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잊지 않았겠지?
아직은 해가 뜨지 않은 시간.
신성증권 시흥지점은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지민 씨. 팩스 들어온 거 바로 전달해줘.”
“네. 과장님. 안 그래도 지금 정리 중이에요. 바로 전달해 드릴게요.”
“좋아. 그럼 경 대리. 테마주 정리는 다 끝냈어?”
“네. 어제와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최석영 과장이 이리저리 지시를 내리며 장 열리기 전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항상 그렇지만 장 열리기 전 30분 전이 가장 바쁜 시기였다.
“그런데 우리 신입께서는 보이지 않네. 설마 아직 출근 안 한 건 아니겠지?”
“진작 왔는걸요. 지점 문도 신입이 열어놨어요.”
“그래? 몇 시에 왔다는데?”
“제가 7시에 왔는데 문이 열려있던 거 보면 그 전에 왔겠죠?”
“그래?”
최석영은 의외라는 눈으로 한진영의 비어있는 자리를 바라봤다.
“자자. 이제 고객 맞을 준비 하자고…… 지민 씨. 문 열어.”
지점장실에서 나온 최준호 지점장이 손뼉을 치며 지시했다.
최준호의 손뼉이 끝나기 전에 한진영은 자리로 돌아왔다.
한진영은 장 시작 전에 잠시 밖에 나가 앞으로 나아가 생각을 정리하고 오는 길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오늘로써 1주일째. 나는 아직도 과거에 있다.’
고작 며칠이라면 생생한 꿈을 조금 길게 꾸는 것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벌써 1주일째 매초, 매분을 느끼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을 꿈이라 여기는 것이 오히려 미련한 짓이리라.
그렇다면 답은 하나.
지금 자신이 있는 이곳이 현실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건 다르게 말하면 한진영에게 찾아온 엄청난 기회라는 뜻이었다.
과거 자신의 실패를 만회하고, 오히려 그 이상의 성취를 달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말이다.
그 기회 앞에서 한진영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생각을 지웠다.
대신 ‘어떻게 해야 최단 경로로 과거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있는가’에 치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온 첫 번째 목표는 간단했다.
‘지점에서 최대한 실적을 쌓은 뒤 본사로 점프한다.’
아무리 시흥지점에서 날고뛴다고 해도 결국은 일개 지방의 지점.
본사에서 다룰 수 있는 자산 규모와 비교하자면 시흥지점은 고작 개미 수준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목표.
본사로 가기 위한 첫 번째 단추가 조금 뒤에 펼쳐지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한진영은 생각을 가다듬고 올라오니 최석영 과장이 한진영을 보며 물었다.
“어디 갔다 왔어?”
“담배 좀 피우고 왔습니다.”
“담배…… 하긴 오늘이 마지막…… 아니야. 못 들은 걸로 해줘. 그런데 어디서 피고 온 건데?”
최석영이 주제를 돌리려는 듯 급히 다른 말을 꺼냈다.
그 모습에 한진영은 당연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건물 아래 옆 골목에서요.”
“어? 왜 거기서?”
“왜라니요?”
“아니. 거기까지 가서 왜 담배 피우냐는 말이지. 회사 앞에 누구 찾아왔어?”
한진영은 이상하게 자기를 바라보는 최석영을 말없이 쳐다봤다.
그때 문이 열리며 기다렸다는 듯이 고객들이 시흥지점으로 들어왔다.
40대와 50대 아저씨 아줌마부터 시작하여 70대에 지팡이를 힘들게 짚고 들어오는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시세판 앞에 놓인 소파로 직행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제일 먼저 담배부터 꺼내기 시작했다.
한진영은 그런 모습을 보고서 깨달았다.
과거에는 객장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담배를 피웠고, 자기가 있는 곳이 바로 그 시대라는 것을 말이다.
‘1주일이나 지났는데, 이런 건 아직 익숙해지지 않네.’
그러나 차츰 익숙해질 것으로 믿은 한진영은 얇게 웃으며 말했다.
“밖에 나가서 바깥바람 좀 맞고 싶어서요. 그래서 잠시 나갔다 왔습니다.”
최석영은 한진영의 말에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답답하겠지. 나도 자네 마음 이해하네. 내가 뭐 도와줄 수 있는 건 없지만 마음속으로는 응원하고 있으니까 그것만 알아줘.”
“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최석영은 손을 들어 파이팅을 외치고 고객 맞을 준비를 마쳤다.
9시 정각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며 전광판이 힘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시세판에 쓰인 이름과 숫자 그리고 각자 들고 온 메모지를 확인하며 연신 담배를 피워댔다.
“이 사장. 어때?”
“아~ 이번에는 갈 줄 알았는데 오늘이 아닌가?”
“그 이야기는 석 달 전부터 들었어. 도대체 간다는 때가 언제야?”
“그러는 양 사장은? 양 사장이 투자하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던 대서양 화장품. 저거 자네가 30만원쯤에 추천하지 않았었나? 그런데…… 지금 보니 26만 원이네? 그때 샀으면 앉은 자리에서 10% 이상 손해 봤을 거 아냐?”
“지금은 건전한 조정이야. 그리고 25만 원에 지지대가 형성돼 있으니까 거기까지 가면 무조건 튈 거야.”
“그 이야기를 29만 원 부근부터 들은 것 같은데…….”
중절모를 눌러 쓴 지긋한 연세의 노인들이 옥신각신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객장 안은 물론이고 창구에까지 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힐끗 노인들을 돌아봤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다시 자기들이 주목하고 있는 종목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객장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기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오직 맨 뒤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만이 자그마한 수첩에 무언가를 적을 뿐이었다.
“저 아주머니가 뭐 하는지 알고 있나?”
최 과장이 슬쩍 한진영을 돌아보고 물었다.
신입에게 아는 척을 하고 싶어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겉모습과 달리 속은 닳을 대로 닳아 있었던 한진영이었다.
그는 아주머니가 무엇을 하는 것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지금 들린 이야기를 적는 것이겠죠. 종목명과 가격을…… 그리고 조금 뒤 여기로 오셔서 대서양 화장품을 사겠다고 하실 겁니다. 그것도 25만 원에 말입니다.”
“그걸…… 어떻게…… 알았나?”
“글쎄요. 그냥 자연스럽게?”
한진영이 웃음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얼마 뒤 최석영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아주머니가 창구로 찾아왔다.
“대서양 화장품을 사고 싶어서 그러는데요.”
“얼마에 몇 주나 사려고 하시나요?”
“어디 보자.”
아주머니는 조금 전 열심히 적었던 수첩을 꺼내 들고 그 안을 쳐다보며 말했다.
“25만 원에 우선 1주만 살게요.”
“정찰병부터 보내시나 보네요?”
“뭐…… 네.”
가볍게 던진 한진영의 이야기에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한진영은 이해한다는 듯이 미소를 보인 후 주문을 넣기 전에 마지막으로 물었다.
“고객님 요청대로 25만 원에 주문을 넣겠습니다. 주문은 오늘만 들어가게 할까요? 아니면 기간을 정해서 계속 주문이 들어가게 할까요? 기간을 정하신다면 저에게 말씀해주시면 원하는 대로 조정해 드리겠습니다.”
“으음…….”
최석영은 의외라는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조금 전에도 그랬지만 한진영에게서 신입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객을 응대하는 것이 신입에게는 가장 힘든 일이었다.
사회에 막 발을 내디딘 초짜가 사람을 상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최석영도 경험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증권사 지점처럼 창구로 찾아온 고객을 자기 고객으로 만들어야 하는 입장에서는 더욱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한진영은 능숙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고객님. 이렇게 하시죠.”
한진영은 차분한 어조로 신뢰가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오늘만 25만 원에 걸어 놓으세요. 이후에는 그냥 지켜만 보시고요.”
“왜요? 별로인가요?”
“그럴 리가요. 우리나라 화장품 시장에서 대서양 화장품의 위치를 생각했을 때 대서양 화장품처럼 안정적인 종목도 없지요. 다만…….”
한진영은 잠시 말을 끊어 듣는 이의 흥미를 끌어올렸다.
한진영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아주머니는 빨리 이유를 말하지 않는 한진영의 모습에 답답해했다.
그러나 한진영은 그녀의 궁금증이 최고조에 도달했을 때까지 참다가 천천히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너무 안정적이라는 게 치명적인 단점이에요. 투자한 뒤에 뒤도 돌아보지 않는 투자법을 가지고 계신다면 이것만큼 좋은 종목도 없을 정도로요. 업황도 좋고 회사도 좋으니까요. 그런데…… 고객님께서는 그런 투자법을 견디기 어려워하실 것 같아서…… 그래서 추천해 드리지 못하는 거니까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제가요? 왜요? 저도 안정적인 종목에 투자하고 견디는 거 잘해요.”
“고객님 기분 나빠하지 마시고 들어주세요.”
한진영은 고객을 향해 몸을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번 투자한 뒤에 돌아보지 않으신 분들은 객장까지 오지 않아요. 그리고 정말로 여유자금을 가지고 투자를 하기 때문에 이렇게 더딘 움직임을 보이는 종목에도 투자를 할 수 있는 거고요. 고객님은…… 그렇지 않으시잖아요.”
“그래서…… 저는 한 주만 산다고 했는데요.”
“네. 한 주만 사신다고 하셨죠.”
여자는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부드럽게 아주머니를 향해 웃었다.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외모.
입고 있는 정장의 끝 단이 얇게 닳아 있었다.
곱게 화장한 얼굴이지만 깊게 팬 주름이 그녀의 고단함을 전해줬다.
한진영은 이런 류의 사람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 주가 열 주가 되고 백 주가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죠. 고객님. 퇴직금은 그렇게 투자하는 게 아닙니다.”
아주머니는 크게 놀란 얼굴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아주머니만 놀란 것은 아니었다.
조용히 밖에 나와 객장을 둘러보던 최준호 지점장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역시 내보내기에는 아까운 인재인데…….’
최준호는 한진영이 약속한 일주 안에 SS 1호 ELS가 녹인 구간에 돌입하지 못한다면 회사를 그만둔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동시에 오늘이 약속날짜의 마지막 날이라는 것도 말이다.
당시에는 내기의 조건으로 필요한 부분이라 받아들였지만, 한진영의 이런 모습을 보자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입이라기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고객 응대가 매끄러운 모습에 최준호는 한진영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다.
아주머니를 향한 한진영의 설명은 계속됐다.
“퇴직금은 안전하면서 수익이 바로 발생할 수 있는 곳에 투자하셔야죠. 그런 면에서 대서양 화장품은 안전하기는 하지만 수익이 발생하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기 때문에 고객님과는 어울리지 않는 회사예요.”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남편 퇴직금을 가지고 투자를 하려고 한다는 걸요?”
한진영은 말없이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차피 이런 류의 고객에게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크게 할 필요가 없었다.
원하는 곳을 긁어주기만 하면 알아서 쉽게 넘어오기 때문이었다.
“제가 추천해 드리고 싶은 곳은 안정적이면서 배당수익이 꾸준히 들어오는 곳입니다. 1년에 한 번, 많으면 분기마다 배당금이 현금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돈이 필요하실 때 바로 돈을 유용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리고 은행 정기예금 금리의 2배 이상을 기대할 수도 있고요.”
“지금 은행 정기 예금금리가 3%대니까…… 6%가 넘는 수익을 보장하는 곳이 있나요?”
“은행권과 보험 등의 시장에서는 없지요. 그러나 주식시장에서는 많이 있습니다. 6%가 아니라 잘만 찾으면 7%에 8%짜리 배당이 나오는 곳이 수두룩합니다. 어떠십니까?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요?”
“8%면…… 괜찮지요. 그런데…… 안전한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안전합니다. 왜냐하면, 보통 그렇게 고배당을 주는 곳은 은행이나 정유 회사 같은 곳들이거든요. 그런 곳이 망한다면…… 은행에 넣은 정기예금도 함께 망한다는 이야기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으십니다.”
한진영의 말에 여자는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자기가 원하는 투자처가 바로 한진영이 이야기 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이제 마지막 말을 건넬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이 말이 끝나게 된다면 앞에 앉아 있는 여자를 고객으로 만들게 된다고 생각했다.
한진영은 가벼운 마음으로 아주머니를 향해 말했다.
“어떠십니까? 제가 한번 고객님의 포트폴리오를 짜드릴까요? 퇴직자금을 안전하게 운용하여 앞으로 남은 노후를…….”
“고객님.”
한진영이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려 할 때 뒤에서 황인석이 다가왔다.
“고객님. 이 친구는 오늘로 회사를 떠나는 친구입니다. 그러니 저에게 오시지요. 제가 잘 짜 드리겠습니다.”
한진영은 고개를 돌려 황인석을 올려다봤다.
지금 황인석의 행동은 매우 예의가 없는 행동이었다.
특히, 고객과 상담 중에 난입하여 고객을 뺏어가려는 듯한 행동은 용납받지 못하는 짓이었다.
물론 자신이 했던 행동을 생각하면 피차일반 셈.
‘그래. 나도 한번 했으니, 너도 한번 해라.’
물론 호락호락하게 뺏길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이봐. 황 대리. 뭐 하는 건가?”
예상 밖의 최준호 지점장이 끼어들며 급히 황인석을 말렸다.
황인석은 마침 최준호까지 자리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모든 사람이 들으라는 듯이 소리쳤다.
“지점장님과 저 그리고 여기 신입이 함께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이번에 출시한 SS 1호 ELS가 일주일 안에 녹인 구간을 터치하지 않으면 회사를 그만두기로 말입니다.”
황인석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기라도 하다는 듯이 객장까지 들리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건지 우리 신입이 아주 상상력이 풍부해요. ELS 녹인 배리어가 현재 하한가에 자리 잡고 있는데 그걸 당장 오늘 하루 만에 터치한다고 생각한 건가?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고객님. 이런 사람에게 돈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황인석이 이죽거렸지만, 한진영은 그런 황인석이 안타깝게만 느껴졌다.
가만히 있어도 창피함에 어쩔 줄 몰라 할 사람이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