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증권사 생활-7화 (7/650)

7화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다

한진영은 지난 15년간의 일을 모두 기억하지는 못했다.

몇 년 며칠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날짜까지 떠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일은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주식시장에서 큰 이벤트가 일어났던 날은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진영에게 북한의 2차 핵실험 날은 바로 그런 날이었다.

그리고 그날의 주가 움직임도 또렷이 기억했다.

수백 개에 달하는 종목들을 모두 기억하지 못하지만 미친 움직임을 보였던 몇몇 종목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뭘 사야 합니까?”

“안전하게 하려면 8%대의 하락을 보이는 은행주를 매수하시고 도박을 하고 싶다면 하한가에 꽉 물려 있는 조선주를 매수하시면 됩니다.”

“저기 그러면…….”

“시간이 없습니다. 뒤에 분들도 생각하셔야지요.”

창구에서 한진영에게 상담을 받으려는 사람은 뒤에서 매서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찔끔하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은행으로…… KA은행으로…….”

“네. 그럼 처리하겠습니다. 다음 분.”

한진영은 말에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앞의 사람을 제치고 한진영에게 소리쳤다.

“나는 하나중공업.”

“네. 하나중공업으로 매수해드리겠습니다. 그럼 다음 분…….”

한진영은 매수하려는 사람들을 능숙한 모습으로 처리해 나갔다.

최준호 지점장은 그런 한진영의 모습을 뒤에서 팔짱을 낀 채 바라봤다.

‘저거 뭐 하는 물건이야?’

처음에는 배포가 큰 놈 하나가 새로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에는 키우면 좀 괜찮은 놈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정확한 예측에 더해 이벤트가 발생했을 때의 대처 능력은 웬만한 중간관리자급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게다가 사람을 상대하는 모습은 창구 담당 직원 이상이었다.

최준호는 도대체 어디서 저런 물건이 들어온 것인지 놀랄 지경이었다.

“지점장님.”

빠르게 고객들을 처리해 나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최준호의 곁으로 황인석이 다가왔다.

황인석은 최준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지점장님.”

“왜?”

한창 한진영의 모습을 보고 뿌듯해하고 있었던 최준호는 오늘 제대로 사고를 친 황인석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 일이 마무리되지 않아 자네에게 아무 소리 안 하는 것인 줄이나 알아. 알았어?”

“지점장님…… 그게 아니라…….”

“왜? 무슨 일인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은 황인석은 시세판을 손가락질하며 가리켰다.

최준호는 황인석의 손가락을 따라 시세판을 확인했다.

조금 전까지 -8%를 눈앞에 둔 종합주가지수가 1310대에서 어느새 1330대까지 올라와 있었다.

“설마 이대로 다 올라오지는 않겠지요?”

“너 던진 거 다시 담지 않았어?”

“고객님들에게 정리했다고 확정시켜서 보고했어요. 그런데…… 자꾸 지수가 오르니…….”

“이 미친…….”

최준호는 황인석이 붙잡은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시세판을 자세히 보기 시작했다.

하한가에 꽉 잠겨 있던 종목이 하나둘 하한가가 풀려나갔다.

산성전자는 어느새 마이너스 2%대까지 회복을 했으며 은행주를 비롯하여 크게 출렁였던 대부분의 종목들이 하락폭을 만회하기 시작했다.

“자 그럼 더 매수하겠다는 분은 없으신 겁니다. 조금 뒤에는 매수하겠다고 나오셔도 매수 못 해 드립니다. 이것으로 마무리합니다.”

한진영은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수하겠다는 고객들이 그리 많지 않아 금방 끝낼 수 있었다.

“수고했어.”

최석영이 슬며시 한진영에게 다가와 엉덩이를 두드렸다.

한진영은 눈으로 웃으며 말했다.

“점심시간이라서 다행입니다. 그래도 고객이 많지 않아서 말입니다.”

“내 말이…… 아마 오전에 이랬으면 지점 집기들 다 뒤집어졌을 거야. 의자 날아다니고…… 어휴…… 상상하기도 싫다.”

매년 행사처럼 벌어지는 일을 이번에는 잘 넘겼다고 생각한 최석영은 한진영을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사람들 흥분을 가라앉힌 거는 그렇다 치고……매수하게 유도해도 괜찮았던 거야? 다행히 점심시간에 객장에 사람들이 많이 남아있지 않았고 남아있던 사람 중에서도 대부분이 의심하는 눈으로 매수에 동참하지 않아서 다행이기는 한데…….”

전염병처럼 번졌던 매도의 불길을 가라앉힌 것은 백번 생각해도 백번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정도에서 멈추는 것이 좋지 않았냐고 생각했다.

만약 반등이 실패했을 때 혹은 하락이 재차 이어졌을 때 매수한 이들이 보일 분노를 걱정됐기 때문이다.

“저기 보십시오.”

한진영은 턱짓으로 객장에 넓게 펼쳐진 시세판을 가리켰다.

한진영의 턱짓을 따라 시세판을 바라본 최석영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가득 묻어나기 시작했다.

“저거 뭐 잘못된 건가?”

“잘못된 것 없습니다.”

“아니. 잘못된 게 아닌데 어떻게 저렇게 돼?”

“시장을 사로잡았던 공포와 혼란은 우리 지점만이 아니었던 거죠. 그리고 그 공포와 혼란이 잦아든 것 또한 우리 지점만 그런 것이 아니고요.”

한진영의 말에 최석영이 천천히 시세판에서 한진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편안한 모습의 한진영은 웃음기가 가득 묻어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까지 올라갈 것 같습니까?”

최석영은 한진영의 말에 깜짝 놀랐다.

“저게 끝이 아니라고? 지금 반등도 무서울 정도로 올라온 건데?”

반등이라고 부르기 무서울 정도로 잠깐 사이에 시세판 속의 종목들이 미쳐 날뛰었다.

온통 파란 빛을 보였던 종목들이 하나둘 빨간빛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보합 부근에서 -8%까지 30분 만에 폭락했다면 다시 돌아오는데 1시간이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뭐라고? 다시 돌아온다고?”

“저는 저거 다시 돌아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매수를 이야기한 거고요.”

“아니. 뭐 이런…….”

최석영은 뭐라 할 말을 잃고 말았다.

-8%를 눈앞에 뒀던 종합주가지수가 한 시간 만에 보합으로 돌아오는 상황은 증권사에 입사한 이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어설프게 –1%, -2% 하락한 것도 아니라 -8% 하락했다가 보합으로 돌아오는 상황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야 인마! 뭐라도 해봐!”

최석영은 큰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당황한 얼굴의 최준호 지점장과 어쩔 줄 모르는 황인석이 있었다.

“지점장님. 이번에는 매수 주문이 들어가지를 않아요.”

“야!”

최준호는 답답한 마음에 발을 동동 굴렀다.

황인석이 담당 고객들의 계좌를 비운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고객들의 매도 요청을 묵살한 채 몰래 자기 물량만 매도한 것까지도 백번 양보해서 이해하려 노력하면 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런데 비워놓은 계좌에 다시 물량을 담지 못하는 것은 문제가 달랐다.

“이 미친놈아!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아니. 대체 왜…… 왜 계속 오르는 거죠?”

하한가에 집어 던지고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던 황인석은 하한가가 풀린 것도 모자라 계속 오르고 있는 주가들을 확인하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를 안쓰럽게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직 객장에 남아있던 고객들은 물론이고 같은 직장의 동료들조차 이런 황인석의 모습에 오히려 꼬시다 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매수 주문이 왜 안 들어가는데?”

“매수 주문이 몰리니까 안 들어가지는 거겠죠. 당연한 것 아니에요?”

창구 담당 직원인 김미진이 어떻게 자신보다 모르냐는 듯한 얼굴로 황인석을 바라보고 혀를 찼다.

“손절한 자리가 최저점일 때는 견디기 어렵지. 게다가 최저점에서 내 물량만 빼먹고 올라가 버리면 멘탈 터지고…… 내 돈도 아니라 고객들 계좌를 박살 내 놓은 것이면 뭐 말할 것도 없고…… 어휴~”

최석영은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한진영은 가만히 팔짱을 끼고 황인석을 바라봤다.

그의 과거 속 기억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었다.

대부분 점심을 먹으러 갔다가 급히 이야기를 듣고 돌아왔기에 던질 시간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야기가 다르게 흘러갔다.

한진영에게 딴지를 거느라 점심을 먹으러 가지 않았던 황인석이 대형사고를 치고 만 것이었다.

황인석은 주문이 들어가지 않는 단말기를 연신 두드려댔지만, 두드린다고 들어가지 않는 매수 주문이 들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황인석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와중에도 상승은 멈추지 않았다.

“뭐야?”

조금 전까지 그래도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려던 사람들도 점점 술렁이기 시작했다.

종합주가지수가 -3% 선을 돌파하여 -2% 선까지 올라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승은 멈추지 않았다.

중간중간 쉬엄쉬엄 떨어졌다 오르는 것도 아니라 마리아나 해구처럼 한방에 떨어졌다 올라오는 모습이었다.

이런 변동성은 듣도 보도 못한 수준이었다.

한진영은 스마트폰 보급이 아직 널리 퍼지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했다.

2차 핵실험을 통해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지만, 그 소문을 진화할 뉴스는 한 타이밍 늦게 사람들에게 알려지며 희한한 광경을 연출하고 만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희한한 상황 속에서 황인석이 친 대형사고는 수습 불가의 상황에 접어들었다.

“하나도? 하나도 남겨 놓은 게 없어?”

황인석은 대답할 기운도 없는 것인지 최준호 지점장의 질문에 힘겹게 고개만 끄덕였다.

“이 새끼야!”

고객들 앞에서 욕을 하는 것이 잘못된 일인 줄 알면서도 최준호 지점장의 입에서는 욕지거리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이 미친놈아! 대체 손실만 얼마야? 게다가 지금 네 눈에도 보이지? 다 복구됐다. 어? 다 복구됐다고…… 이러면 그냥 손실만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라는 거 너도 알고 있지?”

황인석은 양쪽으로 얻어터져 버린 상황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최준호는 옆에 놓인 서류 뭉치를 황인석을 향해 집어 던졌다.

“나가 뒈져. 이 새끼야. 나가 뒈지라고…….”

최준호는 자그마한 사고가 아닌 지금의 사태에 화를 참지 못하고 폭발하고 말았다.

단순히 사고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계좌를 맡긴 고객이 이것을 문제 삼아 항의를 한다면 감당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일이 커질지 몰랐다.

자기 지점장 목은 물론이고 손실에 대한 복구 비용을 토해낼지도 몰랐다.

“60,000원짜리를…… 50,000원 부근에서 다 털고…… 어? 다시 60,000원으로 다시 돌아왔어. 이럼 15%만 손해 본 게 아니라 양방으로 30% 이상 손해를 본 거란 말이야. 알고 있어? 양방으로 다 터진 거라고…… 이 등신아!”

최준호의 외침에 객장에 남아있던 고객들은 자기 목을 쓰다듬었다.

조금 전까지 매도해 달라고 가장 앞에서 소리쳤던 고객이 슬며시 한진영 쪽으로 다가왔다.

“고맙습니다.”

최준호 쪽을 바라보고 있던 한진영은 고마움을 표시하는 고객을 향해 웃으며 고개 숙였다.

“한진영 씨 덕분에 살았습니다.”

“저도 물량 던졌으면 어떻게 됐을지 아찔합니다. 감사합니다.”

“최저점에서 매수해서 먹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저는 만족합니다. 대신 다음에는 한진영 씨가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대단합니다.”

감사의 말이 물꼬를 틀자 객장에 있던 고객들이 일제히 한진영이 있는 쪽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돈을 지켜준 은혜에 그들은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우리 아들 대학 등록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가장 먼저 한진영을 찾아와 매수한 아주머니는 눈시울까지 붉혔다.

“감사의 표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돈을 드린다고 받으실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뭐라도 하고 싶은데…….”

황인석 앞에서 잔뜩 얼굴을 찌푸리며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최준호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그는 급히 한진영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감사의 표시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직접 돈을 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 쪽에 있는 상품들에 가입해주시거나 계좌를 직접 위탁해주시면 됩니다. 이건 고객님과 저희 모두에게 유익한 일로…….”

최준호는 황인석이 저지른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잡았다는 생각에 자기가 직접 고객들을 향해 상품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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