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538화 (538/556)

48-7. 폴름스 전투, 임시 휴전

만프레트는 감정의 변화 없는 말투로 설명을 이어간다.

“스승님의 수업은 종잡을 수 없게 진행되었네. 다만 나는 언제라도 들을 수 있도록, 다른 일과를 포기하고 잠을 줄여가면서 스승님의 곁을 따라 다녔지.”

“그거··· 힘드셨겠습니다. 가문에서는 일과를 빠지는 것을 허락해 주셨나요?”

“다행스럽게도 말이지. 나로서는 폰 자이트리츠를 대표해서 스승님의 모든 것을 배워야 한다는 깊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고.”

그 후 만프레트의 설명은 플로리안을 질리게 만들 정도였다.

전쟁관의 귀빈으로 머물면서도, 세델레네 공은 조금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키는대로 행동했다.

마음대로 전쟁관 내외를 구경하고, 때로는 성벽 밖으로 나가 산맥을 타기도 했다.

어찌나 체력과 재주가 좋은지, 그 작은 체구로 깎아지른 절벽을 손쉽게 오르내려 이를 지켜보는 만프레트 경의 마음을 졸이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은 역시 군사 도서관이었다.

“스승님은 자신이 장서를 살피는 동안에는, 어느 누구도 도서관에 들이는 것을 원치 않으셨지. 그래서 나는 도서관 입구에서 스승님이 나오시는 것을 기다렸지.”

“대, 대체 어떻게 버티신 겁니까? 식사나 다른 필수적인 생활들은요?”

“동기와 후배, 사용인들이 도와주었으니 내가 살아있을 수 있었지. 그 때를 이용해 잠시 쪽잠을 자거나, 밥을 먹거나 몸을 씻을 수 있었네.”

아무리 역사속 전설을 스승으로 모시고 강의를 직접 들을 기회라고는 해도 실로 가혹한 강행군이었다.

플로리안은 자신이라면 그럴 수 있었을까···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본들, 답은 아마 자신도 그랬을 것이다··· 이다. 설령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자신도 끝끝내 버텨냈겠지.

그러니 강철과도 같은 의지를 가진 만프레트 경은 마치 대문 밖의 수호석처럼, 묵묵히 세델레네 공이 나오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유능한 인재’를 길러내기 위한 전쟁관의 수업은 대단히 가혹하다.

빠르면 7~8살, 늦어도 12~13살에는 입문하여야 하며, 그 재능은 철저하게 관리되어 그들 중 소수만이 보좌 참모가 될 수 있다.

당연히 하루 종일 빡빡한 시간표에 시달려야 한다. 하지만 당시 만프레트가 받은 시련은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스승님의 수업은 4년 정도 계속되었네. 물론 스승님께서는 바쁜 분이시니, 항상 전쟁관에 계셨던 것은 아니지.”

“그러시다면··· 전쟁관의 다른 업무와 병행하셨나 보군요.”

“그렇네. 간혹 연락도 없이 전쟁관에 찾아오셔서, 길면 두 달 정도 머물다 가셨지. 한 번은 겨울에 오셔서 이듬해 봄까지 머무셨던 기억도 나는군.”

아마도 그것은 만프레트 경에게 상당히 즐거웠던 기억인 모양이다. 듣기만 해도 힘든, 고행이나 다름없는 방식이지만.

하지만 그랬다면, 겉 모양이야 어떻든 ‘잘 진행되던’ 스승과 제자 관계가 끝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하지만 나로서는 애석하게도, 스승님께서는 언제부터인가 전쟁관을 찾아오시지 않게 되었네.”

“아무런 연락도 없었나요?”

“언젠가 가주님께 질문을 드린 적 있지만, ‘원래 그런 분이다’ 라는 대답만 들었지. 행동을 예상하기 힘든 분이고 내키는대로 행동하는 분이다··· 라고 말일세.”

“예···.”

“애초에 제국보다도 역사 깊은 고대 혈족의 일원으로, 선제후 가문의 장로이신 분이지. 처음부터 신분의 격차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

말로는 납득한 것으로 보였으나, 그 후로 만프레트 경의 목소리에서는 참담함이 느껴졌다.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던 일, 통보도 없이 일방적으로 받아들였으나 아쉬운 점은 많았으리라.

하지만 그 경험이 만프레트 경에게, 또한 자이트리츠 전쟁관 전체에 많은 이득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겠지.

단순히 만프레트 경이 대단한 재능을 타고 난 천재일지도 모르겠지만, 확실히 현재 플로리안의 나이보다도 어릴 때부터 그 활약은 대단했으니까.

“그후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스승님께 몇 차례 편지를 보내기는 했지만 답장은 없었네. 아, 딱 한 번 있었군. 비젤키르헨 선제후령에서 온 것이라 스승님께서 보내신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답장이 왔습니까? 무슨 내용이었나요?”

“전쟁관과 귀하의 건승을 기원한다··· 는 것이었지.”

의례적인 내용, 하지만 스승과 제자간에 없을 법한 편지도 아니었다.

세델레네 공이라는 사람은 굉장히 오랫동안 대륙 전역을 돌아다녔으니 통상적으로 연락이 힘든 것은 당연하겠다.

“항상 풍문으로, 스승님의 활약 소식은 들을 수 있었지. 주로 변경 지역 군대를 돕는 경우가 많았고, 백전백승 소식에 나조차도 어깨가 으쓱했을 정도니까.”

“저라도 그랬을 것 같습니다.”

“그러던 중, 스승님께서 새롭게 제자를 두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어, 어떻게 말입니까? 설마 소식이 왔나요?”

“그건 아닐세. 다만 한참동안 스승님의 소식이 들리지 않다가, 다시 활동하게 되었을 때 그런 소문이 돌았지.”

항상 방랑하며 내키는대로 행동하던 ‘전설’이 어느 순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면 그 이유에 대해 호사가들이 한마디씩 하게 마련이다.

이 경우는, 대외 활동을 멈추고 정착하여 누군가를 키우기 위해 시간을 썼다··· 라는 소문이 돌았으리라.

“문제는 그 ‘제자’에 대해서 통 알 수가 없었다는 것일세. 제자를 길러 세상에 내보냈다면, 특출나게 재능있는 전략가가 전장에 나왔을 테니 말일세.”

“그건 기억이 납니다. 분명 만프레트 경께서 젊은 군인들에 대한 조사를 부탁하셨었지요.”

“그랬지. 성실하게 임해 주어서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네.”

“아뇨,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도움도 많이 되었구요.”

그 무렵에는 어린 플로리안 본인도 나름 인정받는 보좌 참모, 자이트리츠 전쟁관 일원이 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재능있어 보이는 원석을 조사하고 정리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기에, 플로리안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 목적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외에, 세델레네 공의 제자를 찾고자 하는 것도 있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라성과도 같은 인물들이 많이 등장했었고, 누군가는 피어오르고 누군가는 전장에서 일찍 지고 말았었지···.”

“아! 당시에 세델레네 공의 제자임을 참칭하는 자들도 많았지요. 기억납니다!”

“흐음··· 맞아, 그랬네. 그만큼 세델레네 공, 스승님의 위상은 군인들 사이에서 각별한 것이었으니 말일세. 그만큼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을 것이고.”

오히려 그 무렵부터, 전쟁관과 만프레트는 세델레네 공의 제자임을 밝히는 것을 주저하게 된다.

세상에 워낙 많은 가짜가 날뛰다 보니, 진짜의 가치조차 빛이 바랜 경우라 할 수 있으리라.

게다가 이미 젊은 만프레트는 굉장한 활약을 하고 있었고, 검은 늑대라는 이명이 붙었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지만, 당시 만프레트는 스승님의 제자, 즉 자신의 동문을 참칭하는 자를 전장에서 만나면 다소 신경질적으로 대했었다.

보다 매끄럽고 신사적으로 이길 수 있는 전투에서 적을 한계까지 몰아 붙이는 식으로 말이다.

그만큼 보잘것 없는 인간들이었다.

비록 거짓이지만, 저런 형편없는 자들이 자신과 같은 항렬에 서고자 했다는 것 자체가 모욕이었다.

플로리안을 비롯한 전쟁관의 일원들이 모아 준 자료와, 만프레트 스스로 모은 정보를 바탕으로 ‘스승님의 또 다른 제자’에 대한 탐색을 진행했다.

일단 자기 입으로 ‘세델레네 공의 제자’를 칭했던 이들은 모두 가짜였다.

실력이 있는 인물이라면 타인의 이름이나 공훈을 탐낼 이유가 없다. 스스로 결여를 알고 있기에 그 빈 자리를 남의 것으로 채우려 하는 것이겠지.

일부는 만프레트가, 혹은 전쟁관의 다른 참모들이 전장에서 만나 쓰러뜨렸다.

그리고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몇 년 지나기 전에 알아서 바닥이 드러나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은 후보들을 압축해 나갔다.

최근에 전장에 등장한, 비교적 젊은 나이의, 특출나게 재능있는 전술가.

후보가 대여섯 명 정도 있었으나, 만프레트가 ‘특출나다’라고 따로 기억할만한 인물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전략전술이란 어차피 훈련의 영역, 어느정도 수준까지는 평범한 이를 가르쳐 도달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상, 어떤 선을 넘는 데에는 재능이 필수불가결이다, 라고 만프레트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자이트리츠 전쟁관이 오래 전부터 이 점에 주목해 재능있는 원석들을 모아 육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후보로 생각했던 이들 상당수는 수준 이하로 확인되거나, 확인할 필요도 없이 전장에서 도태되어갔다.

평범하게 지방 중견 영주의 보좌관이나, 연대장 정도에서 만족했다면 제법 우수한 군인으로 활약할 수도 있었던 인물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을 노렸기에, 오로지 승자만이 살아남는 치열한 각축장에서 먼저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무렵 만프레트는 생각했다.

사실 ‘스승님의 또 다른 제자’는 그저 소문이었을 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닐까?

혹은 존재했다고 한들, 특별한 재능은 없었던 게 아닐까?

어쩌면 지금까지 만프레트가 전장에서 쓰러뜨렸던 상대방 중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만약 이 시기, 만프레트가 ‘평범한 지방 영주의 보좌관이나 연대장 정도’ 인물들도 조사했다면 ‘특출난’ 누군가를 확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국 전역에서는 수백 개의 연대가 매일같이 창설되거나 사라지고 있었으며, 커리어의 정점에 도달한 ‘검은 늑대’가 신경쓰기에는 너무 많은 숫자였다.

자연스럽게 또 다른 동문의 존재는 잊혀지게 되었다.

아니,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에 기억의 저 편으로 잠시 사라졌다에 가깝겠다.

“하지만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고, 조사를 통해 확신하게 되었네. 이건 플로리안 자네도 아는 내용이 아닌가.”

“엘랑키아 남부에 갑자기 등장한 용병대장에 대한 이야기군요.”

“바로 그렇네.”

딱히 세델레네 공의 제자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전쟁관은 아군 혹은 적군이 될 수 있는 인물들을 찾아 기록하고 분석한다.

혹자는 이것이 전쟁관의 진정한 힘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단기간에 변경 자작령의 군을 양성, 오합지졸이긴 하지만 엘랑키아 국왕과 법황이 보낸 성전군을 격파했다.

그런데 그 전의 행적이 묘연해 마치 유령이라도 보는 것 같다 느꼈었다. 혹시 세델레네 공 본인은 아닌가, 라는 추측까지 전쟁관 내부에서 돌았을 정도니까.

하지만 각종 자료를 수집하면서 수수깨끼는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문제의 인물은 딱히 유령같은 존재는 아니었으며, 심지어 자신의 행적을 숨기지도 않았다.

다만 ‘평범한 지방 영주의 보좌관이나 연대장 정도’의 인물이었기에 전쟁관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을 뿐이다.

게다가 자신의 전공을 직접적으로 자랑하지도 않았고, 이를 바탕으로 영주들에게 자신을 고용해달라 영업하지도 않았었다.

심지어 어느정도 명성이 쌓일 무렵에는, 그룬발트를 떠나 활동지를 주디칼리로 옮기기까지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모든 행동은 전쟁관의 관심을 철저하게 빠져나가는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활동을 시작한 시기와 나이대, 그리고 처음 등장해 커리어를 쌓기 시작한 지역이 그룬발트라는 점은 예상했던 후보와 완벽하게 맞아 떨어졌다.

심지어 상대적으로 귀족 직할의 영지군 비중이 매우 큰 엘랑키아에서, 일개 용병이 승승장구해 국왕의 보좌역까지 오른다.

이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지난 휴전 협정의 참가자를 통해서, ‘그 용병’이 지금 엘랑키아 진영에 있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하지만 어쩐지, 전선 북부에서 벌어졌던 대규모 격전에 참여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아직은 엘랑키아 국왕의 전폭적인 신임까지는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요한 이야기를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만프레트 경. 전쟁관의 일원으로 전혀 모르던 내용이라는 점이 부끄럽습니다.”

“딱히 숨기던 이야기는 아니네. 자네가 활동하기 전에 일어났던 일이라 자네 세대의 참모들이 잘 모를 뿐이지.”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시고 싶으십니까?”

어떻게 ‘할’ 것이냐가 아니라, ‘하시고’ 싶냐는 질문.

전쟁관 참모 중 하나로서 공적으로 묻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만프레트 개인의 요망을 묻는 질문이리라.

“딱히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네. 디오보르크 공작의 총참모장으로서, 폴름스 전역에서 승리할 뿐.”

다만 만프레트는 조금 망설이다가 몇 자를 덧붙인다.

“다만 ‘이번 후보’는 동문으로서 가치가 있었던 인물인지, 확인해보고 싶다는 욕심은 있군.”

“반드시 그렇게 될 겁니다, 만프레트 경.”

플로리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존경하는 선배이자 상관의 작은 소원을 이루어 주고 싶다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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