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증권사 생활-8화 (8/650)

8화 어떻게 알았나?

이제 막 첫차가 다닐만한 시간에 한진영은 자취방 문을 나섰다.

“이 생활 정말 오랜만이네.”

한진영은 아직 해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 안에는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들로 붐볐다.

아침 시장을 보러 가는 사람부터 한진영과 같이 이른 출근을 하는 사람 그리고 이제야 겨우 집으로 향하는 사람까지 각자 다른 사연을 담은 채 버스에 몸을 싣고 있었다.

‘맞아. 출근이 이렇게 불편했지.’

제이와이 자산운용의 대표 자리에 앉아 있을 때는 항상 비서를 대동한 채 출근 시간을 피해 느지막한 시간에 회사로 향했던 한진영이었다.

그러다 새벽같이 일어나 대중교통을 타고 출근하려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버스가 브레이크를 밟을 때마다 자기에게 쓰러지는 사람 때문에 한진영은 몇 번이나 비틀거렸다.

아직 지하철이 개통되지 않아 많은 사람이 버스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유독 버스 첫차는 사람들로 붐볐다.

잘 다려진 양복이 출근 버스 안에서 꼬깃꼬깃 구겨져 버리고 말았다.

푹 자고 일어나 나왔음에도 30여 분 간의 출근으로 녹초가 된 것만 같은 느낌을 받은 한진영이었다.

차라리 첫차가 아니라 7시 무렵 버스를 탔다면 이렇게 붐비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도 꼭 첫차를 타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한진영은 보안을 해제하고 지점 문을 활짝 열었다.

밤사이 쌓였던 공기를 환기하기 위해서였다.

형광등의 불을 모두 켜고 커피머신 앞에 다가가 커피를 한잔 내렸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커피머신에서 원두가 갈려 흘러나올 때 팩스 수신 소리가 들려왔다.

한진영은 커피잔을 들고 팩스 앞으로 다가가 들어오는 종이를 들어 확인했다.

이 팩스가 바로 한진영에게 첫차를 타게 만든 이유였다.

미래에는 사라진 문화지만, 한진영이 막 입사했을 때만 해도 중요한 정보 등이 팩스로 들어왔다.

그리고 바로 이 팩스를 누구보다 먼저 받기 위해 한진영이 이렇게 일찍 출근하는 것이었다.

“산성증권하고 소투증권에서 집행할 금액이 아직도 2천억이 남아있다고? 흐음. 자금 집행이 좀 꼬였나 보네. 그럼 오늘 기관 강세장을 예상하면 되려나?”

한진영은 팩스로 들어온 정보들을 정리해 나갔다.

그리고 컴퓨터를 켜 지난 밤에 있었던 이슈를 확인했다.

유럽의 오후 장과 미국의 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장 마감 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뉴스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했다.

한진영은 능숙한 모습으로 오늘 장을 준비했다.

한진영은 정리해놓은 서류를 내려다보며 느긋하게 커피를 음미했다.

회사에 입사하고 반년이 흐른 뒤에도 장 시작 전에 마무리하면 다행일 정도로 정리해야 할 정보의 양은 많았다.

그러나 지금의 한진영은 출근한 지 30분 만에 모든 일을 끝내고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이미 한번 경험해본 일이었기에 쉽게 일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정도면 본사로 점프 기간을 3년으로 줄여도 되겠어.’

처음에는 과거보다 조금 빠른 정도.

그러니까 원래라면 7년 걸릴 본사까지의 점프를 약 5년 정도로 잡았다.

하지만 막상 일을 처리하다 보니 생각보다 수월하게 본사로 갈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본사 이후에는 고객을 모아 독립한다.’

다만 독립까지의 시기는 정하지 않았다.

하고자 한다면 이전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도 독립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한진영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한진영이 원하는 독립은 이전보다 더 굵고 단단한 뿌리를 가진 채 독립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라면 약간의 시간이 더 드는 것은 얼마든지 감안할 생각이었다.

‘과거와 같은 실수를 범할 수 없으니까.’

이번에는 힘이 없어 시장에게 휘둘리다며 당하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그리고 한진영은 이 모든 계획에 자신이 있었다.

이미 한번 걸어봤던 길이었다.

앞에 놓인 길이 비포장도로인지 아니면 잘 닦인 도로인지 다 알고 있었다.

게다가 도로의 꺾인 방향까지 이미 머릿속에 들어 있는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시간뿐이라고 판단했다.

“오늘도 일찍 오셨네요.”

김미진이 꽃을 한 아름 들고 들어왔다.

그리고 자리에 앉기 전에 먼저 창가에 시들어가는 꽃과 가지고 온 꽃을 꽃병에 바꿔 꽂았다.

“도대체 몇 시에 오시는 거예요?”

“글쎄요? 미진 씨보다 아주 조금? 딱 그 정도 일찍 옵니다.”

“거짓말 마세요.”

김미진은 한진영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서류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조금 일찍 오신 것 같지가 않으신데요? 이 정도 정리를 하려면 적어도 두세 시간은 걸릴 텐데…….”

김미진이의 말에 한진영은 말없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좋은 아침.”

뒤를 이어 직원들이 속속 사무실로 들어왔다.

다른 곳보다 일과가 빠른 증권사였기에 그들의 출근 시간은 다른 회사원들보다 빨랐다.

“오늘 별일 없었지? 출근하면서 보니까 미국 쪽도 별다른 일 없이 잘 흘러간 것 같던데…….”

“주간 실업청구 건수도 잘 나왔고 주택 판매 건수도 잘 나왔습니다. 미국 쪽에서 당분간 큰 이슈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잘됐네. 잘 됐어.”

최석영은 대답하고는 자리에 앉아 조금 뒤 있을 회의를 준비했다.

그리고 직원들이 모두 사무실로 들어오자 최석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들어가 보자고.”

최석영의 말에 각 팀의 주요 인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지점장실로 향했다.

그날 있을 중요한 이야기들을 나누기 위함이었다.

한진영은 그들이 들어간 지점장실을 슬쩍 바라보고는 앞에 놓인 명단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한동안 명단을 보고 있던 한진영을 지점장실에서 나온 최석영이 불렀다.

“진영 씨.”

한진영이 고개를 돌렸을 때 지점장실에서 나온 최석영이 한진영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진영 씨. 지점장님께서 잠깐 들어오라고 그러시네.”

한진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최석영을 따라 지점장실로 향했다.

지점장실에는 아직 이야기를 끝내지 못한 다른 직원들도 한진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최준호 지점장은 한진영이 지점장실로 들어오자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한진영을 향해 다가갔다.

“그래 왔어?”

어디 먼 곳에서 찾아온 손님처럼 최준호는 지점장실로 온 한진영을 반갑게 맞았다.

“여기 앉아. 여기…….”

최준호는 한진영이 앉을 자리까지 직접 마련하여 안내했다.

그리고 엉덩이 부분을 손으로 쓸어 한진영이 앉을 때 거슬리는 것이 없는지 직접 확인했다.

이런 모습에 자리에 있던 다른 직원들의 표정이 기괴하게 변했다.

지점장이 이제 막 신입에게 하는 행동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지점장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해했다.

지금 지점장 눈에는 나머지 직원들이 들러리로 보일 만했기 때문이다.

최준호는 자리에 앉은 한진영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조금 전 본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이번 사태 속에서 현명하게 잘 대처한 우리 시흥지점을 회사의 모범사례로 채택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감사패와 소정의 회식비가 나온다고 하니…… 자 여러분. 우리 한진영 씨에게 박수 한번 쳐줍시다.”

최준호가 뿌듯한 얼굴로 먼저 박수를 치자 뒤를 이어 자리에 있던 이들 모두 한진영을 향해 박수를 쳤다.

한진영은 최대한 어색한 표정을 지은 뒤 자리에서 살짝 일어나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표했다.

최준호는 손바닥에 불이 날 것처럼 박수를 친 뒤 소리 높여 말했다.

“이번에 있었던 일로 다른 지점들은 큰 곤란을 겪었다고 합니다. 녹인에 걸린 ELS 손실액만 30억이 넘는다고 하니까요. 게다가 고객들의 불만은 또 얼마나 많았던지…… 저기 안양지점에 있는 내 친구 이야기를 들으니 사무실 집기가 남아나는 것이 없다고 하더군요. 어휴~ 다른 곳 들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그런 것에 비하면 우리 지점은 어떻습니까?”

최준호는 마치 자기가 한 일이라도 된 것처럼 가슴을 펴고 큰 소리로 말했다.

“한진영 씨가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고객들을 대한 덕분에 소요사태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뿐입니까? 백이면 백 손절을 볼 구간에서 한진영 씨는 고객들에게 매수를 권유하여 큰 이득을 봤습니다. 그 덕분에 새롭게 유치한 자금이 당일에만 10억이 넘었으며 펀드 및 각종 수익상품의 판매 구좌만해도 100구좌가 넘었습니다. 이게 다 날카로운 한진영 씨의 판단 덕분입니다. 자 다시 한번 박수.”

사람들은 최준호의 말을 따라 박수를 치며 최준호의 안색을 살폈다.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발갛게 상기되어 있는 표정으로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

한참 동안 박수를 친 최준호는 자리에 있는 이들을 향해 말했다.

“이렇게 단 한 직원의 통찰력만으로도 큰 위기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 따지지 말고 경청하는 자세를 유지해주길 바랍니다. 나와 같이 말입니다.”

사람들은 결국 하고 싶은 말이 마지막 말이었음을 깨닫고 고개를 살짝 숙여 웃었다.

최준호는 이후에도 한참 동안 자기 얼굴에 금칠해댔다.

이제 신입에 불과한 한진영의 말을 잘 들은 자기의 명쾌한 태도 덕분에 위기 속에서도 기회를 얻었다는 이야기를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계속했다.

“저기…… 지점장님. 장 시작 준비를 해야 하는데…….”

보다 못한 최석영이 나서고 나서야 겨우 말을 멈춘 최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들 자리로 돌아갈 것을 지시했다.

“잠깐 한진영 씨는 나 좀 봅시다.”

한진영은 나가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최준호의 근처로 다가갔다.

최준호는 한진영에게 담배를 한 개비 내밀었다.

“자 한 대 피우면서 이야기하도록 하세.”

최준호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뒤이어 담배를 문 한진영에게 직접 불까지 붙여주며 말했다.

“농담이 아니라 자네 때문에 나 죽다 살았어.”

한진영은 최준호의 말에 웃으며 담배 연기를 빨아 마신 뒤 길게 내뿜으며 말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지점장님이 잘못되기야 하겠습니까?”

실제로 지난 시절에도 최준호 지점장이 잘못되지는 않았다.

다만 한동안 고객들의 시달림에 큰 고통을 받았던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알지 못하는 최준호는 목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니야. 정말로 고맙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네. 이렇게 다른 사람들 앞은 물론이고 개인적으로도 말이야.”

“큰일이 아닌데 이렇게까지 말씀해주시니 저야말로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

최준호는 몸 둘 바 모르겠다는 듯한 한진영을 지그시 바라본 후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나?”

“네?”

“2차 핵실험 말이야. 대체 어떻게 알았어?”

“…….”

한진영은 대답 대신 느긋한 표정으로 최준호를 바라보고 재떨이에 담배를 털었다.

최준호는 그런 한진영을 바라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러네. 그냥 단순하게 시황이 안 좋다던가 추세가 어떻다던 가의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말이야. 게다가 자네 역시 뭔가를 알고 있었다고 했잖아. 그런데 그게 2차 핵실험이라니…….”

최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점장실 문 앞으로 걸어갔다.

철컥.

그러고는 지점장실 문을 걸어 잠근 뒤 탁자에 양손을 대고 기대섰다.

“자네 정체가 뭔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