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13. 폴름스 전투, 셋째 날
###
제르티에 드 라글랑이 이끄는 연대가 새로이 투입된 3개 용병 연대와 사투를 벌이고 있을 무렵, 다른 전장 역시 움직이고 있었다.
당장 양측의 주력부대가 정면으로 격돌하고 있는 북부 전선의 양측에 자리한 두 마을, 북쪽의 슈뵈켄과 동쪽의 호펜로이테도 마찬가지였다.
남부 전선, 브레세른과 아룬하비크 마을을 연결하는 도로에서도 크고 작은 전투는 끊이지 않고 벌어지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서로 주력을 북부에 투입한 상황에서도 우세를 점하기 위한 싸움은 끊임 없었다.
다만 다른 점은, 북부 전선처럼 전장을 가득 채울 만큼 수만의 대군이 집중되지 않았다는 점일까.
서로 주력이 평야전에 집중된 와중에도, 전술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공방전과 소규모 기동전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불과 십수 기의 정찰대 사이에 벌어진 조우전 결과가 주전장의 승패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정찰대가 어떤 정보를 가지고 본부로 돌아갈지는 모르는 상황일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또 다른, 전혀 반대편이라고 할 수도 있는 전선에서도 움직임이 없는 것은 아니었고.
###
“폐하께서 전령을 보내셨어요, 콘도티에레!”
“아, 무슨 내용이지?”
‘왕실군 총사령부에서 원수부 참모 에트 경에게, 북부 적의 공세가 예상보다 다소 강력하나 문제 발생한 전선 없음, 귀 군의 용전분투를 기원함’
나는 얼마 전까지 국왕 다고베르 2세가 직접 머물며 전군을 굽어보던 아우페브라즈 사령부에서 정기 연락을 받았다.
“다행히 잘 싸우고 있는 모양이야··· 정말 다행이야···.”
“네에, 콘도티에레.”
나는 가급적 북부 전선에는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실제로도 국왕 다고베르 2세나 프레니히 백작 등, 왕실군의 지휘관들과 그러기로 협의한 상황이었고 말이다.
물론 ‘혹시 문제가 생기면 즉각, 가장 먼저 알리겠다!’ 라는 단서가 붙어있기는 했지만.
그래서 완전히 신경을 끄지는 못했고, 혹시 문제가 생길 경우에 대비해 예비대를 온존하는 등··· 젠장 계속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북부 전선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아룬하비크를 포기하고 전선을 아우페브라즈까지 당겨야 할 것이다.
잔혹한 판단이지만 브레세른의 고립을 감수하더라도 북부 전선을 지원하는 게 맞았다.
브레세른을 지키는 루제 드 제브레도뉴 공작 역시 이 점을 알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 한동안 고립무원 상황에서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왕이 잡히면 패배하는건 장기에서만 그런 게 아니니까.
또 그런 상징적, 실질적 의미 말고도 투입된 병력이나 전선 우선순위나 북부 전선과 내가 담당한 나머지 지역은 비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우선순위가 그렇다는 것이지, ‘덜 중요한 전선’이라는 이유로 싸우지도 않고 적에게 내주는 일은 할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북부 전선에 일단은 신경을 끄기로 했다.
당장 국왕 다고베르 2세 또한 지금까지 항상 승리해온 전쟁 군주이고, 그를 보좌하는 두 명의 왕실군 원수 또한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니다.
담당 전선이 이미 나뉘어졌고, 내가 생각하는 전술을 제안한 것으로 내 역할은 끝났다. 오히려 과도하게 걱정하는 것은 그들을 모욕하는 일이 될지도 모르고.
그들이 나를 신뢰하여 남쪽 절반을 맡겼듯이, 나도 그들을 신뢰하도록 하자.
“북쪽은 확인했으니 우리 앞마당을 신경쓰도록 하지. 첼레스티나, 아룬하비크에 대한 적의 공세는 어떻게 됐지?”
중요성이 북부에 떨어진다 뿐이지, 남부 전선 역시 전투가 한창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공세가 브레세른에 집중되었던 첫 날에 비해 적이 출몰하는 범위가 말도 못하게 넓어졌다.
다른 전선에 신경을 쓸 수 없는 이유가 이것이다. 이미 상당히 많은 병력이 정찰과 감시에 투입되어 있었으므로 쉽게 다른 일을 하기도 어려웠고 말이다.
“여전히 브레세른과 아룬하비크를 연결하는 도로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네요, 콘도티에레.”
“미리 만들어 둔 보루들이 제 역할을 하고 있는 모양이네?”
“네에, 콘도티에레! 다만 아직 적도 전력을 다하지는 않고 있는 모양이라··· 저도 주시하고 있었어요오···.”
“흐음, 우회를 하려고 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높을 것 같네요.”
브레세른과 아룬하비크, 두 마을을 연결하는 도로 주변에 그나마 지대가 높은 곳에는 아군이 설치한 두 개의 보루가 있었다.
이는 장거리 포대의 역할도 하며, 첫 날 브레세른을 공격하는 적의 측면을 공격하기도 했다.
이곳에는 국왕에게 맡겨진 엘랑키아 북서부 출신의 보병 연대들을 배치했는데, 다행히 잘 싸우고 있는 모양이다.
왕실군이 직접 소집하여 강도 높은 훈련을 시켰던 왕도 베르마유 부근 출신, 주로 엘랑키아 중부와 북부에서 온 연대들은 상당한 정예군이다.
샹다메리에서 블랑독 연맹군이 맞서 싸웠던 다소 지리멸렬한 북부 출신 성전군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그들은 대부분 현재 북부 전선에서, 다고베르 2세의 지휘를 받으며 싸우고 있었다.
그에 비해 전쟁을 앞두고 왕실에 우호적인 가문들이 제공한 북서부 출신 병력은 훈련도가 다소 떨어지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평균적인 엘랑키아의 군사 귀족들은 기병에 비해 보병을 부차적인 전력으로 보고 신경을 덜 쓰는 경향이 있었으니 말이다.
이를 감안하여 야전보다는 의지할 방어 시설이 있는 보루에 배치한 것인데, 다행히 잘 싸워주고 있었다.
“아··· 새로운 정보를 하나 더 얻었어요, 콘도티에레. 현재 아룬하비크를 공격하고 있는 병력은··· 미터스하임 마을을 기억하세요?”
“미터스하임? 왕실군에 합류하기 전에 비탈에서 싸웠던 전투를 말하는 거지?”
“네에, 맞아요! 그때 공격했던 선제후의 군대가 지금 아룬하비크를 공격하는 군대인 모양이에요. 분명 이름이 브라우나인이라고 했어요!”
“아···.”
음··· 미터스하임에서 맞닥뜨렸던 병력은 뭐라고 해야 할까.
객관적으로 판단해보면, 질적으로 떨어지는 군은 결코 아니었다.
나름 통제도 잘 되고, 연대급 부대마다 다소 차이는 있었지만 충격력을 가진 정예 연대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예를 들자면 오르막길을 빠른 속도로 달려 오르며 허를 찔렀던, 검은 갑주의 기병대라거나··· 말이다.
그 기동성과 호흡은 결코 어중이떠중이로 이루어진 기병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걸 하필이면 첼레스티나가 대포를 깔아 놓고 기다리던 좁은 골목으로 들이 박았던 게 문제였지만.
뭐, 어느정도 저항은 예상했겠지만, 자신들이라면 뚫어낼 수 있으리라 믿었던 자신감의 발로일지도 모르고.
아무튼 그 비탈에서 이어졌던 며칠간의 전투에서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점은, 적이 자신들이 가진 힘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글쎄, 이게 표현하자니 쉽지 않은데··· 다소 오만하게 말하자면 공격에 날카로움이 없었다고 해야 할까?
“아아··· 그때 부주의한 적 지휘부가 대포 사거리에 들어왔는데요오··· 그때 확실히 맞췄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일이 있었지, 참. 보고 받은 기억이 난다.”
당시 첼레스티나는 드물게도 화포를 이용한 초장거리 저격을 시도했었다. 아쉽게도 사령관으로 보이는 자는 빗나갔지만, 엘프 참모 한명을 명중시켰다던가.
첼레스티나는 아쉬워하지만, 휘하 병력의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어중간한 사령관이라면 그냥 살려두는 게 나을 수도 있지.
그나저나 엘프들로 이루어진 지휘부라면, 그건 선제후 본인이나 그 측근이 이끄는 병력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아룬하비크 부근에 다른 움직임은 없고?”
“네에, 콘도티에레. 다만, 마을 남쪽과 서쪽에서 적의 소규모 정찰대가 자꾸 출몰하고 있다고 해요. 포로를 잡아 심문했으면 싶은데···.”
“작정하고 도망치는 정찰병을 잡기는 쉽지 않겠지. 적이 병력을 분산시켜 주는 건 바라던 바야. 너무 신경쓰지 마.”
“네에···.”
솔직히 유난히 넓디 넓은 전장의 남쪽 절반을 지키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특히 지금처럼, 쓸만한 병력을 결전에 나서는 국왕 휘하에 몽땅 빼준 상황에서라면 말이다.
무엇보다도 기병이 많이 부족하다. 그나마 있는 경기병 부대의 상당수는 튼실한 정찰망을 유지하는 데 활용하고 있고.
때문에 평소보다 몇 배나 세심하게 부대를 배치했다.
떨어진 기동성을 보완하기 위해 분산배치를 하는 수 밖에 없었고, 유사시 즉각 집결해 싸울 수 있도록 연락망을 위해 많은 전령을 배정했다.
그리고 주로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 생각한 지점에 지어 놓은 보루들이 제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한편, 브레세른의 루제 공작 역시 오늘은 첫 날에 비해서 훨씬 수비적으로 싸우고 있는 모양이다.
이는 당연히 우리가 아룬하비크를 지키느라 지원해줄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한동안은 이 상황이 유지될 수 밖에 없겠지.
다만 아군이 핵심 병력을 왕실군 직속으로 차출하고도 그럭저럭 전선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적도 마찬가지 상황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양측 모두, 핵심 병력은 북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결전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
그래서 남쪽에 서로 투입된 병력은, 전투 첫 날에 비해서도 적다.
당장 열심히 싸우고 있는 아군 병사들이 있으니 쭉정이라 표현하고 싶진 않으나, 그만큼 중요성이 떨어지는 건 서로 마찬가지란 말이겠지.
전장의 넓이로만 따지면 북부 전선에 비해서 오히려 넓은데, 병력은 삼 분의 일? 혹은 사 분의 일?
그래서 병력 밀도도 낮고, 서로 병력이 꽉 물린 채 사생결단을 내는 분위기도 아니라는 이야기겠다.
반대로 전술적 돌발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은 높아졌으니··· 나도 그렇지만 사방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확인하는 참모들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북부 전선이 진정한 힘싸움으로 결판이 난다면··· 이곳 남부 전선은 전혀 다른 요소로 승패가 갈릴 것으로 생각된다.
뭐 예를 들자면 그게 운일 수도 있고.
그러니, 일단 내 방침은 이긴다 보다는 지지 않는다에 가깝다. 북쪽에서 승전보가 들어오기 전 까지는 현상 유지하는데 집중해야지.
···만약 반대의 결과가 나오더라도, 뭐라도 해보려면 병력을 온전하고 있어야 한다. 그때 가서는 어설픈 전술 우위고 뭐고 다 쓰레기가 될 테니.
“아룬하비크 동쪽의 보루를 공격하는 적이 포병의 숫자를 늘렸다는 보고가 들어왔어요, 콘도티에레!”
“포병? 그 브라우나인 선제후군이 말이지?”
“네에.”
그러고보니 미터스하임에서 적 포병 전력도 생각보다 충실해서 놀랐었지.
음··· 그것도 전투 마지막 날에 기습적으로 뛰쳐나간 티테니아의 부대, 드 몽파르지에 가문의 경기병들이 몽땅 털어 먹긴 했었지만.
점화구에 못을 박거나 포가의 바퀴를 부수는 ‘테러 행위’에 그쳤으니 그 후로 수리를 해서 화력의 8할 정도는 복구했겠지만.
하지만 그렇다면, 적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왜냐하면 그 도로 주변 보루를 설계하고 건설 총괄을 맡은 사람이 다름아닌 첼레스티나이기 때문이다.
···아마 제한된 시간과 재료를 활용할 수 있는 한, 포격전에 대한 대응만큼은 최고 수준으로 구축했을 거다.
“당장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지만, 혹시 모르니 병력 증원이나 교체를 고려해 줘. 한동안 주시할 필요가 있겠네.”
“네에, 콘도티에레. 가능한 자주 확인하도록 할게요오!”
포격이 계속된다면 실질적인 피해보다도, 수비군의 사기가 걱정된다.
그래서 마음 같아서는, 포술 전문가인 첼레스티나를 전방에 보내 지휘를 맡기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
어설프게 포격전으로 승부를 걸어온 그룬발트 군에게 분명 매운 맛을 보여주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녀를 제외하면 사방에서 쏟아지는 정보를 관리할 믿을만한 참모 장교도, 조직도 없었다.
트랑카벨에서 데리고 온 나름 경험을 쌓은 참모 조직과, 그들을 총괄하는 첼레스티나가 없다면 나는 멀리 떨어진 각 전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을 테니까.
으으··· 정말로 맵핵 치트가 필요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쾅, 쾅! 꽈앙!
새롭게 묵직한 포성이 울린다.
내가 있는 아우페브라즈는 양측 합쳐서 십만을 훌쩍 넘는 대군이 격돌하고 있는 대전장의 한 가운데, 아침부터 포성이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들린 포성은 조금 다르다.
유난히 육중하고, 유난히 가깝다.
···북부 전선이나 남부 전선에서 들리는 포성이 아니다.
“첼레스티나! 전령 온 것 없어?”
“네에, 콘도티에레! 확인 중이에요!”
맵핵이 없는 와중에 새로운 전선이 또 열리는 건 절대로 사절이다.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