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439화 (439/556)

44-8. 연리목 세계수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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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부 방면 정리 마무리 되었습니다. 혹시 적 잔존 병력이 있는지 기병대가 수색 중입니다!”

“수고했다.”

로스니히에서의 전투는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앞장 선 꼴이 된 2개 연대를 붕괴시키자마자, 적군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뒤 이어서 기동성이 있는 적 기병대가 가장 먼저 흩어져 도망쳤고, 이를 인지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건재하던 후방의 적 보병 연대도 그대로 무너졌다.

적장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적은 마치 통일된 사령탑이 없다는 듯, 제각각 저항하다가 제각각 무너져 도망치고 말았다.

아, 어쩌면 초반에 전멸한 선두 연대에 적장이 속해 있었을지도 모른다.

가끔 그런 때가 있다. 화약이 전장을 지배하기 시작한 이후로 더 자주 생기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지휘관이 쓰러지는 경우.

그렇다면 적장이 초장에 쓰러졌다는 말일까. 길진 않았지만 전투 내내 지리멸렬했던 것을 보면 이해는 간다.

럭키샷으로 초반에 적장을 쓰러뜨린 것도 그렇고, 걱정했지만 자욱한 안개에 완벽하게 몸을 숨길 수 있었던 것도 그렇고.

이번에는 참 운이 좋았다.

전투는 운칠기삼까지는 아니지만, 운삼기칠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아무리 꼼꼼하게 챙겨도 결국은 뚜껑을 열어 봐야 아는 부분들이 있다는 말이지···.

어쨌든, 지금은 오늘의 행운에 감사하고 마무리를 잘 해야 한다. 그 왜, 그룬발트에는 ‘불운은 게으른 자에게 옮는다’ 라는 속담이 있더라고.

“자 너무 완벽하게 할 필요는 없다. 10분 내로 마무리하고 신속하게 철수하자. 각 부대에 전령을 보내주게.”

“옛, 콘도티에레!”

지금은 전투를 끝낸 직후, 흩어진 잔적을 소탕하고 포로를 잡는 한편, ‘전장 정리’를 하고 있었다.

전장 정리란 무기 회수이다. 다른 건 몰라도, 화약과 화약 무기는 반드시 회수하는 것이 원칙이다.

다만 이번에는 시간이 넉넉한 편은 아니니까, 적당히 마무리하고 로스니히를 떠나는 쪽을 택했다.

이미 정찰을 통해서 후속 병력이 오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만약 적이 독이 올라 추격한다면, 최저 6시간 만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6시간 정도의 거리는 군대의 기동 여하에 따라서는 거리가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완승을 거두었지만, 계획에도 없는 전투는 가급적 피하고 싶었다. ‘당초 목표’는 이미 달성했으니까.

당초 목표란 물론, 적의 예봉을 꺾고 본대를 도발해 결전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압도적 우위를 가지지 못하는, 만 명 정도의 작은 규모 야전군으로는 싸워봐야 손해만 볼 뿐이라는 인식을 주고 싶었던 것이기도 하고.

반대로 적이 신중 모드가 되어 전투를 피하게 된다면··· 그건 그거대로 나쁘지 않으리라. 더 이상 큰 전투 없이, 전략적 승리만 챙기고 빠질 수도 있으니.

하지만 적은 전투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 때 분명하다.

하여간 엘랑키아 국왕 폐하는 운도 좋다···.

“방금 포로 후송을 마무리 했습니다! 포로 숫자는 모두 1300여 명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밝은 얼굴로 사령부를 찾아와 보고하는 장교는 다름아닌 뤼브르 드 루블랭이다.

밧줄로 줄줄이 엮인 그룬발트 군 포로들이 시무룩한 얼굴로 폴름스로 향하고 있었다.

장교들은 따로 분류되어서 조만간 신문을 받게 되겠지.

“수고했다, 뤼브르!”

“모두 백작님과 에트 경 덕입니다!”

부자관계인 프레니히 드 루블랭 백작과 루블랭 경은 잠시 애정과 신뢰 어린 눈길을 나누었으나, 그 이상의 친밀함을 표시하지는 않았다.

프레니히 백작 입장에서는 늦둥이 막내아들이 사랑스러울 법도 한데, 역시 전장에서는 선을 그어 놓는 모양이다.

“에트 경의 지휘를 받아 싸워 보니 어떻더냐?”

“하하핫, 저는 이미 미터스하임 전투에서 에트 경의 신묘함을 보았었습니다. 안개 속에서 대기하는 동안에도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허허, 이제 좀 사내 테가 나는구나.”

“저도 몇 년을 군대 밥을 먹었는데, 이제 조금은 전쟁의 이치에 대해서 알아가는 것 같습니다.”

뤼브르는 그렇게 대답하더니 활짝 웃으며 나에게 고개를 깊게 숙인다.

“모두 에트 경 덕분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아니 저는 뭐 딱히···.”

내가 대답을 제대로 못하고 우물거린 이유는, 겸양의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한 게 없기 때문이다!

···솔직히 뤼브르 경 처음 봤을 때는 붙임성은 있지만 미덥지 않은 사람이라 생각했었다 생각한게 미안할 정도인데.

“그럼 저는 현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소탕전을 진행 중인 아군이 또 포로를 잡아 오는 모양이니까요. 일을 마치고 다시 뵙겠습니다, 백작님, 에트 경.”

“그래, 수고하거라, 뤼브르.”

“나중에 뵙지요, 뤼브르 경.”

첫 인상과 다르게, 지금 생각하는 뤼브르 경에 대한 감상은 ‘주변에서 신뢰 받는 행정가’ 같은 느낌이다.

본인이 능력이 뛰어나서 조직을 휘어잡아 이끌어 가는 타입은 아니지만, 조직의 일원으로서 분위기를 긍정적으로 유지하고 효율을 끌어 올리는 사람이라고 할까.

두루두루 잘 지내니 다른 부서 돌아가는 행태도 잘 알게 되고, 전체적으로 평가가 좋으니 일이 잘 돌아가는 윤활제 역할이기도 하겠지.

물론 저런 타입 중에는 이른바 ‘뺀질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중요한 인물인 척 하지만 실제로는 겉돌기만 하는 인간들도 있지만, 뤼브르 경은 진짜배기이다.

···역시 사람은 첫 인상 만으로 판단하면 안 되고, 일을 같이 해 봐야 알 수 있다는 말이 맞는 모양이다.

“...못난 막내아들 녀석이 이제 사람 구실을 하는 모양이오. 그간 말은 못했지만 솔직히 걱정을 조금 했었다오.”

그때, 프레니히 경이 의외의 말을 꺼냈다. 아버지 입장에서도 아들이 미덥지 못했던 것인가···.

“원래 일 하는 방법을 찾는 데 시간이 걸리는 사람도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허허헛, 에트 경 역시 우리 아들 놈을 변변찮게 보고 있었던 모양이오?”

“아, 아니···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이 노장은 사람 마음이라도 읽는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변변찮게 보고 있었던 게 맞습니다.

“허허헛, 농담이오. 아마도 저 녀석이 에트 경을 뭐라고 해야 하나, 본보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소.”

“저를 본보기로 말입니까? 저와는 전혀 다른 타입의 사람인데요! 참모로서나 인간으로서나···.”

정말이다. 나는 최소한 저렇게 누구에게나 살갑게 굴고, 쉽게 남의 영역에 들어가는 일은 못한다. 좋게 말하면 신중하지만, 나쁘게 말하면 우유부단한 편이고···.

“그런 거야 저 녀석 본래 성격인 것일 테고, 일 하는 방식 말이오. 아들 녀석 곁에는, 우리 엘랑키아 군에는 에트 경과 같은 타입의 군인이 거의 없으니까 말이오.”

“아, 그 말씀이셨습니까.”

놀랍게도 이 노원수 프레니히 백작의 의견은 단번에 핵심을 찔러왔다.

왜 놀랐냐면, 나도 최근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던 점이기 때문이다.

역시, 하급 귀족으로 군문에 들어 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결과, 자력으로 왕실군 원수와 백작위를 받은 인물이라더니 분석이 남다른 모양이다.

“우리 엘랑키아 왕국에는 대군을 이끌 기사의 재목이 얼마든지 있소. 그리고 그들을 뒤에서 지탱하고 유지할 행정가들도 많지. 그렇지 않소?”

“예, 맞습니다. 엘랑키아 군은 가까이에서 보니 멀리서 볼 때 보다 더욱 강군이더군요.”

“하하하! 샹다메리에서는 귀경의 블랑독 군에게 시원하게 패배한 군인데도 말이오?”

“그, 그건 외람되지만 당시 엘랑키아 군은 힘을 다 쓴 군대라고는 하기 어려운···.”

“하하하하핫!”

내가 당황하자, 프레니히 백작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껄껄거리며 호탕하게도 웃는다.

“...하하, 뭐 지금의 왕실군만큼 강하지 않다, 는 것은 진실이지만 여전히 강한 군대라 생각하고 있소.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지.”

“어떤 점에서입니까?”

“방금 말하지 않았소! 장군도 많고 행정가도 많지만, 바로 에트 경과 같이 다방면으로 생각하는 참모가, 책사가 없는 군대니 말이오.”

“그런··· 점도 있겠습니다.”

다소 논리가 거칠고 과장된 부분이 없지 않으나,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확실히 엘랑키아 군은 정강한 대군이 있고, 이를 지탱할 풍요로운 국토와 유능한 인물들도 있다.

다만 프레니히 백작이 표현한 ‘기사’ 타입의 인재들이 주도하는 것은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가진다.

본래 기사 성향의 인물들은 용맹함을 미덕으로 여기고, 여기서 파생되어 다소의 무모함을 감수하는 것 또한 미덕이 되는 편이다.

쏟아지는 총탄을 뚫고 적진에 선봉으로 도착, 적을 무수히 쓰러뜨리며 승리를 견인한 선봉장!

이라는 이상적인 기사의 모습은, 남자라면 누구나 꿈 꾸어 본 자신의 미래일 것이다.

아, 까놓고 말해서 적의 대군을 몰아내고 큰 전공을 세워 금의환향해서 아름다운 공주를 부인으로 얻는다는 그런 거, 다들 한 번쯤 망상해 보는 법이잖나.

게다가 실질적으로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거기에 스스로가 갖춘 무력에 더해 가문과 후원자가 모아준 병력이 더해지면 전형적인 ‘기사’타입의 군인이 탄생한다.

승리는 자신의 창끝으로 쟁취하는 것이라 믿으며, 다소 위험한 임무에도 거리낌 없이 뛰어드는 용맹한 군인 말이다.

엘랑키아에 이런 타입의 인물이 많은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이 엘랑키아 왕국이 국왕부터 말단 종사들까지, ‘군사 귀족’이라는 말로 묶을 수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리라.

지금까지 그렇게 싸워왔고, 그렇게 승리를 쟁취했으며, 대국 엘랑키아 왕국은 대륙을 호령할 정도로 막강하니까.

그런 가문, 그런 환경에서 보고 듣고 배우고 자라왔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용맹한 엘랑키아의 기사들은, 필요하다면 몇 배나 되는 적의 대군을 향해서든, 이쪽을 향해 포구를 벌린 포대를 향해서든 거리낌 없이 창을 세우고 뛰어 들 것이다.

물론, 절대로 이게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런 타입의 군인은 위험과 손해를 계산하는데 미숙한 경우가 많다.

예전부터 전술가들 사이에서 많이 논의되었던 난제가 있다.

과연 전투의 승패에 미치는 영향은, 전투 전과 전투 후 어느 쪽이 더 많을까.

나에게 묻는다면 당연히 전투 전이라 대답하겠지. 내가 스승님께 배운 내용이 바로 그것이고, 나도 평생을 그렇게 생각해 왔으니까.

하지만 엘랑키아의 기사들은 대부분 후자를 선택하리라.

그리고 이걸 틀렸다고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건 그들에게 경험칙이다. 다소 불리한 전투일지라도 자신들의 힘으로 극복하고 최종적으로 승리한 경험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말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전투 전에 망설이고 고민하며 제3의 방법을 살펴보는 것에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설령 그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도, 평생을 살아온 방식이 그렇기 때문에 ‘혹시라도 내가 겁을 내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억제해 버리기도 한다.

그에 비해서, 승리의 영광 보다는 패배의 손해를 더욱 뼈아프게 생각하고 위험 관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들이 있다.

바로 나 같은 용병들이다.

비슷하게 주디칼리 등, 소국의 군주들도 그럴 수밖에 없다.

승리를 자신할 만큼 막강한 군대를 애초에 가지기도 어렵고, 혹시 있다 하더라도 피해를 감수할 여력까지는 없다.

심지어 한 번 철저하게 패한다면, 커리어와 재산, 그리고 미래까지도 몽땅 날아간다.

그렇기에 ‘전략적 패배’까지도 때로는 선택지에 올라가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패하고 많은 것을 잃더라도, 병력과 자금을 온존시켜 물러나는 것이 미래를 위해 더 나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까지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냉정한 전술가, 프레니히 백작 표현대로 책사가 아직은 엘랑키아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훨씬 작고 자유로운 분위기인 블랑독에서조차 그랬으니까.

용맹한 기사들은 과분할 정도로 많아, 트랑카벨 영지군의 기틀을 잡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하지만 참모로 삼을 인원이 부족해서 지난 겨울 따로 양성까지 했으니 말이다.

음··· 그러니 내가 생각해고 행동하는 방식이 평생을 군인, 그것도 왕실군의 정점에 있는 아버지의 슬하에서 태어난 뤼브르 경에게는 특이해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다음에는 리타르몽 드 당세르 경을 한 번 소개시켜 드리는 것이 좋으려나···.

“아 그러고보니, 에트 경!”

“예, 백작님?”

“자네는 결혼은 했던가? 아직 미혼으로 알고 있네만!”

···갑자기 또 무슨 질문이지? 평생 살면서 이렇게 계속 허점만 찔리는 건 또 처음인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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