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355화 (355/556)

37-2. 신규 군 사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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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 레뮤즈 가문의 본성인 레뮤즈 성은 라솔의 침공군을 격퇴한 이후, 천천히 일상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만한 병력을 전장에 보내고도, 성벽을 순찰하고 병영에 상주하는 수비군의 숫자는 평소의 몇 배나 되었었다.

하지만 적이 격퇴되고, 다시 ‘이스키비르 강 이북에는 적이 없다’는 ‘평시 상황’을 되찾은 지금은 계획에 따라 다시 수비군을 줄이고 있다.

성벽 위에 올라갔던 막대한 양의 군수물자도 다시 방수천에 덮여 무기고로 돌아가고, 오랜만에 햇빛을 보았던 문관들의 갑주도 다시 가문의 장식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성문을 통과하는 모든 이들의 신분과 목적, 지참품을 조사하느라 생긴 긴 행렬도 사라졌다.

심할 때는 성문 밖에서 노숙하며 노심초사하던 여행자들이 한숨을 돌린 것은 물론이다.

그런가 하면, 광장에도 주점에도 바글거리던 자칭 평론가들의 모습도 슬슬 사라졌다.

오랜만에 현실이 된 전쟁의 향방이나, 앞으로 드 레뮤즈 가문과 그 신민들이 겪어야 할 고난에 대한 변화무쌍한 논평들은 전쟁 그 자체가 빠르게 끝나면서 사라졌다.

물론 그 중에도 특별히 열정적인 자들은 ‘앞으로의 엘랑키아 남부 정세’에 대한 것으로 주제를 바꾸었지만, 청자들은 이전처럼 관심이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물론 최근까지도 블랑독에서는 엄청난 규모의 전투가 연이어 벌어지고 있었지만, 드 레뮤즈 백작가는 사실상 중립을 지키고 있었기에 ‘남의 전쟁’ 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자신들의 전쟁’이다.

본인이 나가지는 않더라도 자신이 섬기는 주인, 친척, 어쩌면 가족 중에서 전쟁에 나선 이들이 많다. 혹은 익숙치도 않은 갑옷을 입고 성벽 수비에 불려간 경우도 있겠고.

이런 대군이 출전했다가 만약에 지기라도 한다면 드 레뮤즈 백작령과 거기 사는 주민들은 큰 곤란을 겪게 될 것이라는 것은 누구라도 알고 있었다.

반대로, 크게 이긴다면 그건 그나마 다행이지만, 이 역시 주민들의 삶이 많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은 대부분이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사실이었다.

아직만 아직 그 변화는 직접적, 혹은 즉각적으로 전달되고 있지는 않았다.

그렇게 엘랑키아 남부에서 손꼽히는 거대한 도시인 레뮤즈 성은 천천히 일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 도시의 심장부인 영주관의 상층 집무실에서는 오랜만에 두 명의 백작이 만나고 있었다.

“이렇게 만나는 건 정말 오랜만이로군.”

가스텔 드 누아 백작이 차를 마시며 기쁘게 말한다.

“그간 서로 매우 바쁘지 않았나요. 그리고 서로 소식이 없는 게 좋은 일입니다. 요즘에는 어디서 전령만 왔다고 하면 심장이 뛰어서···.”

이를 다소 퉁명스럽게 받는 것은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이다. 그는 아직 체력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는지, 푹신한 의자에 평소보다 몸을 깊게 묻고 있었다.

그의 통통한 피부는 이전보다도 윤기가 없고 창백하다.

“그새 군인이 다 되었구려, 백작님도.”

“...절대로 다시는 하기 싫군요. 대체 이렇게 힘들고 귀찮은 일을 왜 못해서들 안달인지 모르겠어요. 전쟁을 좋아하는 인간은 전부 돌아버린 게 틀림없습니다!”

“허허허허헛!”

그답지 않게 발끈하여 감정적으로 말하는 라몽 백작을 보며, 가스텔은 호탕하게 웃으면서도 애정 섞인 눈길을 숨기지 않는다.

옛 친구의 아들이며, 지금은 서로 둘도 없는 이웃이며 동맹이다.

“그보다 내가 ‘이렇게 만나는 것’ 이라 한 건 말이오, 서로 당당하게 집무실에서 만나는 게 오랜만이란 말이었소이다.”

“하아···.”

“그 왜, 무슨 숲에서 몰래 만나고, 늪지대에서 몰래 만나고··· 다 우리 영지인데, 내 땅에서 간첩질이라도 하는 느낌이었다니까.”

“그랬지요··· 왜 굳이 밖에 나가서 만나야 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이가 다 갈리네요.”

두 백작가 사이의 관계는 가문간의 친교로도 오래 묶여 있지만, 정치나 경제, 군사적 동맹으로도 굳게 묶여있었다.

두 가문의 가신과 백성들은 물론, 이웃 영지의 거주자들도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그 관계는 다소 이상한 모습을 띄게 되었다.

이유는 당연하게도, 블랑독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주신교의 법황이 블랑독에 많이 퍼진, ‘다소 특이한 교리’를 가진 정순파를 이단으로 간주하면서, 이를 토벌하기 위한 성전이 선포되었다.

그리고 법황청과 엘랑키아 왕실은 물론, 온갖 가문과 세력들이 각자의 논리와 계산으로 휘말리며 이단토벌전쟁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어떤 점에서는 이 전쟁은 아직도 현제 진행형이며 끝났다고 하기는 이르지만···.

이 전쟁에 드 누아와 드 레뮤즈 두 백작가가 휘말리는 건 당연했다.

드 누아는 가문의 영지 전체가 블랑독 지방에 해당했고, 드 레뮤즈 가문은 영지 일부가 블랑독에 속해 있었고 명목상 블랑독 전체를 권역으로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 때, 드 누아는 적극적으로 블랑독을 지키기 위해 투쟁을 선택했고, 드 레뮤즈는 왕실의 성전군에 참여하며 반대편을 선택했다.

‘이론상’으로는 말이다.

하지만 두 가문의 유대는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었다. 오랜 협력 관계 때문이었을지, 사방이 적인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상대가 서로밖에 업었기 때문이었을지.

가문의 주인인 두 백작은 여러 차례 회합을 가졌으나, 명목상 서로 적대하는 관계였기에 연극이나 다름없는 기행을 하며, 비밀리에 만나는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두 가문은 서로 원하는 것을 모두 얻었다.

드 누아는 많은 병력을 파견해 블랑독의 승리에 공헌했으며, 이를 통해 트랑카벨을 비롯한 여러 가문의 존경과 신뢰를 얻었다.

드 레뮤즈는 반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성공하였다. 남들이 모두 헛손질을 하며 벼랑 아래로 뛰어 내리는 와중에는 아무것도 안하는 것 자체가 메리트가 되기도 하니까.

결과적으로 불완전하나마, 엘랑키아 왕실과 블랑독 지역 모두에게 척을 지지 않고, 가문의 힘도 온존할 수 있었고.

그렇게 생각하면 추억일 수도 있겠으나··· 라몽 백작은 기억하기도 싫은 모양이었다.

그런 인간이 잘도 전쟁터에 나가 오랫동안 야외생활을 하면서 하루종일 지휘부에 말을 타고 꼼짝 않고 있었구나··· 라고 생각하니 가스텔 백작은 이 병약한 친구가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흠흠, 아무튼 오늘은 오랜만에 좋은 소식을 전하러 왔소이다.”

“무슨 일인가요?”

“우리 드 누아 가문이 귀하의 가문에 진 빚을 변제하러 왔소이다!”

“흐음? 진짜로요?”

이것만은 라몽 백작도 예상하지 못했는지, 눈이 커지며 평소의 빈정대는 말투가 아닌, 순수하게 놀란 말투가 나온다.

가스텔 백작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번지는 것은 물론이다.

“그렇소이다! 여기 문서가 있고, 사람을 시켜서 재무관에게 전달하도록 했소.”

“흠···.”

라몽 백작은 여러 줄에 걸쳐서 항목과 숫자가 빼곡하게 쓰인 문서를 확인한다.

제법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한 줄 한 줄 확인한다. 그의 성격상 이런 일은 아무리 친하고 신뢰하는 관계일지라도 ‘믿고 생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니까.

“...이자가 빠진 것 같은데요··· 백작님?”

“큼, 크흠! 아··· 그게···.”

“뭐 좋아요. 이자는 생뢰르반에서 탈진하도록 열심히 싸웠던 드 누아 연대 장병들에게 대신 받은 것으로 하면 되겠군요.”

“어? 어허! 그래, 그··· 고맙네.”

그제서야, 가스텔 백작은 상대방이 좀처럼 하지 않는 농담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여전히 농담이 아니고 진지한 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있지만.

“아직 전쟁 중이지 않으시지 않나요. 함부로 병력을 줄이시지도 못하는 상황이리라 생각되는데, 빚을 우선 갚으셔도 되나요?”

“뭐, 조금이지만 생기는 수입이 있었지. 덕분에 차곡차곡 쌓인 여유 자금은 먼저 갚아주고 싶었네.”

“어떤 수입이죠?”

“뭐, 라솔 동부의 영주들과 무역을 하면서 차익이나 수수료를 조금씩이라도 챙겼으니까. 그리고 우리 영지에서 아직 모르고 있던 돈 되는 것들을 내다 팔면서 여유가 좀 생겼다네. 바닷가에서 잡히는 괴상한 조개가 주디칼리에서 그렇게 비싸게 팔릴 줄은 나도 몰랐지.”

“허어···.”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라몽 백작은 대충 알 것 같았다.

드 누아 가문은 현재 라솔 동쪽 변경의 소영주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넓히고 있었다.

이 지역 일부는 원래 엘랑키아 왕국의 영토였던 적도 있고, 귀족들 사이에서도 혈연이 얽힌 경우가 많아 나름의 유대관계가 있으리라.

게다가 라솔 왕국 중심지에서 워낙 멀리 떨어져 있다보니 라솔의 일부라는 의식이 적었다. 그러니 이번 전쟁 도중에도 무역이 끊기는 일은 없었겠지.

그리고 아마도··· 트랑카벨 가문이 끌어들인 주디칼리의 상인들이 드 누아 영지를 다니며 돈 될 만한 것들을 사간 모양이다.

“라몽 백작, 귀공 역시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지 않은가. 빌려갔던 돈으로 생색 내는 것 같아 좀 그렇네만, 돕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네.”

“그건··· 감사하네요. 확실히 돈 나갈 구석이 워낙 많아요··· 정말 전쟁이란 건 손해밖에 볼 게 없는데 왜들 그렇게 좋아하는지···.”

드 레뮤즈 가문은 이번 전쟁의 당사자로서, 짧은 전쟁 기간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전비를 지출했다.

우선 직할 가신들은 물론, 이웃의 우호 가문들의 도움도 받아 전에 없던 대군을 편성했다.

가문과 영지의 여력을 한계까지 쥐어 짠 것은 아니나, 아무리 풍요로운 영지일지라도 부담이 될 수준인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입장상, 만만치 않은 대군이었던 앙비토 드 몽파르지에 공작의 서부군이나 트랑카벨 가문의 파견군이 소비하는 군수물자도 조달해야 했다.

그런 점에서 적을 빠르게 격퇴하고 전쟁이 악화되기 전에 정리된 것은 천운이라고도 하겠다.

누구에게 말은 하지 않았으나, 적자투성이의 재무보고서를 보며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린 게 몇 번인지 알 수도 없다.

아직 가문이 흔들릴 정도이느냐··· 라고 묻는다면 그 정도는 아니지만, 가스텔 백작의 호의로 생긴 예상하지 못한 막대한 현금은 분명 도움이 되리라.

“그리고 아직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네만, 앞으로도 큰 일이 있지 않은가?”

“또 무슨 이상한 소리를 듣고 오신건가요···.”

“국왕 폐하의 군사령관이 되신다고 들었소.”

“하아아아···.”

라몽 백작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는다.

“그 망할 놈의 사령관 자리, 어디 시장 바닥에라도 버리고 올 수 있으면 좋겠군요.”

“허허헛, 심려가 크시겠소.”

“백작님께서는 웃고 계시지만, 백작님도 당사자가 아닌가요? 이 빌어먹을 돈만 허공에 퍼붓는 짓거리에 말이죠···.”

“뭐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지.”

블랑독 지역이 엘랑키아 왕실의 관심에서 벌어져 있는 동안, 드 누아 가문 역시 반독립에 가까운 상태에 있었다. 이는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있었고.

가스텔 백작은 예상하고 있었다. 지난 전쟁에서 국왕이 보낸 성전군을 깨부수었을 때, 이미 정해진 일이나 다름 없었다.

이제 블랑독은 대충 알아서 잘들 살고 있겠지··· 적국에 넘어가지만 않으면 돼, 하며 방치해도 되는 변경이 아니게 되었다.

아무리 직접적으로 보낸 건 아닐지라도, 엘랑키아 국왕과 주신교 법황이 보낸 수만 대군을 시간차로 격파한 엄청난 군사력을 가진 지역이다.

당연히 이를 뒷받침하는 경제력도 있을 테고.

이렇게 된 이상, 왕실의 선택은 둘 중 하나밖에 없다.

철저하게 아군으로 만들거나, 철저하게 배격하여 섬멸하거나 말이다.

후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물론 강대국인 엘랑키아 왕국이 가진 힘을 동원한다면 결국 블랑독 지방은 패배해 잿더미가 되겠지.

허나 그래서 왕실이 얻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지방 반란을 무력으로 진입하느라 피폐해진 군사력과, 취약해진 국경 방어선 뿐이겠지.

그러니 애초 목적이었을 왕실 직할령화는 포기하더라도, 왕국의 제도권 안으로 들일 것이라는 생각은 당연히 할 수 있었다.

국왕을 상대로 투쟁하여 권리를 되찾고, 다시 국왕의 신하가 된다.

논리적으로 보면 이상한 것 같기도 하지만, 각종 권리관계가 뒤얽힌 봉건제도 아래서는 매우 흔한 일이기도 하다.

그게 이런 형태··· 일줄은 몰랐지만.

“군사력으로 두각을 나타낸 지역이니, 군사력으로 이용하겠다··· 이 말인가?”

“우리 드 레뮤즈는 거기 치인 환자나 다름없네요!”

“허허허허, 어차피 한 배를 탔으니 어쩔 수 없네.”

라몽 백작의 역정을 웃으면서 받아 넘긴다.

가스텔 백작으로서는 전통적인 동맹인 드 레뮤즈나, 최근 빠르게 친해진 내실있는 동맹인 트랑카벨과 함께 뭔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나름 기대되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오래된 대귀족의 일원으로서, 군주를 향해 총을 겨눈다는 것이 유쾌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물론 우리 드 누아는 국왕 폐하의 사령관을 돕기 위해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네!”

“...지금 돈 갚으셔서 군자금도 없지 않으십니까?”

“그럼 또 빌리면 되지!”

“어휴···.”

“하하하하핫!”

그래도 작년에 비하면 상황이 나아졌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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