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19. 폴름스 전투, 셋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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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츠베르크 용병단장 쇠렌 마이켈러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분명 자신은 수세에 처한 적을 공격하고 있었고, 비록 아군의 힘을 빌리기는 했으나 승리가 눈 앞에 있었다.
적 측익 부대 하나를 통째로 날려먹을 수 있는 상황에서 딱 한 걸음 떨어져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타탕! 따당! 탕! 타타탕!
타타탕! 타탕!
“으윽! 큭!”
“자리를 지켜라!”
“흐아아악!”
“명령 없이 쏘지 마!”
사방에서 전장의 소음이 들린다.
전장에 화승총이 이렇게나 많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끊이지 않는 총소리.
죽어가는 자와 산 자들의 고통과 공포에 질린 비명소리.
산 자들을 어떻게든 통솔해보기 위해 장교와 부사관들이 질러대는 고함소리.
이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방에 가득해 지겹도록 듣던 소리였다.
그런데 거기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가장 두렵고, 또한 놀라운 소리···.
바로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말발굽 소리였다. 그 소리는 진동이 되어 대지를 통해 쇠렌과 반츠베르크 연대원들의 몸에 전달되고 있었다.
“크윽!”
지휘를 위해 검을 뽑아든 오른손이 덜덜 떨려서 왼손으로 잡는다.
오래 사용해 반질반질해진 가죽 장갑 아래가 아플 정도로 힘을 주어 잡자 간신히 떨림이 멈춘다.
쇠렌은 20년을 전장에서 떠돌았다. 때로는 용병으로, 때로는 지방 영주의 하급 가신으로, 때로는 나름 지분을 가진 상단의 일원으로.
그러면서 사선을 넘은 일은 수도 없이 많았다.
허나 쇠렌은 겁이 없는 편이었다.
오래 전, 늦은 저녁 숲을 따라 행군하다가 적과 코 앞에서 조우해 서로 얼굴에 대고 총을 쏘는 광기 어린 격전이라거나.
이미 패한 전장에서 몇 배의 적을 상대로 사실상 목숨을 내어 놓고 하는 꼬리 끊기 전투라거나.
운이 좋았던 건지 나빴던 건지, 그런 진저리나는 전투는 쇠렌의 몸에 흉터를 늘려갔고 또한 커리어에 빛나는 경험을 한 줄씩 추가해 갔다.
때로는 용병료를 떼먹히는 사기를 당하거나, 전공 평가 절하는 당하는 부당한 경험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전선을 떠나지 않으며 받은 돈 값은 확실히 한다는 믿음을 쌓아 올려갔고, 마침내 연대장에 오르게 된 그였다.
그렇게 평생 어지간히 ‘지랄같은’ 경험은 다 해봤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처음이었다.
바로 ‘개활지를 온통 뒤덮은 엘랑키아 기사들 틈바구니에 끼인’ 경험 말이다.
“멍청이들아! 대열 풀면 안 돼!”
“멈춰 멈추라고!”
그로이엔펠트 연대가 길을 뚫어주면 즉시 돌파해 들어가기 위해서 깊은 종심 대열로 병력을 재배치하고 있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엘랑키아 기병들이 ‘갑자기 후방에서’ 나타났을 때, 대응할 시간이 부족했다.
그런 까닭으로 완벽한 대기병 진형으로의 전환에 실패했다.
‘우리 연대 측면에 바짝 붙어 대기할 것’
그나마 그로이엔펠트 연대의 에카트 연대장이 제 때 보내준 전령의 말을 따라서, ‘한쪽 벽’으로 의지하면서 대열을 짤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더 심각한 상황에 처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간신히 사방으로 창날을 세우고 총병을 배치하고 나자, 엘랑키아 기사들이 들이닥쳐 사방을 휩쓸어 버렸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해서 연대 외곽에서 대열 변경 중이던 중대들이 급한 진형 변경에 따라오지 못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그나마 주변에 작은 섬 처럼 낙오된 중대들이 똘똘 뭉쳐 살아남은 게 다행이었다.
“어어? 어어어어! 저 새끼들 왜 저래?”
“으아아! 움직이지 마!”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사고는 가장 약한 고리에서 터졌다.
낙오된 작은 섬에 속한 병사들의 일부가 사방에서 전해지는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본대로 합류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가뜩이나 적은 사람 수로 똘똘 뭉쳐 간신히 적 기병의 접근을 막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움직이면 다 죽는다니까!”
“멈춰 머저리들아!”
전방에서 아직 불완전한 방어선을 조율하고 있던 전방 장교들이 기겁하여 외치지만 소용 없었다.
외떨어진 ‘작은 섬’과 반츠베르크 본대 사이의 최단거리는 불과 200여 미터.
달리기에 조금만 익숙하면 정말 한달음에 쉬지 않고 뛰어갈 수 있는 거리이다.
게다가 양쪽 모두 총병이 노린다면 사거리에 들어오므로, 가운데를 가로막는 적 세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숨도 쉬지 않고 달리면, 적이 눈치채기 전에 본대에 합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리라.
몇 명이 대열을 이탈해 뛰기 시작하자, 나머지도 우르르 움직이기 시작한다. 삽시간에 대열에는 남은 병사보다 이탈한 병사가 더 많아져 버린다.
하지만 엘랑키아 기병은 생각보다 더 빨랐다.
“으읏, 으아악!”
“온다! 오른편에서 온다!”
200명이 넘는 훈련받은 용병이다. 제대로 무장하고 한 자리에 똘똘 뭉쳐서 버티기만 해도 기병대가 함부로 접근하기 힘든 규모이다.
억지로 공격해 사과 껍질 벗겨내듯, 외부에서부터 조금씩 피해를 누적시킬 수는 있겠으나 반격에 공격하는 기병도 그만큼의 피해를 입어야 하기 때문이다.
허나 이는 장창과 화승총 등, 적절한 무장을 갖추고 지휘관에 의해 통제되는 상황에 그렇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그런 상황이었으나··· 그저 살아남기 위해 눈이 돌아버려 대열을 이탈한 상황에 그런 게 있을리가 없었다.
태반이 무기를 팽개치고 죽어라 달리고 있었고, 대열은 커녕 주변의 아군을 살필 틈도 없었다.
···물론 적군도 말이다.
“살려··· 허억!”
예상하지 못한 시야 밖에서의 공격, 창날 끝이 도망치던 용병의 겨드랑이 아래쪽을 쑤시고 들어가 반대로 튀어 나온다.
죽을 힘을 다해 달리던 병사의 몸이 옆으로 훽 틀어져 날아가고, 본대에서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요란하게 ‘우드득’ 하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린다.
그게 사람의 체중이 실리며 부러져 나간 창날에서 난 소리인지, 희생자의 척추와 갈비뼈가 엉망으로 부러지며 낸 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자기 위치를 버리고 죽자사자 도망치던 작은 타원형의 무리는 어느새 측면에서 나타난 엘랑키아 기병 분견대에게 관통당했다.
겨우 30기나 될까 말까, 게다가 가볍게 무장한 경기병들이다.
만약 도망병들이 원래 위치에서 떠나지 않았다면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을 전력차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일단 기회를 발견한 이상 거침이 없었고, 대담하게도 수가 훨씬 많은 보병들을 그대로 밀치고 지나쳐 버렸다.
“이야아아아!”
“허억!”
“끄아악!”
“엘랑키아를 위하여!”
가장 먼저 창에 찔리거나 돌진해온 말에 치인 병사들이 추수가 끝난 짚단 더미처럼 엉망으로 나가 떨어진다.
뒤이어 보병 사이로 뛰어들며 기세를 이용해 휘두른 칼날에 잘려나간 팔이 몇 개 허공으로 날아 오른다.
“도망쳐! 도망쳐!”
“살려주시오! 으아아!”
바로 다음 순간, 최초의 돌격에서 살아 남은 이들이 부채꼴로 흩어져 마구 달리기 시작한다.
말 그대로 공포로 눈이 뒤집힌, 필사의 도주였다.
몇 명은 기병이 스치고 지나가면서 큰 상처를 입었음에도, 상처를 감싸고 비틀비틀 도망자들 사이에 합류했다가 힘이 다해 쓰러지기도 했다.
이 모든 과정에 속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살아 남았거나, 말들 사이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거나, 마지막 남은 용기를 짜내 저항하는 병사들이 학살당하기 시작했다.
비록 소수의 경기병이었지만, 이미 혼란에 빠져 도망치던 보병 대열에는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의 엄청난 충격력을 발휘했다.
보병들이 저항을 하려 한들, 태반은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던 중이었다. 싸움이 될 리가 없었다.
그들의 지휘관 입장인 쇠렌은 눈앞에 캄캄해졌다.
반츠베르크 연대는 비록 전통있고 유명한 명문은 아니지만, 나름 실전 지향적인 연대였고 이는 쇠렌의 자랑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게··· 아무리 기습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추하게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치다가 그 목숨도 건지지 못하는 꼴을 보고 나니···.
규모가 좀 더 큰 본대라고 한들 끈질기게 버티면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최근 선제후의 ‘급하고 큰 건’ 계약을 앞두고 검증되지 않은 신병을 너무 많이 충원했던 것이 문제였던가···.
타탕! 타타탕!
속절없이 당하는 아군을 돕고 싶었는지, 본대에서 총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뭐 하는 짓이야! 명령 없이 쏘지 마!”
정신차린 쇠렌이 버럭 화를 냈다.
“모두 방아쇠에서 손가락 빼!”
“다 같이 뒈질 생각이냐!”
이런 상황에서 가장 피해야 할 것은 ‘총이 빈 상태에서’ 적 기병에게 돌격당하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충분한 화력을 갖추고 있는 한, 적은 무리해서 접근하지 않을 것이며 접근하더라도 충분히 격퇴할 수 있었다.
온갖 시련이 있기는 했지만 일단 대기병 밀집 대형을 갖추었으니, 이대로 버티기만 하면 살 수 있다.
하지만 손톱만한 약점이라도 잘못 노려져서, 대열 한가운데로 적의 침입을 허용하는 순간 끝장이었다.
···아마 저 외떨어져 있던 작은 대열 역시 도망을 선택한 것은 배후에 적이 있다는 공포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그에 비해서 천 명 이상으로 규모를 갖춘 밀집 대형은 실제로 포위 당하더라도 배후에 적이 있다는 압박감은 한결 줄일 수 있었다.
그리고 한 번 방어 대형을 갖춘 보병 연대는 몇 배의 적으로 공격해도 쉽게 무너뜨릴 수 없다.
실제로 쇠렌은 며칠 동안 잠도 자지 않고 대열을 유지한 상태로 퇴각해 결국 살아 남은 전설적인 무용담에 대해 알고 있다.
심지어 그들은 이미 패배한 전투에서 후위를 맡아 퇴각하는 아군을 엄호하면서 전장에서 벗어났다고 하질 않던가.
그러니 반츠베르크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다. 당황한 부하들이 제발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연대장님! 그로이엔펠트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무슨 내용이지?”
전령이 내민 살짝 구겨진 종이에는, 전장에서 휘갈겨 쓴 것 치고는 깔끔한 글씨체로 두 줄이 적혀 있었다.
‘귀 연대와 그로이엔펠트가 함께 버틴다면, 엘랑키아 기사들도 쉽게 우리를 넘보지 못할 테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엘랑키아 기병이 갑자기 어떻게 이동해 왔는지는 몰라도, 십중팔구 전장의 반대편에서 왔으리라 추측됩니다. 버티다 보면 반대편 전장의 아군이 승리할 것입니다’
쇠렌은 그제서야 전장의 상황을 떠올렸다.
확실히, 중앙군 예비대에서 이곳으로 지원을 올 때, 엘랑키아 놈들이 한쪽 측면에 기병대를 집중한 괴상한 배치를 했다고 들었었다.
그 병력으로 단숨에 돌파를 노리거나, 다른 전선이 유리해지든 불리해지든 변화가 생기면 그쪽으로 투입할 것이라는 건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장 휘하 연대 챙기기도 바빠서 잊고 있었다.
그에 비해 에카트라는 연대장은 이런 상황에서도 정확하게 전황을 파악하고, 동료인 자신에게 협조를 구하는 정중한 쪽지를 보내온 것이다.
부끄러웠다. 어쩌면 방금 반츠베르크의 일부가 저질렀던 추태를 보고 보냈을지도 모른다.
고개를 돌려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대열을 갖추고 엘랑키아 기병과 대치하고 있는 그로이엔펠트 브리체른 연대를 바라본다.
확실히··· 격이 다르다.
급하게 모양새만 만들었다가, 이제서야 엉망진창인 방어선을 재배치하고 있는 자신들과 다르게, 저들은 정갈하기 그지없었다.
기병 기습 초기에 마치 ‘상황을 알았던’ 것처럼 순식간에 방어선을 구축했던 게 분명했다.
다시 한 번 부끄러웠다··· 역시 명문이라 부르는 이유가 있었다. 지금 그가 아군이라 다행이라 든든하게 생각하는 게 그 증거였다.
어쨌거나, 그로이엔펠트 역시, 사방이 적인 상황에서 한쪽 면이라도 아군이 버텨주는 게 나을 테니 서로 도와야 한다.
“연대장님, 적습입니다!”
“뭐? 어느 방향인가! 상황은? 설마 기병에 돌파당했나?”
“그게··· 기병이 아니라 보병입니다!”
“보병? 그게 무슨 소리야!”
어처구니가 없었다. 적 보병이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왔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