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480화 (447/556)

47-15. 폴름스 전투, 셋째 날

“헉, 헉!”

“뒤쳐지지 마라, 아직 사격하지 말고!”

“예엡!”

아마도 한달 이상 계속된 포위 상황에서, 성문을 통해서는 처음으로 폴름스 밖으로 나왔으리라.

그들은 함성을 지르며 마구 돌격하는 대신, 체력을 아끼며 빠른 걸음으로 이동한다.

“우리는 좌측으로 가자!”

“옛!”

다행히 깊은 성문 길을 빠져나오는 데는 성공했다.

평소에는 그렇게 거대하게 보이던 성벽 아래 통로가, 이번에는 어찌나 좁고 길게 느껴지는지.

그리고나서는 소대 별로 장교를 따라 이동한다. 분대가 이동한 게 전부가 아니라, 그들이 먼저 방향과 영역을 잡으면 나머지 병력이 그 뒤를 따르는 것이다.

그만큼, 선두에 선 장교와 그 휘하 분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었다.

“허억, 헉!”

“하아, 하··· 가자고!

함성소리는 없이, 긴장으로 평소보다도 숨이 찬 병사들의 가쁜 숨소리와 발소리만이 들린다.

엘랑키아 군이 설치한 장애물과 잡동사니를 이리저리 피해 움직인다. 그런가 하면, 가슴 앞으로 올려 세운 화승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주의한다.

출격 전, 미리 성벽 위에서 다른 장교들과 논의해서 방향을 잡아 놓았었다. 다행히 계획대로 잘 흘러가고 있었다.

이번 출성 돌격은 모두 세 개의 성문에서 동시에 시작되었다.

북쪽, 서쪽, 그리고 현재 그들이 배치된 남동쪽.

하지만 나머지 지점은 적을 혼란시키기 위한 조공이었으며, 남동쪽이 명백한 주공이다.

그래서 북쪽과 서쪽에는 각각 2개 연대가 배치된 것에 비해, 이 남동쪽 성문에는 출성 돌격을 위해 무려 5개 연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 주공의 선두를 맡았으니 막중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뒤를 흘끗 돌아보니, 목숨을 건 선두가 ‘확보’한 안전지대 안쪽으로 후속 병력들이 잔뜩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기습적인 출성 돌격은 성공했다! 적은 외부에서 대규모 전투를 진행하면서 감시를 게을리 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최악의 경우, 성문이 열린 직후, 그 앞의 좁은 통로를 뚫고 나오자마자 집중 공격을 당해 돌격이 실패하는 것도 감안했었다.

아무리 전우의 시체를 넘어 진격한다고 해도, 성문에서 나오자마자 그런 꼴을 당하면 방법이 없었다.

위에서 무슨 명령을 내리건, 출성 공격은 실패였고 후속 병력은 더 이상 진격을 멈추었을 것이다.

물론 엘랑키아 군의 포위 방벽에서 거리는 100미터가 훌쩍 넘었으나, 고지대에서 집중사격할 경우 막 성문에서 나와 똘똘 뭉친 상태인 아군은 큰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었다.

특히나··· 혹시라도 적이 성문을 향해 한 문이라도 포구를 겨누고 있었다면···.

상상만 해도 아찔해진다.

하지만 그 모든 우려는 괜한 걱정이었다.

출성을 준비하던 아군은 엘랑키아 군을 과대평가했다. 그들은 돌격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기를 놓쳤다.

이제 병력은 쭉쭉 나오고 있었으며, 이들을 막을 방책은 사람 키보다 조금 높은 정도의 높이이다.

혼비백산한 적이 반격하기 전에 도달할 수 있다면 충분히 넘을 수 있을 것이다!

“모두 옆으로 옮긴다! 하나, 둘, 셋!”

“부숴버려! 거기 도끼 가져와!”

후속해온 보병들이 후속의 후속 동료들을 위해 바리케이드를 치워 버리고 있었다.

비교적 가벼운 것은 길 옆으로 치워 버리고, 너무 큰 것은 도끼질을 해서 부숴 버린다.

암만 두꺼운 나무로 튼튼하게 엮은 장애물일지라도 연결부의 약한 부분을 부수거나, 밧줄을 끊어 버리면 무너뜨릴 수 있었다.

성문과 적 포위망 사이의 좁은 공간은 뛰쳐나온 폴름스 보병들로 바글바글하다. 벌써 선두의 800명은 전부 나온 것 같았다.

1차 목표 지점에 도착했다. 방벽에 평행해서, 병사들이 한 줄로 늘어선다. 후속 총병들도 나란히 대열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뛰어오고 있었다.

“중대장님, 저, 저희는 어디까지 가는 것입니까?”

“으음?”

“50··· 성벽까지의 거리는 50미터가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사격합니까?”

“아직··· 아직이다. 적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대로 방벽까지 전진한다. 어쩌면··· 적은 이미 포위망을 버리고 이동했을지도 모른다!”

돌격대를 이끌던 장교는 살짝 흥분한 상태로 자신의 바람을 말한다.

확실히 엘랑키아 군은 외부의 대군과 상대하는 와중이다. 포위망을 버리고 개활지에서의 전투에 모든 것을 걸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에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건 소대장은

“그게··· 아까부터 언듯언듯 방벽 위로 적이 보입니다.”

“...뭐라고?”

계속 주변을 살피고 뒤따라오는 아군을 확인하느라, 정작 장교는 목표 지점을 살피지 못했다.

그러고보니 이상했다.

아무리 엘랑키아 군이 대비를 하지 못했고, 허겁지겁 대처하고 있다고 해도 지금까지 반응이 없는 건 상식 밖의 일이 아닌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사방을 둘러본다.

방금 말했던 소대장의 말과 달리, 자신의 눈에는 방벽 위로 고개를 내미는 적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같은 크기로 자른 통나무를 나란히 엮어 세운 포위망 방벽이 아까와 다르게 보인다.

여전히 아무런 인기척도 없지만···.

마치 성문을 중심으로 두는 것처럼, 둥글게 지어진 포위망이 무섭게 느껴진다.

성벽 위에서 내려다 보던 때에 비해 유난히 높은 것 같고, 무언가 알 수 없는 기운이 그를 내리 누르는 것 같다.

그리고 아마, 병사들도 뭔가 수상함을 느낀 것인지 찌푸린 얼굴로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일단 여기서 멈춘다. 후속하는 아군을 기다리고 성벽 위를 감시한다!”

“알겠습니다.”

“언제라도 사격할 수 있도록 준비하도록!”

“알겠습니다!”

다음 순간 한 줄기 바람이 아직은 초라한 돌격대 총병들의 대열을 훑고 지나간다.

바람 자체는 지극히 평범한, 이 시기의 그룬발트 초원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바리케이드를 피하고 엘랑키아 군이 쌓아 놓은 완만한 비탈을 타고 황급히 올라오느라 이마에 맺힌 땀을 시원하게 식혀주는.

하지만 기괴할 정도의 조용함에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장교는 마른 침을 삼키며 권총을 어깨 위로 들어 올리고 포위망 너머를 살핀다.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전방을 감시하며 천천히 전···.”

파악!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상체가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다.

정수리 부분이 높게 솟은 투구 아래로 뜨거운 무언가가 목덜미까지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째서인지 몸이 한쪽으로 자꾸 기울었다. 중심을 잡기 위해 허우적대는 자신의 손이 시야 멀리에서 흐느적댄다.

퉁, 투퉁. 퉁. 투우웅.

파팍. 팍. 팡. 파각.

마치 물 속에 머리를 박고 있는 것처럼, 멀리서 들리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사방에서 울린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알 것 같으면서도 파악이 잘 되지 않는다.

이상하게 좁아진 시야 너머로 부하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게 보인다.

적진을 앞에 두고 저러면 안 되는 것인데.

어서 부하들을 정렬시키고 후속 부대를 기다려야 하는데.

이상하게 움직이기가 너무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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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앙!

오늘 두 번째 사격.

제18 벨모제 보병 연대 소속의 선발 사수, 얀 고티에는 주의 깊게 방아쇠를 당기자마자 화승총을 세우고, 여전히 뜨거운 총구에 꽂을대를 쑤셔 넣는다.

타타탕! 타탕!

“쏴라아!”

타타타타타탕! 타타타탕!

“자율사격!각자 장전되는 대로 쏴!”

주변은 이어지는 총성으로 귀가 아팠다. 하지만 익숙한 일이다. 마치 자신과는 상관 없는 일이라는 듯, 숙련된 손놀림은 약간의 느긋함마저 느껴진다.

오늘의 그는 여유가 있었다.

코 앞에서 악을 지르며 자신을 죽이겠다 달려드는 시커먼 얼굴의 적병도 없었으며, 선발 사수 소대장으로서 통제하고 지휘해야 하는 부하들도 없었다.

그저 한 명의 사수로서, 방벽에서 가장 좋은 사격 지점을 배정받아 적을 노리고 쏠 뿐이다.

명중률이고 뭐고 허겁지겁 장전해 한 발이라도 더 적진으로 쏴야 하는 절박함도 없었기 때문에, 꼼꼼하게 총열을 청소하고 화약을 다져 넣는다.

그렇게 꽤나 느긋하게 장전을 했는데도, 주변의 다른 총병들보다 더 빠르게 사격 준비를 마친다.

벌써 몇 번째 전투에 참여하는 것이었는지. 새삼 불과 2년 전의 자신과 비교해 얼마나 성장하였는지 체감 된다.

마지막으로 점화구에 도화선 역할을 할 고운 화약을 부어 넣은 후, 격철에 물린 화승의 불꽃이 빨갛게 잘 타고 있는지 확인한다.

어느새 자욱하게 피어 오른 화약 연기 너머로 적당한 표적을 살핀다.

그는 선발 사수, 실력을 인정받아 자율권을 부여받은, 더 비싸고 큰 구경의 화승총을 지급받은 베테랑 중 한 명이다.

···뭐 얀의 경우는 총은 생뢰르반 전장에서 노획한 크고 멋진 놈을 쓰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가치 있는 표적을 노려야만 한다.

그렇다고 너무 오래 시간을 끌어 사격 기회를 날려 버리면 안 된다.

아무리 평소보다 여유 있는 상황이라고 해도, 대개의 경우는 연사 속도는 명중률 만큼이나 중요하니까.

하지만 이미 사격전은 격렬해졌고 자욱한 화약 연기에 가려 적진이 잘 보이지는 않는다.

적당히 타협하여, 무리지은 적 한 가운데의 깃발을 노린다.

대개의 경우 깃발 근처에는 지휘관이 있을 것이며, 그게 아니더라도 기수를 맞추면 충격을 줄 수는 있을 것이다.

···선발 사수 훈련에서 배운 이론 수업에서는, 기수를 쓰러뜨리면 적의 사기를 낮추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생뢰르반 전투에서, 얀이 기억하기로 당시 그가 속했던 제10 카르카냑 보병 연대의 연대 기수는 최소한 다섯 번 이상 바뀌었었다.

그럼에도 온갖 출신 병사들이 뒤섞인 얀과 동료들은 오히려 악에 받혀 싸움을 계속했었다.

기수가 쓰러지면 연대기는 손에서 손으로 전해져 전투가 끝나는 순간까지 전장을 떠나지 않았고 말이다.

타아앙!

어쨌든, 주의 깊게 손가락 첫마디로 방아쇠를 당기자 굉음과 함께 육중한 반동이 어깨를 때린다.

흐릿한 연기 너머로 적이 맞았을 것이라는 확신은 들었지만, 애석하게도 깃발이 쓰러지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얀은 곧바로 다음 사격 준비로 넘어간다. 명중했든 안했든, 이미 쏜 이상 집착하지 않는다.

맞췄다면 다행이고, 빗나갔다면 더더욱 다음 사격은 신중하게 해야 할 것이니까.

얀이 제18 벨모제 보병 연대의 동료, 2개 중대의 총병들과 배치되어 있는 곳은 폴름스 성문을 마주보고 있는 방벽의 위이다.

현재 제18 연대의 본대가 주둔해 있는 곳은 폴름스 서쪽 마을, 파두자이트였다.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다를 쿠에상 연대장은 병력이 가장 온전한 2개 중대의 총병과 선발 사수들을 이끌고 바로 어제 이곳에 배치되었다.

그 이유는 ‘적이 출성 돌격을 계획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다를 쿠에상 연대장은 조심스럽게 포위선을 따라 적에게 보이지 않도록 행군하며 자신이 들은 작전 지시를 이것저것 설명해주었었다.

선발 사수 소대장이니 중대장급으로 대우 해준다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듣기는 했지만, ‘왜’ 사령부에서 그런 명령이 내려졌는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어차피 따를 생각이기도 했고.

아직 얼치기 신병으로 참전한 리니 능선에서의 첫 전투 이후로, 콘도티에레의 명령을 의심해본 적 따위는 단 한번도, 한 순간도 없다.

여울목 전투에서 북부 귀족들이 고용한 용병들과 야트막한 담을 사이에 두고 주먹다짐을 했던 때도.

샹다메리 전투에서 지금은 아군이 되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우고 있는 국왕군 기병을 상대로 기습했을 때도.

생뢰르반 전투에서 몇 번이나 죽을 뻔 하며, 질릴 정도로 몰려오는 라솔 놈들을 끝도 없이 때려 눕혔을 때도 말이다.

자신은 그저 눈 앞의 적절한 표적을 찾아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된다.

그건 승리를 향한 지름길이 분명할 것이며, 전장의 어디에선가 콘도티에레는 승리를 확정 짓고 있을 테니까.

뭐··· 요즘도 가끔 생뢰르반에서의 혈전을, 쓰러져간 수백 명의 동료들이 기억나며 잠에서 벌떡 깨어날 때가 있기는 하지만.

자신이 먼저 간 동료의 뒤를 따르는 것 자체는 그렇게까지 두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이 개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기 때문이다.

분명 자신은 가치 있는 전장에서, 가치 있는 역할을 하다가 스러지리라.

블랑독의, 트랑카벨의, 그리고 얀 고티에의 고향 카르카냑을 위한 가치있는 죽음 말이다.

타아앙!

또 한 발, 적진을 향해 탄환을 쏘아 보낸다.

이제는 적의 반격이 거세졌고, 연기가 시야를 가려 조준은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다.

성문 방향에서는 적이 끝도 없이 몰려 나오고 있었다.

꽈광!

“끄아아아악! 으악!”

“으아아!”

“살려줘! 끄윽, 살려줘!”

아무리 적병이라지만, 사람이 바글바글하게 몰려있는 그 지점에 호박 덩어리 만한 구포탄이 떨어져 폭발하는 것은 소름끼치는 광경이었다.

사람 조각인지 옷 조각인지 모를 시커먼 것들이 하늘로 치솟았다가 너풀거리며 다시 떨어지는 장면은 말이다.

어쨌거나, 기세 좋게 성문을 열고 나온 적군은 결코 포위망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얀은 확신을 가지며, 꽂을대를 총구로 밀어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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