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500화 (467/556)

47-35. 폴름스 전투, 셋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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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장애물은 넘었다. 슈뵈켄 전선을 구원 온 티테니아 드 몽파르지에 휘하의 혼성 기병대는 첫 접전에서 승리했다.

그룬발트 기사들은 생각보다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초반에는 완강하게 싸우려는 것 같았으나, 전황이 부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분위기가 퍼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흩어져 도망쳤다.

마치 지금까지는 전장을 떠나고 싶지만 마땅히 변명할 기회가 없어서 전장에 남아 있었다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지빌링엔 반연대를 우습게 보고 분견대를 보냈다가 크게 패하고, 이번에는 기병대 전체를 모아 맞섰으나 마찬가지로 패배하자 싸울 의지를 상실한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번에는 완전히 산산조각나 부대가 흔적도 남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름 부대 단위로 물러난 무리도 있었으나 첫 접전에서 이렇게나 깨진 이상 다시 전장으로 돌아오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이다.

“구원 감사합니다! 지빌링엔 반연대의 연대장 대리인 울리히 헨텔입니다!”

“귀경께서 보내신 전령 덕분에 신속하게 전투 준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번 지원 파견대 지휘를 맡은 티테니아 드 몽파르지에입니다.”

“옛, 저희는 앞으로 티테니아 경의 지휘를 받겠습니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적을 격퇴하고 여유가 생긴 덕에, 따로따로 출발한 아군과 합류할 수 있었다.

“다음 광격을 위한 병력 집결은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3분 내로 완료하겠습니다. 기다려 주십시오.”

이제 한동안 첼레스티나의 지원 없이, 티테니아 본인의 판단만으로 지휘해야 한다.

그 이유는 첼레스티나는 더 중요한 당초의 목적, 슈뵈켄 포병 진지에 배치된 병력을 재편성 해서 야전에 활용할 포대를 급조하는 것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첼레스티나가 아니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기에, 한동안은 그녀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

뤼브르 경 역시, 혹시라도 갑자기 나타난 용병 출신 여지휘관의 지시를 타 부대 출신 장교들이 따르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이에 협력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오라버니가 붙여준 드 몽파르지에의 베테랑 장교들이 미숙한 그녀를 보좌하며 세세한 병력 운용을 돕고 있었다.

드 몽파르지에 공작가에 충성하는 가문의 자제들과 종사들로 이루어진 기병대는 특별한 지시 없이도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부대였고 말이다.

실제로 전장에 와서 전장의 한가운데를 겪고 나니, 조금 더 보이는 것이 있었다.

물론 미터스하임 전투 등, 실전을 겪는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미 유리한 상황에서’ 쐐기를 박아 넣는 역할이었던 그때와는 다르다.

남의 도움을 받을지라도, 이번에 티테니아가 맡은 임무는 콘도티에레의 지시에 따라 ‘불리한 상황을 유리하게 만드는 것’이었으니까.

출격을 앞두고 들은 콘도티에레의 지시는 언제나 그렇지만 명쾌했다.

개념적으로 생각하자면 크게 복잡하지는 않다.

방금은 먼저 전투에 들어간 지빌링엔 반연대를 구했고, 작지만 결정적인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

추가적으로 첼레스티나는 제한적이나마 새로운 야전 포병대를 편성할 수 있는 기회와 장소를 얻었고 말이다.

그럼 다음 차례는 방금 구해낸 지빌링엔 연대와 협력하는 것이다.

그래서 슈뵈켄을 공격하는 그룬발트 군을 쫓아내고 슈뵈켄을 수비하는 나머지 병력을 구원하며, 첼레스티나가 재편할 야전 포병대도 합류한다.

게다가 슈뵈켄에는 수비를 책임진 연대가 이외에, 다른 연대에서 차출한 총병 분견대도 있다고 들었다.

트랑카벨 정규 연대에서 차출한 선발 사수들도 있으며, 그들은 숫자로만 판단할 수 없는 훌륭한 전력이라고 한다.

이렇게 완성된 병력으로, 중앙군의 측방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중인 디타레 드 카울의 기병대를 지원한다.

그룬발트 우익군 본대를 격퇴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국왕 폐하가 이끄는 엘랑키아 중앙군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한다.

만약, 만약에··· 라고 콘도티에레는 ‘만약’이라는 표현을 두 번이나 거듭 썼었다.

만약에 그룬발트 우익군을 격퇴할 수 있다면, 디타레 경의 기병과 합류, 잔존 병력을 재편해서 교착상태인 중앙군끼리의 교전을 측면 지원한다.

지금 엘랑키아 군이 비장의 카드였던 기병 대군을 투입하고도 서로 호각인 교착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명확했다.

그룬발트 군이 생각보다 강하고 능숙하게 대처하고 있다는 점도 있겠지만, 결국 서로 다른 수단을 활용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 국면에서 균형을 깨려면 외부의 조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남부 전선에서 파견된 지원군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만약 여기까지 할 수 있다면··· 이번 폴름스 전투의 승리는 확실히 티테니아 경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겠지.’

콘도티에레는 너무 부담을 줘서 미안하다는 듯, 쓰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티테니아는 대체 당시에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거기다 대고 한 마디 더 했었다.

‘아닙니다, 승리는 오로지 콘도티에레의 전공입니다! 티테니아 드 몽파르지에, 피와 뼈를 모두 불태울 각오로 콘도티에레께 승리를 바치겠습니다!’

···정말로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보면 얼굴에서 불이 날 것 같은 부끄러움만 느껴진다.

하지만 그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이동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가자! 지빌링엔 반연대가 중앙, 우리가 그 측면을 지원한다!”

승리를 놓칠 생각은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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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힘들어서 눈 앞이 팽팽 도는 것 같다. 간신히 버티고 있던 무릎이 저절로 꺾이고, 쉴 새 없이 부풀어 오르는 숨통이 터지기 직전이라는 느낌이다.

“주신이시여··· 아··· 차라리··· 감사합··· 하아···.”

아까 적에게 얻어맞아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지는 입에서는 맥락도 의미도 없는 신음 비슷한 한탄이 흘러 나온다. 정말 괴로웠다.

하지만 살아남았다.

트랑카벨 영지군 제18 벨모제 보병 연대 소속의 선발 사수 아르옌 그로반은 언제나 지상을 굽어보고 계신 주신에게 감사와 원망을 동시에 느꼈다.

아까는 감사와 원망이 거의 오 대 오 이었는데, 그래도 숨 좀 골랐다고 이제는 칠 대 삼 정도는 된 것 같다.

성직을 떠나니 신앙심도 줄어든 것인지··· 바로 얼마 전까지 방어 교회 소속의 수도사였던 아르옌은 자기 생각에 놀랐다.

“형씨 정말 잘 싸우는군! 저 세상에서 가장 큰 장작더미에 맹세코 댁처럼 빨리 장전하는 인간은 본 적이 없소!”

함께 싸웠고, 함께 살아 남은 낯선 이가 그에게 말한다. 전투 복장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가벼운 천 옷을 입은 특이하게도 양손에 두 자루의 검을 들고 있었다.

복장으로 보면 포병대나 공성부대에서 일하는 노무자처럼 보이는데, 적에게서 빼앗은 쌍검을 아주 능숙하게 써서 놀랐었다.

아마도 그가 말한 ‘세상에서 가장 큰 장작더미’란 폴름스의 거대한 세계수를 말하는 것이겠지.

“아, 아닙니다. 후우··· 포대의 여러분이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어려웠을 겁니다.”

“정말이라니까. 이번에는 정말 죽는 줄 알았구만.”

쌍검을 든 남자가 손을 뻗어 포대 벽에 기대어 주저앉아 있던 아르옌을 잡아 일으켜준다.

거친 손바닥을 통해 강인한 힘이 느껴진다. 무거운 공성포를 수시로 옮기는 포병이기 때문일지.

아르옌과 선발 사수 동료들은 함락 직전에 몰린 포병 진지를 돕기 위해 급히 파견되어 왔고, 방금까지 몇 차례나 사선을 넘던 참이었다.

다행히도 남쪽에서 지원군이 왔고, 적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아까 집요하게 포대를 점거하기 위해 덤벼왔던 그룬발트 기사들이, 기병전에서 패하고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칠때는 기뻐서 얼마나 소리를 질렀는지 지금도 목이 아팠다.

그렇다. 그들은 살아남았다.

“수도사님, 다친 데는 없습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소대장님.”

“휴, 다행입니다. 다른 선발 사수들도 모두 무사합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하지만 유난히 번쩍번쩍 빛나는 눈빛을 한 소대장 얀 고티에가 말했다.

수도사를 그만둔 지는 한참 됐지만, 동료들은 여전히 아르옌을 수도사라고 부른다.

동료들이 모두 무사하다는 것은 기쁜 일이었지만 많은 시체를 앞에 두고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분명 선발 사수들이 비교적 안전한 후방에서 적에게 근거리 사격을 퍼부어 큰 전과를 올린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만큼 앞에서 싸우며 대신 죽고 다친 이들이 있다는 것이니까.

그나저나 전황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 여전히 포성은 멈추지 않는다.

슈뵈켄 마을을 공격하는 전투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었고, 멀리 개활지에서는 많은 수의 기병과 보병이 싸우는 듯 흙먼지가 연이어 일어나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얀 소대장님. 아직 싸우고 있는 전선의 아군을 도와야 할까요?”

“그게··· 그 지역을 수비하는 지휘부의 통제를 따르라는 명령을 받고 왔긴 했습니다만··· 이래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슈뵈켄 포병 진지가 적 기병의 습격으로 함락 직전에 몰리자 십수 명씩 흩어져 구원에 나서 간신히 살아남은 참이다.

이런 대혼란의 와중에 지휘체계에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다.

“일단 조금 쉬면서 체력을 비축해야겠습니다.”

“그래요, 그래야겠네요.”

귀신처럼 시퍼런 안광을 번쩍이며 방벽을 타넘던 그룬발트 기사의 손목을 도끼로 찍어내던 소대장이건만, 그 역시 지치기는 한 모양이다.

모두가 고생했다. 살아남은 게 신기할 정도로.

“남은 화약이랑 포탄을 확인하자. 자네는 포가가 멀쩡한지 살펴봐 주겠나.”

“예, 포술장님.”

한편, 살아남은 포병들 역시 자기 역할을 잊지 않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거 장전봉이 몽땅 부러져버렸구만··· 우리 뼈 대신 부러졌다 생각하면 싸게 먹혔지만 이거 어쩌지?”

“아, 여기 멀쩡한 게 하나 있습니다. 혹시 주변에 빌릴 수 있나 찾아보겠습니다.”

포대를 습격당한 상황에서 무기로 쓸 수 있는 가장 만만한 게 장전봉이다보니, 전투 중에 대부분 상해버린 모양이었다.

“저희도 돕겠습니다.”

“아, 총병 양반들은 잠시 더 쉬시오. 여긴 화약 천지라, 불 쓰는 분들은 위험하지 뭐요! 혹시 적이 다시 올지도 모르고.”

나서려는 아르옌을 만류하는 포술장의 말투는 부드러웠다.

사격하려면 화승에 불이 붙여야 하는 총병이 포대에 접근하면 안 된다는 것은 상식이었지만, 그렇다고 생명의 은인이 아니게 되는 것은 또 아니니까.

“화약 통은 다행히 전부 무사합니다.”

“이거 바퀴가 완전히 나갔는데요··· 고치기 전에는 무리일 것 같습니다.”

“흙 좀 털어내야겠네! 나도 다녀 올 테니, 총병님들은 잠시 쉬고 계십쇼!”

아르옌을 일으켜 주었던 남자는 원래 자기 것이 아니라는 듯, 피투성이 쌍검을 미련없이 방벽 위로 던져버리더니, 동료 포병들 곁으로 돌아간다.

포병들은 멀쩡한 장비를 챙기고 시체들을 멀찍이 밀어 치우면서 언제라도 포를 재사용할 수 있도록 부지런히 준비한다.

그들 역시도 난전 속에서 지쳤을 텐데, 임무를 잊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다행히도, 전장이 이동해 버린 듯 산산히 흩어져 도망친 그룬발트 기병대가 돌아올 것 같지는 않았다.

대신 부대를 통합하려는 듯, 방벽과 참호선을 넘나들며 지휘부로 보이는 이들이 지나다니는 게 보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갑옷 차림인 남자가 다가와 포병들에게 묻는다.

“이봐 자네, 여기 포대는 상황이 어떤가?”

“3문 중 1문 바퀴가 파손되어 이동이나 포격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군··· 제일 큰 공성포가 망가진 건가···.”

갑옷 차림의 남자는 종이에 무언가를 적는다.

“반격을 위해 임시로 야전 포대를 조직하기로 했네. 나머지 두 문은 사용할 수 있겠나?”

“예, 그거야 뭐 가능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포대에서 포를 빼내려면···.”

“그건 우리가 돕겠네! 마지막까지 함께 고생해야 하지 않겠나.”

“예 예, 알겠습니다.”

갑자기 공성포병에서 야전포병으로 전직하게 생긴 포병들이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들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일 것이다.

“엇차···.”

바로 그때, 방벽을 훌쩍 뛰어 넘더니 작은 체구의 누군가가 포대 안으로 들어온다. 우두커니 앉아 쉬고 있던 얀과 아르옌의 눈이 갑자기 커진다.

“체, 첼레스티나 교관··· 아니 참모님?”

“아앗! 수도사님이네? 우리 선발 사수님들 여기 있었나요오? 무사하신 것 같아 다행이네요!”

“아닙니다, 저희를 살린 지원군이 콘도티에레께서 보내주신 병력이었군요.”

“그럼요, 그럼요! 앞으로 반격을 준비하려 하니 선발 사수님들도 함께 해 주세요.”

“물론입니다!”

전투가 끝난 혼란 통에 아는 얼굴을 보자, 첼레스티나는 무척이나 반가운지 아르옌의 손을 마주잡고 휙휙 흔든다.

“이동하는 것은 문제가 아닌데, 탄약을 실을 수레가 필요합··· 어라? 어···.”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경악한 표정을 짓는 이가 포병들 중 하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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