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2. 출동, 생뢰르반 파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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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쥬흐 트랑카벨은 최근 기분이 좋았다.
일시적이지만 바쁜 일에서 해방되어 있었고, 블랑독을 괴롭히던 여러가지 상황도 어느정도 해결되었으니까.
무엇보다도, 최근에는 친애하는 콘도티에레 에트와 담화 자리를 자주 가질 수 있었다. 차를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시간이 어찌나 빨리 지나가는지.
아쉽게도, 조만간 다른 가문의 파견군이 집결하고 북쪽으로 떠나게 되면 헤어져야 하겠지만.
그리고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영주 가문의 일원으로서 체면 문제도 있지만, 지금 그녀와 함께하고 있는 트랑카벨 병사들은 전장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지원 병력이라고는 하나, 얼마든지 실전에 나갈 가능성도 있었다. 그런 이들을 앞에 두고 기쁜 척을 해서는 안된다, 평생 갈고 닦아온 그녀의 교양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다만 그런데도 그녀의 발걸음이 경쾌해지는 것 까지도 막지는 못했다. 그렇게 빠른 걸음으로 의무대로 향한다.
아무리 평시라고는 해도 그녀는 공식적으로 의무대장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종군하는 군의관들과 간호사들은 그녀의 직속 부하들이다.
그러니 지속적으로 부대를 관리하는 것은 그녀의 의무이기도 하다.
게다가, 분명히 콘도티에레 에트 역시 그런 기본적인 걸 챙기는 모습을 좋아할 것이다. 본인이 그렇듯이 말이다.
“어머나···.”
의무대로 향하는 중에, 의무대 막사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나온다.
유난히 키가 크고 마른, 벗은 투구 아래로 보이는 곱슬머리가 이리저리 뻗쳐 머리를 더욱 크게 보이게 하는 바람에 허수아비처럼도 보인다.
게다가 유난히 구겨지고 사이즈가 작아 껑뚱하게 보이는 독특한 복장은 한 번 보면 절대 잊지 못하는 개성이라면 개성이다.
“리타르몽 드 당세르 경?”
“아쥬흐 영주··· 의무대장님! 안녕하십니까?”
언제나 음울하게 찌푸린 표정인 젊은 참모 장교는 아쥬흐를 보자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인사한다.
“아아, 의무대에 진찰을 받으러 오셨나요?”
“예, 방금 군의관님을 뵙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후후, 고맙네요. 제 권고를 성실하게 이행해주고 계시네요.”
“물론입니다, 트랑카벨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든 이행할 각오입니다!”
다소 과할수도 있는 의지 표명이지만 트랑카벨의 일원으로서 기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쥬흐는 가볍게 목례를 하며 그 신임 참모를 지나쳐 보낸다.
보기에는 다소 흐리멍텅해 보이는 사람이지만, 대화를 나누어 보면 생각도 남다르게 또렷하고 의지가 강한 사람이다.
콘도티에레 에트에게도 물어봤더니, 확실히 날카롭고 기대되는 점이 있는 장교라는 평가였다.
물론 항상 조심스러운 콘도티에레 에트는 좋은 점이든 나쁜점이든 사람을 쉽게 평가하는 사람은 아니니, 이 정도면 충분히 호평이라고 하겠다.
“어··· 선배님?”
군의관 막사로 들어가자, 탁자 위에서 뭔가를 쓰고 있던 젊은 군의관이 놀라서 동그랗게 된 눈으로 아쥬흐를 올려다 본다.
“아니, 아쥬흐 의무대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바쁘실 텐데 미안해요. 잠깐 시간 괜찮나요?”
“바쁘긴요, 막사 입구까지 부상병이 들이차기 전 까지는 감기 환자들 보는 것 말고는 할 일도 없는 걸요.”
아쥬흐의 델로나 대학 후배이자, 이번 파견군의 책임 군의관인 알체스테 델 나르코가 다소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그녀는 왠지 웃음이 나와 활짝 웃는다. 대학 시절, 그리고 아쥬흐의 초청을 받아 블랑독에 처음 왔을 때 그의 모습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이런 말 하면 실례일수도 있지만, 알체스테 군의관은 참 많이 바뀌었네요. 델로나 시절을 생각하면 말이에요.”
“바뀌었습니까? 제가요?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의무대장님께서 전혀 다른 분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만···.”
“아하하하, 그런가요?”
무례할 수 있는 툭툭 던지는 말투임에도, 아쥬흐는 함박웃음을 터뜨린다.
하긴 의과 대학 시절의 아쥬흐는 전혀 재미 없는 인간이었으니까. 죽어라 공부만 하고, 철저하게 이해득실로만 모든 것을 판단했었지.
알체스테는 대단히 유능한, 그리고 헌신적인 군의관 중 하나이다.
“알체스테 군의관은 동료들이나 간호사들, 환자들에게서도 무척 평가가 좋더라고요.”
“그야 이만큼 임상 경험을 쌓으면··· 아무리 손이 둔한 저라도 재주가 붙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 상대를 가리지 않고 거침없이 말하는 청년 군의관에 대해 아쥬흐가 가지고 있었던 인식은 ‘겁 먹은 다람쥐’ 였다.
아무리 주변에 신경을 쓰지 않았던 시절이라고는 해도, 덩치가 작고 안경을 쓴, 그리고 아직 소년 티가 남아있는 제법 성적이 좋은 후배에 대한 기억이 없지는 않았으니까.
그리고 블랑독에 처음 도착했을 때도 익숙하지 않은 군대에서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던 모습이 영락없는 작은 동물의 모습이었고.
하지만 그러던 그가 이제 트랑카벨 영지군 의무대의 일원으로 샹다메리, 마르사코르, 생뢰르반 전투 모두에 참전한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다.
말 그대로 수백 명의 부상자가 그의 손을 거쳐갔고, 그 중 적지 않은 수는 그대로 두면 죽거나 불구가 됐을 중상자였으리라.
그렇게 일 잘하는 부하라면 이 정도의 퉁명스러움은 얼마든지 이해해줄 수 있지. 그렇고 말구.
···소년 같던 얼굴도 고생을 해서 그런지, 피부가 많이 상하고 수염도 자라 예전 같은 모습은 아니라 좀 미안하다는 생각도 든다.
“방금 나가신 분, 리타르몽 경의 건강 상태는 좀 어떤가요? 의무대장으로서 소견을 묻고 싶어요.”
“별로 좋지는 않습니다. 폐가 좋지 않다는 것은 의무대장님께서도 알고 계실 테고··· 심장도 그렇습니다.”
“...심장도 안좋다고요?”
“예. 심장 뛰는 소리를 들어보니 불규칙한 잡음이 섞여 있었습니다. 아직 확신은 할 수 없지만···.”
“그래요···.”
둘은 한참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아쥬흐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던 일이나, 생각보다도 좋지 않은 모양이다.
전쟁에 내보내서는 안 될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출전을 막지 않으셨어요?”
“그게 말입니다··· 의무대장님.”
시종일관 뚱한 표정이던 알체스테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어린다.
“음··· 그게요, 의무대장님도 잘 아실테지만, 그 장교가 가진 병은 선천적인 것으로, 쉰다고 낫거나 하는 병이 아닙니다.”
“하지만 상태가 호전될 수는 있지 않나요. 조심해서 관리하면 분명히.”
“예, 맞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의무대장님, 의무대장님이시라면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여생을 조금이라도 길게 보내려면, 모든 일에서 손을 놓고 숨만 쉬며 살라고 하면 말입니다.”
“하, 하지만 꼭 그렇게까지는···.”
“저는 그렇게는 못 삽니다.”
둘 사이에는 잠시 침묵만이 머문다. 이 두 사람이 아니라, 설령 의사가 아니더라도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성질의 질문은 아니리라.
“그 멀대 장교는 저에게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고, 차마 군인 관두고 집에서 쉬라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리타르몽 경이 뭐라고 했나요?”
“만약에라도 자기가 행군을 따라가지 못하면, 길가에 버리고 가라고 하더군요.”
“음··· 뭐라고 대답했나요?”
“버리지는 못하고, 군수품 수레에 싣고 갈 것이고 특별 대우는 없을 거라 말했습니다.”
“앗···! 아··· 흠흠, 네, 그러셨군요.”
“웃으셔도 괜찮습니다만.”
“...아니에요, 미안해요.”
상상도 못한 문답에 웃음이 터질 뻔한 아쥬흐는 간신히 체통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제가 부담을 하나 안겨 드린 것 같아서 죄송하네요. 설마 이번 파견군에 지원하신 것도 설마···?”
“뭐, 제가 결정한 사항인데 환자를 누구한테 맡기겠습니까. 그리고 어차피 저는 임상 경험이 필요한 가난뱅이 의사니까요.”
태연스레 말하는 알체스테의 얼굴을 보며 아쥬흐는 그저 어색한 미소를 짓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원래 목표도 명확했다. 트랑카벨 의무대에서 경험을 쌓는 한편, 위험수당이 포함되어 다소 높은 임금을 모아 고향으로 돌아가 성공한다는 야망이다.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헌신적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은 두말 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요··· 그럼 잘 부탁드려요.”
“예, 그 친구가 원하는 만큼, 그리고 트랑카벨이 필요로 하는 만큼은 살려두도록 할 생각입니다.”
“후후, 좋은 의사가 되려면 좀 더 상냥해지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환자들은 상냥한 의사가 아니라 실력 좋은 의사를 원합니다.”
“아하하, 그것도 그래요. 그럼 달리 의무대에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신가요?”
“전투에 들어가면 모든 게 부족해지겠지만, 지금은 뭐든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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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셨겠지만, 드 레뮤즈 보병 연대가 도착했습니다, 리타르몽 경.”
“계획된 주둔지로 안내해 드리고 필요한 보급품을 배분하도록 하게. 혹시 추가 지시가 필요한가?”
“저번에 분류해주신 내용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트랑카벨 영지군만 머물고 있어 휑하던 주둔지에 처음으로 손님이 도착했다. 앞으로 더 도착하겠지.
콘도티에레와 연대장은 드 레뮤즈 군을 맞이하러 갔고, 자신은 묵묵히 뒤에서 역할을 한다.
그의 주 업무는 연대장을 보좌하는 작전 참모이지만, 또한 참모진을 관리하는 수석 참모이기도 하기에 방금처럼 보급 참모에게 상부의 지시를 전달하기도 하는 것이다.
아직은 전장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고, 군수품도 넉넉한 상황이다. 하지만 그게 나태하게 행동해도 되는 이유는 되지 못한다.
“쿨럭, 크흠!”
리타르몽은 손등으로 갑자기 나오는 기침을 막는다. 별 재주도 없는 팔다리는 쓸데 없이 길어서 손목을 덮을 옷감이 부족하다.
다행히 최근에는 몸 상태가 아주 좋다. 군의관님이 신경써서 약을 챙겨준 것도 있지만, 역시 평생의 비원을 이루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자기 몸이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은 알고 있었다. 어릴 때는 훨씬 심했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날이 한달 중 절반을 넘던 시절도 있었고.
그다지 부유한 집안도 아니었거늘, 부모님은 아들을 치료하겠다고 가산을 탕진했다.
지금은 자신이 물려받은 드 당세르 가문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은 순전히 자기 책임이다. 원래 부유한 가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자신도 노력했지만, 부모님께서 배려해 주신 덕분이다.
그럼에도 자신은 아마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다.
자신도, 자신을 진찰한 의사도 알고 있었고 부모님도 아셨으리라. 하지만 받아들이시지 못하셨던 것 같다.
힘든 가정 상황 탓인지, 그의 형은 다른 가문에 데릴사위로 들어갔다.
···그리고 지난 전쟁에서 전사했다. 형님은 제51 포르망제 의용보병 연대 소속이었다. 델레망드 삼각주를 지키기 위한 전투였다.
그런 급박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멀쩡하지 못한 몸뚱이를 가진 그는 아마 영지군에 입대조차 못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그는 간부 후보생으로 카르카냑에서 교육을 받고 있었다.
데릴사위로서 다른 가문을 이어받으면서 성이 바뀌었기 때문에, 친동생이면서도 형의 전사 소식을 듣는 데 한참 걸렸었다.
현재 리타르몽 드 당세르가 품은 뜻은 복수는 아니다. 사실 복수야 이미 트랑카벨 가문과 콘도티에레가 이루어 주었으니까.
증오스러운 성전군 놈들을 마르사코르에서 몽땅 불태우면서 말이다.
다만 그가 이루고자 하는 뜻은 단 하나였다.
길지 않은 인생일지라도 자기 역할을 찾아보자. 트랑카벨 가문과, 너무나도 빛나는 존재인 콘도티에레를 섬기면서 말이다.
그리고 지금 그 뜻을 이루고 있어 너무나도 기쁘다.
자신의 저주받을 몸뚱이가 버텨주는 한, 헌신하고 싶었다. 보잘것 없는 내용일지라도 역사 속에 자신의 이름 한 줄 정도는 남기고 싶었다.
이번 파견군은 여러 가문에서 조금씩 보낸 병력들로 이루어진 연합부대이다.
생뢰르반 군을 이루는 핵심인 트랑카벨 자작가와 드 레뮤즈 백작가는 물론이고, 드 누아나 드 상포리앙과 같은 주변 가문에 서부군의 드 몽파르지에 가문에서도 지원군이 온다고 했다.
그러나 보급을 책임지는 것은 트랑카벨 가문이다. 따라서 관리 업무가 많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이를 책임지는 게 자신이라는 점에서 무한한 기쁨을 느꼈다.
리타르몽은 글자도 좋고 숫자도 좋았다.
몸이 약해 밖에 나갈 수가 없으니 종일 책만 보았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당시에는 ‘과거의 숫자’를 되새김하며 상상만 했었지만, 지금은 ‘현재의 숫자’를 다루며 실제 병력과 물자를 관리한다.
게다가 그게 척척 맞아 들어간다는 것, 그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정작 동료이자 실무 담당자인 보급 참모는 그게 어떻게 재미있을 수 있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말이다.
“리타르몽 경! 콘도티에레께서 부르십니다. 드 레뮤즈 영지군의 지휘부 장교분들께 소개를 하시려는 것 같습니다.”
“아! 지금 즉시 가겠네!”
갑자기 움직이려니 가슴 한 구석에 살짝 통증이 온다. 누군가가 쿡쿡 쑤시고 당기는 듯한 통증. 허나 익숙한 통증이다. 조금 조심하면 사라지겠지.
분명 괜찮을 것이다. 오늘도, 내일도, 그 이후로도. 한동안은 움직여 주겠지.
리타르몽은 기쁜 마음으로 주둔지를 가로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