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다른 결론을 만들려 한다
지점에 있는 직원들은 물론이고 시세판을 바라보고 있던 고객들까지 황인석에게 전부 시선을 모았다.
그들은 오랜만에 펼쳐진 소란에 잔뜩 기대하는 눈치였다.
증권사 지점에서의 소란은 일종의 이벤트나 마찬가지였다.
남편과 부인을 찾으러 쫓아와 부부싸움을 연출하는 일은 이제는 흔한 일이 되어 있었다.
빚쟁이들이 쫓아 오거나 손해를 봤다며 지점에 흉기를 들고 찾아와 난동을 부리는 일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그러나 지점의 직원들끼리 다툼이 벌어지는 일은 희귀한 일이었다.
그들은 잔뜩 기대하는 눈치로 한진영의 반응을 기대했다.
‘고객을 뺏는 게 목적이 아니라, 내게 창피를 주는 게 목적이었군.’
그렇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황 대리님. 고객님과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그만 자리로 돌아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기대와 달리 한진영의 반응은 정중하기만 했다.
사람들은 실망의 눈으로 소란이 벌어지려는 곳에서 시선을 거두려 할 때 황인석이 불씨를 계속 살리는 말을 던졌다.
“이제 그만 짐 쌀 준비나 하는 게 어때? 아,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챙길 짐이 없어 이렇게 느긋하게 있는 건가? 분명 네 입으로 약속했지? 녹인(Knock-in)이 발생하지 않으면 그만두겠다고 말이야. 여기 있는 직원들은 모두 다 그 이야기를 알고 있어. 이제 고객들까지 알게 됐네? 이렇게 됐는데도 발뺌하지는 않겠지?”
한진영은 앉은 채로 자기가 있는 자리까지 쫓아와 소란을 피우려는 황인석을 올려다봤다.
“잊지 않고 있습니다.”
황인석의 도발에도 한진영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황인석은 차분하기만 한 한진영의 모습에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이내 얼굴에 가득 비웃음을 담고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뭘 믿고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있는지 모르겠는데 이것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그것만 알아라. 네가 나가기 싫다고 울고불고 떼써도 널 들어다 건물 바깥에다가 내가 직접 집어 던져버릴 테니까.”
가만히 창구 안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바라보던 고객들은 황인석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단순히 직원들 간의 다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객장 시세판 앞에 앉아 있던 고객들은 자기들끼리 창구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ELS 녹인(Knock-in)이라면 폭락을 이야기하는 거 아냐?”
“지금 나누는 대화를 들어서는 그것도 오늘 하루에 녹인 구간을 터치한다는 것 같은데?”
“하루 만에 녹인 구간을 터치한다는 건 폭락이 나온다는 말이잖아.”
“그러니까 말이야. 게다가 ELS 종목에 포함된 것들이라면 대부분 대형주라는 이야기인데…… 대형주가 폭락할만한 일이 뭐가 있지? 그냥 아무렇게나 막 던진 거 아냐?”
“아무리 막 이야기해도 자기 밥줄을 걸고 그런 이야기를 그냥 할 수 있는 건가? 뭔가 믿는 게 있으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
“오늘 점심때 약속이 있어서 나가보려고 했는데 취소해야겠네. 혹시 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를 테니까 말이야.”
고객들이 수군대는 것을 바라보며 한진영은 고개를 저었다.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는데 직접 일을 크게 만드셨네요.”
“뭐라고?”
“저는 그냥 조용히 넘어가고 싶었는데 뭐 이렇게까지 일을 만드셨으니 황 대리님도 앞으로 피곤해지겠습니다.”
“뭔 소리야?”
“이제 할 만큼 하셨으면 그만 돌아가세요. 오늘 장이 마감하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습니다. 설마 장 마감 때까지 여기 서서 이러고 계실 건 아니시죠?”
한진영의 말에 그제야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 황인석은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리고 천천히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최준호는 흥분하지 않고 황인석을 자리로 돌려보내는 한진영의 모습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여기서 자기에게 시비 걸었다며 멱살을 잡고 싸웠다면 실망했을지도 몰랐다.
회사에서 그것도 고객 앞에서 추태를 보여서는 안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위험한 상황을 유연하게 대처하는 한진영의 모습에 최준호는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폭락이 나오건 아니건 저 친구는 회사에 도움이 되겠어.’
최준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지점장실로 돌아갔다.
황인석은 자리로 돌아가면서도 한진영을 향해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자기가 계속 지켜보며 분노가 사그라진 것이 아님을 알리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황인석의 모습에도 그러거나 말거나 태연하게 받아넘겼다.
오히려 저런 모습의 그가 몇 시간 뒤에 벌어질 일을 겪고 어떻게 변하게 될지 궁금할 뿐이었다.
한진영은 여전히 앞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를 바라보고 웃었다.
“아무래도 조금 전 제가 건넸던 제안은 생각을 좀 해보셔야 할 것 같네요. 그러시죠?”
“아…… 네.”
아주머니는 머쓱한 표정으로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떨궜다.
이런 소란 속에서 한진영의 제안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해합니다. 그러니 돌아가서 차분히 생각해보시고 찾아주세요. 아까 말씀하신 대서양 화장품은 원하시는 가격에 매수 주문 넣어놓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중년 여인은 꾸벅 인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진영 앞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자리를 떠나자 최석영 과장이 찾아왔다.
“진영 씨. 진영 씨가 이해해야 해.”
최석영이 한진영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진영 씨가 김 사장님 담당이 되고 싶다고 했다며? 황 대리가 기분 나빠할 만해. 자기 고객을 뺏어가겠다는 말 듣고 기분이 괜찮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 내가 황 대리였어도…… 그랬을지 몰라.”
최석영의 말에 한진영이 가볍게 웃었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면 다행이고…… 혹시 황 대리가 진영 씨가 한 말 가지고 꼬투리 잡으면 내가 도와줄 테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 사람이 흥분하면 무슨 말이고 못하겠어?”
“흥분해서 한 약속이 아닙니다. 그리고 약속은 황 대리님과 한 게 아니라 지점장님과 한 겁니다. 그러니 도와주시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최 과장님의 호의는 마음만 받겠습니다.”
한진영은 최석영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잠시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어? 어…… 그래. 다녀와.”
한진영은 지점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점에 있는 직원들은 물론이고 시세판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까지 모두 문밖으로 나가는 한진영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한진영은 건물 밖에 나오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재미있네.”
한진영은 화단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이곳에 오기 전 마지막 기억을 떠올렸다.
모든 것을 잃은 것도 모자라 검찰 출석을 요청하던 목소리.
그 이야기를 들으며 갑자기 아려오는 가슴.
가슴을 움켜쥐던 손.
점점 가까워지던 바닥.
119를 급하게 부르던 비서의 목소리.
한진영은 마지막 자기의 모습에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진영은 지금도 자기가 잘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시장은 피해자와 가해자를 나누고 싶어 했고 가해자로 자기가 지목된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가해자로 지목됐던 이유는 자기가 힘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했다.
시장의 지목을 피해갈 만큼 힘을 키우지 못한 것.
혹은 지목을 받았더라도 받아넘길 정도로 단단하게 뿌리가 박혀있지 못했던 것.
그게 자기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한번 기회가 찾아왔다.
그 기회의 순간을 살아가다 보니 이런 해프닝마저 그에게는 즐거운 일이었다.
“후~”
한진영은 가슴 깊이 빨아들인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 후 담배를 발로 비벼 끄곤 쓰레기통에 버렸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후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한진영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사람들이 하나둘 한진영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오늘 그들은 시세판에 쓰인 숫자보다 한진영에게 더 관심이 가는 모습이었다.
“괜찮으세요?”
2년 차 직원인 김미진이 자리로 돌아온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네. 괜찮습니다.”
“저기…… 진영 씨. 상승 중이에요.”
“뭐가 말입니까?”
“그…… 1호 ELS에 포함된 종목들이요. 10개가 모두 상승 중이에요.”
“아. 그렇습니까?”
김미진은 태연한 표정의 한진영이 이상하게만 보였다.
지난 사흘간의 하락으로 기초자산들이 모두 기준가 밑에 자리 잡게 됐다.
그러나 아직 ELS의 하단라인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황인석의 말대로 하한가를 찍어야 1호 ELS가 손실 구간에 돌입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태연하기만 한 한진영이 김미진의 눈에는 신기하게 보였다.
개장 후 바쁘게 흘러가던 시장은 이제 점점 소강상태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을 눈앞에 두며 요동치던 가격들이 점차 안정된 상태로 변해갔다.
“오늘은 뭘 먹어야지 잘 먹었다고 소문나지?”
전화로 문의가 온 고객을 응대했던 최석영은 수화기를 내려놓고는 혼잣말을 꺼냈다.
“요 앞에 동태탕 집이 새로 생겼는데 괜찮더라고요. 그거 어떠세요?”
“그래? 오늘은 거기에 가야겠네. 내가 진영 씨하고 점심 먼저 먹고 올 테니까 그다음에 경 대리하고 미진 씨가 가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과장님.”
김미진의 대답을 들은 최석영이 한진영에게 말했다.
“슬슬 정리하고 밥 먹으러 가자. 오늘은 동태탕…….”
“식사 시간을 잠시만 미루시죠.”
“어?”
의자에서 일어나려던 최석영은 한진영의 말에 일으키던 몸을 멈칫했다.
한진영은 그런 최석영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10분이면 됩니다.”
“어? 왜? 뭐 하던 거 있어?”
“잠시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최석영은 김미진을 돌아봤다.
“그럼 미진 씨가 먼저 먹고 와. 다음에 나하고 진영 씨하고 갈 테니까.”
“그러세요.”
김미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이번에도 한진영은 김미진을 멈춰 세웠다.
“미진 씨도…… 조금만 기다리세요.”
최석영과 김미진은 갑자기 밥 먹으러 가려던 자기들을 붙잡는 한진영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때 밥을 먹기 위해 나가려던 황인석이 한진영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최석영을 향해 말했다.
“왜 그러세요?”
“어? 아니. 그게…… 진영 씨. 왜 밥 먹으러 가지 말라고 하는 거야?”
“이 또라이가 밥 먹으러 가지 말라고 잡던가요? 하하하. 이제는 하다 하다 별짓을 다하는구나.”
황인석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서서 한진영을 내려다봤다.
그러나 한진영은 그런 황인석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최석영을 향해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재미있는 것을 보게 되실 겁니다.”
“무슨 소리야? 자세히 좀 말해봐.”
“이맘때쯤이었는데…….”
한진영은 고개를 들어 시계를 바라봤다.
12시 5분.
한진영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날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다가 갑작스러운 일에 밥이 나오기도 전에 회사로 돌아왔었기 때문이다.
“12시에 밥 먹으러 가서 식당에 앉았을 테니 아마 10분쯤? 그쯤이었던 것 같은데…….”
“뭔 혼잣말을 하는 거야? 10분이 뭐?”
황인석이 한마디 하려고 할 때 잠잠하기만 하던 시장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1400대에서 안정적으로 흘러가던 주가가 조금씩 고개를 떨구기 시작한 것이었다.
“선물시장에서 이상이 감지되는데요.”
“이상? 무슨 이상?”
“외국인들이…… 갑자기…… 물량을…… 아니다. 기관이…… 어? 뭐지?”
“왜 그래?”
황인석이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김미진을 다그쳤다.
그러나 그런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인지 김미진은 모니터에 들어갈 것처럼 얼굴을 가까이 대고 소리쳤다.
“물량이 쏟아져요. 선물, 현물 할 것 없이…… 외환시장까지…… 어? 무슨 일이 있나? 갑자기 다들 왜 이래? 옵션시장까지…… 모든 시장에서 기관과 외국인의 물량 폭탄이 터지고 있어요.”
김미진은 놀란 얼굴로 모니터에서 얼굴을 돌려 한진영을 바라봤다.
그들의 눈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웃고 있는 한진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왔구나. 핵실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