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39. 폴름스 전투, 셋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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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도티에레, 엘프 포로를 만나 보시겠습니까?”
“흠, 글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아룬하비크 남쪽 숲에서의 두 번째 전투가 무난한 승리로 마무리 되었다.
소탕전과 전장 정리도 수습이 되는 와중, 전황이 나쁘지 않게 돌아가 아까보다는 훨씬 차분해진 참모가 확인하듯 묻는다.
그 이유는 내가 아까 처음 보고가 올라왔을 때 모호하게 대답했기 때문이다.
본래는 전투가 끝나기 전에는 포로 면담은 피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거야 전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전과 타령하는 꼴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위가 높은 포로일수록 시끄럽고 오만하게 굴며 높은 사람을 찾는 경우가 많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살려둘 가치 있는 인질’이라는 점을 각인시켜 안전을 도모하려는 것이겠고, 한편으로는 치욕적인 상황이기에 더더욱 자존감을 챙기려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불안하니까 뭐라도 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해서 그런 것이겠지. 이해는 한다.
하지만 이해가 되는 것은 이해가 되는 것이고, 포로로 잡은 쪽에서는 곧바로 만나 줄 의리 따위는 없지.
나도 지금까지는 적 사령관을 잡든 대귀족을 잡든 대체로 원칙을 지켜왔었는데··· 이번에 망설였던 이유는 따로 잇었다.
“그 엘프 포로가 뭐라고 한다 했지? 책임자를 불러오라고 했던가?”
“책임자 정도가 아니라··· 자신은 선제후에 준하는 지위를 가진 후계자이니 엘랑키아의 국왕 폐하를 만나야 겠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허허, 참 당당한 친구이네.”
이건 뭐, 하는 짓은 영락없이 블랙 컨수머 수준인데.
하지만 당사자의 주장대로 선제후의 후계자, 그것도 유력한 후계자라면 통상적인 포로와는 격이 좀 다른 것은 분명하다.
엘프 선제후 가문은 12개나 되니까 좀 희석되는 느낌이지만, 거의 왕위를 물려받을 왕세자를 붙잡았다는 것이니까.
선제후들 사이가 서로 전쟁까지 할 정도로 좋지 않다는 것이야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후계자에 대해서는 서로 존중하는 편이다.
고대 아란 제국을 지배했다는 고귀한 혈족, 통치권 자체는 인간 황제에게 양보했어도 여전히 그룬발트 제국의 지배 계급.
인간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긴 세월을 살며, 마찬가지로 측정 불가능한 경험과 지식을 쌓는 아름다운 이종족.
그런 엘프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으니, 바로 숫자가 적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쟁을 불사하는 격렬한 경쟁의 와중에서도, 암묵적으로 어린 동족에 대한 직접적 위해는 가급적 피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물론 일반 용병들 사이에서는, 어린 엘프를 포로로 잡는다는 건 몸값 장사 입장에서 엄청난 대박이었다.
문자 그대로 성 하나를 살 수 있는 황금을 얻을 수 있으니까.
이렇게 몸값이 높게 책정된 것은, 어떤 면에서는 선제후 가문들이 의도적으로 정한 것도 없지 않았다.
지도에 표시를 할 수 있을 정도의 대영주 수준의 몸값은 된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어야, 실수로라도 위해를 가하는 대신 어떻게든 살려서 붙잡으려 노력할 테니 말이다.
그만큼 어린 후계자를 잃는다는 것은 선제후 가문에게는 물론, 고대 혈족 전체의 손해였기에 어린 엘프들이 전장에 나오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번 폴름스 전투 역시도 그룬발트 제국 전체가 들고 일어난 대전이지만, 선제후 가문의 엘프들이 군을 직접 이끈 케이스는 거의 없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예외가 있었고, 우연찮게 포로로 잡고야 말았다.
“그 포로 엘프는 부상은 없나?”
“예, 따로 보고받지는 못했습니다. 치료가 필요한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흐음.”
나는 어떤 결정을 내릴지 잠시 망설였다.
멀리서 포성이 끊임없이 울린다. 전투의 한 가운데, 각자가 하는 역할에 따라 결과가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와중이다.
주변 적의 잔당 탐색을 포함한 전장 정리도 끝나가고 있었고, 일부 부대는 이미 타 전선을 지원하기 위해 행군을 준비하며 휴식하고 있었다.
그러니, 조금은 시간이 있다.
잠시 짬을 내어 포로를 만나보기로 하자. 어쩌면 그간의 정찰이나 정보원들의 연락으로는 알지 못한 것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신분을 이용해서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는 바탕이 될지도 모르고 말이다.
전장에 나왔다가 포로로 잡힌 선제후 후계자라는 호기심도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본인이 지금도 만나고 싶어한다면, 한 번 만나보기로 하지.”
“옛? 알겠습니다, 콘도티에레! 곧바로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 포로의 이름은 뭐라고 하던가?”
“이름이··· 브라우나인 선제후령의 세두시온이라고 합니다.”
“세두시온이라···.”
“아시는 분이십니까?”
“아, 아닐세. 처음 듣는 이름이구만.”
흠··· 얼굴을 아는 엘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행히도 세두시온은 처음 듣는 이름이다.
그룬발트에서 지내던 용병 시절도 그랬지만, 지금처럼 엘랑키아 군의 일원이 되어 서로 싸우는데 아는 사람이 상대방에 있으면 꺼려지는 것은 분명하다.
용병이라면 신경쓰지 말아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인데 참, 생각처럼 잘 되지는 않는다.
“그럼 포로를 데리고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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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지나지 않아서 포로가 도착했다.
젊은 부사관들의 손에 붙들려 지휘부 막사로 끌려온 그는 마지막 자존심인지, 종사들의 손을 떨쳐내려는 듯 상체를 흔든다.
하지만 아마도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을 섬기는 종사로 보이는 부사관들의 손아귀는 힘으로 떨쳐내기에는 너무 우악스러웠다.
“풀어드리게.”
내 말에 따라 풀려난 엘프 포로, 세두시온은 눈을 부라리며 나와 참모, 그리고 호위병들을 노려본다.
그룬발트의 도시를 걷다보면 종종 볼 수 있는, 직물 자체가 빛나는 것 같은 아름다운 하얀 천으로 된 옷을 입은 포로는 한 눈에 보아도 고귀해 보인다.
비록 진흙과 풀물, 거기에 약간의 핏방울로 더럽혀졌음에도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복장.
거기에 누가 보아도 미남이라고 할 만한 고운 얼굴 선과 깨끗한 피부는 어떤 기준에 평가를 맡겨도 전형적인 귀족의 상이라 하겠다.
다만 그 아름다운 외모 뒤에 어떤 음험함이 숨어있는지 여러번 경험한 내 입장에서는··· 마냥 좋게만 보기는 어려웠지만 말이다.
“반갑습니다. 세두시온 공. 책임자를 만나고 싶다 하셨다 들었습니다.”
“흠, 나는 분명 엘랑키아의 국왕을 만나게 해 달라 하였소!”
“하하, 죄송합니다만 이쪽에도 절차가 있고 사정이 있습니다. 용건이 있으시면 저에게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일단 차가운 물 한 잔 하시지요.”
“뭐 하는 수 없지. 좋소.”
병력 말아먹고 붙잡혔으면서도 오만한 태도에 살짝 짜증이 났지만, 뭐 어딘가의 왕자님과 면담한다 생각하며 참는다.
여기서 괜히 감정 싸움을 하는 것 보다는, 이 특이한 포로로부터 새로운 정보라도 얻어낼 수 있다면 좋을 테니까.
그나저나··· 그의 멀끔한 얼굴에는 보기 흉한 피멍이 들어있었다.
아마도 포로로 잡히는 과정이 그렇게 평화롭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허··· 그런데 생각해보면··· 큰 일이 날 수도 있었겠다 싶다.
나 같은 용병이야 선제후의 친족이 얼마나 가치있는 인질인지 알지만, 그를 포로로 잡은 것은 드 레뮤즈 가문의 보병들이다.
엘랑키아 ‘남부 변경’ 출신의 우직한 농부 출신들이니··· 그런 건 몰랐을 텐데?
멍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구나 싶다. 솔직히 힘든 전투를 치러 힘들고 정신적으로도 지쳤는데 포로가 악다구니 부리면 솔직히 엄청 짜증나니 말이다.
정말 자칫하면 ‘무심코’ 죽여버릴 수도 있는게 전투 직후의 살벌한 상황이다. 열받은 병사들에게 린치당해 반신불구가 된다 해도 할 수 없었고.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세두시온은 그 오만함을 좋게 좋게 받아주자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연다.
처음에는 그가 나에게 질문하는 구도였으나, 슬그머니 나도 궁금한 것을 묻기 시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많은 것, 대충 알지만 확신은 하지 못했던 것과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었다.
세두시온은 오늘 전투에서만 1만 2천에 가까운 기병과 보병을 이끌고 있었다.
병력을 둘로 나누어 선두는 자신이, 후속은 자이트리츠 전쟁관의 참모가 지휘했다. 하지만 참모의 배신으로 자신은 전장 한복판에 포위되는 꼴을 당했다.
브라우나인의 병사들은 의욕이 없고 나약했지만 이는 죽을 죄가 아니니, 몸값이 지불될 때까지 안전한 포로 대우를 요청한다.
포병도 있지만 이는 아룬하비크 - 브레세른 도로의 진지를 공격하는 부대에 맡겼다.
아룬하비크와 브레세른을 공격하는 부대의 지휘체계는 따로.
전군의 지휘는 전쟁관 출신의 또 다른 참모가 하는데 이제는 미덥지 못하다. 각 야전군에는 부하 참모를 파견해 지휘하고 있다.
폴름스 남부 전선에 대해서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다른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눈 앞의 목표에만 집착하고 있다.
남부에는 여유 병력이 없으나, 북부의 주력군이 곧 지원 올 것이니 여유 부리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전쟁관의 참모들은 소문처럼 대단하지는 않으며, 배신만 아니었다면 포로가 되는 것은 세두시온이 아니라 나였을 것이다.
등등, 내 입장에서는 답답했던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은 귀중한 정보들이 대부분이다.
차가운 물을 권하고, 같은 눈높이에서 공감한다는 듯 이야기를 나누자 줄줄이 풀어 놓는다.
멍청이··· 라기 보다도 자신이 말하는 것에 군사적으로 예민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함께 포로로 잡혔던 측근들과 따로 떼어서 면담한 것이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귀경은 매우 무례하군. 브라우나인의 후계자를 만나면서 어찌 본인의 이름조차 말하지 않는가?”
“어이쿠, 이거 큰 실례를 저질렀군요. 저는 트랑카벨의 에트라 부릅니다. 엘랑키아 왕국의 충성스러운 신하이신 아롱드 트랑카벨 자작님을 섬기는 용병대장입니다. 무례에 대해서는 사과드립니다.”
어째 진실 반 거짓 반이 섞여있는 느낌이고, 뭔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불쾌감도 느껴지기는 하지만. 정보를 더 들을 수 있다면 이 정도 쯤이야.
“사과는 받아들이겠소. 트랑카벨이라··· 어디서 들어 보았는데···. 트랑카벨, 트랑카벨이라···.”
다행히 기분이 풀린 듯한 세두시온은 내 말을 듣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글쎄, 신성 그룬발트 제국의 선제후가 저 엘랑키아 귀퉁이의 시골 가문의 이름을 들어보았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하도 가문이 많고, 비슷한 이름도 많아서 헛갈리는 건 흔한 일이다. 나도 뭐, 지금까지 계약했던 고용주 이름만 헤아려도 애매하게 기억 안 나는 경우가 여럿 있을 정도니까.
아무튼, 생각보다 포로 면담이 조금 길어졌으니 슬슬 움직여야겠다.
세두시온은 자신의 지위와 함께 포로로 잡힌 부하들의 안전을 인정받아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그리고 나 역시도, 남부 전선에는 더 이상 병력이 남아있지 않으며 통일된 지휘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 것은 큰 수확이다.
이제 전선을 축소하며 다른 더 중요한 전선들을 도울 여유가 생긴 것이니까 말이다.
물론, 이 멍청··· 아니 고마운 협력자의 말을 문자 그대로 다 믿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교차 검증이 필요하겠지.
세두시온이 고의적으로 기만을 위해 역정보를 흘렸을 것이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본인도 몰랐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정보 수집부터 나서는 것 보다야, 기준이 되는 정보를 알고 이를 검증하는 게 훨씬 낫긴 하지.
“아! 트랑카벨을 어디에서 들었는지 기억이 났군.”
내가 참모들에게 낮은 목소리로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고 있는 동안, 혼자 고민하던 세두시온이 뭔가 기억해 낸 모양이다.
“분명 세델레네 공, 비젤키르헨의 세델레네 공이 연합군의 수장 자리를 거절하고··· 자기 제자를 만나러 간다고 할 때 언급되었던 이름이군.”
나는 익숙한 듯 낯선 듯한 이름을 듣는 순간, 얼어붙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내가 모르는 데서 나와 관련된 일이 굴러가고 있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