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신입 한진영
밝았던 빛이 있던 공간을 점점 어둠이 삼켜가기 시작했다.
한진영은 그런 어둠 속에서 빛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한진영의 뜻과 달리 어둠은 금세 모든 빛을 삼키고 말았다.
“야! 신입. 정신 차려.”
한진영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뒤척였다.
“이거 뭐 하는 놈이야? 야! 야!”
목소리에 이어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한진영은 눈을 떴다.
“뭐 이런 놈이 들어왔어. 이봐 신입. 이대로 그냥 지하철 입구에 내려줄까? 그냥 집에 갈래?”
운전하고 있던 남자는 가장 바깥쪽 차도로 운전했다.
당장에라도 지하철 입구가 보이면 차를 멈춰 세울 것만 같았다.
한진영은 그런 남자의 말이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여기는…… 여기는 어디지?”
“이것 봐라. 아직도 잠이 안 깼어? 도대체 밤에 뭐 하는데 차에 타자마자 잠이 들어? 그것도 미래에 상사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 운전하고 있는데도 말이야.”
“상사?”
한진영은 차 안에서 급히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어디인지 모르게는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 그만 정신 차리고 여기 물이나 마셔. 아무리 참관 형식으로 가는 거라지만 긴장 좀 하자 우리. 어?”
한진영은 알 수 없는 말을 계속해대는 남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서른 초반쯤으로 보이는 외모의 남자는 운전대를 잡은 채 물병을 내밀었다.
한진영은 내민 물병을 건네받으며 남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자기보다 열 살은 어려 보이는 외모였다.
그런 그가 왜 자기에게 반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게다가 왜 자기를 향해 신입이라고 부르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한진영은 제이와이 자산운용의 대표였다.
상위 랭크에 속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탄탄한 업력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작년에 출시한 펀드가 은행 판매의 호조로 주목을 받는 중이었다.
이대로만 간다면 5년 이내에 상위 랭크를 손에 쥘 가능성도 컸다.
‘이대로만 간다면…….’
그러나 장밋빛 전망이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증권사들과 총수익스와프 거래를 통해 레버리지를 키웠던 펀드가 투자 실패로 큰 손해를 보고 말았다.
게다가 펀드 판매에 부정 거래가 있었다는 이야기로 갑작스럽게 검찰에 소환되기까지 했다.
고객들에게 위험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는 의혹 때문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펀드 자금을 개인적으로 유용했다는 의심까지 받았다.
펀드 투자 실패가 비리와 불법으로까지 이야기가 번진 것이었다.
한진영은 고개를 저었다.
우선은 여기가 어디인지 깨닫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옆에서 운전하는 사람에게 물으려 할 때 차가 멈춰 섰다.
“자 다 왔으니 내리자.”
한진영은 남자의 뒤를 따라 차에서 내렸다.
쾅!
차 문이 부서져라 닫은 남자는 허름해 보이는 상가 앞에 서서 상가를 올려다봤다.
남자는 큰 숨을 몇 번이나 내쉬고는 말했다.
“신입. 우리가 오늘 승부를 볼 곳이 바로 여기다.”
한진영은 남자를 따라 4층 규모의 상가를 올려다봤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모습의 상가였다.
그러나 남자의 눈에는 테헤란로에 있는 빌딩과 다름없이 보이는 듯했다.
남자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말했다.
“여기 계시는 김 사장님한테 이번에 무조건 1억 이상 땡겨 와야 해. 그걸 내가 보여줄 테니까 신입은 잘 보고 배워. 옆에서 추임새 넣을 수 있으면 그렇게 하고, 하지 못하겠거든 그냥 가만히 있어. 그게 도와주는 거야. 알았지?”
“저기…….”
“가자.”
큰 다짐을 한 듯한 남자는 한진영이 질문하려는 것도 무시한 채 성큼성큼 상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진영은 눈살을 찌푸리고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손목에 있는 시계와 어깨에 메여 있는 가방을 슬쩍 바라봤다.
익숙한 모양을 한 시계와 가방이었다.
‘이건 어머니가 입사 기념으로 사준 시계하고…… 비슷한데.’
오래전 기억 속의 시계 모습과 비슷하지 않냐는 생각에 잠겨있을 때 앞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신입. 빨리 와.”
따라오라며 소리친 남자도 이제 보니 어딘지 알 듯 말 듯 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지?”
한진영은 천천히 남자의 뒤를 따랐다.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어딘가 모르게 모든 것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4층 상가의 꼭대기로 올라가며 한진영은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런 한진영의 기분과 달리 남자는 이야기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미리 말해두지만 여기 상가건물하고 저 길 건너의 2층짜리 상가건물 그리고 옆 블록 1층에 있는 상가 세 개가 바로 여기 사장님 소유야. 이 동네에서는 알부자로 유명하지. 우리 지점에도 이 사장님이 가장 큰 금액을 예치해놓고 있어. 상품이 좋다 싶으면 투자하는 데 통 큰 분이니, 이번에 무조건 1억을 추가로 예치시켜야 해. 알았지? 뭐 신입 자네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니까 이런 스토리만 잘 듣고 내 옆에 있어. 나니까 이런 스토리라도 알려주는 거야. 다른 사람은 이런 스토리도 안 알려줘.”
4층까지 다 올라온 남자는 철문 앞에서 숨을 몇 차례나 골랐다.
그리고 한진영을 보고 한 번 씩하고 웃은 후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김 사장님 계십니까?”
“어떻게 오셨어요?”
철문이 열리자마자 보이는 곳에 앉아있던 여자가 앉은 채로 들어오는 일행을 올려다봤다.
“저희는 신성증권 직원들입니다.”
“신성증권?”
“신성증권?”
앉아있던 여자와 한진영의 입에서 동시에 같은 말이 나왔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한진영을 바라보고 눈을 크게 떴다.
여자가 놀란 것은 그렇다 쳐도 왜 네가 놀라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러나 한진영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신성증권은 한진영의 전 직장이었다.
10여 년 동안 몸 담갔던 곳으로 이미 퇴사한 지 5년이 지난 곳이었다.
그러니 갑작스럽게 그곳의 직원이라며 자기를 소개하는 남자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리 들어오세요. 사장님께서 안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진영 일행을 안내했다.
남자는 여자의 안내에 급히 고개를 돌리고 천천히 여자의 뒤를 따랐다.
“그러고 보니…….”
지금의 상황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사장이 있다는 복도와 복도에 놓여 있는 화분과 그림.
딱 꼬집어 어디서 봤다고 말할 수 없지만 데자뷰처럼 한진영에게 지금의 광경을 전해줬다.
“어서 와. 아~ 오늘 신입 정신 못 차리네. 빨리 와.”
남자가 급히 한진영에게 손짓하고 문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여자 앞으로 갔다.
여자가 문을 열자 남자가 들어갔고 한진영이 뒤를 이어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들어가자마자 소파에 앉아있는 김 사장을 향해 인사했다.
“아이고~ 사장님. 안녕하셨죠?”
“나야 뭐…… 그런데 황 대리 자네는 오늘 여기 웬일이야? 자네가 오겠다고 해서 내가 좀 놀랐어.”
“저야 김 사장님에게 커피 한잔 얻어 마시러 왔지요. 괜찮지요?”
“그럼. 잘했어. 더운데 어서 와. 그런데…… 옆에 있는 젊은이는 누군가?”
“이번에 새롭게 발령받은 신입입니다. 신입. 여기 사장님께 자기 소개해.”
한진영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는 김 사장과 황 대리를 보고 안개가 걷히는 느낌을 받았다.
김 사장과 황 대리 모두 한진영이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한 사람은 지점의 VIP였던 사람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사람으로 인해 잘린 사람이었다.
VIP도 지금 이 자리에서 일어날 일로 인해 신성증권에 실망하여 떠나가 버렸다.
한진영은 물론이고 지점장까지 나서 다시 유치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VIP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 사람이 바로 눈앞에 앉아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진영은 지금 자기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꿈이 아니라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다만, 하필 왜 신입사원 시절이 꿈에 나오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왕 꾸는 꿈. 어디 한번 꿈에 맞춰 행동해주자는 생각으로 김 사장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새로 신성증권에 들어온 한진영이라고 합니다.”
“오~ 신입인가?”
김 사장이 웃으며 말하자 옆에 앉아 있던 황 대리가 웃는 얼굴로 한진영을 보고 말했다.
“똘똘한 친구가 들어왔으면 했는데 좀 아쉽습니다. 많이 부족해요.”
“뭐가 아쉽다고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잘할 것으로 보이기만 하는데…… 자네도 처음 들어왔을 때 마찬가지였어.”
“아닙니다. 사장님. 저는 처음부터 똘똘했어요.”
“그랬나?”
화기애애하게 이야기하는 두 사람이었다.
그러나 한진영의 눈에는 이것만큼 어색한 게 없다고 느꼈다.
한진영의 기억 속에 마지막 두 사람은 썩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김 사장은 한진영을 위아래로 훑으며 미소를 지었다.
황 대리는 그런 김 사장과는 대조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리바리한 게 믿음직스럽지 못합니다. 앞으로 가르쳐야 할 것도 산더미이고요.
“걱정하지 말게. 옆에서 잘 가르치면 될 것 아닌가? 이봐. 한진영 씨. 여기 있는 황 대리한테 많이 배우도록 해. 이 친구 잘해.”
황 대리는 김 사장의 칭찬에 어쩔 줄 모르겠다는 모습으로 김 사장의 손을 덥석 잡았다.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자네 덕분에 내가 재미 좀 보지 않았나? 이 정도 칭찬쯤은 백 번이라도 더 해줄 수 있네.”
“하이고~”
황 대리는 감사하다는 마음을 듬뿍 담아 김 사장의 손을 잡았다.
한진영은 눈앞에서 서로 화기애애하게 이야기하는 둘을 보며 코웃음이 나오는 걸 참았다.
황 대리는 웃음을 멈추지 않고 천천히 가방을 열었다.
이제 인사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여 본격적으로 일 이야기를 하려 했다.
“김 사장님. 제가 사실 김 사장님을 방문한 이유는 다름이 아닙니다. 지점에 좋은 물건이 하나 들어와서 이렇게 김 사장님에게 소개하기 위해 온 겁니다. 다른 사람은 아직 확인하지도 못한 아~~주 뜨끈뜨끈한 물건입니다.”
황 대리는 실제로 서류가 뜨겁게 느껴지는 것처럼 서류를 들었다 놨다 하며 장난을 쳤다.
김 사장은 그런 황 대리를 보며 사람 좋은 미소를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