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12. 폴름스 전투, 임시 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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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타탕! 탕탕! 타앙!
서늘한 새벽 공기를 가르고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하지만 부대 단위의 격렬한 일제사격 소리는 아니다. 수십 명, 혹은 수백 명의 총병들이 제각각 조준하고, 사격하고, 장전을 반복하는 상황으로 보인다.
이제 막 해가 뜨기 시작한 이른 새벽, 아룬하비크와 브레세른을 연결하는 도로에서 벌어진 작은 전투의 시작이었다.
그룬발트 군 중대 규모의 보병이 새벽 어스름을 틈타 엘랑키아 군 방어 진지의 모서리를 공격한 것이다.
흙과 나무로 쌓아 올린 진지는 언듯 보면 허술해 보였으나, 여러 개의 보루가 상호 보완해주는 공들인 구조이다.
전선 전체에서 격전이 벌어졌던 사흘 째 전투에서도 수 차례 공격을 당했었지만 결국에는 지켜냈다.
공격군이 몇 차례 방어선 끄트머리를 넘었고, 간혹 포대 안쪽까지 백병전이 벌어지는 위기가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보루를 동시에 함락하지 않으면 후속 병력 투입이 너무나 어려운 구조였다.
비탈에 빽빽하게 모여있는 병력은 이웃 보루에서 조준하는 포대에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이었다.
당연하지만 완만한 방어선 비탈에 다닥다닥 붙어 기어 오르던 불운한 병사들은, 비스듬한 뒤편에서 날아오는 산탄에 끔찍한 꼴을 당하게 된다.
터무니없는 대군으로 피해를 각오하고 밀어붙였으면 모를까, 주 전선은 병력이 집중된 각 마을들이었기 때문에 결국은 함락할 수 없었다.
이런 어려운 경험을 했던 그룬발트 군은, 이번에는 어둠을 틈타 방어선에 접근하는 작전을 짰다.
소규모 병력으로 방벽에 달라붙자 거치된 화포는 각도 문제로 사용할 수 없었고, 완만한 비탈을 사이에 둔 치열한 총격전이 시작된 것이다.
타앙! 타타탕! 타당! 탕!
보루와 보루가 서로를 지원해 효율을 최소화 시킨 방어 진지라 해도, 소규모 병력으로 사각을 찾자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경험 많은 병사들은 본능적으로 사각과 사각을 이용하며, 아주 가끔 그늘에서 몸을 드러내 수비병을 저격한다.
평지에 세워진 방어 진지라는 특성상, 어느정도 규모 있는 공격에는 월등한 화력으로 대응할 수 있지만 정작 스스로에게 달라 붙은 적을 떼어내는 것은 곤란했다.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움직여라. 용 쓴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으니까.”
휘하의 총병 중대를 보내 공격을 지휘하고 있는 것은 반츠베르크 용병단장 쇠렌 마이켈러였다.
야밤에 숙련된 총병 중대를 차출해 공격을 시작할 때만 해도, 혹시라도 ‘나라면’ 기습적으로 진지를 점령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엘랑키아 군의 방어 진지는 튼튼하게 지어져 있었고, 몇 개 중대 정도 더 밀어 넣는다고 흔들릴 구조가 아니었다.
‘이건 욕심내는 순간 다 같이 뒈진다’
평지에 흙과 나무로 쌓아 올린 볼품없는 진지라고 쉽게 접근했다가는 연대가 결딴날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수천 명이 공격하고도 성과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아주 악랄한 인간이 분명했다.
겉으로 보기에도 튼튼하게 만들었다면 어설프게 접근도 하지 않겠지만, 처음 한 눈에 보면 만만하게 생겼다.
솔직히 말하자면, 겨우 이런 평지 진지를 제대로 점령도 못하다니, 그룬발트 보병들 형편없네··· 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직접 공격을 위해 휘하 병력을 내보내고, 자신도 근처까지 접근해 망원경으로 주변을 살피고 나니 결코 만만한 구조가 아니었다.
만약 진지 보는 눈이 없이 휘하 병력만 많은 지휘관이 무모하게 전면 공격을 지시했다면···.
진지에 달라붙다가 교차 사격에 희생, 산처럼 쌓인 부하들의 시체를 지켜보며 좌절하고 있었으리라.
그리고 불행하게도 사흘 째 전투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쇠렌은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여기서 세울 수 있는 어정쩡한 공훈을 노리기 보다는 병력을 온존하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사흘 째 전투에서, 엘랑키아 기사 대군이 ‘지나가는 길’에 배치되었다가 잘못하면 휩쓸릴 뻔 했다.
바로 옆에 그로이엔펠트 연대가 붙어서 함께 싸우지 않았다면 병력 절반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함께 싸웠다’ 라는 것은 이쪽 입장일 뿐이고, 사실은 반츠베르크 연대가 그로이엔펠트 사각 대형에 달라붙어서 위험을 피했다가 맞겠다.
가장 위험한 측면을 그들이 지켜준 덕분에, 전열 붕괴 위험에서 피할 수 있었다.
나름 신흥 용병 연대로 경력도 쌓았고 ‘이 정도면 명문 용병 연대들과 붙어볼 만 하지 않을까?’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실전에서 그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특히나 방금까지 밀어붙여서 궤멸 위기로 몰아 넣었던 엘랑키아 보병들이, 그로이엔펠트가 아니라 ‘만만해 보이는 이쪽으로’ 공격해오는 것을 보았을 때 자신감도 자존심도 박살나 버렸다.
왜 그들의 위상이 그렇게 높은지 여실히 느꼈다. 명문 연대가 받는 비싼 용병료는 이름 값 뿐인 거품이라 생각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거품은 그로이엔펠트의 이름이 아니라, 한껏 부풀어오른 자신의 간덩이였던 것이다.
어쨌거나 좀 더 소극적이 된 쇠렌은 철저하게 위험 회피 중심으로 가기로 했다.
‘적군은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고 행동할 것. 무모하게 행동하면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어쩐지, ‘직속상관’인 전쟁관의 참모도 이런 말을 하긴 했었다.
이름이 플로리안이라고 했던가? 원래 이 지역 전선을 담당하던 엘프 사령관이 엘랑키아에 포로로 잡히는 바람에,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파견된 인물이라고 했다.
원래 북쪽, 그것도 예비대에 속해 있었던 자신들이 남부 전선으로 불려올 때 예상은 했지만 남부 전선은 정말 처참하게 당한 모양이었다.
병사들이나 그 지휘관인 영주들이나 혼이 나간 모습이었고, 공격은 커녕 전선 유지가 가능할지도 의문으로 보였다.
그나마 연대 전투력을 온존한 반츠베르크 연대가 파견된 건 그런 이유였다.
아마 조심스러운 공격 명령이 내려진 것도, 이 처참한 패배 분위기를 반전시켜 보려는 지휘부의 판단일 것이다.
‘조심스러운’ 인 이유는 혹시 또 패배라도 하면 더 심각한 꼴이 될 것이기 때문일 테고.
타탕, 탕! 탕탕, 탕!
아마 이 상태로 하루 종일 공격하더라도 엘랑키아 군의 방어 진지에 흠집도 내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그룬발트 군이 전투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다음 공세를 준비하고 있다는 알림은 될 것이다.
···수비군을 귀찮게 하는 정도의 효과도 있을 것이고.
“혹시라도 적이 기병을 내보낼지 모르니 조심해라. 만약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해서라도 구해낸다.”
“알겠습니다, 대장님.”
군인으로서 쇠렌이 생각하기에도, 현재 그룬발트 군은 스스로 가진 힘을 너무 못 쓰고 있었다.
이럴거면 빨리 전쟁 때려치고 집에나 갈 것이지··· 대체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뭐, 어차피 돈 받고 대신 전쟁해주는 용병 입장에서야 시키는대로 할 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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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사흘간 전선에서 발생한 교전 보고입니다.”
나는 다고베르 2세에게 보고서를 넘겼다. 새벽부터 첼레스티나가 공들여 작성해준 보고서였다.
참고로 내가 이전 생의 경험을 바탕으로 교육시킨 옛 슈토르히 연대 간부들의 행정 업무는 대륙 최고 수준이다.
현대인의 합리적 보고서 구조와 회계 지식에 기반한 문서 작성은 어떤 면에서 내가 가진 유일한 치트라고도 하겠지.
다루는 내용 자체의 완성도는 동일하다 하더라도, 결정권자가 보았을 때 한 눈에 들어오는 정보의 양과 직관성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건 트랑카벨 가문의 군수 참모들을 거쳐서 행정관들 사이에도 전파되었고, 기존에 사용되던 복식부기법도 개선되어 효율이 올라갔다··· 라고 한다.
아무튼 다고베르 2세도 명석한 군주답계 그걸 바로 알아보았고, 현재는 왕실군의 장교들 역시 조금씩 그 방식을 따라하고 있다고 한다.
“그룬발트 놈들, 전쟁을 할 생각이 없는 건가? 우리가 그렇게 무섭다고?”
그 잘 정리된 문서를 잠시 살핀 다고베르 2세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대략 예상했던 반응이다. 휴전이 끝나고 한참이 지났는데도 그룬발트 측의 활동은 크게 위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겁이 나서 그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혹시 다른 계획을 준비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어 조사를 해보고 있습니다.”
“어휴, 무서운 소리를 하는 군, 에트 경. 뭔가 특별한 움직임은 있소?”
“...아닙니다. 아직까지는 너무 아무것도 없어서 오히려 불안할 정도입니다.”
대치 중에 갑자기 전방 주둔 병력이 줄어들면 이는 심각한 문제이다. 그 병력이 어디서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 수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징후도 전혀 없다. 그룬발트 군은 정말로 대책 없이 시간만 보낸다는 느낌이었다.
좋게 봐 줘도 병력 증원을 기다린다··· 정도일 텐데 이 상황에서 전황을 뒤바꿀 정도의 증원군이 존재할 수 있을가.
“이러니 폴름스의 선제후가 약이 올라 난리를 부리는 것도 이해는 가는군.”
“아··· ‘석방 교섭’은 아직 진행되고 있습니까?”
“이번에 세번째 만남을 가진 모양이더군.”
포위당한 폴름스 선제후와의 정전 협정 논의는 계속 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전황이 크게 바뀌지 않고 있으니, 논의가 지지부진한 것도 대충 예상은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전황의 변화는 어느 한 쪽, 혹은 양측 모두에게 카드가 되니까. 유리하든 불리하든 회담은 진행 될 수 밖에 없다.
적진 한 가운데 포위되었으니, 시간이 지나면 엘랑키아 군이 무조건 불리해진다고 할 수도 없었다.
만약 ‘소모전이 반복된다’ 라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불리하겠지.
하지만 이렇게 서로 대치만 하고 시간만 보내는 상황에서는 딱히 불리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엘랑키아 군이 자리잡은 방어선이 넓어도 너무 넓기 때문인데, 그룬발트 군이 아무리 많아도 도시 포위하듯 포위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주요 방어 거점이 되는 마을과 그 주변을 반포위하는 데 그치고, 특히나 폴름스 서쪽, 파두자이트와 거기서 이어지는 도로는 뻥 뚫린 것이나 다름없다.
엘랑키아 본토와의 연락도 끊긴 적 없고, 주변에서 상인들을 통해 식량과 화약을 비롯한 주요 물자들도 조금씩 공급되고 있었다.
물론 엄청난 바가지 가격이기는 하지만, 혹시라도 순찰 중이던 그룬발트 군에게 붙잡히면 경을 칠 거래니까 이해는 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단순히 시간이 흐르면 엘랑키아 군이 약화되겠지···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만약 폴름스와 정전 협정이 체결되면··· 에트 경이 제안했던 ‘역공 계획’ 준비에는 시간이 얼마나 필요하겟소?”
“이미 물 밑에서 준비는 진행되고 있습니다. 공성포를 비롯한 주요 장비를 모두 챙기려면 사흘, 무거운 물자를 버리는 가정이라면 이틀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거의 5년 간 궁정 요리 숫자를 줄여가며 만든, 내 자식놈들 같은 대포라 버리고 가기는 아까운데 말이오.”
“그럼 더더욱 철저하게 준비해야겠습니다.”
폴름스와 협정은 단순히 조건 없는 휴전이나 정전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애초에 요구했던 전쟁 목적이 일부는 이루어지는 형태로 체결되겠지.
하지만 그래도 외부의 적, 디오보르크 공작이 이끄는 대군은 전쟁이 끝났다고 철수하는 아군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모두가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그룬발트 측은, 다고베르 2세의 전쟁 목적 중 하나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모르고 있겠지.
그래서 우리가 세운 계획은 ‘역공’이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철수가 아닌, 엘랑키아로 돌아가기 위해 적을 한 번 더 격파하는 계획이라는 말이다.
다만 그 준비에는 까다로운 부분이 많았고, 앞으로 어찌 될지도 모르는데 대놓고 할 수는 없는 경우도 많아서 당장은 애매한 부분이 많을 뿐이고.
“물론, 나도 내가 세운 목표가 달성되기 전에는 호락호락 돌아가줄 생각은 없소.”
“잊지 않고 계셨군요.”
“하핫, 당연하지 않겠소?”
국왕 다고베르 2세 품고 있는 숨겨진 목적.
바로 ‘그룬발트 군의 군사력’ 그 자체를 파괴하는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