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32. 폴름스 전투, 셋째 날
다소 어수선한 행군 대형으로 숲을 헤매느라 지쳐있던 병사들이 앞으로 나와 대열을 갖추기 시작한다.
시야가 좁은 숲속이지만, 경험 많은 장교들은 용케도 깃발을 중심으로 수평을 잡고 병사들을 지휘해 전투 대열을 만들기 시작한다.
“세두시온 공,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정찰을 보내겠습니다. 아직 적의 규모나 배치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만류하려는 것은, 폴름스 전투에 파견된 자이트리츠 전쟁관의 참모들 중 서열 2위, 플로리안 도프 폰 자이트리츠였다.
“그럼 지금 정찰을 보내시오! 이미 늦었으니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은 없소이다.”
“급할 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적은 분명 우리의 접근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렇기에 서두르는 것이오. 대응 준비를 하기 전에 깨뜨리고, 폴름스를 남쪽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이오!”
“세두시온 공···.”
세두시온의 브라우나인 병력과 함께 오늘 하루종일 숲속을 헤매고 다닌 플로리안은 상당히 지쳐있었다.
이번에 디오보르크 공작이 이끄는 군에 부임하고 난 후로 잠이 부족했기 때문인지, 혹은 조악한 식사 탓인지 컨디션도 좋지 않았다.
허나 계속 열이 끓고 혀가 말라가며, 눈 앞이 침침한 와중에도 이 숲 너머가 천국인지 지옥인지도 모르고 부하들과 함께 뛰어들려 하는 세두시온 공을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세두시온 공, 지나온 숲 길에 쓰러진 아군 병사들을 보시지 않았습니까? 분명 대규모 전투에서 패배하고 무너져 추격당한 흔적입니다.”
“그렇지. 우리가 합류를 예정했으나 만나지 못했던 그 병력이 아니겠소? 적은 ‘작은 승리’에 방심하고 있을 것이오.”
호언장담하는 세두시온을 보며 플로리안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엇 때문에 그의 상관이 이렇게 무모한 태도를 취하는지 알 수 없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세두시온은 무척 침울했다. 플로리안이 가능한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며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몇 차례 여기저기서 전령에게 정보를 전달받고, 플로리안이 세운 계획을 검토하더니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감을 되찾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아까부터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서는 작전을 주도하고 있었다.
애초에 숲을 통해 길게 우회해 아룬하비크를 공격하겠다는 계획도 그가 즉흥적으로 세운 계획이었다.
아침에 플로리안이 제출한 계획안은 숲을 통해 우회는 하되 아룬하비크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아룬하비크와 브레세른을 연결하는 도로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두 마을 사이에는 포병으로 증강된 엘랑키아 군의 강력한 방어 진지가 있었는데, 이것이 플로리안의 목표였다.
도로와 방어 진지를 장악해 브레세른 마을을 고립시키며 적에게 아우페브라즈와 아룬하비크 모두를 지키도록 강제한다!
그게 어렵더라도, 방어 진지와 아룬하비크 사이의 연락보급망을 차단한다.
그것으로 일단 수적 우세를 달성할 수 있으며, 남부 전선에서의 주도권을 빼앗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플로리안은 양측의 주력이 격돌하는 북부 전선에서 만프레트 총참모장이 승리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금까지 경험해온 바로는, 이런 유리한 국면에서 ‘검은 늑대’가 패배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승리가 엘랑키아 군을 궤멸시키는 압도적인 승리가 되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마을 하나 혹은 둘 정도를 빼앗으며, 엘랑키아 군의 전선을 축소시켜 내선의 이점을 빼앗는 정도가 되리라 생각했다.
최악의 경우, 엘랑키아 기사대의 정신 나간 전투력을 생각하면 서로 치명상을 입는 양패구상에 빠질 수도 있다 생각했다.
허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더 이상 본국으로부터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엘랑키아 군과 달리, 그룬발트 군은 아직 전 병력이 집결하지조차 않은 상태이다.
또한 방어선의 일각을 무너뜨리고 내선의 이점을 빼앗은 순간, 지금과 같은 엘랑키아 측의 효율적인 방어전은 불가능해진다.
이 두 가지 약점은 오히려 넓은 점령지와 방어선을 병력만 빨아들이는 함정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시간이 흐를 수록 엘랑키아 군은 점점 약해지고, 그룬발트 군은 점점 강해진다.
오늘 이기지 못했어도 내일은 이길 수 있을 것이며, 혹여 내일 이기지 못했어도 모레는 이기게 되리라.
막대한 희생을 감수했으나 혹시라도 엘랑키아 군이 이길 수도 있다는 모든 경우의 수를 제거해 버리는, 결정적인 승리로의 한 수였다.
그렇게 굳게 믿은 플로리안은 거기에 맞춰 작전을 전개하는 것이 당연하다 믿었다.
때문에 남부 전선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필요 없이, 전선을 최대한 확대하고 적을 정신없게 만드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계속 확장되는 전장은 병력이 빠듯한 엘랑키아 군을 더더욱 수렁으로 빠져들게 할 테니까.
그리고 ‘만약 있다면’ 엘랑키아 측의 마지막 예비대도 전장으로 끌어낼 수 있을 테고 말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엘랑키아 군은 주전력을 몽땅 북부 전선에 쏟아 부었다’와 ‘지금 아룬하비크는 비어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는 첩보를 들은 세두시온은 멈추지 않았다.
그나마도 멋대로 길잡이를 앞세워 숲을 나아가다가 길을 잃고 현재에 이른 것이다.
“모두 공격을 준비한다! 보병이 선두, 기병은 그 뒤를 따르며 지원한다!”
“옛, 세두시온 공!”
“자,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고열로 인해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부여잡던 플로리안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한다.
허나 세두시온은, 잠시 자신의 ‘충성스러운’ 전쟁관 참모를 바라보더니 몸을 훽 돌려버린다.
이미 공격은 확정되었다. 플로리안으로서는 이미 시작된 공격을 최대한 성공적으로 이끄는 것 밖에는 선택지가 남지 않았다.
“전진! 일격에 적을 부순다!”
“전지인!”
한참 숲을 헤매며 비로소 전장을 찾은 브라우나인 병사들이 힘차게 숲의 외곽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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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정지!”
“정지! 모두 정지이!”
“멈춰! 간격을 유지해라!”
다소 숨이 가빠질 정도로 빠르게 행군해온 지빌링엔 반연대가 멈춰선다.
지빌링엔은 고산지역이다. 옆집에 가려면 산을 두개 넘고 협곡을 하나 넘어야 한다가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 되는 지역이니까.
그래서 지빌링엔 출신들은 평균적으로 발이 빠르고 체력이 좋다.
느긋하게 걷다가는 해가 빨리 떨어지는 산속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노숙해야 하는 일이 자주 생기기 때문이다.
이런 지역적 특징은 같은 지역 출신들로 이루어진 지빌링엔 용병단에는 일종의 개성이 되어, 평범한 행군도 빠른 편이고 작정하면 남들이 도저히 못 따라올 정도의 행군속도를 자랑한다.
현재 트랑카벨 가문에 뒤늦게 합류한 이번 반 연대는 경험한 적 없지만, 아직 블랑독에서 이단토벌전쟁이 진행되던 시기에도 지빌링엔 연대는 그 기동력을 유감없이 발휘했었다.
블랑독 남동부에 성전군의 일부가 침투했을 때, 막 확대 개편되었던 지빌링엔 연대는 기동방어전에 큰 역할을 했었던 것이다.
가족과 친척을 통해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그리고 그들이 보내온 금화를 기억하는 반연대의 구성원들은 ‘그래서’ 입대를 꿈꾸어 온 신병들이다.
보다 철저한 경쟁을 통해 걸러진 이 2세대 지빌링엔들은 기량이나 숙련도는 떨어져도, 가능성 면에서는 1세대를 능가할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이니, 남달리 자신들의 장점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고 그것이 발을 더욱 빠르게 했다.
그 결과, 파견 명령을 내린 당사자조차 예상하지 못할 엄청난 속도로 목적지인 슈뵈켄 인근에 도달했다.
폴름스 주변 지역은 대체로 평야 지역이었지만, 그나마 주변보다 살짝 높은 지점에 올라오자 주변이 확실하게 보인다.
처절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전장이 말이다.
“아군이··· 밀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군.”
연대장 대리 울리히 헨텔은 굳은 얼굴로 차석 중대장과 망원경으로 전장을 살핀다.
울리히는 선임 중대장으로 이번 파견대를 지휘하게 된 점에서 알 수 있듯, 이미 수 차례 전장 경험이 있는 베테랑 용병이었다.
하지만··· 이런 광경은 처음 본다.
쾅! 콰쾅! 뻐엉!
타타타타탕! 타타탓, 타탕!
따다당, 타타타타타탕! 타앙!
눈 앞이 온통 전장이었다. 양측 사이에 일정한 전선조차 살피기 어려울 정도로 전황은 혼란스럽다.
게다가 그 숫자는 보병과 기병을 합쳐 1만을 훌쩍 넘는다. 굳이 세어 볼 필요도 없었다. 이런 규모의 전투는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이 광경이 전장의 전부가 아니다. 폴름스를 둘러싼 대규모 공방전의 극히 일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그리고 서로의 병력이 끝없이 밀고 밀렸던 것인지 두려울 정도로 많은 병사와 군마의 시체가 바닥에 깔려 있었다.
‘앞으로 저기로 들어가야 한다.’
라고 생각하니 솔직히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은 단순히 여기까지 빠른 속도로 행군해왔기 때문은 아니리라.
무심코 고개를 돌려 부하들을 바라본다. 스무 살 전후 신병들의 앳된 얼굴이 강행군으로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들은 선임 중대장, 아니 연대장 대리가 자신들을 바라보자 애써 가쁜 숨을 고르며 자세를 바로 하기 위해 노력한다.
‘저들을 이끌고, 저기로 들어가야 한다.’
잘 할 수 있을까. 자신도, 대부분이 신병인 부하들도 말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대장님?”
차석 중대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판단을 묻는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울리히가, 지빌링엔 반연대가 받은 명령은 ‘슈뵈켄으로 행군해 지원군에 합류하라’ 뿐이었다.
상식적으로는 이대로 후속 명령을 기다리는 것도 명령 위반은 아니다.
적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콘도티에레에게 올리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건 어떨까.
아니, 오히려 그 편이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한다는 점에서 정답인 것 같기도 하다.
독자적으로 판단하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겠다 싶었으니까.
드디어 실전 투입인가, 라는 분위기로 숨을 고르며 대열을 정돈하고 있는 병사들의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다시 망원경을 눈으로 가져가 전장을 살핀다.
자세히 전장을 살피니, 그저 무질서한 집단전의 현장으로만 보였던 것이 차츰 뚜렷하게 보인다. 무질서 속의 질서라 해야 할지.
아군과 적군이 차츰 구분되며, 전황을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슈뵈켄 마을 후방에 펼쳐진 진지를 적이 습격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거의 진지의 절반이 적에게 넘어갔으며, 지금도 불리해 보인다.
하지만 자를 대고 쭉 그은 것처럼 전선 자체가 밀린 것은 아니다.
나름 이어질 듯 이어지지 않는 공간과 길을 통해 연결된 진지 사이 빼앗기지 않고 저항하는, 외딴 섬처럼 보이는 작은 방어 거점들이 보인다.
애처롭게도, 볼품없는 방벽과 참호선으로 격리된 좁은 공간을 고수하며 싸우는 이들은 소속은 몰라도 분명 아군이다.
전령을 보내 상부에 판단을 묻는 게 정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정답을 기다리는 사이, 저 작디 작은 방어 거점들은 분명 무너지리라.
주로 100명 미만의 소규모 보병대를 지휘하며, 열악한 지형에서 싸운 경험이 많은 울리히이기에 그 점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허대 연대급 부대를 지휘하는 것은 처음이다. 그런 생각이 울리히의 판단을 자꾸 방해했다.
‘이제부터 울리히 경이 지휘할 휘하 부대는, 다소 정원에서 모자라기는 해도 연대급 부대입니다. 전장의 승패를 가를 수 있는 힘을 가진 부대라는 말이죠.’
오늘 아침, 아우페브라즈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기 전, 콘도티에레에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이전에 만났던 용병대장들과는 전혀 다른,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가 말했었다.
‘때로는 사령부가 모르는 일을 일선에서 알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울리히 경은 판단을 해야 합니다.’
그 후에도 이런저런 조언을 해 주었으나, 기준을 알려주지는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 이야기 자체가 ‘기준’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 상황에서, 그 콘도티에레라면 어떤 판단을 내렸을까. 마지막으로 무의미한 생각을 잠깐 해본다.
아직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낸 것은 아니지만, 왠지 무기력하게 지켜보기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울리히는 작게 심호흡을 한 후, 허리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 모습을 본 차석 중대장이 깜짝 놀란다.
최근 콘도티에레의 호의로 무기를 지급받은 부하들과 달리, 전장에서 공을 세워 고용주에게 받았던 자신만의 자랑스러운 검이다.
“횡대 전투 대형으로. 슈뵈켄 마을을 지키는 아군을 구한다.”
“예, 옛, 알겠습니다! 모두 횡대 전투 대형으로!”
“횡대 전투 대형! 서둘러!”
“휴식은 끝났다!”
잠시 쉬며 체력을 회복한 지빌링엔 병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