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15. 폴름스 전투, 첫째 날
타탕 탕! 타타탕!
절망적인 저항을 의미하는 산발적인 총소리가 요란한 말발굽소리에 묻힌다.
2천 명 정도의 엘랑키아 기병대가 계속해서 그룬발트 군 보병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수적으로 거의 배가 넘는 3개 연대를 와해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물론 보병의 도움이 있었으니 약점을 노릴 수 있었던 것이긴 하지만, 실로 대단한 전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치 양떼를 몰아가는 맹수 무리처럼 도망치는 적을 몰아 붙이는 부하들을 보며, 디테라 드 카울은 이쯤에서 부하들을 조심시켜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무리해서 추격하지 마라. 숫자는 적이 많으니, 어디서 반격해올지 모른다!”
“옛 전달하겠습니다, 디타레 경. 하지만 일선 병사들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적을 무너뜨리고 이를 추격해 전과를 확대하는 것은 기병으로서 바라던 이상적인 상황이다.
특히나 무작정 추격하다가 아직 전의를 상실하지 않은 적 창병 대열에 정면으로 부딪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얼마나 많은 기병이 무모하게 추격하다가 참혹한 최후를 맞이했던가.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이번 전쟁이 시작된 이래로, 디타레 휘하의 기병들은 중대 단위로 뛰어다니며 적을 적발하고 추격하는 임무가 대부분이었다.
휘하 장교가 말한 것은, 디타레 휘하의 기병들이 이쪽의 약점은 숨기면서 적의 아픈 부분만 공격하는 싸움에 이골이 났다는 말이리라.
실제로 공격이 시작된 직후, 그룬발트 기병대 일부가 공격해왔었다.
수적으로 1천기 정도의 열세이면서도, 아군 보병을 구하기 위한 결사적인 돌격이었다.
하지만 이를 인지한 엘랑키아 기병들은 명령이 내려오기도 전에 중대 단위로 먼저 반응했다.
본대가 적의 돌격을 받아내는 사이, 분견대가 비스듬한 측면에서 역으로 돌격했고, 적은 충격력을 제대로 써 보지도 못하고 힘이 빠졌다.
결국 그룬발트 기병대는 제대로 힘을 써 보기도 전에 와해되어 무질서하게 도망쳐야만 했다.
오랫동안 전군의 선봉을 맡아온 디타레 휘하 엘랑키아 기병대의 조직력과 숙련도를 유감없이 보여준 경우였다.
“그나저나 대단하군··· 상황이 이렇게 돌아갈 것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누가 말입니까? 원수부에서 온 참모장 말씀이십니까?”
“그래, 에트 경 말일세.”
“확실히··· 명령 내리는 타이밍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그 뭐랄까요··· 마치 미래를 본 것처럼 말입니다.”
디타레는 예전에 처음 만났을 때의 젊은 용병대장, 부하들이 콘도티에레라 부르던 자를 떠올렸다. 생뢰르반 전투에서 라솔의 대군을 격파한 직후였다.
당시에도 왕실에서 그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은 막연히 알고는 있었지만··· 아직 판단을 보류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그는 분명, 아르밀 공작의 돌격대가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상황을 예견하고 자신에게 공격 개시를 명령했었다.
만약 아르밀 공작이 예비 병력을 쪼개 편성한 돌격대가 적진을 뒤흔들어 놓지 않았다면, 디타레의 적 배후 공격은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으리라.
어쨌거나 지금 무너뜨린 적의 측익은 3개 연대의 보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요행히 1개 연대 정도는 기습적으로 모서리를 공격해 효과를 보았다 하더라도 전과는 거기서 끝났으리라.
명령이 내린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단독으로 준비된 보병 연대를 공격해야 하는 것만큼 기병 지휘관에게 고민되는 일은 없었다.
차라리 두 배로 많은 적 기병과 교전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에트 경에게 처음 명령을 받아 부하들을 이끌고 적 측면으로 우회할 때만 해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적은 이미 기병대의 접근을 인지하자마자 날개를 접고 방어 준비를 시작한 상황이었고, 이런 경우 기병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디타레가 적을 견제하기 위해 공격 위치로 이동하는 순간, 아르밀 공작의 돌격대가 쏟아져 들어가며 적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물론 보병과 기병의 협력 작전이 특이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할 수만 있다면 전공에 욕심내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알았냐’ 라는 것이다.
에트 경은 분명히 상황이 시작되기 전에 다음 수를 내다보고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거리거 멀고 의도를 숨기고 있었기 때문에 디타레 자신은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아르밀 공작으로부터 사전 협의 전령이라도 주고 받았나?
아마 아닐 것이다. 에트 경이 다고베르 2세 폐하의 사령부에 도착해 정보를 주고 받을 때 옆에 자신도 있었다.
언제 출정할지 모르는데 자리를 오래 비운 적은 없었다.
오히려 에트 경은 주로 브리핑을 받는 쪽이었다. 각 전선에서 산발적으로 들어오는 정보의 양은 고정된 사령부 쪽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즉, 사령부에 계속 머문 자신 모르게 아르밀 공작과 전령을 주고 받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슈뵈켄 전선을 도우라는 다고베르 2세의 명령을 받고 자신과 함께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낌새’를 전장에서 보았다는 것일까.
대체 무슨 낌새를?
전투에서 지휘관이 딱 전장을 조망하기 좋은 높은 지휘소를 얻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위치에 따라서 기습의 목표가 될 수 있어서 꺼리는 경우도 있다.
그나마 말 위에 타면 좀 낫긴 하지만, 그렇다고 전장이 한 눈에 보이는 것은 절대 아니다.
보병 부대 너머 정도는 보이지만, 다른 기병 부대가 앞을 가리거나 밀집 장창 부대의 그림자에 가려지면 아무것도 안 보인다.
어느 정도는 초기 배치에 따른 사전 정보를 기반으로, 아군의 배치와 부대 깃발의 움직임을 기반으로 전황을 추측은 하지만 말이다.
마치 장기에 익숙하다면, 내가 직접 두고 있지 않더라도 몇 수 정도는 미래를 내다 볼 수 있는 것과도 유사하다.
하지만 이는 전투가 격화되고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심해질 수록 예상에서 벗어난다.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이 전방 부대와 정찰대에서 올라오는 끊임없는 보고이다.
하지만 전방에서 올라오는 보고는 실제 발생한 사건과 시간차가 발생하기 때문에 무조건 의지할 수는 없다.
또한 하다 못해 중대급 기병대가 달려서 모래 먼지만 일어나도 시각 정보는 극도로 제한되어 이 또한 왜곡되는 경우가 많다.
지휘관이란, 이 제한되는 정보만 가지고 자기 자신과 수천 부하들의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 심지어 두 번째 기회 따위는 정해지지 않는 경우가 많은 상황에서.
지식과 경험 타령을 해도, 결국에는 순전히 ‘감’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찾아온다.
그런 점에서, 지금까지 기병 지휘관으로 견실하게 커리어를 쌓고 있는 디타레 본인은 감이 좋은 편이라 생각한다.
혹은 운이라도 좋거나.
그런데 에트 경은, 부하들에게 콘도티에레라는 특이한 별명으로 불리는 이 젊은 용병 대장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전황이 이렇게 흘러가기 전부터 말이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도무지 알 수가 없군···.”
아무튼 결과적으로 디타레의 기병대는 최적의 순간에 최적의 위치를 선점할 수 있었고, 지금 큰 전과를 올리고 있었다.
“디타레 경! 적 지원군이 도착했습니다. 보병 2개 연대가 벽을 치고 있고, 아까 도망쳤던 그룬발트 기사들도 돌아온 모양입니다.”
“좋아, 이젠 정말 파티가 끝났군. 각 중대장들이 병력을 수습할 수 있도록 신호를 보내라.”
“알겠습니다!”
그룬발트 군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기병대의 차례가 끝나가고 있었다.
지식인가, 경험인가. 혹은 불가사의한 다른 요소에 의거한 판단인가.
이유야 아무래도 좋다. 이기게만 해 준다면 상대가 악마와 계약을 맺은 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디타레 드 카울은 에트 경과 좀 더 함께 싸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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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기병이 물러나고 있나?”
“그, 그렇습니다. 살았습니다, 백작님!”
“그래, 살았군. 빌어먹을, 천운이었다. 어서 병력을 수습해라.”
“예엣! 알겠습니다.”
펠쿠트 벨톤 폰 비덴누벨 백작, 슈뵈켄 전선을 공격하던 그룬발트 군 지휘관은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손을 내려다보자 장갑을 낀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고, 장갑 안쪽으로 식은 땀이 흥건하게 고인 것이 느껴졌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는 패배를 실감하고 있었다.
든든하게 버텨주고 있었던 좌측익이 삽시간에 완전히 무너졌다.
그들을 구하기 위해 무리해서 투입한 기병대는 적 기병을 잉겨내지 못하고 마찬가지로 붕괴되었다.
주력군은 여전히 건재하긴 했으나 적의 거센 저항에 직면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방금 전까지 일군을 지휘하던 사령관인 펠쿠트 백작의 손에서 모든 카드가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리는 데는 채 15분이 걸리지 않았다.
적이 부하들을 참살하며 차근차근 포위망을 만들어 가는데 보고만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전장에 있지만 전장에 아무 영향도 끼칠 수 없다는 무력감과 공포감.
그럭저럭 전술 감각은 있는 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전장에서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는 것은 어린 시절 전장에 나서고 처음이었다.
때마침 어디서 왔는지 모를 예비대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누군가가 붕괴된 기병대를 재수습해서 돌려보내지 않았다면···.
펠쿠트 백작 자신도 적진 한 가운데 고립되어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휴우··· 타를라 참모가 보낸 병력인가?”
“아마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슈뵈켄 마을 반대편의 공격을 맡겼을 텐데.”
“아직 예비대를 남겨 두었던 모양입니다.”
슈뵈켄 마을을 지키는 엘랑키아 군을 양쪽에서 협공하겠다는 판단을 한 것은 다름 아닌 펠쿠트 자신이었다.
반대편 지휘를 맡긴 타를라 니케 폰 자이트리츠는 어째서인지 명령대로 공격에 전념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섬기는 지휘관인 펠쿠트 백작의 부대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것을 알았으며, 아직 아껴두고 있던 예비대까지 보내 도와주었다.
어떤 면에서는 명령을 어긴 것이다.
하지만 타를라가 문자 그대로 명령대로 행동했다면 전군의 절반 이상이 적에게 잘라 먹힐 뻔 했다.
“타를라 참모에게 전령을 보내게.”
“옛, 무슨 내용을 보낼까요?”
“본대는 와해된 병력을 수습하는 대로 슈뵈켄 북방으로 퇴각 예정. 타를라 참모는 그 후방을 지원해주기 바란다. 이상!”
이대로 전투를 지속해봐야 백해무익하다. 간신히 사지에서 벗어난 좌측의 부하들을 살려서 돌아갈 수 있는게 다행이다.
마음이 복잡했다. 결과적으로 구원받기는 했으나··· 부하들을 버리고 도망치거나, 부하들과 함께 항복하거나의 양자택일을 강요당할 뻔 했으니까.
지금까지 전장에서는 대체로 승리해왔다. 큰 위협을 겪은 적 없었기 때문에 안일했던 모양이다.
“펠쿠트 백작님, 타를라 참모에게서 답신이 도착했습니다.”
“무슨 내용인가?”
“적은 추격 의도가 없어보이나, 본대의 무사한 퇴각을 엄호하겠음. 이상입니다.”
“그래··· 알겠네.”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설마 이렇게 될 것을 예상했던 건가.
자이트리츠 전쟁관의 참모와 한 전장에 서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구원을 받는 것은 물론, 보좌를 받는 것도 처음이다.
아무리 그래도 외부인에게 부대의 중책을 맡긴다는 것에 거부감이 없지 않았는데···.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옳았고, 자신이 틀렸다.
“본대가 적에게서 빠져 나왔습니다! 이대로 계속 퇴각하겠습니다.”
“알겠다,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말도록.”
멀리 중대 단위로 나뉘어 사격이 닿지 않는 어정쩡한 거리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엘랑키아 기사들이 보인다.
마치 상처입은 사냥감이 힘이 빠지기만을 기다리는 독수리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지금은 보내주지만 약점이 보이면 언제라도 물어뜯어 주마’ 라고 말하는 것 같아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룬발트 군 전반에 왜 엘랑키아 기사 공포증이 가득한지 알 것 같았다.
빌어먹을,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음을 증명하기는 커녕, 펠쿠트 백작의 부하들은 이제 엘랑키아 기사와 대적하게 되면 두려움부터 느끼게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