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5. 고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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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다음! 다음 준비해!”
이스키비르 강변에 강압적인 외침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다만 전투 상황은 아니다. 총성도 포성도 들리지 않는다.
무수히 많은 남자들이 강가에 줄지어 앉아있었다. 무장한 이는 없었으며, 머리와 수염이 엉망으로 길어 초췌한 모습이다.
이들은 생뢰르반과 로그포르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장병들이다.
라솔, 타라트라바, 알시라스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무기와 갑옷을 몰수당한 지금은 서로 구분할 수 없다.
잔뜩 긴장한 드 레뮤즈 백작가의 기병과 보병들이 눈을 부릅뜨고 무기를 겨누고 있었지만, 포로들은 저항할 기력이 없어 보인다.
강을 건너기 위한 거룻배 준비가 늦는 바람에 종일 방치되어 지칠대로 지친 것이다. 바람이 선선해지는 계절이라고는 하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햇빛이 따갑다.
게다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을 것이다. 도강 일정이 늦어지면서 드 레뮤즈 측에서는 부랴부랴 건빵을 지급했지만 물 없이 먹을만한 음식이 아니었다.
그나마 이들을 얌전히 기다리도록 지탱하는 것은 조만간 자기 차례가 올 것이라는 기대였다.
이들의 몸값은 이미 지불되었기 때문에, 이론상으로는 자유의 몸이었다. 하지만 진정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은 강을 건너 라솔의 영토에 발이 닿았을 때였다.
드 레뮤즈 가문 소속의 포로 관리자들이 이에 대해 설명하기도 했고, 몇 시간만 지나면 자유의 몸이 되는데 맨 몸으로 무장한 감시병들에게 덤빌 정도로 멍청한 인간은 없었다.
게다가 이들 중 상당수는 강변에서 벌어진 로그포르 전투에서 잡힌 이들이다.
강을 건너다 동료들이 수십 명씩 떼죽음 당하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기에 함부로 강에 뛰어 들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들의 유일한 적은 지독한 지루함이다. 지루함과 싸우며 오로지 자기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자, 출발!”
포로들을 가득 태운 배 한척이 다시 강변을 떠난다. 평소보다 사람을 훨씬 많이 태운 배들이 불안하게 강을 가로지른다.
다행히도 주변에서 엘랑키아와 라솔의 작은 배들이 지원을 왔기에 적어도 해가 지기 전까지는 도강 작업이 마무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 건너편, 라솔의 영토 쪽에서는 침통한 얼굴로 강을 건너 돌아오는 부하들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퀸토 로르카 데 페니베라다 변경백. 생뢰르반 전투의 패장이기도 한 그는 끝 없이 강을 건너오는 부하들을 지켜본다.
“돌아왔다!”
“세상에, 아아, 주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자, 대열을 갖춰! 엘랑키아 돼지들에게 놀림 받을 수는 없지 않나?”
강을 건너온 병사들은 자발적으로 작은 대열을 이루어서는 인솔 장교들의 지시에 따라 내륙 방향으로 이동한다.
부하들이 무사히 돌아오는 것은 물론 다행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들어간 막대한 석방비용을 생각하면 마음이 썩 편하지만은 않았다.
물론 그 대가는 거의 2개 연대를 편성할 수 있는 숙련병, 그리고 그들을 통솔할 장교와 부사관들이라 해도 엘랑키아는 다소 비싼 비용을 요구해왔다.
통상적인 전쟁포로의 석방 비용에 비하면 분명 비싸지만, 어느정도는 전쟁 배상금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물론 포로를 포기한다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없었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자식과도 같은 병사들을 버릴 생각은 없었지만, 부하들을 돈 때문에 포기했다는 소리를 들어서야 영원히 사령관으로 복귀할 수 없으리라.
뭐, 그 전에 분노한 생존자들에게 찔려 죽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다만 냉정하고 계산적으로 생각해보더라도, 새롭게 신병을 뽑아 훈련하고 조직할 것을 감안하면 싸게 먹힌다는 생각도 들긴 한다.
숙련병도 모집하거나 양성하기 어렵지만, 이들을 통솔할 장교는 더더욱 모으기가 어려울 테니까.
마찬가지로 침공에 참여했다가 자국군 일부를 포로로 잡힌 타라트라바나 알시라스 역시 돈을 보내 왔으나···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알시라스는 가난하기로 유명한 나라였고, 타라트라바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지난 전쟁에 무리해서 대군을 투입했다가 그 충격을 회복하지 못했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으니까.
결국 변경백령의 돈이 되는 것들은 대부분 내다 팔거나 저당잡히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영지의 미래 수입을 담보로, 철면 은행은 막대한 금화를 늦지 않게 가져다 주었다.
그래도 우호적인 영주들, 그리고 무엇보다 라솔 국왕 리오고의 지원이 없었다면 때 맞춰 석방금을 마련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명목상 지난 침공은 타라트라바의 공작과 퀸토 변경백이 ‘국왕의 묵인 하에’ 엘랑키아를 침공한 전쟁이었다.
라솔 왕실 입장에서는 모른 척 할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기꺼이 돈을 낸 것은 아직 변경백인 자신과 이스키비르 하류 주둔군이 가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겠지.
실제로는 국왕의 밀명을 받고 실행한 퀸토 변경백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침공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면 가장 큰 영광과 권리는 다름 아닌 그의 것이었다.
결국 패배로 그걸 망친 것은 퀸토 변경백 자신이다. 그나마 다음 기회를 가질 가능성이라도 있는 게 다행이었다.
하지만 다음 기회··· 를 얻으려면 그 길은 순탄치 않으리라. 지금 당장 돌아오는 병사들을 새롭게 무장시키고 재편성하는 데 들어가는 돈만 해도···.
조용히 머리속으로 자신이 가진 카드를 꼽아본다.
거의 전력이 절반으로 줄어든 하류 주둔군 4개, 아니 3개 검천사 연대. 하나는 생뢰르반 전투에서 영구히 상실했다. 흔적도 없이 소멸한 부대를 재건하려면 보통 노력으로는 안 되겠지.
마찬가지로 절반 가까이 숫자가 줄어든 보조 경기병대. 라솔 북방의 거친 황야를 달리던 기수들은 다행히 큰 피해에도 사기가 높았다.
그리고··· 할콘 남작의 기병대.
솔직히 지난 침공전에서 할콘 남작의 부대에 많은 도움을 받은 게 사실이다.
협조성 없는 용병 나부랭이라 생각했고 부하들이 욕할 때도 암묵적으로 동의하며 그냥 놔두었지만, 결과적으로 도움이 된 건 사실이니까.
강변에서 벌어졌던 최악의 포위 상황을 극복한 것도 할콘 남작의 기병대가 퇴로를 개척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찾아놓은 얕은 여울이 아니었다면 잔존 병력의 절반 이상, 어쩌면 퀸토 변경백 자신도 라솔의 땅을 밟지 못하고 죽었을지도 모른다.
총에 맞아 죽든 물에 빠져 죽든.
만약 아군이 이겼다면 이는 좀스럽고 비겁한 행동이었으리라. 하지만 아군이 완전히 졌기에 생명줄을 내려준 꼴이 된 것이다.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이다.
허나 아군이 간신히 목숨만 붙여 퇴각해온 이후로도 질서를 유지하며 혹시 모를 추격에 대비했던 것은 할콘 남작의 기병대였다. 정말 놀라운 통솔력이었다.
그래서··· 마지막 정산 이후 ‘다음 전쟁에도 불러달라’며 떠나는 할콘 남작의 등 뒤에 대고 ‘필요 없다!’고 외치고 싶지는 않았다.
필사의 적진 돌파나 최후의 항전을 기대할 수는 없는 자였지만, 전장에서 기병의 역할은 그것 뿐만은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자이기도 했다.
우울한 생각에 빠져있던 퀸토 변경백에게, 막 포로에서 풀려난 누군가가 다가온다.
“사령관, 퀸토 사령관 각하!”
“마티오 연대장··· 무사히 돌아왔군!”
마티오 가엘 데 프라가도. 코루냐 연대의 연대장이었다. 강변에서의 전투에서 후위를 맡겠다는 자신을 설득해 퇴각시키고 대신 아군 주력이 강을 건널 때까지 싸웠던 용사이다.
그리고 전멸하기 직전, 자신이 준비하도록 했던 큼직한 백기를 직접 들고 투항한 군인이다.
‘변경백 몸값 보다는 연대장 몸값이 싸게 먹힙니다.’
마티오 연대장의 말은 자포자기 심정이었던 자신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저 말은 단순히 계산적이어서 나온 말이 아니다. 반드시 하류 주둔군이 재기할 것을 믿는 깊은 신뢰에서 나온 말이다.
그렇게 무사히 포로의 인도가 끝났다. 일단 조잡하나마 따뜻한 음식을 배불리 먹이고, 출신지역에 따라 임시 부대를 편성한다.
타라트라바, 알시라스, 그리고 라솔 각 지역에서 온 지원군으로 나눈다. 그리고 식량과 약간의 여비를 지급하고 귀환시키기로 했다.
남은 하류 주둔군 출신 병력은 정들었던 주둔지로 돌아간다. 다행히도 지친 귀환병들의 발걸음에는 새로운 희망이 엿보였다.
“감시 장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특히··· 생뢰르반에서 엘랑키아 군을 실질 지휘한 용병대장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깊었습니다.”
“...말해보게.”
포로수용소에서 고생을 하고 초췌한 얼굴로 돌아온 마티오 연대장은 전보다 말이 조금 많아진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 내용까지 시시껄렁한 것은 아니다.
장교, 그것도 연대장급 고위 장교이니 따로 수용되고 특별 대우, 즉 감시를 받았으리라. 하지만 그만큼 엘랑키아 장교들과 접할 기회도 많았겠지.
“그 자들의 말에 따르면, ‘콘도티에레’ 라고 불리는 그 자는 주디칼리 출신의 ‘용병왕’ 이라고 합니다.”
“콘도티에레? 용병왕?”
“물론 과장은 있겠습니다만, 주디칼리 남부를 무력으로 평정한 인물이라고···.”
시작부터 어처구니 없는 소리가 나온다. 콘도티에레야 라솔 문화권에서도 베테랑 용병에게 종종 붙이는 칭호라고 쳐도 용병왕이라니···.
“주디칼리 남부는 아직 한 국가로 통일 되지 않았을 텐데?”
“그런 의미가 아니라 서로 싸우던 도시 국가들 사이에 균형을 찾아 전쟁을 멈추도록 했다고 합니다. 실제야 어떻든 저와 대화한 엘랑키아 기사는 실제로 그렇게 믿는 것 같았습니다.”
“허어, 선전과 정보 조작에 능한 자라는 말인가.”
실제로 그럴지도 모른다. 생뢰르반 전투의 마지막 순간, 라솔의 마지막 일격을 가로막았던 적군이 보여줬던 분전은 광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부하들을 자신에게 심취하게 해서 목숨까지도 내놓게 하는 종류의 지휘관인 것인가···.
확실히 적 중앙에 배치되었던 주력은 완벽한 기강이나 훈련도를 갖추지는 못했다. 오히려 기세에 몸을 맡기는 느낌이었다.
“몇몇 장교들을 만났고 저와 대화를 원치 않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이나 용병왕에 대해서는 신나서 떠드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 엘랑키아의 돼지라 불리던 보병 부대를 우리 라솔의 정예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도록 양성한 인물이니까.”
라몽 백작도 상상 이상의 인물이었다. 이전에 전투에 참여한 경험이 있나를 백방으로 조사해보아도, 병력을 이끌고 출전한 경험 자체가 거의 없었다.
허나 첫 전쟁을 이만큼이나 지휘해 냈다는 것은 타고난 사령관으로 판단해도 좋겠다. 거기 더불어 그 ‘용병왕’이라는 자는··· 또 다른 변수가 될지도 모르겠다.
주디칼리 남부 평정이라는 말이야 과장이 되었을 수야 있겠지만, 직접 병력을 부딪쳐본 자신이기에 알 수 있는 게 있었다.
회심의 일격이라 생각한 기동이 몇 번이나 막혔으니까.
이는 양측 포진의 강점과 약점을 정확히 알았다는 것, 혹은 사령관으로서 퀸토 변경백의 의도를 읽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금이 가기 시작한 자부심이지만, 그래도 평생 조국의 변경을 지켜온 군인으로서 명예를 걸고 말할 수 있는 게 있다.
만약 생뢰르반에서 싸웠던 적이 ‘10년 전의 엘랑키아 군대’였다면, 승리의 함성을 올렸던 것은 라솔 왕국의 정예들이었으리라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엘랑키아 보병을 얕볼 수 없어졌다. 라솔 보병 둘이면 엘랑키아 돼지 셋은 쉽게 처리할 수 있다던 자신감은 무참히 깨진지 오래였다.
특히 적의 배후로 침입하려는 검천사들의 예봉을 틀어 막았던 적은···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은 훌륭했다. 마지막 국면에서 자신은 성급했고, 적은 침착했다. 자신은 적을 과소평가했고, 적은 그렇지 않았고.
이제는 알았으니 다시는 같은 실수는 하지 않는다. 절대로.
하지만··· 그 전에 우선 병력을 재건해야 한다. 어쩌면 철면 은행에 좀 더 대출을 받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퀸토 변경백은 머리속으로 담보로 잡힐 만한 가문의 재산이 더 있나 고민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