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542화 (542/556)

48-11. 폴름스 전투, 임시 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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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방향이 옳을 것인가.

한밤 중, 아우페브라즈 마을에 위치한 사령부의 한 방에서 나는 전쟁터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호사, 즉 조용함을 누리고 있었다.

늦은 밤이라 다들 자고 있는 시간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일부러 조용한 방을 찾아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반드시 양자택일의 판단을 내려야 하는 경우는 살면서 얼마든지 있다.

전장에서, 아니 전장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그 상반된 선택지 중, 하나가 명백하게 옳고 하나는 명백하게 그른 경우는 많지 않다.

대체로 어느 쪽도 나름의 당위와 이득이 있기에,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된다.

이게 일상 생활 중 벌어진 일이라면, 사례를 조사하고 제반 상황을 고려하여 한계까지 합리적인 고민을 할 수 있겠지만···.

전장에서는 그럴 수 없다.

애초에 참고할 사례는 커녕 비슷한 이야기조차 들어본 적 없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목숨이 오가는 전투 와중에 벌어지는 일은 아니라는 것일까.

그런 이유로, 집중해서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은 충분한 편이다. 다행스럽게도 말이다.

명확한 판단을 기대하고 있는 국왕 다고베르 2세도, 부관 첼레스티나도 나를 위해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위협이 없다고 안심하고 마냥 고민을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전장에서의 시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흘려 보냈다는 이유만으로 위험해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약하게도, 이 파멸이라는 것은 코 앞까지 다가오기 전에는 잘 보이지도 않는다!

아직 여유가 있겠지··· 라며 결정을 미루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파멸의 아가리가 한쪽 다리를 물고 있는 경우가 왕왕 생기는 법이다.

그래서 군지휘관들은 보통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 머리속의 누군가에게 쫓기는 법이지···.

나 역시도 너무 오랜 시간을 고민할 생각은 없었다. 적어도 내일 오전에는 국왕 다고베르 2세에게 결론을 보고하기로 했다.

폴름스 선제후령은 포로 및 부상자 송환 협의에서 엘랑키아 측에 기묘한 제시를 해왔다.

전쟁의 주체였던 두 세력 사이의 정전협정.

물론 자세한 조건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엘랑키아 측에서도 여러가지를 요구할 수 있을테고, 반대인 경우도 마찬가지겠지.

논의에 따라서 그냥 없던 일이 될 수도 있겠지. 협정 시작 자체를 비밀리에 하고 있는 것은 그런 경우도 감안하고 있는 것일 테니까.

들리는 소문으로는 폴름스의 선제후인 여자 엘프가 엘랑키아 왕국과 대화하는 것 자체를 싫어해서 그렇다고 하지만.

설마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이런 눈가리고 아웅을 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런 멍청한 이유로···.

내가 이해가 가지 않는건, 지금이야 외부에 숨긴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협정이 맺어지면 결국 다 알려질 텐데···.

나중에 어떻게 감당하려고 이러는 건지 잘 모르겠다.

물론, 여러 나라가 싸우는 국제전에서, 먼저 치명적인 침공을 당하거나 국력 소모를 감당할 수 없는 나라가 먼저 빠지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서 ‘탈락’하는 것이지, 힘을 남긴 상태로 빠져 나가는 건 ‘배신’으로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지.

말이 신성 그룬발트 제국이지, 선제후들이 서로 대립관계라는 것은 물론 어린아이들도 안다.

그런데 이런 국가적 배신 행위를 하고도 문제가 없다는 것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경쟁 세력들에게 ‘명분’을 주는 행위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

군웅할거의 어지러운 판도가 유지되는 이유는, 이 명분과 불문률에 기반한 합의가 있기 때문이니까.

아무리 약한 상대라 해도 힘의 논리로 정복하는 것은 어렵다, 반대로 아무리 강한 상대라 해도 힘의 논리로 빼앗기지도 않는다.

수백 년 이상 암묵적으로 지켜온 규칙.

하지만 이 ‘암묵적 규칙’이라는 것은 명백한 명분이 있을 경우, 효과가 사라진다.

마치 동네 사람들 모두가 ‘저 놈은 맞을 짓을 했어’ 라는 합의 하에 발생하는 멍석말이와 비슷하다고 할까.

선제후들 사이의 내전이 없었던 일도 아니고, 서로를 정복하고 멸문하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영토를 빼앗고 배상금을 요구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목적의 전쟁은 역사를 살펴보면 수 없이 많았다.

···어린 시절 그룬발트에서 살았던 내가 누구보다도 더 잘 알지.

그룬발트의 선제후들이 나름의 합리성, 그리고 이기심에 기반해 움직인다 생각한다 가정하면···.

폴름스 역시 나름 믿는 구석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정전이 성립되면 ‘엘랑키아 군은 폴름스의 영토에서 떠나야만 한다’ 라는 조건이 아닐까.

현재 폴름스 성채를 둘러친, 안팎의 공격에 모두 대응할 수 있는 이중 포위망, 그리고 다섯 마을을 요새화한 방어선.

그 수준은 상당한 수준이다. 들어간 자재와 노동력만 해도 엄청난 수준에, 세심한 설계와 기술력까지 따지면 더욱 그렇다.

이는 불리한 싸움이 빈발했던 지난 두 차례의 공방전에서 엘랑키아 군이 잘 버텼다는 것으로 증명되고 말이다.

정전이 성립되면 이 모든 것을 버리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전은 ‘엘랑키아 왕국’과 ‘신성 그룬발트 제국’ 사이가 아니라 ‘폴름스 선제후령’ 사이에 성립되었으므로, 대치중인 그룬발트 대군과의 적대관계까지 해소된 것은 아니다.

결국 아군은 의지할 방어선 없이 싸워야 하는 상황이 될 테고.

폴름스의 선제후는 이걸 노리는 것이 아닐까?

이 사실을 우리도 모르지 않는다. 당장 국왕 다고베르 2세 역시 이 점을 처음부터 언급하며, 나에게 조언을 청해 왔을 정도니까.

알고 있다. 이 정전 협정이 눈가리고 아웅이 될 수 있는 함정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랑키아 측이 조건에 따라서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선택지로 여기고 진지하게 논의하는 이유도 있다.

일단 사흘 째의 대격전에서 물자와 전력 소모가 생각보다 너무나 컸다는 사실이다.

다고베르 2세가 ‘우리 망했다’ 라고 한 것은 분명 농담이었지만, 나름 현 상황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하고.

물론 그 소모가 치명적이라, 더 이상 전쟁이 불가능하다라는 수준은 아니다.

또한 우리가 파악하기로 그룬발트 군이 입은 피해는 그 이상이다. 결코 무의미한 승리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사상자 숫자는 최소한 배 이상, 작심하고 준비한 공격이 모든 전선에서 실패하는 바람에 사기도 심하게 떨어진 상태로 보인다.

실제로 전투 직후, 영주가 전사했기 때문인지 고향으로 철수하는 영지군들도 관측되었고.

그래서 지금 생각을 미리 해 보는 것이다.

아직 아군이 충분히 여유가 있고, 선택지를 고를 권리가 있을 때.

전략적인 주도권을 가지고 있을 때 말이다.

또 한 번, 이 정도의 격전을 벌이게 된다면 상황이 어떻게 변할까?

또다시 크게 승리할 수 있을까?

이번에야 말로 물리적으로 적을 궤멸시키거나, 전투 의지를 완전히 꺾어 영웅적인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까?

아군이 전략적으로 이렇게 행동하면 적은 이렇게 행동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군의 승리는 필연적이다.

전장에서는 이런 희망적 관측만큼 위험한 것이 없다.

아군이 아는 정보는 적도 알고 있으며, 아군 만큼 합리적으로 행동할 것을 가정하지 않으면 그 순간 작전 회의는 신에게 복을 바라는 기도회가 되어버린다.

인정해야 한다.

그룬발트 군은 짧은 시간 내에 생각보다 많은 병력을 모아 왔으며, 그 결속도 생각보다 훌륭했다.

포로로 잡은 적장, 세두시온을 통해 얻은 정보에 따르면 그룬발트 군의 수뇌부는 열 명 이상의 자이트리츠 전쟁관 참모들을 고용했다고 한다.

솔직히 열 명 넘게 고용했다는 게 믿기지는 않지만, 상당히 많은 숫자가 그룬발트 군의 여기저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라 생각된다.

자이트리츠 전쟁관 출신이라면··· 우리 슈토르히 연대의 루트비히와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의 군사 고문 아인멜츠가 생각난다.

둘 다 합리성의 화신과도 같은 인간들이다.

그 외에는 개인적으로 만나 본 사람은 없지만, 용병들 사이에 퍼진 소문은 다소 과장을 포함하더라도 모두가 훌륭한 전략전술가들이라 가정해도 되겠다.

스승님께서도 ‘그런 식으로 인재를 키울 수도 있더라’고 몇 차례 언급하신 적이 있고 말이다.

그룬발트 군 전열에서 상상 이상의 견고함이 엿보이는 것은 그들의 역할이 상당히 크기 때문일 것이며···.

전군의 사령관인 디오보르크 공작의 통제력이 상상 이상으로 크다는 것이다.

인정해야 한다. 그룬발트 군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을.

그 바탕에서 비로소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두렵다. 계속 폴름스에 건설한 벙어선에 틀어박혀서 방어에 전념하는 것이 말이다.

그룬발트 군이 못 견디고 철수할 때까지 폴름스를 포위하고 버틴다는 전략을 근본부터 살펴봐야 한다.

여기는 그룬발트 제국의 서부 한 복판, 따라서 적군의 한계가 정신적으로 온다면, 아군의 한계는 물리적으로 올 것이다.

콰앙!

멀리 어둠 속에서 포성이 들리지만, 나는 놀라지 않는다.

비밀리에 정전 협정이 진행 중이지만,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포위전 중이니까. 낮 동안 조준해 두었다가 밤에 발사하는 것이다.

야밤에 포를 쏘는 것은 공성포병들에게도 힘든 일이겠지만, 맞는 쪽에서는 더욱 악몽과도 같은 일이다.

일단 언제 포탄이 날아올지 모르는 것도 그렇고, 밤이라고 해도 복구 작업을 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아무튼 몇 번이나 거듭해서 생각해 보았지만, 역시 결론은 바뀌지 않는다.

정전 협정과 무관하게 이대로 안주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것.

분명 ‘병력도, 물자도, 사기도 충분한데 왜 지금?’이냐는 반박이 나오겠지만···.

병력도, 물자도, 사기도 충분한 지금이 아니면 아군은 선택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될 수 있다.

나는 머리속에서 폴름스와 그 주변을 포함한 방어선을 일단 지운다.

대신 전군을 수습해 취할 수 있는 새로운 전략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아직 다고베르 2세 국왕이 직접 이끄는 엘랑키아 군은 막강하다.

넓은 지역을 포위하느라 분산된 적이 알아채기 전에, 정예군만 추려 신속히 진군해서 결전을 강요할까?

이대로 그룬발트 내부로 더욱 깊숙하게 진격해 좋든 싫든 따라오게 만드는 것은 어떨까.

그룬발트 수뇌부를 이루는 유력자 혹은 주요 후원자의 영지를 향해 진격한다면?

으··· 갑자기 너무 신을 내 버렷다. 여기까지 생각하는 것은 지금은 내 역할이 아닌 것 같다. 국왕 폐하가 시키신다면어쩔 수 없겠지만···.

역시 적 입장에서 열 받는건 이기고 빠지는 것이지.

이럴 선현들은 ‘따고 배짱’ 이라는 격언으로 표현하곤 했었다.

직접적으로 도발 할 필요 없이, 폴름스와 협정을 통해 얻을 것만 얻고 회군하는 엘랑키아 군의 모습을, 포위망 밖의 그룬발트 군은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뭐··· 목적이었던 폴름스 구원은 해결되었으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도 있을··· 까?

대개의 경우는 분통이 터지겠지.

게다가 회군하는 엘랑키아 군이 매력적인 군수물자까지 잔뜩 보유하고 있다면?

잘만 하면, 아군에게 가장 유리한 형태로 새로운 전장을 설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지금 아군이 가장 유리한 것은 ‘정보’이다.

폴름스 안과 밖의 적은 서로 소통이 되지 않는다.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인 이상, 첩자를 통한 정보 유출이나 목숨을 건 전령의 돌파가 있을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래봐야 전해지는 정보는 지극히 일부이고, 명백한 판단을 내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일 것이다.

이 절대적인 유리함이 무너지기 전에, 우리가 먼저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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