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한진영은 황인석이 꺼낸 서류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고 서류에 쓰인 익숙한 이름에 시선을 고정했다.
[SS 제1호 ELS]
‘저거 설마 그건가?’
가물가물한 기억의 바다에서 흐릿하게 옛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ELS 상품.
한진영이 막 신성증권에 들어왔을 때 처음으로 발행됐던 바로 그 상품이 황인석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게 뭔가?”
김영수 사장은 흥미가 생긴다는 얼굴로 황인석 대리가 꺼낸 서류를 보며 물었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전에 바로 사장님께 보여드리기 위해 가지고 온 겁니다. 그러니 혹시라도 보시고 다른 곳에 가서 누구에게도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알면 왜 자기에게 가지고 오지 않았냐고 화를 낼 게 뻔하니까요.”
황인석은 서류를 김영수에게 건네기도 전부터 호들갑을 떨었다.
김영수는 그런 황인석의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직 보지도 않았어. 도대체 뭐길래 그러나?”
“이번에 새로 나온 상품입니다. 너~무 좋은 상품이에요. 이름부터 제1호입니다. 무언가 좋은 느낌이 들지 않으십니까?”
“알았으니까 보여주기나 하게. 도대체 뭐길래 그렇게 사설이 긴 거야?”
마치 약 올리는 듯한 그의 모습이었다.
김영수는 그런 황인석에게서 서류를 빼앗듯이 낚아챘다.
황인석은 빼앗겨서 아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설명을 좀 드려야 되는데…….”
“알았으니까 설명해. 나는 서류 읽으면서 들을 테니까.”
황인석은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한진영을 힐끗 바라봤다.
그리고 눈을 찡긋거리며 잘 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한진영은 모든 게 지난날과 같음을 느꼈다.
‘제1호 ELS. 그리고 그걸 가지고 김영수 사장을 찾아온 황인석. 아무리 꿈이라지만 너무 디테일한데.’
한진영은 바로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히 떠오르는 일이 눈앞에서 다시 펼쳐지는 것을 느꼈다.
“마감까지 딱 3일만 준 상품입니다. 모집금액도 딱 50억만…… 새롭게 설계된 상품이라 본사에서 한시적으로 내놓은 겁니다. 이건 뭐 거의 거저먹는 상품이에요.”
“3일? 그렇게 빠듯하게 내놓는 것도 있어?”
“3일이면 50억 채우는 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 거죠. 그러니 3일만 준 거 아니겠습니까?”
황인석의 말이 전부 다 틀린 것은 아니었다.
모집금액이 50억이었던 것도 맞고, 마감까지 3일 남아 있는 것도 맞았다.
본사에서 상품을 파는 데 자신 있어 한 것도 맞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이 잘못됐다.
나오자마자 가지고 왔다는 것.
그건 황인석의 거짓말이었다.
본사에서 자신 있게 상품을 내놓은 건 맞았다.
그러나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가입자를 유치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아직 ELS라는 개념이 희미했던 시기였기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금보장형을 좋아하는 우리 국민 특성상 원금보장을 하지 않는 상품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입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황인석의 손에 가입 서류가 들려 있었던 것이었다.
“그럼 아직 가입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건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좋은 상품은 알음알음 아는 사람들끼리 다 해 먹는 거 말입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20억이 벌써 들어왔습니다.”
“그래? 나오자마자 바로 들고 왔는데도 벌써 들어간 사람들이 있다고? 신기하군.”
김영수는 보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떼 황인석을 바라봤다.
황인석은 과장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아마 본사에서 상품이 나오자마자 들어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이야기죠.”
‘그래. 황인석의 말대로 지금까지 유치한 금액이 아마 20억이었지.’
한진영을 대화를 들을수록 옛 기억들이 더욱 또렷하게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마감 기한이 다가옴에 본사에서는 지금 상품에 인센티브를 걸었다.
상품을 가입시키면 평소 얻는 실적의 2배 이상을 인정해주고 1억 이상을 유치한 직원에게는 특별 보너스로 100만 원의 상여금을 지급한다는 것이었다.
황인석은 그 인센티브를 노리고 김영수 앞에 앉아 있었다.
“자. 사장님. 잘 들으세요. 제 이야기를 잘 듣고…….”
“잠깐.”
김영수는 황인석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황인석 곁에 앉아 있는 한진영을 바라보고 말했다.
“으음…… 아니. 거기 신입. 자네가 이야기해보게.”
“사장님!”
황인석은 김영수의 말에 깜짝 놀랐다.
“사장님. 이 친구는 정말로 신입입니다. 그래서 상품에 대한 내용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했을 테니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나는 저 친구의 설명을 듣고 싶은데 말이야. 처음 보는 상품이라서 황 대리 자네에게 설명 들으면 내가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할 것 같아. 어떤가? 할 수 있겠나?”
“신입이 어찌…….”
“문제없습니다.”
김영수를 설득하던 황인석은 갑작스러운 현진영의 말에 놀라 한진영을 돌아봤다.
하지만 한진영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역시. 앉아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아 물어본 건데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나 보군. 좋아. 해보게.”
김영수는 자신 있게 이야기한 한진영을 보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영수가 이렇게까지 나오자 결국 황인석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하고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대신 혹시라도 초를 치진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제아무리 뛰어난 신입이라도 첫 고객 미팅에서 이런 걸 설명할 순 없을 테니까.
하지만 황인석이 한 가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건 단순한 신입 한진영이 아니었다.
십수 년간 이 업계에서 달고 쓴맛을 모두 봤던 한진영이었다.
한진영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김영수가 원할만한 핵심 내용만을 간결하게 이야기했다.
“각 업종에 대표성을 띤 종목 10개를 기초자산으로 설정한 상품입니다. 특정 조건을 만족하면 30%의 수익을 돌려주는 상품입니다.”
“뭐? 수익이 얼마라고?”
“30%입니다.”
담담하게 말한 한진영이었다.
그러나 정작 대답을 들은 김영수는 놀란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그게 말이 되나?”
“말이 안 되는 수익률이기는 합니다. 제1호 ELS이기에 가능한 수익률이죠. 처음 나왔으니까요.”
김영수는 한진영을 가만히 바라봤다.
한진영의 눈을 통해 무언가를 알아내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김영수가 한진영에게 설명하도록 한 것은 회사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직원의 허점을 이용하려 한 것이었다.
신입이라면 할 말 못 할 말을 구분하지 못하고 죄다 털어놓을 테니까.
그러나 의도와는 다르게 한진영을 통해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김영수는 얇게 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신입 같지가 않군.”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칭찬이야.”
김영수는 앞에 놓인 서류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좋아. 그럼 계속해볼까? 특정 조건? 수익률 30%를 얻기 위한 조건이 뭐지?”
“1년 동안 기초자산으로 설정된 주식의 가격이 20% 이상 하락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이른바 녹인(Knok-in) 구간이라고 불리는 기준을 20%로 잡은 것이지요.”
“기초자산의 기준가는 어떻게 정하지?”
“ELS가 설계되었을 때의 가격을 기준으로 합니다. 이 상품의 경우는 한 달 전의 기초자산 가격이 기준가입니다.”
김영수는 막힘 없이 대답하는 한진영을 슬쩍 올려다본 후 다시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한진영이 이렇게 바로바로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은 제1호 ELS였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ELS 1호 상품은 ELS 태동기에 설계되어 간단하면서도 파격적인 상품으로 유명한 상품이었다.
게다가 설계되자마자 크나큰 손실을 기록한 것으로 더 유명했다.
그리고 바로 그 손실을 시흥지점의 VIP이자 큰손이었던 김영수가 보고 말았다.
그 이후 김영수는 신성증권에게 실망하여 한바탕 난리를 피운 뒤 떠나버리고 말았다.
한진영이 입사한 뒤 바로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진 사건이라 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김영수라는 VIP를 잃은 이후 시흥지점이 겪었던 고난과 함께 절대 잊지 못하는 사건이었다.
한진영은 흥미로워하는 김영수를 가만히 바라봤다.
김영수는 그렇게 한참을 서류를 훑어보다 기초자산에 눈을 고정한 채 말했다.
“대한전력에 대한통신…… 기초자산으로 괜찮은 종목들만 있네?”
“그렇습니다. 산성전자를 포함하여 각 종목의 대표 기업들로만 설정되었습니다.”
“좋아. 좋은데…….”
김영수는 보고 있던 서류를 덮고 말했다.
“좋은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이제부터 안 좋은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세.”
김영수의 말에 황인석이 화들짝 놀랐다.
“사장님. 이건 나쁜 게 없는 상품입니다. 이름부터가 1호 아닙니까? 실험적인 상품이라는 것이죠. 그만큼 손해를 보는 것도 감수하고 만든…….”
“자네는 오늘 가만히 있게.”
김영수는 이번에도 황인석이 하려는 말을 막았다.
“오늘은 신입, 자네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군그래. 자네가 이야기해보게. 이 SS 제1호 ELS의 위험 요소는 무엇인가?”
한진영은 김영수 앞에 놓인 서류를 내려다보며 잠시 고민했다.
본래라면 위험성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 않는 편이 옳았다.
하지만 제이와이 자산운용의 대표로서 숱한 사람을 만나본 안목으로 판단컨대.
김영수 같은 사람에게는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좋은 결과를 불러온다는 것을 한진영은 잘 알고 있었다.
“훑어보시면서 보셨을 겁니다. 각 업종 대표 종목을 선별한 것이 반대로 위험 요소이기도 하지요. 최근 큰 변동성을 보이는 스특스조선과 언제라도 인수합병 이슈에 빠져들 수 있는 대좌건설 그리고 유가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 한성화학이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기초자산 중 하나라도 녹인 구간에 진입하면 원금을 잃는 ELS 상품 특성상, 해당 종목들의 변동성은 위험 요소입니다.”
“솔직하군. 지나칠 정도로. 하지만 그래서 마음에 들어.”
김영수는 황인석을 돌아보고 웃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이 친구에게 말해보라고 한 거네. 아무래도 신입들이 좀 더 솔직하니까.”
“사장님.”
황인석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혹시라도 김영수가 가입하지 않겠다고 나오면 어쩌느냐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김영수는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지 연신 입술을 핥고 있는 황인석을 바라보고 말했다.
“자네도 알고 찾아온 거지? 마침 10억 정도 융통할 자금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말이야.”
“몰랐습니다. 정말 몰랐습니다. 그런 일이 있습니까?”
황인석이 깜짝 놀란 얼굴로 급히 양손을 들어 흔들었다.
그러나 한진영은 황인석이 그것을 노리고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중에 십 분지 일인 1억만 땡겨 오자는 계획을 미리 세우고 이곳으로 왔기 때문이다.
김영수는 손가락으로 서류를 두드렸다.
“그 돈 여기에 다 넣도록 하지.”
“네? 10억을요? 다요?”
“그래. 다 넣을 테니까 바로 사인하도록 하지. 그래야 만기도 빨리 돌아올 거 아냐? 하루 늦으면 만기도 하루 더 늦어질 거 아냐?”
“바로? 지금이요?”
“왜 자네가 오히려 놀라나? 싫어?”
“아닙니다. 싫기는요 좋습니다. 좋고 말고요.”
1억을 기대하고 왔는데 10억이라는 돈을 유치할 수 있다는 사실에 황인석은 입이 찢어질 듯이 웃었다.
황인석은 웃으면서도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잊지 않았다.
입은 웃고 있지만, 손은 바삐 움직여 김영수 앞에 사인할 곳이 어디인지 알려줬다.
“사장님. 이곳에 사인하시고 뒷장에 보시면 여기와 여기…….”
탁!
김영수 앞에 펼쳐진 서류 위로 손이 하나 올라갔다.
그리고 손은 서류를 움켜쥔 채 움직였다.
“뭐야?”
입이 귀에 걸려있던 황인석은 당황한 눈으로 서류를 가지고 간 한진영을 돌아봤다.
김영수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다짜고짜 계약하려는 서류를 뺏어가는 한진영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여기에…….”
찌이익-
한진영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계약서를 두 사람이 보는 앞에서 찢어버렸다.
“자네 뭐 하는 거야?”
갑작스러운 한진영의 행동에 놀라 황인석은 한진영의 팔을 잡았다.
그러나 서류를 찢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한진영은 서류를 네 번에 걸쳐 찢어내고는 앞에 놓인 재떨이에 던져 넣었다.
“자네 미쳤어?”
그제야 황인석의 목소리가 사무실을 떠나갈 듯이 터져 나왔다.
한진영은 그런 황인석을 잠시 바라보고는 고개를 돌려 김영수를 향해 말했다.
“이 상품에는 투자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