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407화 (407/556)

42-4. 랄렌 강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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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델베르크 요새에서 동쪽으로 떨어진 고도 폴름스.

대륙 전체에 유일무이한 연리목 세계수가 그 장대한 가지를 드리운 도시이며, 폴름스의 혈족들이 보금자리로 삼은 도시이다.

두 그루의 세계수가 이어지는 장소에 건설된 선제후의 집무실은 싸늘한 분위기를 숨길 수 없었다.

“정말 느리군···.”

신성 그룬발트 제국의 12선제후 중 하나인 폴름스의 선제후, ‘회색 마녀’ 네프셀시엔은 울분을 삼키느라 몸을 떨었다.

“그 잘난 디오보르크 공작은 어디서 뭘 하고 있나?”

“가, 갑자기 여섯 선제후를 포함한 많은 영주들이 병력과 물자를 동원하고 있는 상황이라···.”

까다롭고 다혈질인 주군의 성격을 아는 장로와 가신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진땀을 흘린다.

그들이 하는 설명을 주군 네프셀시엔이 모를 리는 없다. 다만 그들이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그것 밖에 없는 것이다.

비밀리에 맺어진 맹약, 오만방자한 엘랑키아 왕국의 침략군을 멸하기 위한 맹약이 발표되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 습격이 시작되었다.

적은 빠른 속도로 진격해온 적은 순식간에 로델베르크를 포위했다.

진격이 얼마나 빨랐던지 로델베르크는 완전한 병력 소집조차 실패했다고 한다.

분하지만 선수를 완전히 빼앗겼다. 저 오만하고 포악한 엘랑크 족의 후예들은 철저하게 ‘전쟁’을 준비한 것이 분명하다.

단순하게 군세를 불려 되는 대로 싸우기 위해 머리부터 들이미는 것이 아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이 쪽이다. 만약에 로델베르크가 함락된다면 선제후의 거점 폴름스까지는 순식간이니까.

당연히 네프셀시엔은 서둘러 병력을 소집해 로델베르크를 탈환하기 위해 출병하려고 했다.

‘맹약에 따라, 디오보르크 공작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폴름스에서 움직이지 말 것을 요망’

그런 네프셀시엔의 생각을 알아채기라도 한듯, 카젤하겐의 선제후가 전갈을 보내 출격을 막았다.

“이러다가 로델베르크가 함락되지 않겠나? 그 다음은 폴름스다! 엘랑크의 후손들이 신성한 연리목의 도시를 공격하는 꼴을 지켜봐야 한다는 말인가?”

“고, 고정하십시오, 선제후 전하. 저희가 방비에는 온 힘을 다 하고 있으니 폴름스의 이중 성벽이 무너지는 일은 만에 하나도···.”

“감히 저들이 폴름스를 공격하게 두는 것 부터가 문제라는 것이다!”

네프셀시엔의 쩌렁쩌렁한 외침에 주변에서는 몸을 떤다.

비록 그녀가 기분대로 주변을 살륙하는 미치광이는 아닐지라도, ‘회색 마녀’의 이명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혈족들은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특히 폴름스가 엘랑키아, 엘랑크 족의 후손이 세운 나라에 가지는 원한은 천 년이 넘은 것이다.

누구보다도 자신의 혈통에 깊은 자부심을 가진 네프셀시엔에게 이는 더더욱 각별한 것이 분명했다.

고대 혈족의 영광스러운 전성기를 끝냈던 과거의 엘랑크 족과, 랄렌 강 너머의 유일한 영토였던 메이플링겐까지 뜯어간 현재의 엘랑키아 왕국.

게다가 이제 다시금 랄렌 강을 너머, 본성 폴름스의 지척을 지키는 로델베르크까지 포위한 상황.

그녀가 느끼는 감정은 개인적인 모욕 이상인 것이 당연하리라.

“최소한··· 남쪽에서, 브라우나인의 선제후가 우선 보낸 병력이 도착한 이후에 결정하시지요. 현재로선 가장 가까운 지원입니다.”

“크으··· 브라우나인···.”

네프셀시엔은 오랜 라이벌 선제후 가문의 이름을 곱씹는다.

천 년을 넘게 서로 으르렁거리며 살아온 상대지만, 이번 맹약에서는 ‘아군’이다. 비록 미덥지는 못하지만 지금은 믿어야만 한다.

맹약의 여섯 선제후 가문들 중, 비교적 거리가 가까운 세 가문은 직접 병력을, 나머지 세 가문은 물자와 전비를 지원하기로 했다.

각 가문의 병력 뿐 아니라, 그들이 지불한 비용으로 고용 계약이 끝난 용병대 역시 속속 집결하고 있다.

만약 전군이 집결한다면 그 전력은 역겨운 엘랑키아 침공군을 훨씬 상회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반드시 이긴다’가 호언장담이 아니게 되겠지.

사실 지금 네프셀시엔이 자력으로 모은 병력과 우선 도착한 용병 부대만 해도 수적으로는 로델베르크를 공격하는 적과 호각이다.

하지만 폴름스의 장로와 가신들은 모두 두려워하고 있다. 가증스러운 엘랑키아의 침략군을 말이다.

10년 전, 팔츠부르크 전투의 비극을 기억하고 있다. 엘프도 인간도 말이다.

하지만 네프셀시엔은 그 생각만 하면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팔츠부르크 전투는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숫자는 적지만 막강한 엘랑키아 기사’에 의해 불운한 메이플링겐 공작의 군세가 일방적으로 학살당한 전투만은 아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충성스러운 공작과 그 자식들이 모두 전사하고, 부하들도 패주하다가 태반이 랄렌 강에 빠져 죽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그렇게 일방적이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아군이 적을 압도해 승리 직전까지 갔던 적도 있었다.

···물론 그 직후에 반격에 당해, 오른쪽 측면부터 쓸려 버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 해도, 지금 폴름스의 기사와 병사들에게 퍼져있는 ‘엘랑키아 기사 공포증’ 과도한 수준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침대 아래의 어두운 공간에 괴물이 살고 있다고 믿어버리듯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주군인 네프셀시엔이 진실을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머저리같은 기사와 병사들이 그걸 믿고 있는 한은 말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완벽한 반례, 새로운 그룬발트 제국의 승리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과연 지금, 맹약의 권고를 무시하고 홀로 출병한다면··· 네프셀시엔 자신은 승리할 수 있는가? 반드시?

“저주받을!”

주먹이 팔걸이를 내리쳐 콰앙 소리가 나자 둘러선 가신들이 놀라 움찔거린다.

안타깝게도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도 자신도 없었다. 어쩌면 그게 울분을 참으면서도 기다리는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른다.

네프셀시엔은 자기 자신의 이중적인 생각에 구역질이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굴욕적인 기다림 다음에는 승리가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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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터스하임에 대한 방어선 준비는 그럭저럭 마무리 되었다.

접근하던 적 역시,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길목에 우리가 대기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자 탐색하고자 한 것인지 거리를 두고 잠시 멈추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하루의 시간을 벌 수 있었고, 병사들이 고생한 덕에 방어선은 한층 단단해질 수 있었다.

나중에 돌아올 주민들에게는 좀 미안한 일이지만, 미터스하임 마을의 건물 절반 정도와 돌담, 울타리 전부는 허물어져 방어선 건설 재료로 사용되었다.

그게 비탈을 따라 한 줄, 혹은 두 줄로 건설된 참호선을 보강하는 역할을 했고 일부는 적의 접근을 막는 장애물로 깔리기도 했다.

지형상 철저하게 정면만 방어할 수 있는 구조는 아니었으므로, 방어선은 마을을 등지고 크게 호를 그리며 반원을 일부 잘라낸 형태를 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마을 주변의 작은 평지를 제외하면 좌우로 지대가 더 높아지는 구조이므로 방어선을 연장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아예 고지대 자체를 돌아 관측하기 어려운 위치로 우회한다면?

다행히 주변은 탁 트인 상태니 미리 대응할 기회는 있을 거다. 물론 그 때가 되면 마을을 사수하는 것 보다 퇴각하는 게 낫겠지만···.

게다가 지금 우리 부대는 기병 비율이 굉장히 높다. 무려 삼 분의 일 가량이 기병이니까!

트랑카벨 영지군 소속의 용기병들을 말에서 내려 보병 부대에 합류시킨다 해도, 약 1500기의 병력이다.

그 중 최소한 절반 이상은 ‘그 엘랑키아 기사’들이니까, 함부로 방어선 뒤편으로 넘어온 적들은 최소한 한 번, 어쩌면 그 이상은 영혼까지 털릴 각오를 해야 하겠지.

···생각해보니 생뢰르반 전투에서도 그랬었지만, 엘랑키아 기사들이 아군이 되니까 참으로 믿음직스럽다.

샹다메리에서는 부족한 전력으로 어떻게든 상대하기 위해 온갖 수를 동원했었는데, 이제는 최소한 같은 수의 기병 싸움에서는 밀릴 생각 안해도 된다.

···세상에 이렇게 편할 수가.

“카렐 경은 전장에서 800미터 후방에서, 예비대로 머물면서 측후방을 감시해주세요.”

“명령 따르겠습니다, 에트 경!”

이번에 기병대를 맡게 된 카렐 드 상포리앙은 다소 긴장된 목소리로 말한다.

얼마 전 나에게 터놓고 말한 것에 따르면, 리니 능선 전투에서 나 때문에 심장이 멈췄던 이후 전투에 트라우마가 생겼었다고 한다.

한동안은 재질 강화의 기프트도 쓰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시간을 두고 강박은 이겨냈고, 용기를 가지고 파견군에 자원했다고 한다.

‘이번에는 승자의 시점에서 전장을 보고 싶다’라고 하면서 말이다.

“티테니아 경은 전장에서 300미터 후방에서, 마찬가지로 혹시라도 방어선을 돌파하는 적을 감시하고 카렐 경의 기병 본대와의 연락을 맡아주게.”

“옛, 콘도티에레! 한가지 요청드려도 되겠습니까?”

“뭐가 궁금한가?”

“저는 콘도티에레의 호위대와 함께 사령부에 머물러도 되겠습니까? 만에 하나 일이 생기면 곧바로 부대와 합류해 대응하겠습니다!”

“흐음···.”

나는 잠시 고민한다. 원칙을 따진다면 지휘관은 부대와 함께 있는 게 옳지만···.

배치 위치가 멀지 않은 포병이나 기병의 경우, 지휘관이 사령부에 머무는 경우가 있다.

부대의 즉각적인 대응 보다도 지휘관의 진의를 파악하는 게 더 중요할 때도 있으니까.

“좋아, 그렇게 하도록. 다만 신임 장교의 경우 전장의 광경에 질려 ‘방관자’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 조심하게!”

“옛! 말씀 받들겠습니다!”

티테니아가 씩씩하게 대답한다. 커다란 두 눈이 기쁨으로 빛난다.

이미 첼레스티나를 전장으로 끌어낸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아무리 본인이 원했다고 해도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는 귀족 아가씨는 가능하면 후방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완전 후방이 아니라면, 차라리 사령부에 있는 게 더 안전하고 배우는 게 많을 수도 있겠지.

그리고 지금까지는 한 명의 기병으로서, 그리고 중견 장교로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으니까.

“참호를 점검하고 왔습니다, 콘도티에레!”

제18 벨모제 보병 연대의 지휘관 다를 쿠에상이 주먹 엄지손가락 쪽을 가슴에 부딪치는 격식있는 경례를 하며 말했다.

외모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마는, 다를 연대장은 군인, 그것도 천 명이 넘는 정규 보병을 이끄는 연대장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술통처럼 풍채 좋은 몸과, 시원하게 정수리까지 까진 대머리가 더더욱 그런 느낌을 주는 것 같다.

‘갑옷이 몸에 안 맞아서 수선 비용이 들지만, 투구 덕에 대머리를 숨길 수 있으니 좋습니다!’

라며 그걸 농담거리로 삼는 호탕함을 가진 남자는, 무엇보다도 부하들에게 사랑받는 연대장이다.

원래 벨모제 성주인 톨마르 마슈레 영감님 휘하의 보병 지휘관이었다고 했던가. 적어도 위나 아래나 사람 다루는 능력은 남다른것은 분명하다.

“수고하셨습니다. 더 필요한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제가 보기에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다만··· 적의 숫자가 예상보다 조금 많은 게 아닐까요?”

“그러게말입니다···.”

나는 말 끝을 흐렸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뤼브르 드 루블랭 역시 몸 둘 바를 모른다.

그가 나에게 잘못된 정보를 주었고, 나는 그걸 휘하 지휘관들에게 전달했으니까···.

명백히 이쪽을 인지하고 전투 대형으로 다가오고 있는 적.

문제는 그 숫자이다.

분명 뤼브르 경이 전해준, 왕실군 사령부에서 나온 정보로는 대략 6천에서 8천 정도의 병력이었어야 했는데···.

“이건 아무리 봐도 1만은 충분히 넘지 말입니다?”

“예··· 아군의 두 배 이상입니다.”

“허허허헛, 방어 준비를 충분히 할 수 있어서 다행이군요! 우리 연대의 데뷔전인데, 축하해주고 싶었나 봅니다.”

다를 연대장이 껄껄 웃으면서 농담한다. 물론 제18 연대는 아실 휘하에서 작은 전투에 참여한 적이 있으니 완전히 데뷔전이 아니긴 하지만···.

이런 중요한 전투에서 그것도 한 가운데를 맡았으니, 전에 없는 상황이기는 하겠다.

“일단 교전이 시작하면 상황을 파악하고, 위기가 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저희는 그저 콘도티에레를 믿고 싸울 뿐입니다!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확실히 처음에는 대략 6천 정도의 병력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이 되니 뒤에서 그 만큼, 혹은 그 이상의 병력이 또 나타날 줄은 몰랐다.

사령부의 예상이 틀린 거니 급한 일이라 전령도 보냈다. 일단은 저들이 어디서 온 병력인지도 알아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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