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460화 (496/556)

46-14. 폴름스 전투, 첫째 날

###

“여기서 물러난다! 천천히, 천천히!”

“물러난다, 전달!”

이미 백병전에 참여 중인 부대를 빼내는 것은 힘든 일이다.

삶과 죽음, 승리와 패배를 걸고 최전방에서 싸우는데 여념이 없는 병사들에게 지휘관의 명령을 전달하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아무도 지나가지 못하는 것’이 미덕인 빽빽한 창병 밀집 대형이니 전령이 다가가지 못한다.

전투에 흥분한데다 각종 소음으로 정신 없는 와중에 뒤에서 몇 마디 외치는 게 들릴 리가 없었다. 아니, 들리더라도 반응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후열에서 젼열로, 우측에서 좌측으로, 장교에게서 병사에게로 명령이 전해지면서 차츰 부대에 지휘관의 의도가 전해지고, 조금씩 하나의 생명체처럼 움직이기 시작한다.

“도망가냐! 겁쟁이들!”

“그룬발트 멍청이들아! 돌아와!”

“닥쳐 머저리들아!”

“적이 물러선다. 모두 대열을 정돈해!”

방금 전까지 빽빽하게 맞서고 있는 창대가 빗겨나고 서서히 거리가 멀어진다.

“겁쟁이 자식들!”

“대열 유지해! 좌우를 살펴라!”

필사적으로 서로 찌르고, 한 걸음이라도 나아가기 위해 목숨을 걸던 모습이 허무할 정도로, 일단 서로의 거리가 멀어지자 그 살기와 열기가 훅 하고 사그라든다.

방금까지 무수한 악의와 살의가 부딪치던 공간은 텅 비어버린다.

전투의 희생자들, 바닥에 피를 쏟고 누운 전사자들과 부러진 창대와 같은 무기들이 버려져 있을 뿐.

전투가 지속된 시간과 충돌이 격렬했음을 생각하면 그 숫자는 놀라울 정도로 적다.

창병 대열과 창병 대열이 격돌할 때, 주변에서 총병에 의해 저격당하거나 대열이 무너져 추격전이 벌어지는 게 아니라면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지는 않는 것이다.

아주 천천히, 사람이 걷는 속도의 몇 분의 일 정도의 느릿한 속도로 양측이 멀어져간다.

여기서 엘랑키아 군이 공격을 선택했다면 백병전이 계속 벌어졌겠으나, ‘일시적 승자’라고 할 수 있는 엘랑키아 군 역시 그 자리에 멈추고 대열을 굳히는 걸 선택했다.

“다음은 우리 차례다! 심하게 다친 녀석 있으면 지금 이야기 해!”

“넌 임마 피로 세수를 하고 있냐? 눈은 보여?”

“괜찮습니다.”

“안 괜찮으니까 가서 대가리 빵꾸났나 확인하고 와!”

창병 끼리의 전투 특성상 얼굴이나 손, 팔목에 상처가 많이 난다. 유난히 출혈이 많은 상처를 급히 응급처치하는 손이 능숙하다.

손재주 좋은 숙련병은 실과 바늘을 이용해 찢어진 상처를 봉합하기도 한다. 전장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그들에게는 익숙한 상처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정도의 상처에서 끝난 게 얼마나 다행인지, 이런 치료라도 할 수 있는게 얼마나 하늘이 도운 일인지도 알고 있겠지만.

그렇게 양측의 끄트머리 대열이 거리를 두면서 잠시 소강상태를 만든다.

병사들이 숨을 몰아쉬면서 때로는 욕설을 날리며 다음 전투를 준비한다.

후방에서 갑자기 나타난 엘랑키아 기병대 때문에, 펠쿠트 벨톤 폰 비덴누벨 백작이 병력의 좌측 끝을 물린 것이다.

측방을 지키기 위해 연대를 되돌려 지금까지 없었던 측후면 방어선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전술 단위로 활동하는 보병 연대는 사방 어느 쪽에서 적이 습격해오더라도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훈련은 받고 있다.

하지만 보병이 적 보병과 교전하며 물려 있는 상황에서 측면이나 배후를 적 기병에게 위협당하는 것은 위험한 상황이 분명하다.

하물며 ‘그 엘랑키아 기사’였으므로 불필요한 혼란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펠쿠트 백작 입장에서는 그런 상황을 만들기 싫었으므로 일종의 예방책이었다.

잠시 날개를 접어 안전책을 취하고, 이후 공격을 재개하든 다른 지역을 공격하든 결정하기로 한다.

딱 이 정도였으므로 대단한 의미가 있는 전술 지시는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방, 아르밀 드 브라뇰 공작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바로 이 순간, 전선에서 압박이 줄어들며 여유가 생기는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다.

시작은 후방에 뒤처져 있던 그룬발트 군 창병 중대였다.

주 전선을 이루는 연대 두 개가 연결되는 지점으로, 창병에게 자리를 비켜 준 총병들이 빠져 나갔던 장소이다.

그 총병들은 여전히 대열을 갖추어 로테이션으로 사격하고 있었으며, 자연스럽게 양측 총병들이 창병을 보조하며 총탄을 주고 받는 위치였다.

“어어? 엘랑키아 놈들 넘어온다!”

“쏴버려! 쏴버리라고!”

갑자기 일부 엘랑키아 총병들이 창병 대열을 피해 앞서 나온다. 창병 대열 모서리에는 장창에 보호받는 총병들이 있게 마련이므로 이들 사이에 치열한 총격적인 벌어졌다.

서로 적지 않은 수가 쓰러졌고, 좁은 장소에서 많은 화승총이 격발되다보니 하얀 연기가 마치 베일처럼 시야를 차단한다.

하지만 엘랑키아 군의 전진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다시 수십 명 단위로 선두와 위치를 바꿔서는 총탄을 퍼붓는다.

아직 재장전이 안 된 그룬발트 총병들은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욕설을 퍼부으며 재장전 중인 병사들 입장에서도 날벼락이었지만, 그들을 지휘하고 있던 그룬발트 장교들은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화약 연기를 뚫고 뛰쳐 나온 엘랑키아 군의 모습을 보며 이미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와아아아!”

“가자! 나를 따르라아아!”

“그룬발트 놈들을 끝장내!”

갑작스럽게 뛰쳐나온 보병들은 무질서한 것 같으면서도 나름 통솔되고 있었으며 조합을 갖추고 있었다.

각종 화약 무기로 무장한 병사가 절반, 장창이 아닌 짤막한 백병전 무기를 든 병사가 절반.

마구 뒤섞인 것 같으면서도 질서정연하게 한 방향을 향해 돌진한다.

“뭐야, 막아!”

“엘랑키아 놈들이 미쳤나!”

측면에서 대기하고 있던 총병들이 서둘러 사격을 가했고, 돌격 중이던 엘랑키아 병사들 중 몇 명이 쓰러진다.

하지만 그런 사격은 부대 전체의 기세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타타탕! 타탕!

탕탕! 타타타타탕!

오히려 달려오던 엘랑키아 병사들이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총구를 들이대고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막아야 하는 그룬발트 창병 중대 입장에서는 총구가 창대에 닿을 지경으로 가까운 거리였다.

이론상 완벽한 사격 거리지만, 실전에서 이런 일이 잘 벌어지지 않는 이유는, 여기까지 접근해 왔을 때 창병이 갑자기 대열을 전진시키거나 하면 백병전 무기를 갖추지 못한 기습 부대는 물러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총을 쏜 이들은 물러서거나 자리를 유지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말 그대로 ‘돌격대’ 였다.

“으와아아아아!”

“마, 막앗! 크으읏!”

그대로 창대 아래로 파고든다. 한쪽 무릎을 꿇은 그룬발트 창병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단검을 꺼내기도 전이었다.

거의 구르듯이 적의 발 밑에 도달한 엘랑키아 선두 장교가 그대로 단검도 아닌 기사용의 장검을 휘두른다.

각반으로 감싸인 그룬발트 군 창병의 정강이에서 피가 배어나온다. 고통으로 주저 앉는 바람에 창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뒹군다.

그제서야 전열의 일부가 창대를 버리고 ‘창대 아래의 백병전’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리고 너무 많았다.

너무 많은 숫자가 창대를 들고는 막아내지 못할 정도로 가까이 돌진해왔다. 여기저기서 힘싸움이 시작되고 피가 뿜어져 나온다.

엘랑키아 군이 특별히 용맹했던 것도, 그룬발트 군이 특별히 못 싸운 것도 아니었다.

단지 창병 1개 중대와 총병 일부가 버텨낼 수 있는 것 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돌격대가 쏟아져 들어왔을 뿐이다.

“밀어! 밀어버려!”

“뭐야 이 새끼들! 버텨!”

“지원군! 지원군은 아직인가?”

“지원군은 옘병 이거나 쳐먹어라!”

이미 창병 사각 대형은 흔적도 없이 밀려나고, 아우성치며 서로가 서로를 드잡이질하는 혼란스러운 싸움이 이어진다.

제대로 된 무기를 들지 못한 이들은 부러진 창대나 맨주먹, 때로는 자신의 쇠로 된 투구를 벗어 무기로 휘두르기도 했다.

근처에 있다가 백병전에 휘말려버린 창병들은 익숙하지 못한 손놀림으로 장전 못한 화승총을 몽둥이처럼 휘두르기도 했다.

화승총 개머리판은 제대로 맞기만 하면 투구로 보호되는 머리도 깨 버릴 만큼 강렬한 무기였지만, 그렇게 쓰기에는 너무 무거운 게 문제였다.

결국 비슷하게 싸움이 붙었더라도, 이런 ‘개싸움’이 벌어질 줄 알았던 엘랑키아 측과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허를 찔린 그룬발트 측의 입장은 전혀 달랐다.

“으아아악!”

“뚫었다! 계속 밀어 붙여!”

창대를 짧게 잡고서라도 저항하던 적병의 손목을 베어버린 엘랑키아 군 장교가 헐떡거리면서도 외쳤다.

그의 얼굴은 뭔가에 맞았는지 한쪽 이마가 퉁퉁 부어있고, 피가 흘러내려 얼굴의 절반을 적시고 있었다.

그럼에도 싸움을, 지휘를 멈추지 않았다.

좁은 통로를 막고 있던 마개처럼, 대열을 갖추고 있던 그룬발트 창병 중대를 몰아낸 엘랑키아 군 돌격대가 마치 저수지를 부수고 흘러 나온 흙탕물처럼 퍼져나간다.

단단한 벽돌 형태로 서로를 밀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전선에 대혼란이 벌어진다.

그리고 거기 호응하듯 반대편에서 달려온 것은 디타레 드 카울이 지휘하는 기병대였다.

###

“적 연대가 또다시 후퇴합니다!”

“모두 3개 연대를 무너뜨렸군요!”

“잔적 소탕은 보병들에게 맡긴다. 우리는 적을 우회해 나머지를 압박한다!”

“옛, 알겠습니다!”

2천 기의 엘랑키아 기병들이 초원을 달리고 있었다.

혹시라도 살 구석인가 싶어 정신없이 도망치던 그룬발트 보병들이 용서 없이 따라잡혀 죽임을 당한다.

최소한 수십 명 정도가 똘똘 뭉쳐서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어느새 접근한 기병에게 공격당해 바닥에 나뒹군다.

아마 아르밀 공작이 기습적으로 활용한 돌격대 전술은 그 자체로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기습공격으로 영역을 확보하고 보병 연대의 측면에 달라붙은 것은 좋았으나, 거기서 끝났으리라.

보병의 온갖 전술 형태들이 사라지고 창병과 총병 중심의 밀집 진형만이 살아남은 이유가 있었다.

다른 모든 보병 전술이 이 단순하고 무식해 보이는 전술 앞에 끝내 무릎 꿇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기동성과 유동성을 잃어버린 보병 연대의 후방을 다른 아군의 충격력, 즉 기병대가 두들긴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엘랑키아 중기병들이 후방을 위협하는 기동에 들어간 것 만으로도, 공포에 질린 측방의 그룬발트 보병 연대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창병과 총병의 조합이 무너지고, 통제도 듣지 않아 방어력이 평소의 절반 만도 못하게 줄어든 그룬발트 보병 연대를 엘랑키아 기사들이 뚫고 들어갔다.

창병이 멈춰 세우고, 총병이 저격한다.

이 단순하지만 극도로 효율적인 협업이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는 방어선은 중기병 앞에 취약하다.

적극적으로 기병을 ‘죽일 방법’이 없는 창병 뿐인 방어선은 언젠가는 피해 누적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게 마련이며···.

막아주는 방벽 없이 높은 위치에서 내려치는 기병의 공격에 노출된 총병들은 재장전할 틈도 없이 학살당하기 때문이다.

공포와 붕괴는 보병 개인에게서 중대로, 중대에서 연대로 점점 퍼져간다. 그 뒤를 엘랑키아 기사들이 바짝 따라 붙는다.

“비켜! 비키라고!”

“엎드려! 바보들아 엎드려!”

겁에 질려 우르르 도망치던 보병들이 안전한 곳을 찾아 이웃 연대로 뛰어든다.

이들이 아군 총병의 사선을 막은 탓에, 오히려 적 기병들은 안전하게 접근하는 꼴이 되었다.

겁에 질려 이쪽으로 넘어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동료의 머리 너머로 인정사정없는 기병 창날이 날아온다.

이 지경에서 버틸 수 있는 부대는 없었다. 그렇게 3개 연대가 우르르 쓸려나가 버렸다.

최악은 적 보병들과도 인접해 있다는 것이었다. 저항력을 상실한 그룬발트 군 연대 내부로 엘랑키아 보병 대열이 밀고 들어온다.

마치 기병들이 부수고 양보라도 한 듯한 자리로 보병들이 밀고 들어와 충격력은 떨어지지만 훨씬 참혹한 학살이 벌어진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