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512화 (479/556)

47-47. 폴름스 전투, 셋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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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랑키아와 그룬발트의 대군이 서로의 운명을 바꿀지도 모르는 대격전을 벌이고 있는 전장의 한 귀퉁이.

슈뵈켄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전장에서는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엘랑키아 군의 수는 원래 좌익군을 지키던 병력과 지원 온 병력을 합쳐서 많아야 수천 명.

그에 비해서 같은 지역에 배치된 그룬발트 우익군의 수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2만에 달한다.

물론 본래 목표로 중앙 전선의 측후방을 노려야 하는 등, 여러가지 이유로 그룬발트 군이 집중을 못 하고는 있는 상황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반격에 나선 엘랑키아 군이 맞상대해야 하는 숫자만 따져도 최소한 2배 이상, 3배 가까이 되는 숫자였다.

“성공했습니다! 돌파에 성공했습니다!”

관측병과 전령을 통해 마침내 보고가 들어오자, 첼레스티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당초 계획대로, 돌파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평범하게 교전을 지속하면서 적을 끌어들인다.

그리고 좀 무리해서라도 끌어 모은 화력과 예비 병력으로 정면, 적의 가장 강한 부분을 깨부순다.

그렇게 만들어진 돌파구로 순식간에 적진을 돌파하고 중앙을 장악한다. 이 때 상대가 상상한 것을 월등히 뛰어 넘는 충격력과 기동력을 발휘해야 한다.

이것이 슈토르히의 선임 중대장으로 콘도티에레와 함께하며 배웠던 방식, 몇 번이나 전장에서 활용했던 방식이다.

첼레스티나는 특히나 주로 적과 접한 정면을 담당한 경우가 많았기에, 화력을 조절하고 순간 집중을 하는 데 능숙했다.

이런 식으로 온갖 병종이 뒤섞이고 출신도 제각각인 잡탕 부대를 이끄는 것은 생전 처음이기는 하지만···.

표준화 되지는 못했어도 대량의 포대를 운용할 수 있다는 점은 오히려 그녀에게는 이점으로 다가왔다.

그 결과가 지금, 기습적인 돌파의 성공이었다.

“모든 총병 전열은 지금부터 돌격대로 전환할게요!”

“알겠습니다.”

“준비되는대로, 중대장 판단에 의해 돌격할 것! 적에게 쉴 틈을 주면 안 돼요!”

“옛,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첼레스티나의 명령은 단호했다.

처음부터 본진을 유지할 생각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유지할 능력이 없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뒤를 보지 않고 짜내기로 시작한 공세, 기병만 내보내서 그들이 잘 해주기를 기도해봤자 시간을 벌 뿐이다.

지원 없는 공세는 언젠가 한계에 도달할 것이며, 얼마 안 되는 보병 전력을 쥐고 있어봐야 정신 차린 적을 막을 수는 없다.

현재, 그녀가 파악하기로 최소한 3개 연대 정도의 적이 무력화 되었다.

당연히 전멸시킨 것은 아니지만, 포병과 기병에게 연달아 얻어맞은 덕에 대열이 완전히 붕괴되었고 절반은 등을 돌리고 도망치는 중이다.

여기서 시간을 주면, 무너진 부분을 포기하고 나머지 병력만 재집결하여 상처를 봉합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 ‘나머지 병력’이 전투력을 되찾고 전술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곤란해진다.

그렇기에 총병, 이제는 돌격대가 된 엘랑키아의 숙련병들을 후속해서 보낸다. 비록 그들은 전문적인 충격 부대는 아니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타격을 주겠지.

이미 흔들리기 시작한 적군에게는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양 측면의 지빌링엔 반연대 장병들에게도 전령을! 적 중앙이 무너졌으니 측방을 노리는 전력도 약해질 거예요. 그 때는, 우리 돌격대의 측면을 부탁할게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병력이 하나하나 그녀의 손을 떠나간다.

이런 열세 상황에서 돌격을 명령한 부대는 목표를 달성하기 전에는 다시 전술적으로 활용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많은 것을 소진해버린 포병대, 그리고 그들을 호위하던 1개 중대의 트랑카벨 용기병 뿐이다.

그리고 또한···.

“첼레스티나 경, 외람되오나 저희에게도 역할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디타레 경···.”

바로 디타레 드 카울의 기병대였다.

지금은 갈기갈기 찢겨 흔적밖에 남지 않았지만, 기만책으로 배치되었던 주력 기병 대군이 좌익군을 떠나 전장 반대편으로 향한 이후 실질적으로 측방을 지키던 용사들이다.

그리고 첼레스티나의 별동대가 다시 무너져가던 전선을 추스르기 시작한 이후, 낙오병들이 모여 다시 어느정도 부대가 재건된 상태였다.

하여 그 지휘관인 디타레는 자신들의 처우가 불만이었다.

그냥 보아도 지금까지 아껴온 것이 분명한 예비대에, 본래 근접전이 제 역할이 아닌 총병들까지 돌격대로 나서는 상황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자신들은 이 후방에 머물고 있어야만 하는 것인가.

비록 지금 상황이 좋지 않다고는 하나 그 핵심은 엘랑키아 왕실군, 그것도 근위기병대의 경기병이다. 때문에 더더욱 자부심에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다.

“명령을 내려주시면, 무엇이든 수행하겠습니다.”

“음···.”

디타레의 강한 요청에 첼레스티나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한다.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나,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한 반응이다.

디타레는 왕실근위대의 부대장 중 한 명이다. 통상적인 중앙군, 혹은 지방군의 연대장급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높은 서열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해서 첼레스티나는 비록 그 상관이 국왕 다고베르 2세의 신임을 받는 왕실군 고위 참모의 직위를 가지고 있다 해도, 그 부관인 용병이다.

따라서 디타레 입장에서는 굳이 그녀의 명령을 기다릴 필요 없이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도 있었다.

심지어는 첼레스티나의 파견대에 ‘협력을 요청’할 수도 있었으며, 최악의 경우 오히려 지휘권을 요구하며 명령을 따르라고 할 수도 있었다.

물론 전장 경험 있는 지휘관이라면, 전장 한복판에서 그 따위 요구를 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잘 알고 있을 테지만 말이다.

게다가 디타레도 눈이 있다. 한 줌 밖에 되지 않는 괴상한 잡탕 병력으로 어떤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지 않았던가.

이를 멈추려 들거나 억지로 자신의 공으로 돌리려는 이적행위를 시도할 정도로 어리석은 남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항의는, 어째서 이 기적과도 같은 광경에 자신의 역할은 없느냐··· 에 가까웠다.

“지금 이 전장에서 ‘중기병’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부대는 디타레 경의 부대밖에 없어요.”

“중기병··· 충격 병력 말입니까?”

“예. 우리는, 드 몽파르지에나 트랑카벨의 기병들은 할 수 없는 일이예요.”

첼레스티나의 말을 심각한 표정으로 듣던 디타레지만, 속으로는 깊은 기쁨을 느꼈다.

비록 경기병이지만 중기병과 비견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라는 뿌리 깊은 자부심이 자극되었기 때문일지.

혹은 자신들에게도 준비된 역할이 있다는 것을 이제라도 알았기 때문일지.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은 잔재주, 기책에 불과해요. 하지만 그룬발트 군이 가진 ‘숫자’는 진짜지요. 여기서 아무리 잘 싸운다고 해도 한계가 올 거예요.”

설령 적의 절반을 무너뜨린다 할지라도, 남은 숫자만 1만이다.

지금 일시적으로나마 우세를 점하고 있는 것은 그룬발트 군의 주 목적이 첼레스티나의 분견대를 섬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 목적은 전선의 우회, 엘랑키아 중앙군의 측후방 타격이며 첼레스티나는 이를 방해하는 곁다리에 불과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이 이상의 타격을 입혀 그 본대를 끌어내야 하는 것이 임무이기도 했다.

적을 이 전장에 묶어 놓아야, 엘랑키아 중앙군에게 승산이 있었으니까.

“잘 알겠습니다, 첼레스티나 경. 하지만 그럼 지금 출격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돌파에 힘을 보태야 하는 게 아닐까요?”

이번 물음에, 첼레스티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 생각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마무리 되었어요. 제가 기다리는 것은 ‘호응’ 이네요.”

“호응··· 무엇과의 호응입니까?”

“콘도티에레께서 준비하신 호응이에요. 항상 전장 전체를 보고 계시니까요. 북부 전선에 저희만 보내신 게 아니거든요. 바로 제가 폐하의 사령부에 전령을 보내기도 했고요.”

“하지만··· 첼레스티나 경, 폐하의 중앙군은 현재도 우세한 상황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저희가 도우면 몰라도 도움을 기대하기는···.”

“네에, 맞아요. 저는 중앙군이 지원해 줄 것이라 이야기한 게 아니예요. 하지만 콘도티에레께서 무언가를 준비하셨을 것이라 믿거든요. ‘다음 단계’를요.”

디타레는 이 특이하다 못해 신비롭기까지 한 여성 용병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리로는 말이다.

하지만 가슴으로는 무슨 뜻인지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왠지··· 자신도 기대되기 시작했다. 그녀가 말하는 ‘다음 단계’가 말이다.

“만약, 만약입니다만, 방금 말씀하신 호응, ‘다음 단계’가 도착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럼 뭐··· 할 수 없지 않을까요? 아마 거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첼레스티나가 얼굴을 활짝 펴며 웃는다. 스스로 비웃거나, 포기한 것이 아닌.

순수한 어린아이의 표정과도 같은 미소.

그 뒤에 있는 끝 모를 신뢰의 깊이를 디타레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도 첼레스티나 경의 ‘다음 단계’를 믿고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순간 자신이 실수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다.

하지만 ‘그녀 정도 되는 능력자가 믿는다면 무언가 있겠지’라는 자신의 감을 믿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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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앙!

“앗!”

티테니아 드 몽파르지에는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총탄에 놀라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적어도 오늘은 말이다.

벌써 몇 번이나 사선을 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오라버니, 서부군의 사령관인 앙비토 드 몽파르지에가 챙겨준 호위기사들이 아니었다면 죽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혹시라도 포위당하거나 협공 당할 위험만 도와줄 뿐, 그녀를 향해 날아오는 총탄까지 막아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누가 쐈느지는 모르며, 알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그녀를 노리고 날아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아마도··· 이런 혼란통에서는 방아쇠를 당긴 직후에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녀는 첼레스티나의 계획에 따라 적진을 돌파하며 기병대를 이끌고 있었다.

하지만 무조건, 힘으로 찍어 누르며 적진을 부수고 또 부수는 형태의 돌파는 아니다.

애초에 경기병 중심에 숫자도 그다지 많지 않은 병력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을리가 없다. 그런 돌파는 위험천만했던 첫 돌파로 충분했다.

이제는 적 창병에게 보호되는 부대는 최대한 회피하면서, 무너져서 도망치는 적 도망병들을 방패막이로 삼으면서, 저항을 포기하지 않은 총병 대열의 후방을 쳐서 후속 아군을 도우면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공포란 빠르게 전염되는 감정이다.

그리고 전장에는 공포가 넘쳐나고 있었기 때문에, 2개 째의 그룬발트 연대를 무너뜨린 시점에서 적은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변을 가득 메우다시피 한 적병들을 양떼 몰듯이 우르르 쫓아가기만 해도 적진에 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저항을 포기하지 않은 부대들이 있었기에 이를 부숴야만 했고, 끊임없이 부하들을 잃어야만 했지만.

그래도 성공적인 돌파였다. 이걸 계속 유지하며 승리의 순간까지 버텨야만 했다.

“티테니아 경! 적 기병입니다!”

“기병이라고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 말대로였다.

도망치는 적 보병들 너머로 한 줄로 늘어선 그룬발트 군 기병들이 보인다. 철갑주로 몸을 감싼 중기병들이었다.

올 것이 왔다··· 는 생각에 숨을 고른다.

기습 돌파 직전의 짧은 회의에서, 명목상 부장이지만 많이 의지하고 있는 첼레스티나가 말했던 주의점이었다.

‘적 기병은 전멸한 게 아니라 도망쳤을 뿐이에요. 전황이 나아진다 싶으면 재집결해서 돌아올 거예요. 특히 귀족 기사님들이니까 불명예를 만회하려 하겠죠!’

‘귀족 기사’ 가문의 일원인 티테니아로서는 다소 불쾌할 수도 있는 표현이었으나 이해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오라버니 역시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귀족 기사들일수록 위험을 피하고 편한 전장에서 싸우려는 경향이 있다 하더군’

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눈치를 보던 그룬발트 기사들 입장에서는 바로 지금이 그 ‘편한 전장’일지도 모른다.

숫자도 얼마 안되는 경기병들에게 휘둘리는 보병들을 구해 불명예를 반납하고 영광을 쟁취할 그 순간 말이다.

그렇다면 편한 전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수밖에.

“병력이 얼마나 남았죠? 우선 집결 나팔을 불고 드 레뮤즈나 프리스마라 분견대에도 상황을 알려주세요!”

“옛, 티테니아 경!”

힘들 것이라 생각은 했다. 그리고 정면 대결을 하려면 차라리 보병이 아니라 기병이 나았다. 마음을 다잡고 다음 싸움을 준비하려 하는데···.

“어?”

잘못 본 줄 알았다.

넓게 횡대 대형을 짜고 이쪽을 향해 접근하는 그룬발트 기사들을 향해, 마치 은빛 화살처럼 쏘아져 날아가는 기병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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