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첫 번째 순위
투자대회 첫 방송 다음 날.
최석영이 출근을 하자 시흥지점의 직원들이 최석영의 근처로 몰려들었다.
“과장님. 봤습니다.”
“저도 봤어요. 사진 잘 나오셨던 데요. 언제 찍으신 겁니까? 회사 갓 입사했을 때 사진 방송사에 보내신 거 아니세요?”
“이렇게 직접 보는 것보다 화면을 통해 보니까 더 보기가 좋던데요.”
최석영은 말을 걸어주는 직원들을 향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첫 데뷔를 축하한다느니 화면발을 잘 받는다니 같은 이야기를 건네는 동료들이었다.
그러나 최석영의 귀에는 그런 이야기가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았다.
끽해봐야 화면 귀퉁이 부분에 증명사진이 나온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이 찾아온 건 그 증명사진 밑에 적혀있는 글 때문일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왜 포지션 잡지 않으셨어요? 포지션을 잡지 않으면 제로잖아요.”
“그냥 참가에 의의를 두신 거예요?”
“그래. 최 과장. 잘 생각했어. 자네 실력에 어설프게 포지션 잡는 것보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나아.”
최석영의 생각대로 그들은 인사 뒤에 곧장 포지션을 잡지 않은 선택에 대해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개 걱정되는 듯한 말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으로 나뉘었다.
최석영은 그런 그들을 향해 이번에도 어색한 웃음으로 얼버무리고 자리를 떴다.
“진영 씨.”
최석영은 한진영이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한진영은 차를 마시며 최석영을 올려다봤다.
“오셨어요?”
“그…….”
“괜찮습니다. 다 계획대로예요.”
“그렇지? 다 자네 계획대로지?”
최석영이 듣고 싶던 말이었다.
최석영은 지점에 들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느라 불안했던 마음이 한진영의 말에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크게 걱정하실 것 없으니 우리는 그냥 우리 일을 계속하면 돼요.”
“그래. 진영 씨만 믿을게.”
최석영은 한진영의 말에 얼굴을 풀고 자리로 돌아갔다.
한진영은 머그잔을 들고 최석영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역시 생각보다 잘 버티네.’
보통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냐고 난리 쳤을 만한 일이었다.
특히 방송에서 앵커의 멘트를 생각하면 최석영의 침착함은 대단한 정도였다.
‘스무 명 중에 좋은 전문가도 있겠지만, 이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전문가도 있으니 이해해달라고 했었지.’
그런 말을 들으면 누구라도 화가 나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최석영은 불안감 정도로만 끝이 난 모습이었다.
‘아니. 속으로는 엄청 화가 났겠지. 하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참는 것도 능력이야.’
한진영은 최석영을 선택한 것이 틀리지 않았음을 생각하며 커피를 홀짝였다.
***
투자대회 첫 방송이 나온 지 이틀 후.
최석영은 슬슬 투자대회 이야기가 스멀스멀 들어갈 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과는 정반대로 직원들의 투자대회 이야기는 더욱 활발해졌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최석영의 포지션에 대한 이야기도 계속해서 나돌았다.
여전히 대부분의 직원들은 최석영이 포지션을 잡지 않은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반응이었다.
아니, 오히려 방송에 얼굴과 포지션이 공개된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껴 도망친 것이라고 여기기까지 했다.
그들이 보는 최석영은 어느덧 겁쟁이로 바뀌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이 바뀌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삼 일째 되던 날 포지션을 잡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손실을 보며 마이너스 수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는데 알아서 뒷걸음질을 치는 사람들 덕분에 최석영의 순위는 계속 위를 향해 올라갔다.
그리고 그와 함께 최석영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바뀌어 갔다.
“그런 거 보면 최 과장님이 포지션을 잡지 않은 게 어쩌면 잘한 것 같기도 해요. 어제 순위 보셨어요?”
잠시 담배를 피우기 위해 나온 남자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이야기했다.
“봤지. 아무것도 안 했는데 4위던가? 5위던가?”
“5위요. 빨간 불 띄운 사람이 위에 4명 밖에 없었어요.”
“아니. 대회에 나온 애들이면 경력도 꽤 되고 각각 한가락 한다는 사람들 아니었나?”
“최 과장님 보세요. 꼭 그런 건 아니잖아요.”
“뭐 그렇긴 하지. 최 과장과 한가락하고는 거리가 멀지. 그래도 경력은 무시 못 해. 이 바닥에서 10년 가까이 굴렀다면 다 그만한 이유가 있거든. 게다가 그냥 10년이야? IMF 말기에 회사에 들어와서 서브프라임까지 맞아본 사람들이란 말이야. 그런데…… 하여튼 나도 이 바닥에서 먹고 살지만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게 최 과장 운인지 실력인지.”
“운이겠죠? 그리고 어차피 일주일을 다 지켜봐야 하는 거잖아요. 그러니 나머지 이틀 지켜보시죠. 진짜 운인지 실력인지요.”
최석영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결과가 곧 최석영의 실력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마침 하락장에 얻어걸리는 운이 찾아와 최석영을 구해준 거로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운도 여기까지라고 봤다.
5위쯤으로 첫 주를 마감하는 것 이상을 기대할 수는 없다는 것이 대다수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말하는 최석영의 운이라는 것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첫 주의 마지막 성적이 나오는 날 출근하는 최석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예사롭지 않았다.
첫째 날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던 이들이 지금은 들어오는 최석영을 바라보기만 할 뿐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저 멀리서 이 운 좋은 사람이 어디까지 운이 좋은 것인지 지켜보기만 했다.
최석영은 사람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오늘 결과로 방송에 나갈지도 모르는 이 미친 상황이 당황스러웠기 때문이다.
“진영 씨.”
“과장님. 오셨어요?”
“봤어?”
“당연히 봤죠.”
“내가…… 아니. 우리가 1등이야.”
“당연한 일을 가지고 왜 그러세요?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걱정할 것 없다고요.”
“아무리 그래도…… 나는 그냥 숨 고르고 출발하자는 뜻에서 포지션을 잡지 말자는 게 아니냐고 생각했는데…….”
“남들 다 출발했는데 왜 숨 고르고 있어요. 함께 출발해야죠.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뒷걸음질 치고 우리는 가만히 있어서 그게 이상하게 보이는 것뿐이죠.”
가슴을 쓸어내리는 최석영을 향해 한진영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제 방송으로 중간 순위를 확인하며 환호를 질렀을 최석영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최석영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짓고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나 심장 터질 거 같아. 오늘 이대로 끝나면 내가 주간 순위 1등으로 인터뷰를 해야 하는데…… 잘 할 수 있겠지?”
“잘하실 거예요. 저는 그것도 걱정하지 않아요.”
“진영 씨는…… 나를 그렇게나 믿는 거야?”
“믿으니까 과장님과 하겠다고 했죠. 다른 사람을 믿었으면 다른 사람과 했을 겁니다. 그러니 과장님은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제가 알려드린 말만 잘 기억하세요.”
이미 인터뷰 내용까지 알려준 한진영이었다.
최석영은 한진영에게 인터뷰 때 할 이야기를 전해 받고 긴가민가한 마음을 가졌었다.
아무리 자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첫 번째 주에 그것도 아무런 포지션을 잡지 않았는데도 1등을 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게 현실로 다가오자 그 누구보다 더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최석영은 한동안 더 한진영 앞에 서서 가슴을 다스리고 나서야 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뒤를 이어 최준호의 믿었다는 말을 더 들은 뒤에야 겨우 업무를 시작할 수 있었다.
***
신성증권 시흥지점은 온종일 다른 일에 신경을 쏟았다.
마지막 결과표를 받아 드는 날에 정말로 최석영이 1등 자리를 차지하느냐가 모두의 관심사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고객을 응대하면서도 한쪽 모니터에는 대회에 참석했던 이들의 추천주를 관심 종목으로 설정하여 수시로 확인했다.
그리고 장 마감이 되며 성적이 나오는 순간 최준호가 박수를 치며 지점장실에서 나왔다.
“자자. 다들 잠시만 주목하세요.”
아직 고객이 객장을 모두 빠져나가지 않아 신성증권의 직원들뿐만 아니라 고객들도 최준호의 말을 들을 수가 있었다.
최준호가 고객이 모두 빠져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이러는 것은 일부러 그들에게 보여주기 위함도 있었다.
“대경TV에서 주최하는 전문가 투자대회 첫 주차에서 우리 신성증권 시흥지점의 최석영 과장이 1등을 차지했습니다. 이대로 쭉 밀고 나가 최종 순위도 1등을 바라며 모두 축하의 박수를 쳐줍시다.”
짝짝짝.
최석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축하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최준호는 잠시 최석영이 모두 인사를 받는 것을 기다린 뒤 사람들을 향해 공지했다.
“오늘 9시에 1등 인터뷰가 있으니 모두 빠짐없이 보도록 하세요.”
최준호는 고객들에게도 일부러 들으라는 식으로 시간을 알려줬다.
겨우 첫 번째 주에 1등을 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전문가 스무 명 중에 1등을 했다는 것에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이야기한 것이었다.
객장에 남아있던 고객들은 새로운 사실에 흥미로운 듯한 얼굴을 보였다.
그리고 잠시 1등을 했다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와 최석영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했다.
최준호는 이런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 뒤 한진영에게 다가왔다.
“저녁 먹고 같이 방송 보도록 하지.”
“그러시죠.”
한진영이 최준호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최준호는 한진영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인터뷰는 잘하겠지?”
“잘할 겁니다.”
“그래. 자네에게서 잘할 거라는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네. 혹시 인터뷰 때 어떤 이야기를 할지도 알려줬나?”
“네. 다 알려줬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음 주에 어떤 포지션을 잡아야 하는지도 알려줬습니다.”
“벌써? 조금 전에 겨우 오늘 마감을 했는데?”
최준호가 신기하다는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인터뷰 내용과 다음 주 포지션까지 결정했냐는 눈빛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최준호의 눈빛을 뒤로하고 최석영에게로 향했다.
여전히 축하 인사를 받는 최석영에게 한진영은 마지막 당부의 말을 건넸다.
“자신감입니다. 아셨죠?”
“그래. 알았어.”
“잘하실 테니 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자네가 이렇게 믿어주니 보답을 해야지. 잘하고 올게.”
최석영의 말에 한진영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간단한 저녁과 반주를 한 최준호와 한진영은 회사로 돌아왔다.
조금 뒤에 있을 방송을 회사에 있는 커다란 TV로 함께 시청하기 위해서였다.
“밥 먹으면서도 알려주지 않았는데 이제 그만 알려주지 그러나? 다음 주 포지션은 뭐야? 뭘 추천주로 내세울 셈이야?”
“보시면 아십니다.”
“알지. 보면 알게 된다는 것 내가 몰라서 그러나? 그런데 궁금해서 그래. 나한테만 먼저 이야기해 줘 봐.”
얼큰하게 취기가 오른 최준호는 사무실에 그들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남아있는 것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네들 퇴근 안 했어?”
“저희도 여기서 함께 보려고요.”
“이게 무슨 축구 경기도 아니고 뭘 같이 보려고 그래.”
경우진 대리를 비롯한 아래 연차의 직원들이 회사에 남아 있었다.
그들도 함께 저녁을 먹은 뒤 조금 뒤 있을 방송에 나올 최석영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먹는 건데 그랬어.”
“지점장님. 다음 주에 또 과장님이 방송에 나오면 그때 사주세요.”
“그래? 그럴까? 좋아. 내가 약속하지. 다음 주에 최 과장이 방송에 나오면 그땐 여기 있는 사람들 밥하고 술은 내가 책임지고 살게.”
“정말이죠?”
“그럼. 내가 거짓말할 이유가 있나?”
제안한 김미진이나 그러겠다고 한 최준호 지점장이나 모두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다음 주부터는 1위 자리에서 밀려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저 중간 순위만 유지하여 창피만 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즐기자는 마음에 둘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말을 이어가며 화면에 최석영이 나오기를 기다렸다.