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2. 폴름스 전투, 셋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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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호펜로이테에서 북서쪽으로 떨어진 개활지에서 였다.
결전을 위해 마주 선 엘랑키아 군 입장에서 우측, 그룬발트 군 입장에서 좌측.
타탕! 탕!
전투의 실마리는 의외로 엘랑키아 군 쪽에서 시작되었다.
타타탕! 탕! 타탕!
따다다당! 따당!
산발적으로 울리던 둔탁한 총소리가 차츰 잦아진다.
‘이제 곧 전투가 시작된다’
전장 반대편에서도 알 수 있는 개전의 신호나 다름없었다.
교전의 당사자는 엘랑키아 측에서 전위로 내보낸 산개 대형의 총병대였다.
수십 명 단위의 산개 대형으로 겁도 없이 적진에 다가가 방아쇠를 당긴다.
산개 대형으로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나, 침착하고 신속하게 장전을 반복하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숙련된 정예 총병들이 분명하다.
타탕! 탕!
“으윽!”
“지정사수! 지정사수 앞으로!”
“대열을 유지해! 적은 파리 떼에 불과하다!”
정말로 얄밉게도, 엘랑키아 전초병들은 밀집대형을 갖추고 천천히 접근해오고 있는 그룬발트 군의 창병 앞에서만 얼쩡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교전거리로서 한계에 가까운 먼 거리에서 쏘고 있으니, 창병의 보호를 받는 위치인 그룬발트 군 총병들의 지원 사격을 받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전초병 몇 명 잡겠다고, 창병들이 대열을 풀고 뛰쳐 나올 수도 없는 일이다.
아니 애초에 거리가 상당히 있으니 보병이 보병을 추격한다고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겠지만 말이다.
타타탕! 따당! 탕탕! 타탕!
퍽! 퍼퍽! 팍!
“크으윽!”
“비겁한 엘랑키아 개자식들!”
“악! 맞았어!”
거리가 멀다보니, 대부분은 명중하지 않는다.
하지만 멀리서 날아온 총탄이 발 밑의 들풀을 헤집어 놓거나, 수직으로 세운 창대를 때려 부러뜨리거나 하니 맞는 쪽에서는 신경이 곤두설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한 발이 두 발이 되고, 두 발이 십수 발이 되는 집중사격이 되면서 명중탄도 갈수록 늘어난다.
여기저기서 철판이 뚫리는 소리가 나며 병사들이 뒤로 넘어가고, 노출된 팔다리를 맞은 병사들은 창대를 떨구거나 무릎을 꿇는다.
“쏴라! 쏴버려!”
타탕! 탕! 타타탕!
뒤늦게 도착한 그룬발트 총병들이 창병들 앞에 느슨한 대열을 형성하고 반격을 시도한다.
하지만 서로 그렇게 많은 수가 아닌 데다가, 산개대형으로 얄밉게 거리를 유지하며 교대 사격을 하는 엘랑키아 총병들을 명중시키기는 쉽지 않았다.
오히려 겁도 없는지 엘랑키아 전초병들은 총탄이 날아온다고 위축되지도 않는다.
기어코 반격탄을 날려 지원 온 그룬발트 사수를 쓰러뜨리고야 만다.
오히려 깜짝 놀란 그룬발트 병사들이 위축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제기랄, 지원이 필요해!”
“흐으윽, 내 다리···.”
“우리 기병은 뭘 하는 거야?”
“쏴! 계속 쏘라고!”
분한 노릇이지만,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전초병들을 평범한 밀집 대형 전투에 익숙한 보병들이 이길 수는 없었다.
그룬발트 군의 전방 연대 장교들은 끝 없이 쏟아지는 적탄에 아우성치는 부하들을 안타까워 하면서도 계속 전진시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물론 엘랑키아 전초병들이 아무리 활약한다고 해도 결국 1개 중대 규모도 안되는 소수이다.
이대로 사격을 계속한다고 한들 연대급 보병 부대의 전투력에 유의미한 피해를 입힐 수는 없으리라.
역사에 남을 만큼의 대군이 투입된 전군의 사정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고 말이다.
하지만 꾸준한 사격에 노출된 전위 창병 중대의 병사들은 벌써부터 신경이 너덜너덜해지고 있었다.
잔뜩 준비한 총병 대열의 정면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공포감이고, 압박감이다.
실제로 중대가 궤멸할 수도 있는 딱 한 번의 공포와, 그보다 덜 위험하지만 절대로 끝날 것 같지 않은 만연된 공포의 차이점이라고나 할까.
“곧 아군 기병이 지원 올 것이다! 조금만 버텨!”
“으응? 뭐라고오? 기병전만 붙으면 도망가는 머저리들은 안 무서운데?”
부하들의 축 처진 모습을 보다 못한 그룬발트 군 장교가 외치자, 그걸 들은 엘랑키아 군 장교가 조롱으로 화답한다.
분노한 그룬발트 병사들이 고함을 질러대지만 돌아오는 것은 총알 세례 뿐이었다.
이런 거리를 두고 총탄을 퍼붓는 산개 전술은 단단한 대신 기동성이 매우 떨어지는 보병 밀집 대형 전술을 상대로 큰 효과를 발휘한다.
하지만 많이 쓰이지 않는 이유가 두 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산개 대형으로도 지속적인 교전이 가능할 정도로 기강이 잡히고 숙련된 보병 부대를 양성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비용과 시간을 들여 양성한다 한들, 결국 전초전이 마무리 되고 주력끼리 격돌하는 단계에 들어가면 평범한 일개 총병과 아무 차이도 없어져 버리고 말이다.
결국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숙련병 조직의 일부를 차출하거나, 원래 야지에서의 산개 대형 전투에 익숙한 산악병이나 엽병 계열을 징집하지 않는 한 잘 보이지 않게 된다.
실제로 자타공인의 보병 강국이며, 숙련된 총병들을 다수 보유한 라솔 왕국의 경우, 일반 정규 연대에서도 베테랑들을 차출해 산개 대형으로 활동하게 하는 경우가 흔했다.
다만 다소 전술적 우위를 얻을 수 있을 지언정, 근본적으로 연대급 적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 없기 때문에 압도적 격차로 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두번째 이유가 치명적인데, 기병 상대로 대응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적진 앞에 나아가 밀집 대형 보병을 괴롭히면서 기세를 올린다고 한들, 기병을 만나면 곧바로 쓸려 버리고 만다.
애초에 불편하고도 비싼 무기와 갑주를 조달해가며, 장창과 화승총을 조합하고, 악착같이 똘똘 뭉쳐 답답할 정도로 둔하게 움직이는 이유가 기병을 상대하기 위해서이니까.
이전 시대에 전장을 지배하다시피 하던 중장기병, 기사 집단을 상대로 살아남기 위해 신병기와 신전술을 도입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사격과 기동성에서 우위를 얻겠다고 다시 보병을 산개시키는 건, 기병 상대로 공짜 전과를 던져주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런데 그게 평범한 총병 보다 많은 비용과 양성 기간 투자가 필요한 병력이라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아마 지금도, 중대급도 아니고 수십 기 정도의 경기병이라도 나설 수 있다면 엘랑키아 전초병들이 이처럼 활발하게 움직이지는 못하리라.
밀집 보병처럼 일제사격 탄막을 형성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알량한 기동력도 무색하게 ‘진짜 기동전력’에게 따라 잡히면 삽시간에 전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룬발트 군은 애석하게도 그럴 수 없었고, 엘랑키아 군은 상대가 그러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양쪽은 약속이라도 한듯, 기병을 후방에 꽁꽁 숨겨놓고 있었으니까.
객관적인 양쪽의 기병 전력 격차가 어느 정도인지는 명확하게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현재 그룬발트 군 소속 대부분의 머리속에서는 명확했다.
엘랑키아 중기병은 못해도 두 배, 가급적이면 세 배 가까운 전력으로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전투 첫 날, 치열했던 슈뵈켄 전선에서의 기병전과, 브레세른 전선에서의 기병전이 또 다시 확인해주고 말았다.
비슷하거나 더 불리한 병력으로 싸워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속설은 거의 확신 수준으로 올라가고야 만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그룬발트 군은 기병을 함부로 내놓을 수 없었다. 최후의 순간까지 아껴야 하는 카드가 되었기 때문이다.
더 냉혹하게 말하자면, ‘전방 보병이 입는 가벼운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투입할 생각은 없다에 가까웠겠지.
물론 수적으로 압도적인 그룬발트 측에서 버림패로 투입할 수 있는 전초전용 경기병 부대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변경 지역에서 소집된 시원찮은 경기병들은 중장기병 군단끼리의 격돌에서 대단한 역할을 하지 못할 테니 전초전에 투입시켜도 된다··· 라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하필 전방 보병들이 보는 앞에서 기병전이 벌어지고, 패배해서 도망치기라도 한다면?
이는 실질적인 ‘경기병 몇 개 중대의 소모’에서 그치는 게 아니게 된다.
‘그룬발트 기병이 또 엘랑키아 기병에게 깨졌다!’라는 인식이 전군에 퍼지게 될 것이며, 보병이든 기병이든 엘랑키아 기사들을 두려워하며 위축되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되고 말 것이다.
하물며 최악의 경우, 교전에서 패배한 후 겁에 질린 기병들이 도망치는 방향을 잘못 잡아 아군 보병 대열을 헤집어 놓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 도망치는 기병을 추격해 안전하게 보병 대열 안쪽으로 돌입해온 한두 개 중대의 기병에게 연대급 보병 부대가 와해되는 대재앙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이러니 그룬발트의 지휘관들은 섣부르게 기병을 내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가랑비에 옷 젖는 정도의 보병 피해는 감수할 만 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반대로 엘랑키아 군은 그럼 왜 상대적 우세인 기병을 내보내지 않고 있는가··· 라고 한다면.
일단 다고베르 2세를 비롯한 엘랑키아 군의 수뇌부, 예를 들자면 왕실군 원수인 아르밀 드 브라뇰 공작이나 프레니히 드 루블랭 백작은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엘랑키아 기사는 무적이 아니며, 그룬발트 군에 의해 고평가 되어 있다’
라는 명백한 사실을 말이다.
실제로 엘랑키아 기사, 특히 국왕 다고베르 2세가 베르마유 왕궁에서 안 쓰는 촛불을 끄고 만찬의 요리 수를 줄여가며 양성한 왕실군 기사들은 강력하다.
대륙 어디에 내 놓아도 이들보다 강한 ‘기병대’는 없으리라.
심지어 호각으로 싸울 수 있는 상대도 많지는 않을 것이고.
이런 자부심은 분명 가지고 있었지만, 정말로 어떤 상대와 싸우든 이길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은 없을 정도로 냉정하고, 전장을 잘 알고 있었다.
최근 그룬발트 군을 상대로 엘랑키아 기병이 연전연승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명확하다.
물론 개개인 전력의 우위도 있겠으나, 더 큰 이유는 전술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만 싸웠기 때문이다.
폴름스 전투가 시작되기 전, 양측 경기병끼리 벌어진 전초전에서는 적의 정찰을 막는 정보의 불균형과 기습의 이점을 십분 활용했다.
그리고 브레세른과 슈뵈켄에서 벌어진 기병전은, 수적으로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우위인 상황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승리에 흠집을 낼 만한 무모한 추격이나 추가 전과에 집착한 돌격을 하지 않은 것도 있었고.
때문에 엘랑키아 지휘부는 생각했다.
‘이 심리적인 우위를 최대한 지켜나가자’라고 말이다.
엘랑키아 기사가 실제로 무적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그룬발트 군 대다수의 머리속에서 무적인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리한 싸움을 최대한 피해야 하며, 기왕 싸울거라면 시원하게 이겨서 그룬발트 군의 공포증을 더더욱 강화시켜야 했다.
타타탕! 타타타탕!
일부 그룬발트 전위 보병들이 불합리하고도 일방적인 장거리 사격에 고통받으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은 결과.
이제 엘랑키아 전초병들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바로 양측 주력 전열이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펑! 꽝! 퍼펑!
뻐버벙! 콰콰쾅!
오랫동안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포병대도 드디어 첫 사격을 개시했다.
서로가 기병을 아끼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이유이지만, 수가 적고 중요한 전력을 드러내는 데 조심스러운 이유라는 점은 같았다.
적을 확실하게 사거리에 두고, 계획했던 적합한 포각이 잡히자 비로소 엘랑키아 군의 포병대가 불을 뿜은 것이다.
“조심해! 온다!”
“끄아아악!”
“겁먹지 마! 적이 코 앞이다!”
“흐아악, 흐윽!”
어지러이 날아든 포탄이 여기까지 간신히 도착한 그룬발트 군 보병 연대를 사정없이 갈기갈기 찢는다.
하지만 익숙하다는 듯, 놀랍도록 의연하고 침착하게 상처를 회복한 그룬발트 보병들이 전진을 멈추는 일은 없었다.
펑! 퍼퍼펑! 퍼펑!
뒤 이어, 다소 늦었지만 방열을 마친 그룬발트 군의 포병대 역시 포격을 시작한다.
그렇다는 것은···.
양측 주력 전열의 거리가 상상 이상으로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긴장한 장교들의 호령이 서로에게 들릴 정도였다.
“사격 준비잇!”
그렇게 전단은 호펜로이테에 가까운 쪽, 엘랑키아 군의 우익과 그룬발트 군의 좌익의 충돌로 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