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509화 (476/556)

47-44. 폴름스 전투, 셋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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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황은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다만··· 새로이 전선에 투입된 엘랑키아의 보병 부대가 측면을 돌파하려는 모습을 계속 보이고 있습니다.”

“새로운 보병?”

만프레트 그로블 폰 자이트리츠는 부관의 보고에 눈썹을 조금 찌푸렸다.

방금, 그는 잠시 사령부를 떠나 우익군의 겪는 혼란을 진정시키고 돌아온 참이었다.

우익군의 지휘관인 펠쿠트 벨톤 폰 비덴누벨 백작이나, 그를 보좌하는 타를라 니케 폰 자이트리츠나 아직 전투 경험이 적고 자신들의 강점을 발휘하는 데 미숙했다.

특히나 만프레트의 제자이기도 한, 전쟁관 전체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둬 어린 나이에 정규 참모 자격을 받은 타를라가 심했다.

어쩌면 그녀에게 부족한 것은 ‘패배 경험’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유리한 전황에서와 불리한 전황에서 보이는 퍼포먼스가 너무 차이가 난다··· 라고 해야 할지.

게다가 전술을 일종의 학문이자 추상적인 기예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어 깨끗하고도 깔끔한 승리를 거두려 한다.

그렇다 보니, 당최 한치 앞이 예상가지 않는 진흙탕 싸움에서 대응이 둔한 모습이 보였다.

뭐, 대화를 나눠보니 그 와중에도 전장을 보는 눈 하나만은 정확했다. 그 정확한 정보를 활용하는 판단력이 아주 살짝 부족할 뿐.

전쟁관은 인재를 키워 살아남은 이질적인 집단이다. 설령 이 전쟁을 도맡아 승리한다고 해도, 엄청난 권력이나 영지를 얻게 되는 것은 아니리라.

그런 만큼, 아무리 혹독한 상황에서도 인재를 기르는 것을 게을리 할 수는 없었다.

그런 점에서는, 만프레트가 잠시 사령부를 비운 사이 훌륭하게 중앙군을 지탱한 그의 부관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보좌 참모인 부관은 자신을 증명했다.

아마도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전쟁관으로 귀환하면 정규 참모 면허를 받아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엘랑키아 국왕기를 내걸고 있는 부대입니다! 아마도 근위 부대로 생각됩니다. 교전하는 아군 보병 연대가 애를 먹고 있어 지원을 명령했습니다.”

“호오, 근위대가 최전선에 나왔나.”

“그렇습니다, 만프레트 경.”

“잘했다. 앞으로도 자네가 계속 주시하면서 혹시라도 변수가 발생하지 않도록 챙기도록 하게.”

“옛!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치 자신의 판단이 인정을 받아 기쁘다는 듯, 부관의 표정이 활짝 펴진다.

강한 적이 나타났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소식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게 엘랑키아 국왕의 근위대라는 것은 기쁜 소식이었다.

국왕 개인의 신변을 지키는 보병 연대는 존재 자체로 중요한 예비대이며 상징성을 가진다.

아무리 기사가 강하고 대접받는 엘랑키아라 하더라도, 근위 연대가 가지는 위치는 특별하리라.

분명 훌륭한 집안 출신의 뛰어난 청년들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며, 장비도 갑주도 기량도 최고급이겠지. 아군이 다소 고전하는 것도 당연하다.

허나 그 수준은 10만 대군이 격돌하는 전장의 뒤집고 승패를 결정할 정도는 아닐 것이다.

양군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전황이 격렬하면 격렬할수록,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저 그런 평범한 보병 연대가 되어 버릴 테니까.

뛰어난 자질을 가진 귀족 청년들로 이루어진 부대가 무용을 뽐내다 어느새 전장의 혼란 속에서 묻혀 버리는 꼴을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그로이엔펠트 연대처럼 고도화 된 ‘전투 전문가’ 수준이 아니라면 결국 전술적 역할은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 근위대를 전장으로 내보냈다··· 라면, 현재 엘랑키아 국왕의 본진은 비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쪽도 예비대를 짜내 사령부를 습격하는 별동대를 파견할까?

라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곧 포기한다. 전장은 너무 넓었고, 이쪽도 예비대가 충분한 상황은 아니니까.

본래 아군의 최대 장점은 병력의 우세일 텐데,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원.

무엇보다, 질서를 되찾은 우익군의 펠쿠트와 타를라가 조만간 적의 좌측 잔당을 무찌르고 적의 측후방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렇게 승리하는 것이 사령부를 기습해 적 국왕을 포로로 잡는 것보다 모양새가 나을 것이다. 적어도 전쟁관 입장에서는 말이다.

적은 기사 대군이 빠져나간 좌측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었고, 여기저기서 조금씩 병력을 보내며 기책을 부리고 있었다.

허나 수많은 전장에서 살아남은 ‘검은 늑대’ 만프레트가 보기에 이는 불리한 쪽이 흔히 보이는 무모한 축차투입에 불과했다.

패배를 늦추기 위해 병력을 쪼개 안간힘을 써 보지만, 궁극적으로 그 행동 자체가 패배의 원인이 되고 마는.

“그런데··· 디오보르크 공작은 어디 가셨나?”

“잠시 작전 지휘소 천막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두통이 있으시다고 하셨습니다.”

뭐 실질적으로 폰 자이트리츠의 참모들이 지휘하는 상황에서 디오보르크 공작이 어디 있느냐는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괜히 전선 부근을 얼쩡거리거나, 되도 않는 의견을 내세우며 지휘에 참견하는 것 보다는 나았으니까.

다만 그래도 이렇게 사령부를 떠나는 것은··· 어리석고 무책임한 일이었다.

혹여라도 사령부에 사령관이 없다는 것을 전방의 병사들이 알게 되면 이상한 소문이 돌 수도 있으니 말이다.

사령관이 죽거나 도망쳤다는 헛소문이 퍼져 다 이긴 승리를 놓친 예는 역사에 얼마든지 있었다.

“상관 없겠지. 그간 수고했다. 앞으로 사령부는 다시 내가 맡겠다.”

“옛, 만프레트 경!”

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자신의 일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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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타타탕! 타타탕!

타탓, 파팍! 파파팍!

따다다다닥! 파각!

“으으으윽!”

“엄청나게 쏴 대는 구만, 빌어먹을 놈들!”

전방에서 적을 막고 있는 병사들이 아우성을 치고 욕설을 내뱉는다. 그러면서도 한치도 물러서지 않으며, 고개를 내밀어 반격을 가한다.

양측의 주 화력이 모두 화승총인 상황, 수가 적은 쪽이 겪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바로 바짝 붙어서 쉴 새 없이 교대로 사격을 퍼붓는 것이다.

그 상황을 막기 위해서 포병 화력을 최대한 활용하고, 연대 단위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계속 운 없는 동료들의 시체를 넘어 밀고 들어오는 후속 병력이 사격 거리에 알박기를 하는 것을 언제까지고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그 결과는 압도적인 화력에 고개도 들기 힘들어지는 상황이었다.

그에 따라 이쪽도 사상자가 늘어나고, 포병의 활동이 위축된다. 실제로 전방으로 포구를 내미는 와중에 포수가 희생되면, 그만큼 화포의 위력도 감소하는 것이다.

물론 이쪽에는 연대급 부대의 화력이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막강한 포병 전력이 있다.

게다가 수레와 나무 상자 등, 잡동사니를 이용한 임시 방어벽이 있었다.

허나 그래도 적의 시도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또한 수레 등 방어벽을 구성하는 판자들은 흙이나 석재로 만든 방어벽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약했다.

비록 작은 쇠구슬이라고는 하지만, 끊임 없이 쏟아지고 판자에 크고 작은 구멍이 뚫리자 마침내 부러지고 망가지는 판자가 생기게 된다.

물론 기동성과 타협한 것이고, 그나마 그것이라도 없었으면 대등한 화력 교환 따위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아, 하아··· 하아아···.”

이 절망적인 방어선을 책임지고 있던 첼레스티나는 어느새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힘들었다. 그저 가만히 서서 듣고, 생각하고, 명령을 내릴 뿐인데 마치 전력질주라도 한 것처럼 숨이 찼다.

어느새 흘러내린 땀이 떡 끝에 작은 방울을 이루는 게 느껴져 손으로 닦아냈다.

그녀는 ‘자신이 겁을 먹고 있나?’라고 자문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죽는게 무서운 것은 아니었다.

허나 자신을 믿고, 등을 보이며 적과 맞서고 있는 병사들을 잃는다 생각하면 두려웠다.

그들은 기대하고 있다. 자신이 온 힘을 다해 싸우고 버텨낸다면, 지휘부에서 어떻게든 상황을 반전시키고 승리해 주는 것을 말이다.

그게 바로 첼레스티나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할 일이다. 그런데 솔직히 눈 앞이 캄캄하다.

현상 유지는 빠듯하게 가능하지만··· 전황을 극복할 방도가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흐를 수록 점점 불리해지기만 할 뿐이였고.

“흐으음···.”

또 다른 상상을 하자, 갑자기 온 몸이 공포로 굳으며 입에서 기이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온다.

방금 그녀가 한 상상은, 다름아닌 경애하는 콘도티에레를 실망시키는 내용이었다.

남부 전선에서, 자신을 믿고 안 그래도 부족한 병력을 쪼개 보내준 콘도티에레가 슬픈 얼굴을 하며 화도 내지 않고 자신을 바라볼 생각하니 눈물이 왈칵 나올 것 같았다.

물론 실제로 울지는 않는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비록 임시라지만 전장 한가운데서 지휘를 맡은 자가 눈물을 보이다니.

허나 가슴이 답답한 것은 여전하다.

하지만 하는 수 밖에 없다. 콘도티에레를 실망시키는 꼴이 되느니,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나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이를 악 문다.

냉정하게 생각하기 위해 노력하며, 전황을 머리속에 그린다.

자신이 눈으로 본 정보와, 보고받은 정보를 종합하여 가상의 지도를 그리고, 가상의 아군과 적군을 배치한다.

슈토르히의 동료 선임 중대장이었던 똘똘이, 루트비히 아린 폰 자이트리츠가 알려준 노하우를 또 한번 생각해본다.

그러고보니··· 이번 전쟁에 그룬발트 군의 지휘부에는 루트비히와 같은 폰 자이트리츠 가문의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다.

겁이 덜컥 났다. 루트비히는 말 그대로 똑똑한 사람이다. 첼레스티나는 한 번도 그의 생각을 따라잡았던 적이 없다.

본래 담당은 포병이었지만, 콘도티에레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대리로서 슈토르히 연대를 총괄 지휘했던 이유가 다 있었다.

자신도, 동료인 모리츠나 크레시미르도 그거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을 정도니까.

그런 사람이 한 명도 아니고 여럿이나 상대편에 있다고 하면··· 자신이 버텨낼 수 있을까. 이길 수 있을까. 조금은 극복했던 마음이 얼어 붙으며 가슴이 다시 철렁한다.

갑자기 병력을 맞대고 있는 상대편의 누군가, 보이지 않는 적장이 커 보이고 두렵게 느껴진다.

하지만··· 어느 지루했던 가을 밤, 루트비히와 나누었던 잡담이 생각난다. 아마 모리츠가 자이트리츠 전쟁관의 소문을 듣고 그에 대해 물어봤을 것이다.

‘자이트리츠 전쟁관은 흥미로운 곳이고 대단한 곳이기도 해. 하지만 한계는 명확하지’

‘어떤 한계가 있길래?’

‘그렇게 수백 년을 전쟁에 관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며 뛰어난 인물을 배출했어.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콘도티에레를 따라잡는 선배는 아무도 없었어’

‘그건 좀 과장된 게 아닐까? 잘 찾아보면 한 명 쯤은’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없어. 그랬다면 내가 전쟁관을 떠나 여기 있지 않았겠지’

뭐, 어딘가의 대단한 인간이 앉아 있겠지.

그래봤자 우리 콘도티에레의 밑이겠지만?

갑자기 마음이 차분해지고 머리가 정돈되는 느낌이었다. 여유를 되찾은 첼레스티나는 숨을 고르며 슬쩍 미소까지 지어졌다.

자신감이 생겼다.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이 전장은, 그녀가 현재 지휘하고 있는 병력은 다름 아닌 그 콘도티에레가 조율해준 병력이 아니던가?

게다가 주장은 티테니아이지만, 부장으로 자신을 임명해 보낸 것 역시 콘도티에레의 선택이었다!

그렇다면 틀림 없을 것이다. 콘도티에레는 자신이나 이 작은 분견대가 해낼 수 없는 일을 맡기지 않았을 테니까.

“후우···.”

다시 한 번 깊게 숨을 내쉰다. 아까처럼, 몸도 마음도 한계에 달해서 발작적으로 내뱉는 가쁜 숨이 아니다.

오히려 여유를 가졌기에 길게 내쉬며 폐를 비우는, 가벼운 쾌감까지도 느껴지는 달콤한 숨이다.

“전령! 기병대의 티테니아 경과 왕실군의 디타레 경을 불러줘요!”

“옛, 알겠습니다!”

조금만 시각을 바꿔 생각하면 익숙한 상황이었다.

콘도티에레의 지휘를 받아, 그룬발트나 주디칼리에서 싸우던 시절의 일이다.

첼레스티나의 사격 통제와 포병 지휘를 높게 평가했던 콘도티에레는 그녀를 ‘적과 인접한 주 전선’ 지휘를 맡기곤 했었다.

당시에는 크게 고민할 것은 없었다. 주어진 병력을 이용해 최적의 배치를 고안하고, 콘도티에레의 지시를 충실하게 이행했을 뿐.

그러면 반드시 이길 수 있었다. 싸우고 있노라면, 전장의 어디선가에서 이변이 일어나 적이 무너지곤 했으니까.

이번에도 그 구도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다만 담당해야 하는 ‘면’이 늘어났고 콘도티에레가 조금 멀리 떨어져 있을 뿐.

불안함을 잊고 자신이 해야하는 일을 찾은 첼레스티나의 행동은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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