성해서 집결하는 형태다.

게다가 병력 유지 비용의 일부는 왕실의 금고에서 나오는 교부금으로 충당할 수 있기에 전체적으로 보면 오히려 경제적 부담은 덜 해진다고도 할 수 있겠다.

대신 아까 들었던 설명에 의하면 관련 가문은 함부로 병력을 늘리거나 줄이지 못한다는 모양이다.

또한 왕실이 정한 상황, 주로 전쟁 상황이 나오면 병력 동원의 의무가 생기지만 뭐 당연한 일이고.

그래, 그 점에서는 사령부 설치를 반대할 이유가 없겠지. 라솔이 과거지사는 깨끗하게 잊기로 하고 먼저 손을 내민다면 모를까.

하지만 지금 라솔 왕국 입장에서 드 레뮤즈 가문은, 자기네 국왕의 친동생을 농락해 죽이고 불태운 원수 가문이다.

그리고 이번 침공··· 생뢰르반 전투와 로그포르 전투를 거치면서 그 원한은 더 쌓였을 테고 말이다.

나는 벌어진 전쟁을 수습하는 데는 나름 재능과 실적이 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이런 부분은 전혀 다른 영역이다.

···엘랑키아 전체의 상인 정보망을 꽉 잡고 있는 아쥬흐에게 물어봐야겠다. 나중에 카르카냑으로 돌아가서겠지만.

거기에 전쟁으로 얼룩진 엘랑키아와 라솔 사이의 수백 년 역사는 언급할 필요도 없겠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니까.

그러니 빠르면 1년 내로, 늦어도 5년 내로는 사달이 일어날 것이다. 전쟁 규모가 문제지.

잠시 머리속으로 여러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해본다.

이번에 침공해오는 라솔 군의 목적은 더 정보를 수집하고 지휘관과 상급 장교급 포로들을 신문해봐야 알겠지만, 일단 드 레뮤즈 가문에 대한 징벌이 목적인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건 전쟁의 첫 단계였을 뿐이지, 라솔 왕국이 작정하고 나선다면 전쟁의 규모는 어느 정도가 될까?

단순히 국경 지대의 영지 몇 개가 오가는 정도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는 막연하고도 불길한 상상이 들었다.

거참, 라몽 백작님 앞으로도 고생이 심하시겠네···.

라고 강 건너 불 구경을 할 수 있는 입장이라면 좋겠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그럴 수 없다.

“저도 한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말 해 보시오.”

이번에는 디타레 경이 아니라 라몽 백작이 대답한다. 백작의 심술 가득한 표정은 왠지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하고 있다는 듯 하다.

디타레 경 역시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며 끄덕인다. 왠지 이 양반도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창설되는 군 사령부의 초대 사령관과 참모부 멤버에 현재 드 레뮤즈 사령부의 구성원들이 그대로 임명된다는 것은 어떤 이유입니까?”

“저는 어전회의 결정 사항을 그대로 전달할 뿐이라 이유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따로 논의되거나 했던 내용도 알지 못 하신다는 겁니까?”

“그게··· 제가 추측하기로는 지금 잘 운용되는 구조가 있다면, 그걸 그대로 이어가고자 하신 의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어전회의는 아직 생뢰르반의 승전을 보고받기 전에 결정되지 않았습니까? 자칫 패배했다면··· 잘 운용되기는 커녕 사령부 자체가 흔적도 안 남았을 수도 있는데요.”

“저도 이 이상은 잘···.”

어쩐지 좀 더 아는 것 같은데. 하지만 이런 남자가 한 번 숨기려고 했다면 캐묻는다고 더 말을 해 주지는 않겠지.

내가 이렇게 짜증을 내는 이유는, 디타레 경이 전달해준 결정사항에 따르면 현재 사령부 구성원, 즉 총사령관 라몽 백작휘하에 참모장인 내가 신규 사령부 구성에도 그대로 유지된다는 이유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앞으로도 라몽 백작 밑에서 참모장으로 일하면서 라솔 왕국이 이스키비르 강을 건너오면 매번 맞서 싸워야 한다는 말이다.

이건··· 내가 좋고 싫고를 떠나 마음대로 받아들이네 마네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트랑카벨 가문의 대리 사령관이니까.

계약이 유지되는 동안, 나는 트랑카벨 가문 소속이나 다름없다.

“저는 트랑카벨 가문에 고용된 일개 용병에 불과합니다. 이번에 참전하게 된 계기는 트랑카벨 가문이 병력을 파견했기 때문이고요.”

내 입장을 밝히기로 했다. 아마 어전회의에서는 이런 점들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이런 결정을 한 것이겠지.

“에트 경께서는 현재 본인은 트랑카벨 가문 막하에 있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음··· 그렇다면 큰 문제는 없지 않습니까? 트랑카벨 가문의 영토는 엄밀히 말하자면 드 레뮤즈 백작가의 권역이니, 향후 편성될 사령부에도 병력 제공의 의무를 지게 될 것입니다.”

“어···.”

어라, 그렇네?

생각해보니 완전 맞는 말이다. 분명 아까 블랑독의 영주와 귀족들 전체를 제도권에 귀속시키고, 거기서 발생하는 수입을 전비로 사용하네 어쩌네 했었지.

그때는 나름 괜찮은 생각이라고 생각하긴 했었는데··· 그게 이렇게 되는구나.

하지만 나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음,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트랑카벨 가문의 가신이 아니라, 고용된 용병입니다.”

“예, 아까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그러니 봉급도 거기서 받고 있고, 계약이 해지된다면 트랑카벨은 커녕 엘랑키아 전체와 아무 상관없는 외국인이 됩니다.”

솔직히 나는 이번에 트랑카벨 가문에 초빙되어 오기 전에는 엘랑키아는 별로 와 본 적도 없었다.

“그런 자에게 중요한··· 주둔군의 참모장을 맡길 수는 없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이건 중요한 문제니까. 물론 나도 이렇게까지 함께 싸운 ‘전우’들과 아무런 연고가 없다고 매몰차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엘랑키아 왕국 입장에서도 말이지, 별다른 연고도 없고 정체도 불명한 낙하산 외국인을 중요한 사령부의 일원으로 임명하는 건 문제가 있다 이 말이다.

그런데 내 말이 끝나자마자, 디타레 경이 곧바로 입을 연다. 불길하게도, 아까 뭐만 물어보면 바로바로 명확하게 대답하던 시기의 자신감까지 되찾고서.

“아, 거기에 대해서도 어전회의에서 논의된 바가 있습니다.”

아니, 아까는 따로 뭐 아는 게 없다면서.

“라솔 측의 기습 공격으로 인해, 일부 인원이 용병으로 충원되었을 경우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만약 현 고용인 측이 계약 연장을 원하지 않는다면 엘랑키아 왕실이 그 계약을 이어 받도록 결정되었습니다.”

“아니 뭐 그런 게 ‘결정’되었다구요?”

“그렇습니다. 저에게 권한은 없습니다만, 원하시는 방향에 따라, 황금이든 영지든 왕실에서는 관대하게 받아들이실 겁니다.”

별 걸 다 논의하네. 그냥 다른 사람 앉히면 될 것을, 굳이 용병까지 데려다가 쓸 이유가 있나.

흠, 내가 알기로는 엘랑키아 왕실은 혈통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서 외국인 용병은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 것 같은데.

게다가 지금까지 만나본 엘랑키아의 군사 귀족들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유능한 인간들이 꽤 많았다. 당장 샹다메리에서 상대했던 면면만 살펴보아도···.

“아, 그리고 에트 참모장님은 드 레뮤즈 영지군의 참모장으로서도 급료를 받고 계십니다.”

내가 당황하며 의문을 표시하자, 이번에는 아인멜츠 피노르 폰 자이트리츠, 드 레뮤즈 가문의 책사가 말했다.

“저, 저는 아직 받은 게 없는데···.”

“제가 알기로는 계약서에 관련 사항이 있었습니다. 드 레뮤즈 가문의 직책자이니, 가신이 아니더라도 동등한 처우를 약속한다는 내용입니다.”

아인멜츠가 단호하게 말한다. 아니 이 양반은 무슨 서류를 달달 외우고 다니나.

계약서라면 막 레뮤즈 성에 불려가서 훈련을 받기 시작할 무렵이었겠구나···.

당시에 바쁜 일정을 진작부터 시작하다보니 정신이 좀 없긴 했는데 생각해보니 그런 내용이 있긴 했던 것 같다.

아니 솔직히 뭐 굴러온 돌이라고 차별 대우를 하지 않는다 이런 명목이라고 생각했지 월급까지 주는 줄은 몰랐네.

와··· 그럼 나는 지금 트랑카벨 가문과 드 레뮤즈 가문 양쪽에서 월급을 받고 있었던 건가. 이거 완전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이상적인 상황 아니냐?

이상적인 상황은 개뿔··· 일도 두 배 세 배로 하게 되는데 무슨.

“아직 받으시지 못한 이유는 종군이 끝났을 때 지급하는 관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곧바로 지급받기를 원하신다면···.”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나는 황급히 아인멜츠의 말을 가로막는다. 이건 무슨 최고위 회의에서 돈 언제 주냐고 깽판 놓은 꼴이 됐다.

“...드 레뮤즈의 지급 약속은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 에트 참모장? 아니면 드 레뮤즈가 정당한 대가도 없이 사람에게 일을 시킨다 생각하는 건가?”

“아닙니다, 그럴리가요··· 저는 현재 백작님의 대우에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

잔뜩 화가 난 라몽 백작의 말에 연신 고개를 숙이고 만다. 이거 괜히 잘 모르는 이야기 했다가 본전도 못 찾았네.

아니 그런데 내가 급료를 어디서 받는지는 중요한 내용이 아니지 않나. 아롱드 영감님, 아쥬흐··· 제가 지금 엘랑키아 왕실에 팔려 가게 생겼습니다.

갑자기 괴상해진 분위기에 어전회의의 사절인 디타레 경도 다소 당황한 모양이다.

“자세한 내용은, 향후 왕실에서 구체적인 지시사항이 내려오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먼저 당사자분들께 관련 내용을 전달하는 심부름꾼일 뿐입니다.”

디타레 경은 또 저렇게 빠져나가 버리네···.

내가 사람들 눈치에는 좀 둔한 편이기는 하지만 이 양반은 뭔가 더 아는 게 있다. 마지막이지만 어전회의에 직접 참여해서 지시를 들었다고도 하지 않았나.

하지만 자신과 엘랑키아 왕실에 유리할 법한 내용만 전달하고, 설령 알더라도 유리할지 판단이 안 서는 내용은 모르는 척 하는 거겠지.

적이지만··· 아니 적은 아니지만, 아무튼 훌륭한 판단력이다. 그러니 샹다메리의 아수라장에서도 무사히 귀환했겠지.

“예··· 저도 일단 알겠습니다. 저는 저에게 주어진 일을 할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트랑카벨의 에트 경. 저도 기회가 된다면, 에트 경의 의사를 어전회의에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한숨만 나오지만, 지금은 나도 물러서는 수 밖에. 더 따져봐야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인다.

문득 아쥬흐와의 과거 대화가 떠올랐다. 트랑카벨 가문의 대리 사령관이 될 결심을 하기 전이었던가.

내가 기준으로 삼은 목표는 명확하다.

트랑카벨의 승리.

설령 트랑카벨 가문이 영토와 작위를 잃고 역사속으로 사라질지라도, 트랑카벨을 따르는 이들을 지키겠다던 아쥬흐의 말에 감동받았었다.

뭐 나를 잡아두려고 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알기로 트랑카벨 가문의 일원이 거기서 벗어나는 행동을 한 적은 없다.

그러니 나도 지금까지 그걸 최종 목표로 생각하며 지키고 있는 것이고.

당면했던 위험인 주신교의 이단 토벌 전쟁은 일단 끝났지만, 이는 ‘트랑카벨의 승리’가 달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가.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번 드 레뮤즈 파병 역시, 라솔의 침입을 격퇴하는 게 블랑독의 안전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다 판단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실이 가끔 보내오는 편지에 따르면 아직 블랑독 북부에는 정신 못 차린 광신도들이 아직 득실거리고 있다고도 하니.

기왕 하기로 한 것, 이 다음은 트랑카벨 가문의 판단을 들어보는 수 밖에.

분명, 아롱드든 아쥬흐든 아실이든, ‘그 트랑카벨’의 일원들이라면 자신들의 입장은 물론 내 입장도 충분히 생각해서 지혜로운 판단을 내리리라 믿는다.

“라몽 백작님, 그리고 에트 경, 질문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지금까지 조용히만 있었던 앙비토 드 몽파르지에 공작이 갑자기 입을 연다.

그러고보니 이 사람이 존대말을 쓰는 건 처음 보네. 뭐 엘랑키아 전체에 자기보다 서열이 높은 사람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밖에 없는 사람이니.

그건 그렇고, 갑자기 무슨 일이지?

“급료를 지불한다면 에트 경의 재능을 빌어 쓸 수 있다는 것이라면, 우리 드 몽파르지에도 그렇게 해도 괜찮겠소이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공작을 바라본다.

눈치를 보아하니 라몽 백작 역시 화가 난 표정이다. 그럼 그렇지, 지금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뭔가 대답하려는데, 라몽 백작이 말을 가로막는다.

“...서부군과 훈련을 함께 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지 않겠소.”

“오호, 과연 그렇구려.”

···나는 아마 세 다리, 아니 어쩌면 네 다리를 걸치고 월급을 받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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